진흙속의연꽃

피함에 의하여 끊어지는 번뇌

담마다사 이병욱 2012. 5. 30. 12:32

 

피함에 의하여 끊어지는 번뇌

 

 

 

 

만나자는 사람이 있는데

 

온라인에서 활동하니 보니 오프라인에서 만나자는 법우님들도 있다. 만나서 나 한잔 하자고 한다. 그러나 만나지 않는다. 이유는 온라인을 오프라인까지 연장하여 활동하는 것에 대하여 그다지 탐탁치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현실이고 사이버 공간은 또 하나의 공간일 뿐 현실세계와 사이버세상을 반드시 동일시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래서 사이버 상에서의 필명은 오로지 사이버상에서만 존재할 뿐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 놓으며 만남을 거부 한다.

 

만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다지 별로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유명작가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범부에 불과한 볼품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에서 만난 법우님

 

그런데 특별한 일 때문에 만난 법우님이 있다.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난 법우님이다. 그 법우님을 만나러 가는 날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글로서만 소통하다가 직접대면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블로그에 이름이나 사진 등 일체신상정보를 올려 놓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라곤 글 밖에 없다. 글만 읽고 판단한 그 법우님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에 대한 걱정 아닌 걱정이 들었다.

 

흔히 글은 그 사람의 얼굴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글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수 있다.하지만 글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의 글과 인격이 반드시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글은 번지르르 하지만 하는 행동이 영 아닌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법문은 잘하지만 도박을 하고, 사기 당하였다는 스님의 이야기가 있듯이 말과 행동이 일치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블로그에 수 년간 글을 쓰다 보니 내용은 그럴 듯 한데 만나 보니 영 아니더라는 말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오프라인에 그 법우님을 만났다. 이미 알고 지내는 법우님 몇 분과 인사동 찻집에서 함께 모임을 가졌다. 그 법우님에게 물어 보았다. 글을 통해서만 상상하였던 이미지와 실제로 본 모습이 어느 정도 일치 되는지에 대한 것 이었다. 70% 정도라 하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법우님

 

인터넷에 매일 글을 쓰다 보니 필명이 많이 알려 지게 되었다. 하지만 실물까지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법회모임의 일부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나마 꾸준히 글을 보는 법우님은 극히 드믈다. 그런 법우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보아서 외면을 알고 있고 글을 통해서 내면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법우님들 앞에 서면 부끄럽기 그지 없다.

 

그런데 지난번 법회모임에서 그 동안 알고 지내던 어느 법우님이 블로그 주소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언젠가 가르쳐 준적이 있어서 종종 보았는데 지금은 잊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메일로 블로그 주소를 알려 주기로 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법우님들도 알려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아 매일로 발송하였다.

 

 

 

안녕하세요, 법우님.

 

OOO입니다. 이렇게 저의 블로그를 소개 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사실 저의 블로그를 알고 있는 법우님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설령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처음 몇 번 보는 것에 지나지 않고 꾸준히 들여다 보는 경우는 극히 적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의 얼굴과 글을 다 아는 법우님은 일부 몇 명에 한정 되어 있습니다.

 

자랑 같지만 저의 블로그는 유명해졌습니다. 검색을 하면 제가 작성한 글이 도처에 깔려 있고, 불교공부를 하는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특히 스님들이 저의 블로그를 주목하고 있는데, 글의 내용은 알지만 얼굴이나 이름 등 개인정보는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블로그에 개인 사진이라든가 신상정보 등을 올려 놓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다지 내 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알리기 싫어서 입니다. 얼굴이 잘 생긴 것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닌 보통불자이기 때문에 그냥 보통불자로 불러 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얼굴을 알리지 않고 글만 쓰다보니 블로그를 자주 찾는 사람들은 필명진흙속의연꽃에 대해서 매우 궁금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분들 중의 질문은 혹시스님아니냐’ ‘교수아니냐는등의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심지어 또 어떤 분들은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알고 보면 별 볼일 없는 자영업자에 지나지 않은데 얼굴을 알리지 않고 글만 쓰다 보니 신비화 된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얼굴과 신체적 조건 등을 아는 법우님이 보았을 때 글과 얼굴이 클로즈업 되기에 때에 따라 언행일치가 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글의 내용과 저의 행동거지가 맞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너그러이 이해 해 주십시요. 저도 배워 나가는 과정이니까요.

 

 

이렇게 속속들이 저에 대하여 아는 법우님 앞에서 글을 쓰게 되었는데, 늘 지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글을 쓰겠습니다.

