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신비체험과 현상

담마다사 이병욱 2012. 6. 2. 17:01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신비체험과 현상

 

 

 

신비체험이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일상적인 체험을 말한다. 이런 신비험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신과의 합일 또는 선의 깨달음 같은 강렬하고 특이한 종교적 경험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런 신비체험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일까.

 

신비체험을 누구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비체험이라 볼 수 없다.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비스럽게 본다. 하지만 사람들은 매일 신비체험을 하고 있다. 그것은 꿈을 통해서이다. 꿈은 누구나 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꾸는 것에 대하여 신비체험이라 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비체험이란 꿈이 아닌 현실에서 비일상적이고 자주 일어나지 않는 특별한 경험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전재성박사의 신비체험

 

신비체험, 신비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에서 전재성박사가 강의 도중 자신이 겪은 신비한 체험을 들려 주었다. 인터넷동영상으로 본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제가 그 당시에 아주 신비스런 체험을 했어요. 그 당시에는 안양천에 앉아 가지고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 당시는 시커먼 공장폐수가 흘러가는 강물이었어요. 그 때 국회의원이 된 제정구 의원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빈민촌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저도 가보기도 했는데.. 

 

근데 갑자기 그 순간에 아주 특별한 현상이 일어 났어요. 갑자기 호흡이 멈추는 거에요. 호흡이 엄청나게 느려지는 거에요. 우리는 호흡이 보통때는 느껴지지도 않고 달리면 숨이 차고 그러러지만  그때는 호흡이 굉장히 느려지면서 호흡이 보이는 거에요.

 

호흡이 레이져광선처럼 호흡이 보여요. 굉장히 느려지고 온몸에서 맑은 기운이 뭉치는데 이게 뭐 호흡이 들어 오는건지 레이져광선이 들어 어는 건지 아주 맑은 기운이 온몸에 들어 오기 시작하더니만 갑자기 이마 있는 데서 (주먹만한) 다이아몬드 같은 것이 콱 박히더라구요.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구태여 표현하자면 그래요. 이 세계가 사라진다. 빛과 같이 사라지는 거에요. 이 세계가 사라져가지고 나도 사라지고 다 사라지고 빛과 같은 광채 같은 것이  순간적으로..그러다 한참 있다 제가 깨어 났어요.”

 

(전재성박사,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2012-03-31, 미디어붓다 2012-05-16)

 

 

전재성박사가 신비체험을 한 것은 20대 중반이었다고 한다. 서울대 다닐 때 대불련 회장을 맡기도 한 전재성박사는 학생운동을 하다 투옥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20대 시절 저항운동을 하다 감옥에 가고 감옥에서 나와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마치고 나니 26살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때 당시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자살하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죽을 것이가를 두고 고민하였다고 한다. 물에 빠져 죽는다든가 자동차에 받쳐 죽는 것 등을 생각해 보았지만 비겁한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앉아서 죽자는 것이었다. 불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발상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렇게 방황하던 시절 세상에 대하여 털끝만치도 미련이 없었다고 한다. “세상은 정말 괴로운 것이다” “즐거운 것이라고는 요만치도 없다”라고 생각하던 시절이라 한다. 이렇게 괴로움에 철저하게 사무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니까야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상윳따니까야에 나오는 내용에 따르면 적어도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하여 털끝만의 탐착이 없어야 된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이 세계를 버리고 저 세계로 가려면 이 세계에 털끝만큼의 탐착이라든가 털끝만큼의 미련이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그마한 탐착이나 미련이 남아 있으면 돌아 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고통을 당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축복이다라고 말한다. 고통을 철저하게 느껴야 이 세계를 버리고 저 세계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신비체험을 하고 나서

 

이처럼 전재성박사가 방황하던 젊은 시절에 신비체험을 하였는데,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당시에 제가 폐결핵도 앓고 늑막염도 앓고 소화불량, 뭐 벼라별 병을 다 앓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게 사라졌어요.

 

그리고 중요한 건 뭐냐 하면, 그 전에는 책을 못 봤어요 제가. 머리가 너무 혼란스럽고 고민이 많고 그러니까 책을 한권도 못 봤어요. 책보기도 힘들었고 세상이 캄캄하니까.

