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힘겹게 산길을 올라가는 노보살, 선승과 자비심

담마다사 이병욱 2012. 5. 29. 15:34

 

힘겹게 산길을 올라가는 노보살, 선승과 자비심

 

 

 

청계사 가는 길

 

부처님오신날 청계사에 갔었다. 의왕에서 분당으로 넘어가는 주 도로에서 청계사로 가는 길은 약 약 5Km에 달하는 거리이다. 편도 일차선 도로이기 때문에 전 도로가 거의 주차장이 되다시피하여 차가 꼼짝도 못하고 서 있는 광경을 부처님오신날 당일에 볼 수 있다.

 

청계사길 입구에서 걸어서 가기로 하였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사는 수도권임에도 불구하고 청계사 가는 길은 한가로운 농촌풍경 그대로이다. 봄이 끝나가기 때문일까 날씨는 마치 초여름처럼 후덥지근 하다. 이렇게 차로 가거나 셔틀버스에 타기를 포기하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꽤 되었다.

 

청계사 입구 주차장까지는 평탄하다. 모두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비포장 도로이었으나 어느 순간 모두 정비되어 청계사 코앞까지 자동차가 들어 갈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힘겹게 올라가는 노보살

 

부처님오신날 청계사 가는 길에 등산객과 참배객이 어우러져 올라가고 있다. 이미 볼일을 보고 내려 오는 사람들도 보인다.

 

 

주차장에서 청계사까지는 경사진 길이다. 도중에 가파른 곳도 몇 있다. 오르다 보니 앞에 어느 나이 드신 분이 힘겹게 길을 올라 가고 있다. 나뭇가지 지팡이에 의지 하고 있지만 옆에서 부축이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으로 보인다.  왜 저 노보살님은 저렇게 힘겹게 오르고 있을까.

 

 

 

 

 

 

 

 

나이 드신 분들에게 있어서 산길은 멀고 먼 길이다.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이 계단을 오르려 할 때 에베레스트 산 보다 더 높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특히 관절염이 있어서 거동이 불편하면 산사에 가는 것은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오신날 불편한 몸을 이끌고 기어코 절에 가는 것은 지극한 신심때문이라 보여 진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있다면

 

나이 드신 노보살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산에 오르는 것에 대하여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동할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하다면 산에 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아무리 신심있는 불자라도 불편한 몸으로 험한 산길을 홀로 오르내릴 수 없다. 그래서 나이 들어 몸이 말을 듣지 않았을 때 절에 가는 것은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자 산중에 사는 스님들의 자비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험한 산길을 스스로 찾아 올라와야 부처님을 뵈올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은 스님위주의 불교로서 중생을 고려하지 않은 발상으로 보인다. 이는 다른 말로 스님들이 자비심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스님들이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있다면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하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저잣거리에 절이 있다면 굳이 먼 산에 있는 절을 찾지 않을 것이다. 바로 집 부근에 절이 있다면 몸이 불편해도 얼마든지 부처님을 뵈로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사람사는 곳에 절이 없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해지면 절에 다닐 수도 없게 되는 것이 한국불교의 실정이다.

 

사마타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스님들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무뚝뚝하고 딱딱하고 냉정하다고 한다. 이는 반대로 자비심 부족을 말한다. 그렇다면 스님들이 왜 자비가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도정스님은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동영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마타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성질이 지랄같아요. 아주 괴팍하고 이기주의적이고. 왜냐하면 자기가 앉아서 수행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뽀시락 거리고 불편하게 하면 고개를 획 처다 보고 , 그거 인간 못됐네욕설을 하고.. 아주 성질이 굉장히 날카로워져 있고 그러죠.

 

(도정스님, 2012년 4월 21일 정각원 토요법회, 초기불교의 수행법, 미디어붓다 2012-05-16)

 

 

사마타 수행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말하고 있다. 정신집중을 특징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에서 누군가 방해 하는 요인이 생겼을 때 매우 민감하게 반응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있을때나 뜨개질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건다면 제대로 할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도정스님은 사마타수행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 우리 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눈은 맑고 초롱초롱하고 날카롭긴 하지만 자비심이 없어요.(웃음) 조금만 뭐 이야기 하면 벼락호통을 치고..”

