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2. 8. 12. 14:16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세계를 보는 두 가지 관점

 

우리가 겪는 고통은 삼천대천세계에 비하면 매우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몇 년전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동국대 J교수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인간이 겪고 있는 괴로움을 설명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선뜻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삼천대천세계에서 항하사에 불과한 한 존재의 고통일 뿐이라고 일축한 것이 못 마땅 했던 것이다.

 

세계를 보는 관점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나는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고, 또 하나는 나는 세계의 주체자이다라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를 받아 들인다. 특히 주류종교에서 그렇다. 대표적으로 유일신교를 들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초기불교적 입장이라 볼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자신을 세계의 일부로 받아 들이는데 익숙할까. 이에 대하여 미디어붓다에 기고한 김정빈님의 글(내가 구제 가능할까?)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공간의 관점에서, 지금 우리 눈앞에 세계, 또는 우주가 펼쳐져 있습니다(그리고 나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세계(나 자신을 포함)를 읽는 독도법(讀圖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반적으로 읽는 법이고, 두 번째는 실존을 걸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읽는 법입니다(이 두 번째 독도법으로부터 부처님의 철학이 시작됩니다).

 

일반적인 독도법은 무심결에 모든 사람들이 세계를 읽는 방식입니다. 그 방식으로 세계를 읽게 되면 “나는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일반적인 독도법에서 볼 때 이 세계가 나를 태어나게 하였고, 나는 이 세계의 일부입니다. 이 관점은 일견 지극히 타당해 보입니다. 내가 태어나보니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계가 있었습니다. , 나는 내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 의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이것은 곧 나는 이 세계에 대하여 후차적인 존재, 또는 종속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상은 공간적인 관점에서 본 나와 세계의 관계입니다만, 시간적인 관점에서도 비슷한 추론이 성립합니다. 내가 태어나보니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시간이 있었습니다. , 나는 시간에 대해서도 후차적인 존재, 종속적인 존재입니다.

 

이 관점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공간적으로는 우주 전체를 거쳐 우주를 만든 신을 상정하게 되고, 시간적으로는 태초에 이르러 역시 시간을 출발시킨 원동자(原動者), 또는 제일동인(第一動因)으로서의 신을 상정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상정된 신을 원동자로 하는 세계관이 우리 자신을 객체로 만들고, 피구제자로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같은 관점이 근현대인으로서의 자기 독립주의, 이성 중심주의와 배치됩니다.

 

(김정빈님, 내가 구제 가능할까?, 미디어붓다 2010-10-15)

 

지성의 상징 이어령의 기독교 귀의.docx

 

 

 

자신을 세계의 일부라고 보는 견해에 대하여 김정빈님은 공간적요인과 시간적 요인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관점이 무심결에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세계를 읽는 방식이라 한다. 그래서 세계가 나를 태어 나게 하였고 나는 이 세계의 일부이고, 후차적 존재이고, 종속적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이 외칠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계가 있었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일신교가 대표적인 예라 볼 수 있다. 존재의 근원 또는 궁극적 실재라 불리우는 모든 것들이 이에 해당 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종교다원주의자이자 기독교 신학자인 길희성교수는 다양한 이름(, Brahman, 太極, 하느님, 혹은 法身)으로 불리고 있지만 결국 동일한 실재 (진리라고 말하는 신앙조차 모두 불완전하다,  휴심정, 2012-05-04)”라고 표현 한 바 있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본다면 불교방송 불교강좌에서 동국대 교수가 한 말인 우리가 겪는 고통은 삼천대천세계에 비하면 매우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세상을 받아 들이는 관점에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생성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와 같은 관점을 부정하였다. 이 세상이 있게 한 제일의 원인으로 다양한 이름의 궁극적 실재 또는 존재의 근원을 상정한 것은 인과법을 무시한 것이고 연기법상으로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이 세상을 읽는 방식을 말씀 하셨는데 이는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잘 나타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세상의 생성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난다.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고,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며,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고,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며,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이 세상의 생성이다.