 

그런데 그 다음부터 어떤 현상이 일어났느냐 하면 굉장히 느려진다는 거에요. 일종의 ‘입정’에 드는 현상이라 볼 수 있는데, 책을 읽어도 굉장히 느리게 읽혀요. 그대신 상세히 알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불경을 보면 무슨 말씀을 했는가 보이는 거에요. 눈에 들어와요. 성경을 봐도 다 들어와요. 그다음에 공자 맹자를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겠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들어 와서 인도철학을 해야 되겠다 생각하고 제일 오래된 철학부터 공부를 해나가는 거에요. 그래가지고 인도 베다철학을 했어요. 베다 우파니샤드 공부를 하고 그리고 난 다음 조금 더 욕심이 생겨 독일 가가지고 독일철학까지 하려다가 못했지만 그렇게 해서 독일에 가서 공부하게 된 거에요.”

 

(전재성박사,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2012-03-31, 미디어붓다 2012-05-16)

 

 

신비체험을 하고 난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몸의 병이 모두 사라지고 책을 접하게 된 것이다. 책을 보면 그 뜻이 모두 이해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철학공부를 시작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재성박사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신비체험으로 모든 것이 바뀌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인생이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바뀌게 된 것이다.

 

성해영교수의 신비체험

 

이처럼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신비체험에 대한 이야기가 또 있다.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가 운영하는 ‘휴심정사이트’에 실린 성해영교수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성해영 교수는 자신이 겪은 신비체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운동장 건너편 담장에는 몇 채의 건물이 바로 붙어 서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갓 칠해진 페인트 탓인지 벽이 새하얗게 빛나는 4층 높이의 건물 하나가 도드라져 눈에 띄었다. 마침 석양 무렵이라 붉은 햇빛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건물의 하얀 벽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새하얀 벽에 붉은 빛이 짙게 채색된 아름다운 모습이 내 눈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붉은 빛과 하얀 색이 어우러진 건물 벽은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광경에 넋이 나간 나는 수업도, 선생님도, 내 짝꿍도, 교실도, 이 세상도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까맣게 잊은 채 붉게 물든 하얀 벽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광경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이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름다움에 취해 좋아진 기분은 커다란 행복감으로 변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 기쁨은 주체할 수 없이 계속 커져만 갔다. 게다가 기쁨이 내 마음을 꽉 채워나가면서 내 몸 역시 점점 뜨거워졌다. 행복감이 내 몸을 말 그대로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에 넋이 나가 기쁨에 젖어있는데, 갑자기 내 발바닥에서 이상한 느낌이 시작되었다. 마치 작은 벌레처럼 조그마한 에너지 덩어리들이 내 발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몇 마리에 불과했던 ‘에너지 벌레’들은 갑자기 그 수가 불어나면서 내 발을 꽉 채우고 빠른 속도로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꼬물거리는 벌레들이 순식간에 위로 퍼져 나가면서 미칠 것 같은 행복감이 내 몸 전체를 가득 채웠다. 숨 쉬기 힘들 정도로 큰 기쁨이 내 몸과 마음을 채워나가던 중에 ‘그 일’이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나를 후려쳤다. 결국은 거대한 기쁨이 나를 터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성해영교수, 열일곱에 삶을 바꾼 ‘그 일’이 날벼락처럼 왔다, 휴심정 2012-03-19)

 

  열일곱에 삶을 바꾼 그 일이 날벼락처럼 왔.docx  열일곱에 삶을 바꾼 그 일이 날벼락처럼 왔.pdf

 

 

 

성해영 교수는 서울대 인문한국 교수로 있다. 성해영 교수가 신비체험을 하던 때가 17세 때인 고등학교 일학년 때라 한다. 아버지의 사업실패, 가정불화 등 최악의 인생의 암흑기에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신비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성해영교수는 이어지는 글에서 신비체험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 하고 있다.

