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싫어하는 것과 만난다는 것, 번뇌탈출과 빠알리 게송 암송하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2. 6. 26. 15:19

 

 

싫어하는 것과 만난다는 것, 번뇌탈출과 빠알리 게송 암송하기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

 

삶을 살아 가면서 매일 자극 받는다. 그런 자극이 발생될 때 마다 회피 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자극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appiyasampayoga)’도 괴로움이라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괴로움이 있다. 이를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dukkha-ariyasacca, 苦聖諦)라 한다. 괴로움 그 자체도 진리로 보는 것이다. 괴로움, 고통, 불만족 등 으로 불리우는 둑카가 무엇인지 알아야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 소멸, 소멸방법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성스런 괴로움의 진리 중에 아홉번째가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인데 이것도 역시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에 속한다. 

 

살다 보면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일 보다 나쁜 일이 더 많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세상에 대하여 괴로움의 바다와 같다고 하였다. 괴로움의 바다에서 일시적으로 좋은 느낌을 갖지만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는 것이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좋은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좋은 사람은 내가 보기에 좋은 사람이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설령 내가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너그러이 보아 준다면 바로 그 사람이 나에게 있어서 좋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언제까지나 오래 있고 싶다.

 

하지만 즐겁고 행복한 순간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 순간의 느낌일 뿐 즐거움이나 행복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과 헤어질 때 아픔을 맛 보는데, 이처럼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piyavippayoga)’이 열번째인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본다면 좋아하는 것과 싫어 하는 것 모두 괴로움을 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은 헤어지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반대로 싫어하는 것은 만나기 때문에 괴로워진다. 

 

감각접촉, 팟사(phassa)

 

중요한 것은 좋고 싫음이 접촉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접촉이 반드시 물질적 접촉만을 의미 하지 않는다. 12연기에서 말하는 팟사(phassa)’ , ‘()’을 감각접촉이라 하는데 육입을 조건으로 일어나고, 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좋고 싫음에 대한 느낌(vedanā, )’이 일어 나기 때문에 감각접촉은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감각접촉은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보이는 대로 보이고, 들리는 대로 들릴 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것이 감각접촉인데,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발생되는 느낌 즉, 좋아함과 싫어함을 알아차리는 것이 모든 수행의 시작점이라 볼 수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결국 좋아함싫어함이 두 가지이다. 굳이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좋아함도 싫어함도 아닌 중립의 느낌 즉, ‘무덤덤한 느낌이 있다. 이를 빠알리어로 우펙카 웨다나( upekkhā vedanā)’ 라 한다. 이는 중립적인 느낌으로서 조건에 따라 언제 어떻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느낌으로 변할지 모른다.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한 사람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함과 싫어함 두 가지에 얽매이어 산다. 그래서 자신에게 잘 해주면 좋아라하고, 자신에게 잘 못 대해주면 마치 원생동물처럼 단세포적인 행동을 한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은 탐욕으로, 싫어 하는 것은 성냄으로 나타난다.

 

욕심부리고 성을 잘 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좋아함과 싫어함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에 대하여 한 없이좋아 하고, 싫어 하는 사람에 대하여 죽도록싫어 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한 것이다.

 

이렇게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주관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호탕해 보인다. 주로 보스형에 많다. 권력의 정점에 있거나 자수성가형,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그리고 많이 배운 사람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주관이 뚜렷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런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고통이다. 호불호가 너무나 명확하다 보니 비위 맞추기에 바쁘고 한번 눈 밖에 벗어나면 끝장이다. 그래서 월급생활자들은 보스로부터 욕을 먹어 가면서 인내하며 살아 가는데, 어떤 이는 자신이 받은 월급의 반은 욕먹은 대가로 받은 것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았다.

 

선근이 없다 보니

 

부처님 가르침의 입장에서 본다면 호불호는 바람직 하지 않다. 어리석기 그지 없는 행위로 본다. 호볼호는 다름아닌 탐욕과 성냄의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탐욕과 성냄을 제거해야 한다고 초기경전 도처에서 말씀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은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 한다. 인연이 없다는 말은 선근이 없다는 말과 같다. 전생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번도 접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현생에서도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이 좋은지 모르는 것이다

 

전생에 선근을 심어 놓지 않은 이들에게 아무리 부처님 법이 훌륭함을 이야기해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비방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다 보니 부처님의 담마가 있는 줄도 모른다. 오로지 자신의 뜻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되면 좋아라 하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마구 화를 낸다. 욕심부리고 성내는 행위가 악업을 쌓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이는 어리석기 때문이다.