 

저의 블로그 주소는

 

http://blog.daum.net/bolee591/?t__nil_login=myblog

 

입니다.

 

 

OOO(진흙속의연꽃)

 

 

 

메일로 발송한 법우님들과의 인연은 오래 되었다. 지난 2004년 불교교양대학 입교 이래 그 동안 각종법회모임 등에 함께 참여 하였기 때문에 낯이 익어서 친구 보다 더 정답고 가족 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일부 법우님을 제외하고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만 수년간 법회 활동을 하면서 인사 정도는 나누는 사이이지만 오래 되어서 외모라든가 행동 등 알만한 것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블로그를 공개함에 따라 내면적인 것까지 알게 됨으로서 모든 것이 오픈 된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메일로 글을 쓴 것이다.

 

긍정적인 댓글, 부정적인 댓글

 

글을 쓰다 보면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댓글을 받는다. 그런 댓글을 보면 둘 중의 하나이기 쉽다. 그것은 긍정적인 댓글과 부정적인 댓글이다. 댓글을 쓸 때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긍정적인 댓글을 보면 격려 하고 칭찬하고 감사 하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본문에 대한 글의 내용에 대하여 공감하거나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 있어서 글쓴이는 신비해 보일 수 있다.  사진 등 모든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오로지 필명으로만 소통하기 때문에 글쓴이에 대하여 궁금해 한다. 무엇 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스님 아닙니까?”또는 교수입니까?” 등의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 마다 별 볼일 없는 보통불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정적인 댓글을 보면 비판과 비방이 주류를 이룬다. 처음에는 비판을 한다. 본문의 내용과 관련 없는 본질에서 벗어난 엉뚱한 주장을 늘어 놓는다. 이런 비판글의 특징은 예의를 갖추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들어 가는 특징이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늘어 놓는 경우가 많다.

 

머리만 가지고 글을 쓰고 있으니... 쯧쯧쯧

 

부정적인 댓글을 접할 때 원칙이 있다.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어 문의 하는 식의 질문이나 로그인 으로 들어 온 경우는 예외이지만,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면서 비판하는 글에 대해서는 대꾸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대꾸 하면 낚이는 것이다. 그런 케이스가 몇 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또 다시 그런 댓글에 낚였다는 것이다.

 

본문과 관련 없는 글을 올렸기에 약각 신경질적으로 답글을 주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에 본 글 때문이다. 마치 유일신교도가 블로그에 들어와 유일신교 옹호 논리를 펴는 듯한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 글이 오버랩 되면서 부정적인 답글을 단 것이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다.

 

 

글을 쓸려면 마음 수양 좀 하시기바라며
혹시 나의 글과 맞지 않는다고 그런식으로 표현하면 어찌합니까?
불교의 기본도 모르면서 입과 머리만 가지고 글을 쓰고 있으니... 쯧쯧쯧
마음을 수양하고 어느정도 무아의 경지에 이르면 그때부터 글을 쓰세요...
왜냐하면 수양이 안된 상태에서의 글은 많은 중생들을 오도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가슴을 찌르는 말이다. 머리로만 글을 쓴다는 말이다. 이는 다름 아닌 언행일치기 되어 있지 않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본다. 글은 번지르르 하게 쓰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한 응징의 글이라 볼 수 있다.

 

안되면 피하라

 

사실 이런 케이스는 많이 있었다. 댓글이 긍적적 아니면 부정적 둘 중의 하나 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부정적인 댓글에 답글을 달면 공격을 받기 쉽다. 그리고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가급적 부정적 댓글에는 답글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하여 공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렇다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자에게 내 뜻대로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감정만 악화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번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난 법우님은 자신이 겪은 번뇌의 케이스에 대하여 말하여 주었다.

 

절에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는 법우님이 어느 날 수 년간 함께 봉사해 온 법우님과 견해차이로 인한 말다툼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마주치면 매번 부딪칠 것 같아 봉사요일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번뇌를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을 아예 없애버리는 지름길이라 판단 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법우님은 왜 그런 조치를 취하였을까. 이는 다름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법우님은 이에 대하여 피함에 의하여 끊어지는 번뇌라고 설명하였다. 피함으로서 번뇌가 일어날 소지를 없애 버린 것이다.

 

피함에 의하여 끊어지는 번뇌

 

피함에 의하여 끊어지는 번뇌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번뇌의 경(Sabbāsavasutta,M2)’에 실려 있다. 부처님이 감흥을 받아 직접 설한 경으로 알려진 모든 번뇌의 경에 따르면 일곱가지 번뇌의 소멸 방법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그 일곱가지는 다음과 같다.