 

 

“아름다운 광경에 매혹되고, 이윽고 거대한 기쁨이 내 몸을 가득 채운 후 폭발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수업 중에 일어났다는 사실로 짐작컨대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그리고 폭발하기까지의 과정은 내가 객관적인 태도로 관찰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마치 언덕을 내려오는 눈덩이가 점점 커져 가듯이 이 모든 일들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나는 거대한 급류에 휩쓸리듯 빠른 속도로 다른 상태로 변해갔을 따름이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그 상태를 관찰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다. 요컨대 그 과정은 놀랍도록 빠르고 강력해서, 거대한 기쁨이 결국 나 자신을 터져나가게 만드는 걸 그저 겪을 수밖에 없었다.

 

내 몸 속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후, 나는 ‘꿈이 없는 잠’과 같은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를 순식간에 통과했다. 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암흑의 터널을 휙하고 통과한 나는 완벽하게 ‘다른 차원’으로 갔다. 요컨대 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덥석 잡혀 짧은 순간 완전히 정신을 잃었고, 그 후 갑작스럽게 우물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던 것이다.

 

잠깐의 암흑을 경험하고 정신을 차린 나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우물 바깥 세상에 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곳은 내가 알았던 모든 것이 깡그리 사라져 버린, 무한과 영원의 차원이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우물 밖 세계 그 자체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성해영교수, 열일곱에 삶을 바꾼 ‘그 일’이 날벼락처럼 왔다, 휴심정 2012-03-19)

 

 

성해영교수는 자신이 겪은 신비체험에 대하여 말이나 글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다만 글을 통하여 밝힌 내용에 따르면 하나의 터널을 지난 것으로 묘사 하고 있다.

 

대체 무슨 체험을 한 것일까

 

그리고 다른 차원에 오게 되었는데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무한과 영원의 차원이고 그 차원과 하나 됨을 체험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제 ‘나(i)’는 ‘나(I)’ 혹은 ‘그것(It)’이 되었다. 일견 ‘나(i)’와 ‘나(I)’는 그 크기만 다른 걸로 여겨지지만, 실상 그 크기의 차이는 ‘무한(infinity)’이다. 즉 우물 안와 바깥을 구분하는 벽은 그저 하나의 벽이 아니라 무한 그 자체이다.”

 

(성해영교수, 열일곱에 삶을 바꾼 ‘그 일’이 날벼락처럼 왔다, 휴심정 2012-03-19)

 

 

 

 

mystery

 

 

 

작은 나(i)가 큰 나(I)와 합일 한 것으로 표현 하고 있다. 이렇게 합일 한 것에 대하여 (i)는 죽었고, 그곳에서 나(I)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라고 표현 하였다.

 

이런 신비체험에 대하여 성해영교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는 말한다.

 

 

게다가 그 경험은 갑작스럽게 나를 찾아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나를 포함해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니고(not real),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진짜(really real)이자 궁극적 실재라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무한한 기쁨이자, 절대적인 자의식이자, 궁극적 존재’로 확장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바로 내 속에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해 주었다. 요컨대 나는 이 사실들을 체험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내 의사와는 눈곱만큼도 상관없이.

 

(성해영교수, 열일곱에 삶을 바꾼 ‘그 일’이 날벼락처럼 왔다, 휴심정 2012-03-19)

 

 

성해영 교수는 궁극적실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신비한 체험을 함으로 인하여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바로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선종의 화두타파 순간을 보는 듯

 

성해영 교수의 신비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마치 선종에서의 깨달은 순간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선종에서의 깨달은 상태는 어떤 것일까. 동국대 학술원장인 로버트 버스웰 교수는 화두 타파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폭발, 폭발시키다 입니다. 화두 참구를 계속하면 이 의정을 핵으로 마음이 점점 집중되어 뭉치면서 마음속에 엄청난 압력이 발생합니다. 이 압력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개념, 개인적인 관점 전체를 위협합니다.

 

모든 것을 동원해서 이해해보려고 하지만 실패합니다. 점점 더 좌절하게 되고 마음은 점점 팽팽해집니다. 그러다 이 의정이 너무나 강렬해져서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평소 현 상태에 대한 안주, 개인적인 관점이 의정이 압력으로 폭발하며 함께 완전히 폭발해버립니다. 이 폭발로 개인적 관점, 즉 ‘나’가 소멸합니다.