 

(로까경-Lokasutta- The World-세상 경, 상윳따니까야 S12.1.5.4, 전재성님역)

 

  로까경(세상 경-S12.1.5.4).docx

 

 

 

부처님은 세상의 생성에 대하여 조건발생에 따른 것이라 하였다. 눈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는데, 이는 세상이 일어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눈과 눈의 대상인 형상이 부딪치면 이를 인식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데 이를 거의 동시적으로 보고 삼사화합이라 한다. 즉 눈과 대상과 시각인식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삼사화합에 의하여 감각접촉이 일어난다. 이것이 세상의 시작의 시작이라 본다.

 

이후 전개되는 상황은 연기법의 정형구에 따른다. 그래서 경에서 이것이 이 세상의 생성이다 (lokassa samudayo, To this is called the arising of the world)”라고 표현하였다.

 

세상의 발생과 둑카()의 발생

 

부처님은 시각 뿐만 아니라,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이것이 이 세상의 생성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발생은 둑카(고통)의 발생과 같은 말이다. 세상의 발생과 둑카의 발생을 동일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세상의 소멸과 둑카의 소멸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정신과 사물을 조건으로 정신의식이 생겨난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난다.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고,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한다.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한다.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한다.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소멸이 이루어진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이 세상의 소멸이다."

 

(로까경-Lokasutta- The World-세상 경, 상윳따니까야 S12.1.5.4, 전재성님역)

 

 

이렇게 부처님은 세상의 생성과 소멸에 대하여 연기법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둑카(고통)의 생성과 소멸의 다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계가 있었다!”라는 관점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한국의 지성 이어령 교수는 왜 기독교에 귀의 하였나?

 

김정빈님은 미디아붓다 기고문에서 이어령교수의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이어령 교수는 늦은 나이에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이어령 교수는 왜 기독교에 귀의 하게 되었을까.

 

이어령 교수가 늦은 나이에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사실에 대하여 언론에서는 이교수의 가족사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미 블로그에서 나약한 지성 이어령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는데 언론에서 말하는 동기는 다음과 같다.

 

 

그에게는 딸 민아(장민아 변호사)가 있는데 그 딸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92년 갑상선암 판정을 받은 뒤부터입니다. 수술을 두 번 받았지만 암이 재발했고, 유치원에 들어간 작은 아들이 특수 자폐아동으로 판명이 나서 “지난 10년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울지 않고 잠든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갔을 때 자신의 망막이 파열되어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망막박리 판결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이어령 교수는 딸의 전화를 받고 급히 하와이로 가서 딸이 하와이 원주민들이 예배드리는 작은 교회를 가자고 하여 거절하지 않고, 아버지로서 딸을 위해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함께 교회에 갔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교회 바닥에 엎드려 무릎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무신론자 이어령 세례를 받다)

 

 

이것이 무신론자 이어령 교수가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동기라 한다.

 

이성의 펜대를 꺽고

 

그러나 미디어붓다에 기고한 김정빈님의 글을 보면 이와 다르다. 이 땅의  최고지성이자 무신론자인 이어령 교수의 기독교 귀의한 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설명 해 놓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르네상스적 기초 위에서 궁극 관심을 해결하고 싶어하지만 자신의 지성(이성)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자괴감을 느낍니다. 현대인은 나 자신이 주인인 상태를 저버리지 않는 것을 전제로 궁극 관심 문제를 풀려고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자괴감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지성을 꺾고 믿음을 받아들이며, 주체성을 포기하고 신을 받아들입니다. 이 점에서 현대인 또한 고대인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김정빈님, 내가 구제 가능할까?, 미디어붓다 2010-10-15)

 

 