 

이처럼 욕심부리고 성내는 어리석은 이와 함께 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자체가 괴로움이라 하여 성스런 괴로움의 진리 중의 하나로 본 것이다.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살다 보면 싫어하는 것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만나기 싫어도 꼼짝없이 만나야 하는 경우도 있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속에서 그야말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말씀 하셨다.

 

 

Ajjeva kiccamātappa,           앗제와 낏짜마땁빵

ko jaññā maraa suve;          꼬 잔냐 마라낭 수웨

na hi no sagara tena,         나 히 노 상가랑 떼나

mahāsenena maccunā.              마하세네나 맛쭈나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

 

(밧데까랏따경-Bhaddekaratta Sutta, 한 밤의 슬기로운 님의, MN131, 전재성님역)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잠들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될지 알 수 없고, 지금 이 순간 운전하면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알 수 없는 미래이지만 실제로 만나기 싫은 것과 만나야만 하는 것이 있다. 늙어 가고 병들고 죽어 가는 것은 만나기 싫어도 만나야 하는 것들이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인 경우

 

그런데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것들과의 만남이 있다. 대표적으로 치매 같은 것이다. 가족 중에 누군가 치매에 걸렸다면 이는 만나기 싫어도 만나야 되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온갖 육체적, 정신적 장애 요인도 만나기 싫어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만남은 싫어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만남자체가 괴로움이다. 그래서 싫어 하는 것과 만나는 것이 괴로움이라 하였다. 싫어 하는 것과 만나는 것은 싫어 하는 사람과의 만남도 포함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것이 어리석은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특징은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들이다. 너무나 자신의 주관이 강하기 때문에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피할 수 도 없다.

 

어리석은 이와 만나는 것은 번뇌를 유발한다. 이런 번뇌를 해결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피하는 것이다. 그 자리를 피함으로서 번뇌를 끊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인 경우 꼼짝 없이 번뇌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 그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법화경 사경만 하면

 

매일 아침 불교방송을 듣는다. 이른 아침 경전공부불교강좌시간이다. 현재 5 35분에 방송하는 경전공부시간의 경우 도림스님이 법화경을 법문하고 있다. 6시에 방송하는 불교강좌시간의 경우 송담스님이 알기쉬운 불교이야기를 법문하고 있다. 모두 현장에서 법문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전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식이다.

 

스님들의 법문에 특징이 있다. 번뇌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먼저 도림스님의 경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 법화경 사경수행이 여러분이 그 법화경을 읽는 수행공덕이 여러 분들이 가정에서 법화경 한자 한자 사경의 위대한 힘이 이 지구라고 하는 이 인간 세상 사바세계를 다 변화 시켜 버려.

 

(도림스님, 법화경 강의, 불교방송 2012-06-25)

 

 

도림스님의 경우 법화경 사경공덕에 대하여 강조한다. 언제 어디서나 법화경을 사경하면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가정 뿐만 아니라 온 국토, 온 우주가 청정해질 것이라 한다.

 

이처럼 스님은  사경공덕에 대하여 방송 때 마다 강조 하기 때문에 법화경 사경만 하면염불이나 108, 이뭣꼬 등과 같은 참선 수행보다 더 수승한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뭐꼬 수행만 하면

 

이처럼 사경공덕을 강조하느 도림스님과 비교하여 송담스님은 화두수행을 강조한다. 늘 입에 달고 다니듯이 말하는 이뭐꼬수행이다.

 

송담스님은 방송에서 늘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이뭐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영한 이놈이 무엇인고 항상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줄여서 이 뭐꼬, 이 뭐꼬, 이 뭐꼬는 경상도 사투리인데, 이것이 무엇인고 그말이여.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영한 이놈이 무엇인고하려면 말이 기니까 간단하게 이뭐꼬 그렇게 만 하시라 이거여.

(송담스님, 알기쉬운 불교이야기 2012-06-26)

 

 

송담스님은 이뭐꼬 수행을 강조한다. ‘이뭐꼬 수행만 하면모든 번뇌가 없어 질 듯이 말한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앉으나 서나 이뭐꼬 하고, 번뇌가 일어나도 이뭐꼬 하면 번뇌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서로 자신의 수행방법이 최고라고

 

불교방송은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더구나 이른 아침에 방송을 듣는 불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매우 크다. 이처럼 많은 영향을 끼지는 방송에서 한 편에서는 사경공덕이 가장 수승하다고 말하고, 또 한편에서는 이뭐꼬밖에 없다고 말한다. 때로 자신들의 수행방법이 더 수승함을 말하면서 다른 수행방법에 대하여 비판하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자신의 수행방법이 더 수승함을 말하는 방송을 들을 때 불자들은 혼란스러워 한다.