 

이로 인해 나와 남, 옳고 그름, 깨침과 깨치지 못함 사이의 분별이 파괴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폭발, 의정의 폭발을 통해 만물이 완전히, 완벽히 서로 상입하고 있음을 똑똑히 알게 됩니다.

 

더 이상 개인이라는 관점이 없기 때문에 나는 만물과 상호 연결돼 있고 만물은 나와 상호 연결돼 있습니다. ‘나’란 제한된 개념이 아니라 무한성에서 오는 관점이지요.

 

(로버트 버스웰교수, 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제26회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26, 불교tv 2011-12-13)

 

 

버스웰교수의 강의를 들어 보면 성해영교수가 말한 것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폭발에 대한 이야기, 나 가 소멸되는 이야기, 그리고 궁극적 근원과 합일이 일어나는 과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열반이란

 

이렇게 두 교수의 이야기는 매우 비슷한데 앞서 언급한 전재성박사와 다른 것이 있다. 전재성박사의 경우 ‘나가 사라져 버려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교수와 버스웰 교수는 ‘작은 나는 사라졌지만 합일의 과정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식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전재성박사의 신비체험은 열반에 가깝다. 전박사는 이 세계가 사라져가지고, 나도 사라지고 다 사라지고, 빛과 같은 광채 같은 것이  순간적으로..그러다 한참 있다 제가 깨어 났어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나가 사라지고 난 후의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열반에 대한 묘사는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서도 설명된다.

 

 

그는 아마도 수다원의 도과는 오로지 수다원 도로 성취되는 다섯 가지 불선한 마음의 소멸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열반은 불선의 부분적인 소멸도 아니요, 정신과 물질 법의 어느 일부분만의 소멸도 아니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는 아주 그릇된 견해입니다. 사실상, 열반은 번뇌(kilesa), 업(kamma), 과보(vipāka)라는 세 가지 바퀴(vatta)의 완전한 소멸을 말하고, 모든 정신과 물질의 행, 형성된 모든 것이 완전히 소멸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도는 무엇을 대상을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성스러운 도는 열반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열반이란 방금 설명한 대로 조건 지워진 모든 정신(nāma)과 물질(rūpa)의 완전한 소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수다원의 도과를 얻는 순간에는 오직, 감각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의 소멸만이 인지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로 지켜본 것을 사실에 입각하여 언급한 것입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마하시사야도의 설명에 따르면 열반이란 물질과 정신의 완전한 소멸을 뜻한다. 이는 아는 마음을 아는 마음도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그 다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단지 깨어나 보아야 열반에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열반에 이른 자는 있어도 들어간 자는 없다”는 말이 있다. 열반에 대하여 항상한 것()이고, 즐거운 것()이고, 참나()가 있는 것이고, 깨끗한 것()이라는 설명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열반에 이른 자는 있어도 열반에 든 자는 없다”라는 말은 아눌라스님의 음성법문에서도 들을 수 있다.

 

 

“무엇이 일어 났는지 자기는 잘 모른다. 그런데 뭔가 일어 났는지는 모르는데 거기서 깨어나면 세상이 변해 있는 것이다. 뭔지 모르지만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있는 것이다. 마치 새로운 아기가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다.”

 

(아눌라스님, 위빠사나 16단계 및 도와과, http://cafe.daum.net/kalyanamitta)

 

 

아눌라스님의 법문에 따르면 열반에 들었다 깨어 났을 때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상태라 하였다.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이는 것이다. 세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상은 그대로 이지만 마음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그래서 이전의 나가 죽고 새로운 나가 태어난 것이다. 이를 청정도론에서는 계보가 바뀐다고 설명하였다. 중생에서 성자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전재성박사와 성해영교수 신비체험 비교표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전재성박사가 경험한 신비체험과 성해영 교수가 경험한 신비체험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나가 사라지고 난 다음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전재성박사

성해영 교수

체험시기

26(대학졸업후)

17(1)

종교

불교(대불련 회장 지냄)

-

체험전 상태

-학생운동으로 투옥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자살하려 함

-“세상은 정말 괴로운 것이다” “즐거운 것이라고는 요만치도 없다하여 세상에 대한 미련이 털끝만치도 없었음.