 

(도정스님, 2012년 4월 21 정각원 토요법회, 초기불교의 수행법, 미디어붓다 2012-05-16)

 

 

스님은 선방에서 수행정진하는 스님들의 자비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비심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는 대상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사마타 수행 방법때문이라 한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반면 위빠사나 수행에 대하여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위빠사나 수행은 이것과 반대로 다릅니다. 선방에서 분위기 산만해져도 그것이 내 마음속에서 일아나는 마음을 관찰하기 때문에 , 저런 번거롭게 하는 요인 때문에 내 마음이 불편해 진다그것을 관하는 거죠.

 

원인을 찾아서 결과를 도출해 내는 마음의 탐진치 삼독으로 인하여 벌아지는 자기마음의 성찰을 통해서 무언가 깨달음을 향해서 가기 때문에 수행을 하다 보면 자비심이 많이 생겨요.”

 

(도정스님, 2012년 4월 21 정각원 토요법회, 초기불교의 수행법, 미디어붓다 2012-05-16)

 

 

자비심에 대하여 위빠사나 수행은 사마타와 반대라 한다. 사마타수행자는 일반적으로 자비심이 부족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자는 자비심이 넘쳐 난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접하였을 때 사마타 수행자는 수행을 방해하는 요소로 보지만, 위파사나 수행자는 알아차리는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너무 긴장되고 날카로워져

 

스님들이 자비심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종종 듣는다. 그 원인이 다름 아닌 화두참구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국수행자들은 힘으로 밀어붙여 화두가 핵폭발하는 것처럼 펑하고 터지면 그 즉시 도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너무 긴장되고 날카로워져 있어 자비심이나 고요함과는 거리가 먼 맹수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각묵스님, 선우논강(대표 철오스님) 7차 토론회 '간화선과 위파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

 

 

한국의 선수행자들은 간화선 수행자들이다. “이뭐꼬?”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꼬?” “어째서 무자라 했을꼬?” 하며 나 또는 참나를 찾는 수행을 한다. 그리고 내가 본래 부처이었다는 사실을 믿는 대신심과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며 의정을 키워 나가는 대의심, 용맹정진으로 표현되는 대분심이 수행의 원동력이다. 

 

그러다가 꽉 막힐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 날카로워지고 긴장되어 누가 건들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먹이감을 노리는 한마리의 맹수처럼,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면 단칼에 베어 버릴 것처럼 보이는 자세가 냉철하고 냉혹하고 냉정하게 보이기 때문에 자비심이 일어날 소지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비발사나(毘鉢舍那)

 

그렇다면 이와 같은 도정스님의 주장은 허황된 것일까. 놀랍게도 대승경전에 스님이 주장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이론서라고 볼 수 있는 대승기신론에 다음과 이야기가 실려 있다.

 

먼저 대승기신론에서 위빠사나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云何修行止觀門 所言止者 謂止一切境界相

운하수행지관문 소언지자 위지일체경계상

 隨順奢摩他觀義故 所言觀者 謂分別因緣生

수순사마타관의고 소언관자 위분별인연생

滅相 毘鉢舍那觀義故 云何隨順 以此二義漸漸修習 不相捨離 雙現前故

멸상 순비발사나관의고 운하수순 이차이의점점수습 불상사리 상현전고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해야 하는가? 말했던 지()란 이른바 일체 경계의 현상을 그치는 것이다. 사마타란 관의 의미를 수순(隨順)하기 때문이다.

 

말했던 관()이란 이른바 인연으로 생멸하는 현상을 분별하는 것이다. 위빠사나란 관찰의 의미를 수순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해야 하는가? 이는 두 의미로써 차츰차츰 수습하여 서로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 두 가지가 목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에서 위빠사나(Vipasana)에 대하여 비발사나(毘鉢舍那)라 하였다. 소리나는 대로 음역한 것이다. 그런 비발사나에 대하여 현상의 생멸현상을 ()하는 것이라 정의 하였다.