일반적으로 지성인들은 무신론자에 가깝다. 이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성은 데카르트적인 사유에 가깝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문제를 풀어 보려 하지만 한계에 부딛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적 사유방식은 알아야 할 것도 너무 많고 해석해야 될 것도 너무 많기 때문에 이 세계를 해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통절하게 느낄 수 밖에 없고, 그 통절함이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적인 한계에 부딪치게 되면 손쉬운 해결책을 찾게 되는데, 이는 완전지또는 절대지를 가진 분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신 또는 창조주, 그 밖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 Brahman, 太極, 하느님, 혹은 法身)을 찾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존재의 근원 또는 궁극적 실재라 불리우는 존재는 절대지 그자체이지만, 그에 비하여 나의 지, 인간의 지는 불완전하고 상대적인 지로 본다. 절대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인간의 지성은 매우 무력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앎에 대한 목마름, 무지에 대한 무력감, 절망감 끝에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이성의 펜대를 꺽고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신께서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외치면서 신을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넘는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삶은 문제투성이다.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짜증이 나고, 상처 받기도 한다. 삶이 나를 지치게 하고 힘겹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능력은 10밖에 되지 않는데 100에 해당되는 문제가 나타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자신의 한계를 넘어 버리는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를 말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신에게 의지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신에 의지하다기 보다 차라리 떠 넘긴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이 세상을 있게 한 창조주가 책임 질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뜻대로라는 뉘앙스가 풍기는 신의론(神意論)’이 나왔을 것이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가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연론, 숙명론 등에 의지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가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육사외도는 단멸론으로 설명된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한계를 넘는 고통에 대하여 육체의 소멸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본다. 우연론, 숙명론 등도 허무주의적 단멸론에 포함 된다.

 

영속론과 단멸론이 성립할 수 없는 이유

 

하지만 부처님은 신의론이나 단멸론은 삶의 방식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신의론으로 대표되는 영속론과 유물론으로 대표되는 단멸론은 양극단으로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는 부처님의 연기송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의 해제에 따르면 약생차즉생피(若生此卽生彼)의 세계를 관찰하면 절대적 무(, natthita)는 성립하지 않고, 약무차즉무피(若無此卽無彼)의 세계를 관찰하면 절대적인 유(, atthita)의 세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는 상견과 단견을 논파한 것이다. 연기법으로 영속론과 단멸론이 거짓임을 밝힌 것이다. 

 

한역 연기송의 폐해

 

그런데 이와 같은 연기송이 종종 단멸론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역된 연기송의 애매모호함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한역 연기송 중에 약유차즉유피 약무차즉무피(若有此卽有彼 若無此卽無彼)’라 고 번역된 문구가 있다. 이를 단순하게 번역해 보면 만약 이것이 있으면 곧 저것이 있고, 만약 이것이 없으면 곧 저것이 없다가 된다. 이런 식의 한역은 “C, 그러므로 E” 또는 “E, 왜냐하면 E” 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조건발생적 연기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약유차즉유피 약생차즉생피 약무차즉무피 약멸차즉멸피(若有此卽有彼 若生此卽生彼 若無此卽無彼 若無此卽滅彼)라고 번역한 한역은 예외이다. 이는 빠알리문과 같이 조건성과 인과성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약유차즉유피 약무차즉무피(若有此卽有彼 若無此卽無彼)’에 대한 것이다.

 

연기법을 상의성(相依性)’이라 하는데

 

스마트폰으로 금오 김홍경 선생의 여민동락 강의를 들었다. 불교TV에서 제공하는 앱을 이용해서이다. 강의에서 김홍경 선생은 연기송을 낭송하였다. 그것은 앞서 인용한 약유차즉유피 약무차즉무피(若有此卽有彼 若無此卽無彼)’에 대한 것이다.

 

김홍경 선생이 해설 하기를 이것이 있으면 곧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곧 저것이 없다라고 매우 단순하게 설명하였다. 그런데 김홍경 선생은 이 연기송을 설명하면서 상의성(相依性)’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 상의성은 다름 아닌 서로 의지한다는 뜻이다.

 

이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단멸론자들의 주장과 동일 하였기 때문이다. 단멸론자들의 바이블이라 불리우는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2연기법 중 3번째 4번째에 위치한 식과 명색의 관계에서도 기존의 불교 교리에서는 ‘식’을 재생연결식, 혹은 전생의 업식이라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식’과 명색은 따로 떼래야 뗄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인 것이다. ‘식’이 없으면 명색은 존재할 수 없고 명색이 없으면 ‘식’은 성립시킬 수가 없다. 이렇게 사고하는 것을 상호의존적 발생의 원리, 즉 연기법이라고 한다,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 , 김종수감수, 훤일 지음, 민족사간 )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저자 훤일 스님은 상호의존적 발생의 원리가 연기법이라 주장하였다. 이는 조건 발생에 따른 연기와 전혀 다른 것이다. 만일 이런 해석이 먹혀 들어 간다면 부처님은 졸지에 단멸론자가 되어 버릴 것이다.