사춘기에다 어려운 가정 형편, 가족 간의 불화 등이 함께 겹친 최악의 시기

공통사항

-수행과정없었음

-어느 날 급작스럽게 경험함

-수행과정없었음

-어느 날 급작스럽게 경험함

장소

안양천변

교실

전조

-호흡이 느려지고 호흡이 보였다

-온몸에서 맑은 기운이 뭉쳤다

-다이아몬드 같은 것이 이마에 박혔다.

-석양 무렵이라 붉은 햇빛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건물의 하얀 벽을 아름답게 물들일 때

-자신마저도 까맣게 잊은 채 붉게 물든 하얀 벽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음

- 아름다움에 취해 좋아진 기분은 커다란 행복감으로, 기쁨으로

-기쁨이 내 마음을 꽉 채워나가면서 내 몸 역시 점점 뜨거워짐

-발바닥에서 이상한 느낌이 시작됨. 마치 작은 벌레처럼 조그마한 에너지 덩어리들이 내 발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짐.

-내 발을 꽉 채우고 빠른 속도로 몸 전체로 퍼져 나갔음

-순식간에 위로 퍼져 나가면서 미칠 것 같은 행복감이 내 몸 전체를 가득 채움

-결국은 거대한 기쁨이 나를 터뜨리고 말았음

체험순간

-이 세계가 사라져가지고 나도 사라졌음

-말로 표현 할 수 없음

-몸 속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후, 나는 ‘꿈이 없는 잠’과 같은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를 순식간에 통과했음.

-암흑의 터널을 휙하고 통과한 나는 완벽하게 ‘다른 차원’으로 갔음

-짧은 순간 완전히 정신을 잃었음

나가 사라지고 난후

알수 없음

(나가 사라지고 난후 깨어나고 나후 사라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음)

- 잠깐의 암흑을 경험하고 정신을 차린 나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우물 바깥 세상에 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음

- 우물 밖 세계 그 자체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음

이후 생활

-고질병이 나았음

-공부가 잘 되었음

-‘그 일’이 무엇인지 늘 생각하게 됨

깨달음

초기불교의 열반과 유사

-선종의 화두타순간과 유사

-궁극적 실재가 있음을 받아 들임

현재

-서울대 졸업

-독일 유학

-4부 니까야 세계최초완역

-현재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행정고시 수석합격

-비교종교학자

-현재 HK(인문한국) 교수

 

 

 

비교표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나가 사라지고 난 이후이다. 전재성박사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깨어나고 보니 나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성해영 교수는 나가 사라지고 난 이후의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궁극적 실재와 합일하였다고 설명하였다. 그런 과정은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유사한 것이다. 선종에서는 이를  상락아정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성해영 교수는 자신이 체험한 것에 대하여 무한한 지복, 무한한 기쁨으로 표현 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전재성 박사의 경우 열반에 가깝고, 성해영 교수는 합일에 가깝다.

 

성해영 교수는 삼매를 체험한 것

 

그렇다면 왜 성해영 교수의 체험이 선종의 체험에 가까울까. 그것은 성교수의 글에 잘 표현 되어 있다. 성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마치 삼매에 들어 가는 듯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이 광경에 넋이 나간 나는 수업도, 선생님도, 내 짝꿍도, 교실도, 이 세상도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까맣게 잊은 채 붉게 물든 하얀 벽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광경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이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름다움에 취해 좋아진 기분은 커다란 행복감으로 변했다.

 

(성해영교수, 열일곱에 삶을 바꾼 ‘그 일’이 날벼락처럼 왔다, 휴심정 2012-03-19)

 

 

성해영 교수는 교실 뒤좌석 코너에서 창밖의 벽에 주목하고 있다. 마침 석양에 물든 햇살이 붉은 벽을 비추고 있었는데, 거기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빠져 들어 간 것이다.

 

이것은 대상에 대한 집중을 말한다. 초기불교용어로 말하면 심일경성(心一境, cittassa-ekaggatā)이라 한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된 마음을 말한다.

 

성교수는 붉게 물든 벽을 그저 바라만 보고만 있었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대상에 대한 집중된 마음이다. 이런 경지들은 마음이 한끝으로 집중되어서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가라앉았고 끝이 났기 때문에 고요함(사마타)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렇게 삼매는 마음을 대상에 집중함으로서 시작 된다. 마음을 대상에 집중하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마음은 기쁨행복이다.