 

자비심을 내기 위하여 위빠사나()수행을

 

이처럼 대승기신론에 관법수행에 대한 언급이 실려 있는데, 기신론에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병행하여 수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른바 지관쌍수를 말한다. 그런 이유 중의 하나로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復次若人唯修於止 則心沈沒 或起懈怠 不樂衆善 遠離大悲 是故修觀

부차약인유수어지 즉심침몰 혹기해태 불락중선 원리대비 시고수관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지()만을 닦는다면

곧 마음이 침몰하여지고 혹은 게으름을 일으키어

뭇 착한 행위를 즐겨 행하지 않으므로 대비심을 멀리 여의게 된다.

그러므로 관()을 닦아야만 한다.

 

(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에 따르면 사마타()수행만 한다면 대비심을 멀리 여의게 될 것 (遠離大悲)’ 이라 한다. 이는 도정스님이 말한 내용과 일치한다. 그래서 대비심 즉, 자비심을 내기 위하여 위빠사나()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광스님의 현대심리학으로 풀어 본 대승기신론에서도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이제까지 한국불교는 선정삼매 위주의 수행이었고 삼매를 강조하는 수행이었는데, 대승경전의 논서에서 이미 그 단점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 대하여 서광스님은 자신의 저서 현대심리학으로 풀어 본 대승기신론(불광출판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은 지금까지 우리는 위빠사나 수행은 주로 남방불교, 즉 소승불교의 전통에서 하는 수행방법이고, 참선수행은 그야말로 보살이 중생의 깨달음과 이익을 돕기 위해서 수행하는 대승불교의 수행전통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대승불교의 핵심과 요체를 잘 설명하고 있는 대승기신론에서 참선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은 깨달음을 완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병행해야 할 요소로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타인을 향한 선행과 보살의 자비심이 길러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서광스님,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현대심리학을 전공한 서광스님의 책에 따르면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상식이 무너졌음을 말한다. 자비의 실천을 보살행으로 보는 대승불교에서 자비심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소승불교라고 폄하 하던 테라와다 불교에서 자비의 실천이 더 강함을 말한 것이다. 그런 차이는 전적으로 수행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으로 본다.

 

대상일치수행과 대상분리수행

 

참선을 위주로 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사마타수행이므로 자비심이 부족하고, 반면 위빠사나 수행을 위주로 하는 테라와다 불교전통의 경우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자비심이 넘쳐 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위빠사나 수행의 경우 대상과 일치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분리 하여 관찰 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본다. 그래서 ‘예쁘다’든가 ‘밉다’든가 하는 감정을 갖지 않는다. 단지 있는 그대로 “그렇네” “그렇구나” “그러려니” 하면서 지켜 볼 뿐 그 어떤 의미도 두지 않는다. 이런 차이가 참선수행(사마타)와 비교하여 자비심이 있고 없고의 차이 일 것이다.

 

스님들은 속히 산에서 내려 오셔야 합니다

 

참선수행자들의 자비심부족으로 인하여 현실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을까. 그것은 사람 사는 곳에 절이 없는 문제로 귀결된다.

 

도시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보이는 것은 온통 십가가 뿐이다. 그것도 크고 웅장한 교회건물들이다. 하지만 사방 어디를 둘러 보아도 여법한 절은 보이지 않는다. 종종 있는 절은 점집인지 무당집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 대하여 혜문스님은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다음과 같이 호소 하였다.

 

 

스님들은 속히 산에서 내려 오셔야 합니다. 산사의 수행처를 비우고 내려 오시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여지껏 배우고, 수행하고, 익히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려 내려 오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일부러 저잣거리에 스스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꾸만 산속으로 숨어 들어서는 안됩니다. 산속으로 출가한 스님의 세월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물론 산속에서도 세상을 맑히고 교화하는 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대다수의 민중들은 저잣가리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정기적으로 산으로 불러 모아서 불법을 전하기에는 너무나 조건이 열악합니다.

