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불교적 우주론과 신통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2. 8. 6. 16:09

 

불교적 우주론과 신통에 대하여

 

 

 

 

불교적 우주론에 대한 글을 하나 썼더니

 

종교와 철학은 양립할 수 없을까. 또 종교와 과학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일까. 최근 글을 하나 썼는데, 법우님들로부터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통에 대한 것이었다.

 

청정도론에 신통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런 신통을 설명하는 과정에 있어서 불교적 우주관을 보여 주는 장면이 있다. 부처님 만이 볼 수 있는 숙명통으로 우주의 성주괴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불교적 우주관에 대하여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는 청정도론 초월지에서 스펙터클하게 묘사 하고 있다. 그런 우주론은 요즘 말로 하면 유일신교의 천지창조과 종말론에 버금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에 대하여 법우님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어느 법우님은 댓글에서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허무맹랑한희론에 지나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과연 그럴까.

 

상윳따니까에서 보는 초월적 존재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빠알리 니까야를 보면 초월적이고 신비스런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우리의 감각적 인지로는 허용이 안 되는 것 들이다. 상윳따니까야를 예로 든다면  아야짜나경(청원경, S6.1.1)에 범천 싸함빠띠가  팔을 굽히는 듯한 사이에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마치 순간이동을 보는 듯하다.

 

이런 장면에 대하여 받아 들이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각각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떠무니 없는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아무런 견해를 표명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들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신통스런 행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경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기경 도처에 범천 사함빠띠, 하늘사람 데와따, 하늘하들 데와뿟따등이 등장한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상윳따니까야 56개의 주제 가운데 등장할 정도이다. 예를 든다면 제1상윳따인 데와따상윳따(Devatā Sayutta), 제2상윳따인 데와뿟따상윳따(Devaputta Sayutta), 제6상윳따인 브라흐마상윳따(Brahma Sayutta)가 있다. 심지어 악마 마라를 대상으로 한 것도 있다. 그것은 제4상윳따인 마라상윳따(Māra Sayutta)이다. 이들 상윳따는 온, 처, 계, 근, 제, 연으로 표현 되는 상윳따와 함께 56개의 상윳따를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악마 마라까지 등장하는 상윳따니까야에서 마라가 들어 갔다고 해서 속아 내자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또 우리의 감각적 인지를 벗어난 천신이나 범천이 등장한다고 해서 이를 제외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상윳따니까야의 반 이상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천신이나 범천, 초월적 내용과 신통이 있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경이라고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부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일반적으로 초기경에서 악마 마라가 등장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부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마라는 늘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대편’의 입장에서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라가 등장하였다고 하여 경이 조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과 같다. 또 경을 읽어 보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나 방편없이 있는 그대로 설한 경도 있지만 비유나 방편을 들어 이해 하기 쉽게 설한 경도 많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승단에 속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승단에 속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일체의 비유나 방편 없이 설하였다면 무미건조할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의 근기는 다양해서 상근기도 있지만 탐진치에 절어 사는 중근기, 하근기도 있고, 심지어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다양한 방편을 써서 근기에 따라 설법한 것이 초기경전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방편과 대기설법은 부처님이 최초로 설하였다는 초전법륜경에서도 볼 수 있다.

 

초전법륜경에는 야마천, 도솔천 등 욕계천상의 신들을 포함하여 범천 까지 등장한다. 더구나 초전법륜경의 후반부에 가면 일만세계가 흔들리고 한량없는 찬란한 빛이 나타났다고 표현 되어 있다.

 

이렇게 초기경전을 보면 중생의 다양한 근기에 따라 비유와 방편을 써서 법을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비유와 방편이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맞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아야만 믿을 수 있는 시대에 하늘사람, 하늘아들, 범천, 천신 등이 등장한다면 믿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극단적인 견해를 드러낸자들이 아마도 단멸론자들일 것이다.  

 

지금 여기만 너무 강조하다 보면

 

단멸론자들은 모든 것을 육체에 기반하고 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외에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이렇게 철저하게 감각적 인지주의에 기반한 단멸론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현실에 기반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을 펼치셨지 내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다 보니 초기경에 쓰여있는 신통이나 초월적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 거짓이라 주장한다. 더구나 그런 용어가 들어가 있는 경은 모두 후대에 삽입되었거나 조작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과 같다. 초기경에서 신통이나 초월적인 내용이 등장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각 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배척한다면 빈데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것과도 같다.

 

그러다 보니 신통이나 초월적인 내용이 없는 경을 찾게 된다. 그런 경이 바로 사띠빳타나경(염처경) 또는 마하사띠빳타나경(대념처경) 등과 같이 수행을 강조하는 경들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림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 여기만 강조하다 보면 어떤 결과가 될까. 그것은 MBSR프로그램과 같이 될 것이다.