 

문제는 번뇌이다. 일어나는 근심, 걱정, 후회, 성냄, 탐욕 등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을 어떻게 하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사경을 할 때 그 순간 만큼은 번뇌가 일어 나지 않을 수 있다. 실제 사경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사경을 하려면 준비물이 많다. 지필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책과 노트와 필기구, 책상등이 갖추어져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또 사경을 한다고 해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경 순간에도 수 없이 많은 번뇌가 일어 나기 때문이다. 사경이 좋은 수행방법이긴 하지만 최선이라 볼 수 없는 이유이다.

 

해도 해도 표가 나지 않는 아무 재미도 없는 공부

 

이뭐꼬 수행의 경우 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단지 방송으로 수 없이 들은 바에 따르면 단전 호흡을 하면서 숨을 내쉴 때 이뭐꼬한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 공부는 자기 스스로 자발적으로 원해가지고 남이 시켜서 강요해가지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속의 모든 공부는 얻은 바가 있고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고 남이 보아도 인증을 할 수 것인데, 이 공부는 암만 해도 이만큼 했다라는 얻은 바가 없고 내 보일 것도 없어.

 

해갈수록 알 수가 없고 얻은 바가 없고 다 의심 뿐인데, 무슨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얻을 것도 없고, 남에게 보일 것도 없는 그러한 공부를 자발적으로

 

오직 생사문제 자아를 깨닫는 일대사문제를 위해서 아무 재미도 없고 얻은 바도 없고 철저하게 발심해서 한생각 한생각을 철저하게 알뜰하게 다져 나가면 맛없는 가운데 맛이, 아무 재미없는 가운데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

.

 

이 공부는 처음 출가할 때부터 마지막 도를 이룰 때 까지 하는 일이 한결 같이 한생각을 돌이키고 또 한생각을 돌이켜서 계속 본참화두 본참 공안에 대분심과 대신심과 대의단으로 계속 그 초점을 흐리지 아니 하고 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대의단이 가슴속에도 꽉 차고 나의 주변에도 꽉 차고 이 우주 법계에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 이렇게 다구치고 잡도리를 해 나갈 때 모든 번뇌와 망상이 발 붙일 것이 없어..

 

(송담스님, 알기쉬운 불교이야기 2012-06-03)

 

 

선사의 법문에 따르면 이뭐꼬 수행은 아무 재미가 없다고 한다. 해도 표가 나지도 않는다고 한다.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것이 되는데, 그런 상태가 오히려 공부가 더 잘 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한계에 이르렀을 때 모든 번뇌와 망상이 사라지는 단계가 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간화선 수행방법을 생활인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라 본다. 해도 표도 나지 않고 번뇌망상만 일어나는 수행이라면 하근기의 수행자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대체적으로 간화선은 상근기의 수행자에게 적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재가자에게 적합한 수행방법은 어떤 것일까.

 

아무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재가자는 생활인이다. 돈을 벌지 않으면 살아 갈 수가 없다. 스님들 처럼 일하지 않고 공부만 하여도 누군가 공양을 해 주는 것과 다르다. 내가 남의 안전을 지켜 줄 수 있지만 아무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의 팔뚝의 힘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그 과정에 있어서 온갖 무시와 수모를 겪기도 한다.

 

사장으로부터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도 가족을 생각한다면 참아야 한다. 거래처로부터 부당한 요구를 받아도 감내해야 한다. 살아 남기 위하여 자기자신과 처절한 투쟁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과정 자체가 번뇌이다. 더구나 싫어하는 것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을 겪는다.

 

이런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사경수행, 108, 염불, 이뭐꼬를 말하지만 그 때 뿐이다. 더구나 그런 수행을 하는 과정 그 짧은 찰나에 번뇌는 비집고 들어 선다. 어느 수행이든지 번뇌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는 것이다.