 

산으로 오는 도중에 모든 외도들에게 모두 감화를 받고 귀의를 당해 버리고 맙니다.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 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외도들의 활동이 너무 적극적이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전해 들으면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허황한지 단박에 알 수 있을 터 인데, 우리 불교계의 스님들은 산속에서 개인의 도만 닦고 계시는지, 왜 밖을 내다 보시는 것이 지난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스님들이 빨리 밖으로 나오셔서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그리고 그들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대화하고, 웃고, 떠들면서 교류해야 합니다. 스님들은 마냥 신비한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손만 벌리면 곧 옷소매가 잡히고 부르면 목소리로 응답을 해야 합니다. 왜 스님들은 숨어서 살려고만 하십니까. 아직 공부가 덜 익었습니까. 출가 하신지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요.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혜문스님,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1 93일자)

 

 

혜문스님은 산속에서 사는 스님들에게 호소 하고 있다. 언제까지 산속에서만 살것이냐는 것이다. 공부가 다 되었으면 이제 자잣거리로 내려와 중생교화를 하자는 피가 끓는 듯한 호소이다.

 

산에서 내려 오지 않는 이유

 

하지만 이는 극소수 뜻있는 스님들만의 바램일 뿐이다. 이런 호소에 대하여 어느 산승은 다음과 같이 댓글을 달았다.

 

 

중들이 왜 산에만 있느냐구요?

본래 세속이 싫어서 머리깎고 산으로 들어온 것이니까

/ 그리고 산속이 편하니까.

 

(산중승님)

 

 

산에서 참선수행을 수십년간 하였다는 산중승님은 스님들이 산에서만 사는 이유에 대하여 두가지를 들었다. 첫번째는 세속과 인연을 끊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산에서 생활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라 한다.

 

산승이 산에서 내려 오지 않는 이유는 세속과 인연을 모두 끊었기 때문에 다시 세속으로 돌아 갈 일이 없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또 산에서 생활하기 편하다는 것은 수행하기 위한 환경이 좋음을 말한다. 산에 있으면 참선수행이 잘 되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고 듣는 등 수행을 방해 하는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참선이 사마타 수행이기 때문이다.

 

불법이 점점 쇠퇴해진다면

 

이런 이유로 인하여 산승이 산에서만 살기 때문에 산에 가야만 절을 볼 수 있고, 자잣거리에는 절이 없는 것이다. 저잣거리에 절이 없기 때문에 불자들은 산으로 가야 한다. 다리가 아파도 험한 산길을 마다 하지 않고 간다. 너무 늙어서 걸을 힘도 없으면 절에 가는 것도 포기해야 한다.

 

불법이 점점 쇠퇴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산중승님은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다.

 

 

만약 불교가 그 인연을 다하여 '말살'을 맞이해야 할 운명이라면 그냥 말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연없는 중생[우빠까]도 붓다를 떠났듯이... 인연없는 세속중생들이 불교를 떠나서 [야훼]한테 가려면 그렇게 하랄수 밖에...

말살?ㅎㅎㅎ 말살 되고 안되고는 [세속중생]이 선택할 일입니다.

세속중생들에게 [불교]가 꼭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속중생들의 사정이니까 세속인들이 나서서 불교 말살을 막는 노력을 해야하는 겁니다.

출가승려'들이야 모두들 세속인연을 다끊고 산중으로 들어와버린 몸인데 세속인연에 연연할 일 없쟎습니까?

(산중승님)

 

 

산에서 오랫동안 수행하였다는 산중승님의 글에 따르면 불교가 쇠퇴하든 말든 자신들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 하였다. 모든 것이 제행무상이라 세속에서 불교가 쇠퇴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이 세속으로 들어가 교화할 일은 없을 것이라 한다. 자신들은 세속과 모든 인연을 다 끊고 세속이 싫어 산으로 들어 왔는데, 다시 세속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라 한다.

 

단지 불법에 대하여 알고 싶으면 산중으로 찾아 오라고 한다. 그러면 자비심으로 가르쳐 줄 것이라 한다. 목마른자가 물을 찾듯이, 불법을 배우겠다고 찾아 오는자에게만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산중승의 생각인데, 이런 생각은 산에 살며 참선 수행을 하는 모든 스님들에게 해당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산승이 스스로 저잣거리로 내려와 중생교화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여겨 진다.