 

종교성을 배제한 MBSR프로그램

 

MBSR프로그램은 지난해 KBS특집 다큐 다르마에 소개 되었다. 그런 MBSR프로그램은 구미에서 정신과 의사들이 환자치료를 위하여 개발한 것이다. 초기불교의 사념처 명상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전혀 불교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종교성을 배제하고 수행방법만 가져가서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금 여기만 강조하다 보면 종교성이 배제되고 결국 불교가 배제가 된다. 따라서 불교의 윤리적, 도덕적기반이라고 볼 수 있는 내생이나 윤회가 철저하게 배제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멸론자들이 사념처를 기반으로 하여 지금 여기만 강조하는 것도 종교성이 배제된 MBSR프로그램과 다를 바 없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내생, 업에 의한 과보, 윤회, 삼세양중인과, 천신, 신통등과 같은 이야기는 한낱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단멸론자들은 철저하게 현실을 중시하다 보니 내생이나 윤회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 하게 된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잘 살면 그만인데 내생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욕심이고 영속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처럼 육체를 기반으로 한 단멸론자들은 오로지 지금 여기만 강조한 결과 육체가 멸하면 정신 또한 함께 멸하여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단멸론을 합리화 하기 위하여 연기법을 육체와 정신의 의존 관계라고 왜곡하기도 한다.

 

이렇게 지금 여기만 너무 강조하다 보면 단멸론으로 빠져 들 수 있다. 그 결과 초기경에 대해서도 필연적으로 감각적 인지주의와 과학적 실증주의 잣대를 들이대어 신통이나 초월적인 내용에 대하여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이런 단멸론적인 주장이 일부 불자들에게도 먹혀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초기경과 논서를 대하는 불자들의 마음은 어떠한 것이어야 할까.

 

처음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였을 때

 

불과 몇 년 전에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 논서부터 접하고 이어서 빠알리 니까야를 접하였는데, 아무런 의심이 없이 받아 들였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원음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설령 논서나 초기경에 신통이나 초월적인 내용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았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희론으로 보지 않았다. 천신, 범천, 초월, 신통 등과 같은 용어가 나온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 본 것이다.

 

이렇게 초기경이나 논서를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 들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틀림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고통에 대하여 말하였을 때 이는 우리 현실과 조금도 다름 없었고, 지금 여기서 겪고 있는 것이고, 또  확인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이다.

 

또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 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였을 때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있다면 설령 초기경이나 논서에서 신통이나 초월적인 내용이 있다고 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늘사람(Devatā)과 하늘아들(Devaputta)

 

왜 그럴까. 이는 신통이나 초월적인 내용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각시키기 위한 조연 정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예를 하나 든다면 다음과 같다.

 

 

그 하늘사람이 한쪽으로 물러서서 시로써 세존께 여쭈어 보았다.

 

[하늘사람]

"한적한 숲속에서 살면서 고요하고 청정한 수행자는 하루 한끼만 들면서도 어떻게 얼굴빛이 맑고 깨끗합니까?"

 

[세존]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으며

현재의 삶을 지켜 나가면 얼굴빛은 맑고 깨끗하리.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며 지나간 일을 슬퍼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시든다네 낫에 잘린 푸른 갈대처럼."

 

(아란냐경-Araññasutta - In the Forest- 숲속에서 경, 상윳따니까야 S1.1.10, 전재성님역)

 

  날라왁고(갈대의 품-S1.1).docx

 

 

 

상윳따니까야 데와따상윳따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현재에 마음을 두면 근심, 걱정할 것이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릴 것을 말하는 사띠빳타나경에서와 같은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을 펴는데 있어서 화자가 하늘사람(Devatā)’라는 사실이다. 부처님과의 대화 상대로서 하늘에 있는 존재를 파트너로 삼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 따르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는 하늘사람 (Devatā)이라고 했고, 이름이 알려 지면 하늘아들(Devaputta)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아들이라고 한 사실을 들어 초월적이라고 한다든가, 팔을 굽혔다고 펴는 순간에 나타났다는 표현에 대하여 신통이 들어 가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경의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에 따른 개인적인 견해라 볼 수 있다.