 

게송 암송하기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알아차리는 수행이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말한다. 사경이나 염불, 이뭐꼬가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말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알아 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누군가 화를 내었을 때 단세포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줄 알면된다. 화내는 이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 줄 알면 화를 낼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런 알아차림도 수행의 깊이가 있어야 가능하다. 처음부터 잘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겸하면 가장 좋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상집중을 하는 사마타에 어떤 것이 좋을까.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사마타수행방법이 게송암송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수행이라고 이름 한다면 게송암송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게송암송이 좋은 것일까. 그것은 언제 어느 때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경처럼 지필묵이 준비 되어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뭐꼬 처럼 막연하게 -뭐꼬~” 하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겼을 때 집중할 수 있어서 그 순간만큼은 번뇌가 치고 들어 올 수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원문 그대로 암송하는 것이 더

 

실제로 게송암송을 하고 있다. 지난 6 5일 일본성지 순례에서 시작한 망갈라경(행복경, Sn2.4)이다. 모두 12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 망갈라경은 여행지에서 두개만 외웠을 뿐이다.

 

여행을 다녀 오고 난 뒤 매일 게송을 외우고 있다. 현재 8번째 게송까지 외었다. 하지만 그다지 속도가 나지 않는다. 이는 하루에 한 게송 외우기도 벅차다. 더구나 외우고 있는 게송은 생소한 빠알리 게송이다.

 

게송을 빠알리어로 외우는 것은 번역자마다 번역문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단어에 대하여 번역자에 따라 취향이 다르다 보니 어느 것을 선택할지 망설여 진다.

 

빠알리어 사띠(sati)에 대하여 어느 번역자는 마음챙김이라고 하고, 또 어느 번역자는 새김’, 또 어느 번역자는 알아차림등 매우 다양하다. 윈냐나(viññāa)의 경우 역시 어느 번역자는 의식이라 하고 또 어느 번역자는 알음알이라 한다. 

 

이렇게 번역이 모두 제각각이다 보니 어느 번역문을 표준으로 삼아야 할지 난감하다. 그렇다고 내방식대로 번역문을 만들어 외울 수도 없다. 이럴 경우 차라리 원문 그대로 암송하는 것이 더 낫다. 원문으로 암송하면 부처님 당시 부처님이 하신 말씀과 가깝기 때문에 더 마음에 다가온다.

 

빠알리-한글 사전

 

빠알리 경과 게송은 이미 몇 개 외었다. 라따나경(보배경, Sn2.1)과 까라니야 멧따경(자애경, Sn1.8)과 자야망갈라가타(길상승리게) 이렇게 3개이다.

 

이렇게 빠알리 게송을 외울 때 마다 느끼는 것은 외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뜻을 모르고 외우다 보니 잘 외워지지 않는다. 그런 경우 사전을 찾아 보면 효과적이다.

 

이번 망갈라경을 외우는데 있어서 잘 외워지지 않는 단어가 있다. 수백, 수천번 반복하면 외워지겠지만 유독 외어지지 않는 말이 6번 게송에 있는 냐따까난짜 ātakānañca)’ 이다.

 

냐따까난짜는 친지라는 뜻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번역어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하여 사전을 찾아 보았다. 빠알리 사전이다. 전재성 박사가 편찬한 빠알리-한글 사전 증보판에 따르면 ‘ñātakā는 여성명사(f)로서 친지관계로 번역되어 있다.

 

 

 

 

 

 

 

빠알리어를 배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문법에 대하여 모른다. 다만 궁금한 점이 있으면 사전을 찾아 본다. 그런 사전찾기도 영어사전과 알파벳 순서가 다르다. 빠알리어만의 독특한 어순이 있기 때문이다.

 

한글로 나온 사전도 있는데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사전을 떠 들어 보면 그나마 의미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무작정 외우는 것 보다 단어를 알고 외우면 훨씬 도움을 준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빠알리-한글 사전은 매우 유용하다.

 

하지만 반드시 평가가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어느 분은 빠알리-한글사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전은 PTS에서 출판한 Pali-English Dictionary가 제일 좋습니다. 한글로 나온 사전도 있는데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PTS사전은 인터넷에서도 찾아볼수 있어서 좋습니다. 초불까페의 <초기불전 연구원 소식> 게시판에 들어가시면 유용한 웹사이트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빠알리어에 대한 oo스님의 답변들

 

 

어느 불자의 질문에 스님은 한글로 나온 사전도 있는데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왜 권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한글로 나온 사전은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박사 것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권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 어떤 사정이 있음에 틀림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심자에게 있어서 빠알리-한글 사전은 매우 유용하다.