 

 

Atthi bhikkhave āsavā                   앗띠 빅카웨 아사와

1)dass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닷사나 빠하땃바 앗띠 아사와

2)savarā pahātabbā atthi āsavā        삼와라 빠하땃바 앗띠 아사와

3)paisev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빠띠세와나 빠하땃바 앗띠 아사와

4)adhivās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아디와사나 빠하땃바 앗띠 아사와

5)parivajj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빠리왓자나 빠하땃바 앗띠 아사와

6)vinod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위노다나 빠하땃바 앗띠 아사와

7)bhāvanā pahātabbā.                    바와나 빠하땃바 앗띠 아사와

 

수행승들이여,

1)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2)수호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3)수용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4)인내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5)피함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6)제거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7)수행에 의해서 사라지는 번뇌가 있다.

 

Bhikkhus,

1)there are desires to be turned out reflecting wisely,

2)there are desires to be turned out with restraint,

3)there are desires to be turned out by indulging,

4)there are desires to be turned out by enduring,

5)there are desires to be turned out by avoiding,

6)and there are desires to be turned out by dispelling,

7)and there are desires to be turned out by development.

 

(삽바사와경-Sabbāsavasutta -All Desires-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Ficus religiosa (bo tree)

 

 

 

이렇게 일곱가지 번뇌와 끊는 방법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중 법우님이 실천한 것은 다섯번째인 피함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이다. 번뇌가 일어날 소지가 있을 때 피하는 것(parivajjanā , avoiding)’ 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피할 것인가

 

이러한 피함은 매우 유용하다. 누군가 시비를 걸어 올 때 대꾸를 하지 않는 것도 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수행승들이여,

피함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성찰에 의해서 이치에 맞게 사나운 코끼리를 피하고 사나운 말을 피하고 사나운 소를 피하고 사나운 개를 피하고 뱀, 말뚝, 가시덤불, 갱도, 절벽, 웅덩이, 늪지를 피한다.

 

총명한 길벗은 앉기에 적당하지 않은 자리에 앉는 자, 가기에 적당하지 않은 장소로 가는 자, 사귀기에 적당하지 않은 악한 친구와 사귀는 자를 악한 상태에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는 성찰하여 이와 같은 적당하지 않은 자리, 적당하지 않은 장소, 악한 친구를 피한다.

 

수행승들이여,

피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피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들을 피함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라고 한다.

 

(삽바사와경-Sabbāsavasutta -All Desires-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삽바사와경(모든 번뇌의 경 M2).docx  삽바사와경(모든 번뇌의 경 M2).pdf

 

 

 

부처님의 말씀에 답이 있다. 누구나 미친개등을 만나면 피하지 맞서지 않는다.  물웅덩이를 발견하면 직진하지 않고 피해간다. 마찬가지로 가지 말아야 할 장소에 가지 않는 것도 피하는 것이다.  적당하지 않은 자와 사귀지 않는 것도 피해 가는 것이다. 왜 그럴까. 가지 말아야 할 장소에 간다든가 악담을 하는 자와 함께 있으면 괴롭기 때문이다.

 

외로워도 홀로 가는 것이 더

 

이처럼 피함에 의하여 번뇌를 끊는 방법에 대한 것은 초기경 도처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법구경에 있다.

 

 

Carañce nādhigaccheyya           짜란쩨 나디갓체이야

sdyya sadisamattano            세이양 사디사맛따노

ekacariya dalha kayirā       에까짜리양 달항 까이라

natthi bāle sahāyatā             낫티 발레 사하야타.

 

만일 자기보다 더 지혜롭거나

비슷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거든

차라리 굳게 결심하고 홀로 갈지언정

어리석은 자와 길벗이 되지 마라.

 

Should a seeker not find a companion

who is better or equal,

let him resolutely pursue a solitary course;

there is no fellowship with the fool.

 

(법구경, Dhp61,거해스님역)

 

 

법구경에서는 어리석은 자와 함께 하지 말라고 하였다.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 또는 비슷한 사람을 사귀라고 한다. 어리석은 자와 함께 하느니 외로워도 홀로 가는 것이 낫다고 한다. 이는 어리석은 자와 함께 함으로 인하여 생길 수 있는 번뇌를 차단 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일종의 피함으로 번뇌를 끊는 방법이다.

 

침묵해도 비방하고, 말해도 비방하고

 

어리석은 자와 함께 있으면 괴롭다. 이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원수와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 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도 괴롭다.