 

왜 그럴까. 단멸론자들은 약유차즉유피 약무차즉무피(若有此卽有彼 若無此卽無彼)’에 대하여 “육체가 있을 때 정신이 있으며, 육체가 소멸됨으로서 정신도 소멸된다”라고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가 소멸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의 근거로 활용 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연기송은 어떤 것일까

 

그렇다면 정확한 연기송은 어떤 것일까. 이는 빠알리 니까야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imasmi sati ida hoti.         이띠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Imassuppādā ida uppajjati.      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Imasmi asati ida na hoti.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약유차즉유피 (若有此卽有彼)

약생차즉생피 (若生此卽生彼)

약무차즉무피 (若無此卽無彼)

약멸차즉멸피 (若無此卽滅彼)

 

when this is present, this comes to be,

when this arises, this arises.

When this is not present, this does not come to be,

when this does not arise, this does not arise.

  

(다사발라경-Dasabalasutta- Ten Powers I, 열 가지 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1, 전재성님역)

 

다사발라경(열 가지 힘 1 경-S12.1.3.1).docx

 

 

 

이것이 부처님이 설한 연기송정형구이다. 부처님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라고 연기의 인과성과 조건성에 대하여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부처님은 이 연기송 다음에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 되는 연기의 순관과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로 시작되는 연기의 역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이처럼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말하자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며,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며,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다사발라경-Dasabalasutta- Ten Powers I, 열 가지 힘 1 경, 상윳따니까야 S12. 1.3.1, 전재성님역)

 

 

 

 

Bodhi tree

 

 

 

이와 같이 연기송다음에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말씀하셔서 연기법이 조건발생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연기법이다.

 

현재 내가 처한 상태를 보면

 

삶은 문제의 연속이라고 하였다. 그 중에 풀 수 있는 문제도 있고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 해 볼 수 없는 문제도 있다. 이럴 경우 신에 의지하거나 자포자기 하기 쉽다. 상견(常見) 이나 단견(斷見)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견해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연기적 삶을 살아 가는 것이다. 모든 현상을 인과와 조건발생의 결과로 보는 것이다. ,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을 인연과라 한다. 이는 현재 내가 처한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은 모두 과거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업에 따른다. 이것이 먼 원인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을 인(, hetu)이라 본다. 그렇다면 가까운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주변환경적 요인으로 본다. 먼 원인이 익을 만한 조건을 형성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을 연(, patticca)으로 본다. 이런 인과 연이 만나면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를 과(, phala)로 본다. 이처럼 인연과(因緣果, hetu-paticca-phala) 로 설명되는 것이 연기법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인과에 따른 조건발생으로 보는 것이다.

 

희론(papañca, 빠빤짜)이 되는 경우

 

이렇게 연기법적으로 관찰하면 고정된 자아나 영혼은 있을 수 없다. 법이  일어나서 사라지면서 조건을 남기고, 그 조건으로 다시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상속하는 연기적인 나만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연기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다면 다음과 같은 사고는 희론(papañca, 빠빤짜)’이 될 것이다.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죽음 이후는 어떻게 되는가?

 

 

이런 희론에 대하여 부처님은 매우 경계하였다. 초기경 도처에 이와 같은 희론은 번뇌만 증장시킬 뿐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희론에 탐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로 구성된 존재 즉, 오온에 대하여 ’,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초기경에서 설명된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따라서 희론에 대한 답은 있을 수 없다. 설령 존재의 근원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고 할지로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결국 펜대를 꺽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고 보는 신에게 귀의 할 것이다. 그런 예를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이어령 교수로 부터 볼 수 있다. 그래서 결국 결국 나약한 지성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부처님은 빠알리 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

 

(둑가따경-Duggatasutta- In Unpleasantness- 불행경, 상윳따니까야 S14.2.1,전재성님역)

 

  둑가따경(불행경-S14.2.1).docx 

 

 

 

2012-08-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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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가따경(불행경-S14.2.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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