 

게송암송하기 이점 여섯가지

 

그렇다면 게송암송하기가 왜 좋은 것일까. 나름대로 장점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게송암송하기를 하면 잡념이 생기지 않는다.

이 말은 번뇌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말이다. 암송을 하다 보면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빠알리 단어를  수백, 수천번 되뇌이게 되는데 그 과정 자체가 번뇌가 치고 들어 올 수 없음을 말한다. 예를 들어 듣기 싫은 소리를 들었을 때라든가 싫어하는 것과 만나게 되었을 때 이미 외웠던 것을 떠 올리려 노력하는 사이에 더 이상 번뇌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둘째, 게송암송하기를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다고 하였다. 또 부처님은 와서 보라고 할 정도로 초대할 만한 것이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암송을 하면 신심과 환희심을 갖게 하는데, 그런 가르침을 매일 되새긴다는 것은 항상 부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게송암송하기를 하면 기억력이 좋아 질 수 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약해지고 잘 잊어 버리게 된다. 심지어 치매에 걸릴 가능성도 있다. 그럴 경우 머리를 자주 써 주어야 하는데, 다른 무엇 보다 게송암송하기 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듯 하다. 그렇다고 하여 신묘장구대다라니 암송하듯이 아무 뜻도 모르고 빠른 속도로 암송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뜻을 음미해 가며 천천히 암송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두뇌 회전도 빨라지고 성취감, 환희감도 느끼게 되어 일석삼조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다.

 

넷째, 게송암송하기는 언제 어느 때나 할 수 있다.

사경수행의 경우 지필묵과 공간을 필요로 한다. 절수행 역시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게송암송하기는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할 수 있고, 전철이나 버스를 타면서 할 수 있다. 심지어 운전을 하면서 암기한 게송을 되뇌일 수 있다.

 

다섯째, 게송암송하기를 하면 겸손해진다.

한번 외운 게송은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하여 자주 되새기게 된다. 출근길에 암송한다면 마치 탁발 하러 나가는 수행자처럼 자연스럽게 눈을 아래로 내리 뜨게 될 것이다. 그런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도 매우 고귀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일 것임에 틀림 없다. 어깨에 잔뜩 힘을 준다거나 목에 기부스를 한 것처럼 고개를 빳빳이 세우며 걸을 필요가 없고, 또 원숭이처럼 눈을 이리저리 굴리지도 않아도 될 것이다.

 

여섯째, 게송암송하기를 하면 바른 자세가 나온다.

게송을 암송할 때 이미 외운 게송과 새로 외운 게송을 함께 하게 된다. 그래야 앞과 뒤의 게송을 잊어 버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오늘 1번 게송을 외우고 내일 2번 게송을 외운다면, 2번 게송 외울 때 반드시 1번 게송부터 외우고 2번으로 넘어 가는 것이다. 만약 10번 게송을 외운다면 1번부터 9번 게송까지 외운 것을 확인하고 10번을 외는 식으로 한다. 그렇게 해야 1번부터 마지막 게송까지 모두 다 한꺼번에 외울 수 있다. 그래서 게송 외우기를 하면 자세가 자연스럽게 바로 잡히지 않을 수 없다. 한참 게송 외우기에 집중하다 보면 앉은 자세에서 허리가 똑 바로 펴져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게송암송만 하면~”

 

이와 같이 게송암송하기를 하면 여러가지 이점이 있다. 가장 큰 이점은 번뇌로부터 일시적으로 멀어진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기분나쁜 일이 발생하였을 때, 싫어 하는 것과 만나게 되었을 때 아무 게송이나 1번부터 기억을 떠 올리는 것이다. 그 순간 기분나빳던 일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이런 방법은 사경보다, 108배 보다, 이뭐꼬 보다 더 효율적이라 생각한다. 더구나 걸으면서 게송을 암송하면 눈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하게 되기 때문에 보기에도 좋다.

 

어떤 스님은 법화경 사경만 하면~”만사형통 되는 것처럼 말한다. 또 어떤 선사는 이뭐꼬~”만 하면 역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말한다. 모두 훌륭한 수행방법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게송암송만 하면~”이라고 말하고 싶다. 게송암송만 하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경이나 게송을 독송하는 것과 암송하는 것은 다르다. 암송하는 것은 작심하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단한 노력과 열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막상 외워 놓고 나면 이 세상 그 어떤 보배 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경이나 게송외우기이다.

 

 

2012-06-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