 

사람들은 이러쿵 저러쿵 남말 하기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어떠 할까.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Porāameta Atula         뽀라나메땅 아뚤라

neta ajjatanāmiva        네땅 앗자따나미와

nindanti tuhimāsīna     닌단띠 뚠히마시낭

nindanti bahubhāina     닌단띠 바후바니낭

mitabhāimpi nindanti     미따바님삐 닌단띠

natthi loke anindito.      낫티 록께 아닌디또.

 

, 아뚤라여! 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옛날부터 있어 왔던 일

그들은 침묵해도, 말을 많이 해도

혹은 적게 말해도 각기 비방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그 같은 자들의 비방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O Atula! Indeed,

this is an ancient practice,

not one only of today:

they blame those who remain silent,

they blame those speak much,

they blame those who speak in moderation. T

here is none in the world who is not blamed.

 

(법구경, Dhp227,거해스님역)

  담마빠다전문(빠알리-영어-한글).hwp

 

 

 

어리석은자나 말 많은 이와 함께 있으면 말을 많이 해도 비난 받고, 말을 적게 해도 비난 받고, 그렇다고 하여 말을 아예 하지 않아도 비방 받는 다고 하였다. 이래도 저래도 욕을 먹게 되어 있는 것이다.

 

비난 받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

 

비난 받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어리석은 자나 남말 하기 좋아하는 자 앞에서 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십중팔구 비난 받기 쉽다는 것이다.  도 닦는 자가 하는 행동을 보면 엉망이다라는 말이라든가 도를 닦는 다면서 왜 그렇게 말하느냐는 식이다.

 

말을 해도 비난 받고, 침묵으로 일관해도 수근 거린다. 이래 저래 비난 받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나 남말 하기 좋아하는 이 앞에서 절대 도를 닦는다든가, 수행을 한다든가, 담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단멸론 카페와 단멸론자들

 

인터넷공간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모여 드는 열린 공간이다.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자신이 생각한 것을 표현 하는 공간이다.  대표적으로 인터넷토론사이트를 들 수 있다.

 

인터넷토론사이트에서는 온갖 주장이 난무한다. 불교관련 토론사이트 역시 예외가 아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의 경연장 처럼 보이는 토론 카페를 보면 댓글놀이를 즐기려는 듯한 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댓글에 댓글을 달면서 토론 하지만 대게 거친 인신공격으로 막을 내린다. 그런 글 중에 단멸론자의 것도 있다. 심지어 단멸론 카페도 가지고 있다. 그런 단멸론자도 불자로 볼 수 있을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내생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단멸론자들의 대표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모순이 있다.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법문집에 따르면 정말로 죽은 뒤에는 내생이 없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죽음 이전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 됩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토론카페에서 보는 단멸론자들은 죽으면 끝이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단멸론자들은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고 현세적인 가르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경전에 윤회나 신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 후대에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단멸론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오직 현실이다. 그래서 눈으로 보이는 것만 믿는 감각적 인지주의와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만 믿는 과학적 실증주의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북방불교는 물론 테라와다 불교 모두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변질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오로지 현세적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구체적으로 말하면사념처’이다. 

 

그런 단멸론자들의 주장이나 댓글을 읽어 보면 가시가 돋아 있다.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아무렇게나 써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악의 단멸론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환상을 가진 것이 상견(常見)이라면, 반대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단견(斷見)이다. 부처님은 이 양극단을 부정하였다. 일어나는 법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상견이 거짓임을 밝혔고, 뒤이어 일어나는 법을 보고 역시 단견이 거짓임을 밝혀 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도의 가르침을 펼치셨다.

 

이렇게 상견과 단견은 버려야 할 삿된 견해이다. 그런데 가장 최악을 단견으로 본다. 상견론자의 경우 도덕적이고 봉사하는 삶이 강조 되어 죽어 천상에 태아난다고 보기 때문에 그다지 비난할 것이 없지만, 문제는 단견론자들이다. 단멸론자들에게 있어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기 때문에 도덕적인 삶, 봉사하는 삶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걸림없이 산다든가 막행막식을 하는 데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넷 토론카페에서 단멸론자들의 글을 보면 비아냥거리고, 비방하고, 비난하고, 중상모략하고, 욕설하는 것이 다반사인 이유도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단멸적인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단멸론자들의 글을 보면 마치 도끼를 든 것 같다.