 

성교수가 체험한 것을 경장과 논장에서 말하는 네가지 또는 다섯가지 색계선은 다음과 같다.

 

 

 

경장에서 말하는 네 가지 색계선[四種禪]

초선(初禪)

일으킨 생각(, vitakka), 지속적 고찰(, vicāra), 희열(, pīti), 행복(, sukha), 집중(, samādhi)

이선(二禪)

희열(, pīti), 행복(, sukha), 집중(, samādhi)

삼선(三禪)

행복(, sukha), 집중(, samādhi)

사선(四禪)

평온(, upekkhā), 집중(, samādhi)

논장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색계선[五種禪]

초선(初禪)

일으킨 생각(, vitakka), 지속적 고찰(, vicāra), 희열(, pīti), 행복(, sukha), 집중(, samādhi)

이선(二禪)

지속적 고찰(, vicāra), 희열(, pīti), 행복(, sukha), 집중(, samādhi)

삼선(三禪)

희열(, pīti), 행복(, sukha), 집중(, samādhi)

사선(四禪)

행복(, sukha), 집중(, samādhi)

오선(五禪)

평온(, upekkhā), 집중(, samādhi)

 

 

 

표를 보면 공통적으로 집중이 들어 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집중이다. 붉은 벽이 저녁 햇살에 비치는 아름다음에 눈을 떼지 못하여 계속 바라본 결과 그 대상에 하나로 집중된 마음 즉, 심일경성이 된다. 이를 지속적인 고찰을 함으로 인하여 희열과 행복이 생겨남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성해영교수가 체험한 신비체험은 삼매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라 나가 사라지고 우주와 합일하는 과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무상한 것이다.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수다원의 오도송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렸을 때 꼰단냐가 하던 말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성제를 제대로 이해 하였다는 말이다.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말은 연기법에 딱 들어 맞는 말이다. 그리고 혁명적인 게송이라 한다 왜 그럴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주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부처님 당시 라자가하(Rājagaha)는 새로운 사조의 중심지로서 많은 철학유파가 번성하고 있었다. 그 중에 산자야라는 사상가가 이끄는 학파가 있어 250명의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우빠띠싸와 꼴리따는 뒤에 부처님께 귀의하여 2대 수제자가 되었으니 사리뿟따(Sāriputta)와 목갈라나(Moggalāna)가 바로 그들이다.

 

어느 날, 라자가하의 거리를 거닐고 있던 우빠띠싸는 한 사문의 엄숙한 용모와 고요하고도 위엄 있는 거동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사문은 부처님의 최초의 다섯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앗사지였다. 우빠띠사는 이 거룩한 사문이 누구의 제자이며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아라한이 탁발을 마칠 때까지 계속 따라갔다.

 

“벗이여, 당신의 모습은 우아하고, 당신의 눈빛은 맑게 빛납니다. 누가 당신을 출가하도록 설득했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시며, 어떤 가르침을 따르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아싸지 존자는 겸손하게 말했다.

 

“나는 교의와 계율을 길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그 대의만 간략히 말해 줄 수가 있습니다.

 

이에 우빠띠싸는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벗이여, 적든 많든 좋으실 대로 말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도 그 대의입니다. 장황한 말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러자 아싸지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포용하는 연기법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m hetum

tathāgato āha Tesam ca yo nirodho Eva vādi mahā samano.

 

“원인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법들,

그들에 관해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밝혀주셨네.

또 그들의 소멸에 대해서도 설명하셨나니,

이것이 대 사문의 가르침이라네.

(Vin.i.40)

 

 

우빠띠싸는 이 게송을 듣자마자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깨닫고 수다원과를 성취했다.

 

(마하시사야도 법문집 주해모음,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 <초전법륜경> 제6장)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된 사리뿟따 존자가 앗사지 비구가 한 말의 대의인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수다원이 되었다고 한다.  또 사리뿟따존자가 이말을 자신의 친구 목갈라나 존자에게 들려 주었더니 목갈라나 존자 역시 수다원이 되었다고 한다.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말은 진리이다. 어느 것 하나에 해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성해영 교수가 체험한 것도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을 집중함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조건에 따라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조건이 사라지면 생겨난 것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주장한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음이 집중된 상태에서 합일을 체험한 것 역시 하나의 현상이다.