 

사견(diṭṭhi, 邪見) 과 정견(dassana,닷사나)

 

누구든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말할 수 있다. 자신의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이나 글로서 표현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런 이야기에  대하여 공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동의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누구나 말 할 수 있는 것을 견해라 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딧띠(diṭṭhi)’ 라 하고 한자어로 ()’ 또는 ()’이라 한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인 견해는 사견(邪見)’으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반하지 않았을 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표적으로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 우쩨따딧티), 무인론(無因論, ahetuka-diṭṭhi, 아헤뚜까딧티), 허무론(虛無論, natthika-diṭṭhi, 낫티까딧티)등을  들 수 있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에서 볼 수 있는 견해들이다.

 

이에 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면 정견(sammā-diṭṭhi, 삼마딧티) 이다.  이를 닷사나(dassana)라 한다.

 

따라서 불자라면 항상 정견을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견에 치우치지 않고 정견을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빠알리 니까야와 주석에 의존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라면 당연히 빠알리 니까야와 이를 해석한 논장에 따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들은 초기경이나 논장에 신통이나 초월적인 내용이 나오면 무조건 못 믿겠다고 나온다. 이는 자신의 감각적 인지를 넘어 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보고 듣고 느끼는 깜냥으로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통이나 초월적인 내용에 대하여 이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든가 후대에 조작 되었다든가 희론으로 치부 하는 것이다. 이는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견해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다면 마치 장님이 인도하는 길을 따르는 것과 같다.

 

이렇게 단멸론자들은 신통이나 초월, 내생, 윤회 등과 같이 자신의 감각적 인지를 벗아난 것, 과학적 인지를 벗어난 것에 대하여 모조리 인정하지 않은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불자들은 신통이나 초월적인 내용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인정하긴 하지만 논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부처님 말씀이 담겨 있는 경전에서 신통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용인 할 수 있지만  논사의 견해가 담겨져 있는 신통이나 초월적 내용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신통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과 부처님제자의 신통이야기

 

초기경에 신통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 많이 등장한다. 아야짜나경(청원경)에서 사함빠띠가 팔을 굽혔다 펴는 순간에 나타났다든가, 로히땃사경에서 로히땃사가 하늘을 날아 다녔다는 신통이야기,  우빨라반나경에서 수행녀 우빨라반나가 빠삐만에게 신통력의 기초를 닦아서 두렵지 않다는 이야기 등이 이에 해당된다. 또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의 하나인 목갈라나 존자의 신통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부처님과 십대제자들의 신통과 관련되 이야기가 초기경에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범중천]

"벗이여, 목갈라나여,

목갈라나와 깟싸빠, 깝삐나, 아누룻다와 같은 위대한 신통력과 이와 같이 위대한 능력을 지닌 다른 세존의 제자들도 있습니까?"

 

그러자 존자 마하 목갈라나는 범중천에게 게송으로 대답했다.

 

[목갈라나]

"세 가지 신통한 지혜와 신통한 힘을 갖추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데 숙달하고 모든 번뇌를 소멸한 거룩한 님들은 깨달은 님의 제가 가운데 다수이네."

 

(아빠라딧티경-Aparādiṭṭhisutta- 다른 견해경, 상윳따니까야 S6.1.5, 전재성님역)

 

아빠라딧티경(다른 견해경-S6.1.5).docx

 

 

브라흐마가 부처님의 제자들의 신통에 대하여 물어 보는 장면이다. 이에 대하여 신통제일이라고 알려져 있는 목갈라나존자는 부처님의 제자중에 신통을 부리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말한다.

 

구체적인 신통장면을 보면

 

그렇다면 초기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신통을 부리는 장면이 묘사 되어 있을까.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런데 그때 다른 어떤 범천에게 이와 같은 나쁜 견해가 생겼다.

 

'여기에 올 수 있는 수행자나 성직자는 없다.'

 

그때 세존께서 마음속으로 그 범천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그 사이에 제따바나에서 모습을 감추고 하늘나라에 모습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그 범천의 머리 위 공중에 결가부좌를 하고 불의 삼매에 들었다.

 

그때 존자 마하 목갈라나가 이와 같이 생각했다. '세존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마하 목갈라나는 사람의 눈을 초월하는 청정한 하늘 눈으로 세존께서 그 범천의 머리 위 공중에 결가부좌를 하고 불의 삼매에 들어 계신 것을 보았다. 보고 나서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사이에 제따바나에서 모습을 감추고 하늘나라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나서 존자 마하 목갈라나는 동쪽에서 그 범천의 머리 위 세존보다 낮은 공중에 결가부좌를 하고 불의 삼매에 들었다.

 

그때 존자 마하 깟싸빠가 이와 같이 생각했다. '세존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마하 깟싸빠는 사람의 눈을 초월하는 청정한 하늘 눈으로 세존께서 그 범천의 머리 위 공중에 결가부좌를 하고 불의 삼매에 들어 계신 것을 보았다. 보고 나서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사이에 제따바니에서 모습을 감추고 하늘나라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나서 존자 마하 깟싸빠는 남쪽에서 그 범천의 머리 위 세존보다 낮은 공중에 결가부좌를 하고 불의 삼매에 들었다.