 

저잣거리에서 필요한 불교는

 

이렇게 산승들이 자비심이 없는 이유는 전적으로 참선수행에 있다고 보여 진다. 참선 수행은 세속의 저잣거리에서 하는 것 보다 깊은 산속에서 방해 받지 않고 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온다. 사람이 사는 곳, 저잣거리에서 필요한 불교는 대상에 집중하는 사마타수행의 불교가 아니라 대상을 분리하여 관찰하는 위빠사나수행의 불교라는 것이다.

 

그런 위빠사나는 부처님이 수행법으로 잘 알려져 있고, 더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자비심이 생겨나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곳, 자잣거리에 적합한 것이다. 왜 초기불교가 필요한지 이유가 된다. 또 왜 위빠사나라는 생활선이 필요한지 이유가 된다.

 

도시에 절이 없는 이유

 

도시에 절이 없는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스님들이 자비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비심이 부족한 이유는 참선수행을 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오로지 대상에 몰두 하는 참선수행자에게 산속이 적합한 것이다. 그런 산속도 방해 받으면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이래가지고는 한국불교가 중흥할 수 없다.

 

이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도시에 사는 불자들에게 필요한 불교는 스님들이 수행하는 참선불교가 아니라 생활불교이어야 한다. 그런 생활불교가 다름 아닌 초기불교이다. 초기불교야말로 현실에 꼭 들어 맞는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런 괴로움은 현실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그래서 그런 괴로움에 대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아요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 소멸, 소멸로 이끄는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담마는 굴러 가는 것이다.

 

부처님이 인류에게 준 커다란 선물

 

부처님은 인류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초기경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Muttoha bhikkhave sabbapāsehi         뭇또항 빅카예 샅바빠세히

ye dibbā ye ca mānusā.                  예 딥바 예 짜 마누사

Tumhepi bhikkhave muttā sabbapāsehi     뚬헤삐 빅카예 뭇따 샅바빠세히

ye dibbā ye ca mānusā.                  예 딥바 예 짜 마누사

 

나는 하늘나라의 올가미와 인간세계의 올가미,

그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도 하늘나라의 올가미와 인간세계의 올가미,

그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Bhikkhus,

I am released from all snares whether heavenly or human.

Bhikkhus,

you too work out your release from all snares whether heavenly or human.

 

(두띠야빠사경-Dutiyapāsasutta.-올가미경, 상윳따니까야 S4.1.5, 전재성박사역)

 

두띠야빠사경( 전도선언).pdf

두띠야빠사경(전도선언).docx

 

 

 

부처님은 전법선언에서 하늘나라의 올가미와 인간세계의 올가미에서 벗어 났다고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올가미에서 벗어 났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열반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하면 해방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의 속박제도의 속박에서의 해방을 말한다.

 

부처님이 오신 뜻은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유일신개념의 종교가 있었다. 그것은 브라만교이다. 브라만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믿은 것이다. 그래서 브라만신에게 제사 지내는 브라흐민(제관)이 가장 위에 있었고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불가촉천민 등의 순으로 계급이 있었다.

 

이런 올가미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준 분이 부처님이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올가미는 구체적으로신의 속박에 해당되고, 인간세계의 올가미는 ‘제도, 관습, 인습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보여지고 있는 수 많은 교회와 성당은 모두 신의 속박에 대한 산물로 본다. 이는 존재에 실체가 있다(아뜨만, 소아, i, 영혼)고 믿는 환상과 이 세상을 구성한 궁극적 실재(브라만, 대아, I, 창조주)가 있다는 허망한 관념에 근거한다. 부처님은 이러한 환상과 관념을 부순 분이다. 그래서 신의 속박으로 부터 인간을 해방 시켜 주었다.

 

신의 속박과 제도, 인습, 관습의 속박으로 인하여 가슴에 말 못할 응어리를 안고 사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괴로움으로 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부처님이 오신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부처님의 자비심 때문이다. 자비심이 있어야 중생구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201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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