 

현상을 무상, , 무아로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삼매에서 벗어나면 사라지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떻게 성스러운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난 들뜸에 의해서 마음이 붙들리게 되는가? 그가 상카라들을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광명이 일어난다.

 

광명이 법이라고 생각각하고 광명으로 전향한다. 그것으로 인한 산만함이 들뜸이다. 그 들뜸에 마음이 붙들려 그들이 일어남을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괴로움이라고 ‥‥ 일어남을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지혜가 일어난다. ‥‥ 희열이 ‥‥ 경안이 ‥‥ 행복이 ‥‥ 결심이 ‥‥ 분발이 ‥‥ 확립이 ‥‥ 평온이 ‥‥ 욕구가 일어난다. 욕구가 법이라고 생각하고 욕구로 전향한다. 그것으로 인한 산만함이 들뜸이다. 그 들뜸에 마음이 붙들려 그들이 일어남을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괴로움이라고 ‥‥ 일어남을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청정도론, 제 20장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106절)

 

 

수행을 하다 을 보았을 때, 이를 보고 깨달은 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라 한다. 모든 현상은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빛을 본 것 역시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현상이 일어남에 대하여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일어남이 괴로움이라 그대로 알고, 또 일어남이 무아라고 그대로 꿰뚫어 알라는 것이다.

 

이처럼 도처럼 보이지만 실은 알고 보면 도가 아닌 것을 ①광명 ②희열 ③경안 ④결심 ⑤분발 ⑥행복 ⑦지혜 ⑧확립 ⑨평온 ⑩욕구 이렇게 10가지로 들고 있다. 수행중에 빛을 보았다든가. 희열을 느꼈다든가, 행복을 맛 보았다든가 하는 것들이 도처럼 보이지만 도를 방해하는  장애요인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한다.

 

 

“광명과 지혜와 희열에 대해 흔들리고

경안과 행복으로 인해 마음이 동요된다.

결의와 분발과 확립에 대해 흔들리나니

전향의 평온과 위빳사나의 평온과

욕구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청정도론, 20장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125)

 

 

수행중에 맛 본 빛(광명), 희열, 행복 등에 휘둘리지 말라는 것이다.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므로 무상, , 무아로 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열반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열반으로 귀결된다. 신비체험하거나 수행을 하여 궁극적 실재와 합일 하는 것이 아니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다.

 

 

Tapo ca brahmacariyañca                 따뽀 짜 브라흐마짜리얀짜

ariyasaccānadassana,                  아리야삿짜나닷사낭
Nibbānasacchikiriyā ca                 
닙비나삿치끼리야 짜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망갈라경-Magalasutta- 위대한 축복의 경, 숫따니빠따  Sn 2.4, 전재성님역)

 

 

Diṭṭiñ ca anupagamma                     딧띤 짜 아누빠감마
s
īlavā dassanena sampanno               실라와- 닷사네나 삼빤노
K
āmesu vineyya gedha                  -메수 위네이야 게당
na hi j
ātu gabbhaseyya punaretī       나 히 자-뚜 갑바세이양 뿌나레띠

 

삿된 견해에 의존하지 않고 계행을 갖추고,

통찰을 갖추어 감각적인 욕망을 다스리면,

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옵니다.

 

(까라니야멧따경-Karaniya Metta Sutta- 자애경, 숫따니빠따 Sn 1.8, 전재성님역)

 

 

Khīa purāa nava natthi sambhava 키-낭 뿌라-낭 나왕 낫티 삼바왕
Virattacitt
ā āyatike bhavasmi,        위랏따찟따- 아-야띠께 바와스밍
Te
īabilā avirūhicchandā             떼 니나빌라- 아위루-리찬다-
Nibbanti dh
īrā yathāyampadīpo,          닙반띠 디-라- 야-타-얌빠디-뽀
Idampi sa
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라따나경-Ratana Sutta, 보배경, 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2012-06-0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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