 

그때 존자 마하 깝삐나가 이와 같이 생각했다. '세존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마하 깝삐나는 사람의 눈을 초월하는 청정한 하늘 눈으로 세존께서 그 범천의 머리 위 공중에 결가부좌를 하고 불의 삼매에 들어 계신 것을 보았다. 보고 나서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사이에 제따바니에서 모습을 감추고 하늘나라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나서 존자 마하 깝삐나는 서쪽에서 그 범천의 머리 위 세존보다 낮은 공중에 결가부좌를 하고 불의 삼매에 들었다.

 

그때 존자 마하 아누룻다가 이와 같이 생각했다.

 

'세존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마하 아누룻다는 사람의 눈을 초월하는 청정한 하늘 눈으로 세존께서 그 범천의 머리 위 공중에 결가부좌를 하고 불의 삼매에 들어 계신 것을 보았다. 보고 나서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사이에 제따바니에서 모습을 감추고 하늘나라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나서 존자 마하 아누룻다는 북쪽에서 그 범천의 머리 위 세존보다 낮은 공중에 결가부좌를 하고 불의 삼매에 들었다.

 

(아빠라딧티경-Aparādiṭṭhisutta- 다른 견해경, 상윳따니까야 S6.1.5,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부처님을 포함하여 마하목갈라나, 마하깟싸빠, 마하깝삐나, 아누룻다존자 이렇게 5인이 등장한다.

 

전도된 인식을 부수기 위해

 

이런 부처님과 제자들이 신통을 부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목갈라나]

"그대가 예전에 지녔던 견해를 그대는 아직도 갖고 있는가?

하늘나라를 관통하고 있는 찬란한 광휘를 보고 있는가?"

 

[범천]

 "벗이여, 예전에 가졌던 견해를 나는 지금 갖고 있지 않네.

하늘나라를 관통하고 있는 찬란한 광휘를 나는 보고 있네.

 

오늘 이런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나 나는 항상하고 영원하다고."

 

(아빠라딧티경-Aparādiṭṭhisutta- 다른 견해경, 상윳따니까야 S6.1.5, 전재성님역)

 

 

부처님을 비롯하여 신통제일 마하목갈라나 존자 등 부처님의 제자들이 신통을 보여 준 것은 범천 브라흐마를 교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범천 브라흐마는 자신이 불멸의 존재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범천 브라흐마나는 자신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로 알고 있었고, 자신이 창조한 세상은 영원하다는 전도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을 부수기 위하여 부처님과 제자들은 신통을 이용하였다. 경에서는 세 가지 신통한 지혜와 힘사람의 마음을 아는 숙달등에 언급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경에서 언급한 세가지 신통한 지혜 삼명이라 한다. 이는 주석에 따르면 육신통 가운데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에 대응하여 각 숙명명(宿命明), 천안명(天眼明), 누진명(漏盡明)이라고 한다.

 

이처럼 경에서 신통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은 신통 그 자체를 이야기 하고자 함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범천 브라흐마의 전도된 인식을 깨우쳐 주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7조도품 (三十七助道品)에도 신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에서 신통이야기만 나오면 경이 잘못된 것으로 알고 있다면, 이는 신통 그 자체에만 집착하여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식의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경이나 논서에 신통이 등장하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일까. 신통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안되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방편없이 법을 설한 것이고, 또 하나는 방편으로 법을 설한 것이다. 전자는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의 법을 말한다. 후자의 경우 다양한 근기의 존재들이 알아 듣기 쉽게 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서 설명한 법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단멸론자들을 비롯하여 일부 불자들은 전자의 법만 믿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내생이나 윤회, 신통 등 자신의 감각적 인지의 범위를 넘어서 있는 것에 대하여 받아 들이기를 거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편없이 설한 법만이 진실이고 조금이라도 감각적 인지의 범위를 넘어선 것은 모두 법이 아니라고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신통이 있다. 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통을 부정한다면 이는 개인적인 견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신통은 놀랍게도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해지고 있는 37조도품 (三十七助道品)에서 볼 수 있다. 그런 37조도품은 어떤 것일까.

 

37조도품 (三十七助道品)이란 무엇인가?

 

37조도품은 일곱가지 깨달음의 범주를 한데 묶은 것으로 보리분이라 한다. 빠알리어로 보디빡키야(bodhi-pakkhiya)이다. 이런 37조도품은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필수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출세간의 도인 네가지 도의 지혜인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이바지 하기 때문이다.