 

도끼 한 자루씩 들고

 

단멸론자들은 모두 도끼 한자루씩 들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에 반대되는 의견은 모두 도끼로 후려친다. 그런 도끼를 든 자들에 대하여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Purisassa hi jātassa kuhārī jāyate mukhe,
Y
āya chindati attāna bālo dubbhāsita bhaa.
Yo nindiya
pasasati ta vā nindati yo pasasiyo,
Vicin
āti mukhena so kali kalinā tena sukha na vindati.
Appamatto6 aya
kali yo akkhesu dhanaparājayo,
Sabbass
āpi sahāpi attanā ayameva mahantataro kali
Yo
sugatesu mana padosaye.
Sata
sahassāna nirabbudāna chattisati pañca ca abbudāni,
yamariyagarah
ī niraya upeti vāca manañca paidhāya pāpakanti.

 

 

사람이 태어날 때 참으로 입에 도끼가 생겨나네.

어리석은 이는 나쁜 말을 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찍는다네.

 

비난받아야 할 것을 찬양하고 찬양해야 할 것을 비난하니

입으로써 불운을 쌓고 그 불운으로 안락을 얻지 못하네.

 

도박으로 돈을 잃거나 모든 재산과 함께

자기 자신마저 잃어도 그 불운은 오히려 작은 것이네.

 

바른 길을 가신 이에게 적의를 품는다면

그 불운이야말로 참으로 큰 것이네.

 

입으로 마음으로 악함을 기도하여 거룩한 이를 비난한 사람은

103천 니랍부다와 5압부다를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네.

 

 

To man when born, a dagger is born in the mouth,
As though cutting himself the fool says hurtful words.

Praising the blameworthy or blaming the praiseworthy,
He accumulates evil with his mouth.

With that ill luck he does not feel pleasant.
By gambling if someone looses all his wealth together with himself
It's nothing much, when compared to this
That is making his mind hurtful towards the well gone ones.

With that evil intention and evil thoughts, blaming noble ones
He is born in hell for a long period
A hundred thousand Nirabuda hells,
And five times six thousand Abudani hell periods.

 

(두끼야꼬깔리까경-Dukiyakokālikasutta, 상윳따니까야 S6.1.10, 전재성님역)

  두끼야꼬깔리까경(S6.1.10).docx  두끼야꼬깔리까경(S6.1.10).pdf

 

 

 

사람들은 입 속에 도끼 한 자루씩 가지고 태어 난다고 하였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입을 말한다. 그런데 그 입의 도끼를 잘못 사용 하면 큰일 난다는 것이다.

 

제발등에 도끼 찍는다는 말이 있듯이 입도끼를 잘못 놀렸다가 자신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비난 받아야 할 것을 찬양하고  찬양해야 할 것을 비난 한다면 한량없는 세월동안 지옥고를 면치 면할 것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인터넷토론 카페에서 보는 단멸론자들이 꼭 이런 케이스라 보여진다. 마치 오늘날 현실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부처님의 말씀이다.

 

,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현실공간은 물론 인터넷 공간에서도 누구나 도끼 한자루씩 들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면 글도끼로 내려 친다. 상대방을 타격하기 위하여 거친 말을 서슴지 않고 가슴을 찌르는 말이 다반사이다. 그런 댓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피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 한다. 피함으로서 번뇌를 끊는 것이다. 댓글에 대한 대응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정곡을 내려 치는 듯한 댓글을 보고 망설였다. 대응을 하면 분명히 더 강력한 도끼가 날아 올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글 삭제로 이어지고, 그럼에 따라 더 강력한 비방글이 올라 올 것이고, 마지막 수단은 차단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 뻔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알기에 그만 두었다. 번뇌만 더 일으킬 것이시 때문이다. 그래서 ,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답글을 남기고 더 이상 대응하지 않았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그가 친구일 수도 있고, 친척일 수도 있고, 가장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면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업을 짓지 않는 것과 같다. 업을 짓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태어남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Khīa purāa nava natthi sambhava키-낭 뿌라-낭 나왕 낫티 삼바왕
Virattacitt
ā āyatike bhavasmi,        위랏따찟따- 아-야띠께 바와스밍
Te
īabilā avirūhicchandā             떼 니나빌라- 아위루-리찬다-
Nibbanti dh
īrā yathāyampadīpo,          닙반띠 디-라- 야-타-얌빠디-뽀
Idampi sa
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Old destroyed,

 new not arising the mind dispassioned

not thinking of the future

Seeds destroyed,

there is no interest to grow,

 the wise extinguish like a lamp.

This too is precious in the jewel of the Community,

by this truth may there be mental happiness.

 

(라따나경-Ratana Sutta-보배경-寶石經, 숫따니빠따 Sn 2.1 , 14번게송, 전재성님역)

 

 

 

 

 

보석경 14번 게송, Imee Ooi 창송

经与吉祥利偈慧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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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3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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