 

그런 37조도품에는 사념처, 팔정도 등과 함께 신통에 대한 것도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단멸론자들이나 신통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보이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임에 틀림없다.

 

37조도품에서 신통에 대한 것은  네 가지 신통력의 기초(사신족)’이라는 이름으로 들어가 있다. 그런 37조도품은 다음과 같이 모두 일곱가지 보리분으로 되어 있다.

 

 

1. 네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cattāro satipaṭṭhānā),

2. 네가지 바른 노력(四正勤cattāro sammappadānā),

3. 네가지 신통력의 기초(四神足cattāro iddhipādā),

4. 다섯가지 정신적 능력(五根pañc'indiyāni),

5. 다섯가지 힘(五力pañca balāni),

6. 일곱가지의 깨달음 고리(七覺支satta bojjhagā),

7.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八聖道ariya aṭṭhagika magga)

 

 

이중 세 번째의 것이 신통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성전협회에서는 사신족이라 번역하였고, 초불에서는 사여의족이라고 이름 붙였다. 모두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사신족에는 어떤 요소들이 있을까. 이는 다음과 같다.

 

 

네가지 신통력의 기초(四神足cattāro iddhipādā)

-의욕의 신통력의 기초(欲神足chanda-iddhipāda)

-노력의 신통력의 기초(勤神足viriya-iddhipāda)

-마음의 신통력의 기초(心神足citta-iddhipāda)

-관찰의 신통력의 기초(觀神足vīmasā-iddhipāda)

 

 

 네가지 신통력의 기초라 불리우는  사신족에는 의욕, 노력, 마음, 관찰이라는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요소를 빠알리어로 쩨따시까라 하는데, 전재성박사는 이를 정신적 요소라고 번역하였다.

 

이와 같이 일곱가지 보리분법과 그에 해당되는 열네가지 정신적 요소(cetasika)를 이용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37조도품과 사신족(네 가지 신통력의 기초)과의 관계

정신적요소

 

 

1

정진

4

1

1

1

1

1

9

2

새김

4

1

1

1

1

8

3

지혜

1

1

1

1

1

5

4

집중

1

1

1

1

4

5

믿음

1

1

2

6

사유

1

1

7

안온

1

1

8

경이

1

1

9

평정

1

1

10

의욕

1

1

11

마음

1

1

12

정어

1

1

13

정행

1

1

14

정명

1

1

합계

4

4

4

5

5

7

8

37

 

 

 

이것이 37조도품에 대한 표이다. 모두 37가지의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요소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 정진(viriya)’이다. 37개 중에 9개로서 가장 많다. 그 다음이 새김(sati)’로서 8, 다음이 지혜 (pañña)’로서 5개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 정진, 새김(알아차림), 지혜가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진과 새김(알아차림)이 가장 강조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통에 대한 주석을 보면

 

이와 같이 신통은 깨달을 이루기 위한 보리분법에 당당하게 포함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는 이에 대한 매우 상세한 설명을 해 놓았다. 두 개의 장에 걸쳐 무려 100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청정도론 12장은 신통변화에 대한 것으로 열가지 신통변화에 대한 주석이고, 13장은 이른바 육신통이라 불리우는 초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런 주석을 한 이유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내용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런 설명중에 세계가 파멸하는 원인에 대한 것이 있다. 이른바 불교의 우주론이라 볼 수 있다. 이에 관하여 글을 쓴 것이 정거천이 가장 수승한 상인가이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청정도론의 우주론에 대하여 마치 ‘SF환타지 소설을 보는 것 같다고 하였다. 또 논사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든 이야기들로서 터무니 없는 희론이라고 하였다. 그런 견해는 당연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주석서에 쓰여진 이야기는 논사들의 개인적인 견해에 따른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 초기경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주석서에 쓰여 있는 것은 철저하게 초기경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설령 초기경에 없는 것을 설명한 글일지라도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상, , 무아, 연기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치성할 때

 

주석서에서 신통이나 초월지 그 자체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비판 받아 마땅할 것이다. 또 그런 주석이 오늘날까지 전달되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정도론에서 볼 수 있는 신통에 대한 주석을 보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드러내기 하여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무슨 이유로 이와 같이 세계가 파괴되는가?

세 가지 해로운 뿌리 때문이다.

해로운 뿌리들이 치성할 때 이와 같이 세계는 파괴된다.

 

탐욕이 치성할 때 그것은 불로 인해 파괴된다.

 

성냄이 치성할 때 물로 인해 파괴된다.

어떤 자들은 성냄이 치성할 때 불로 인해 파괴되고,

탐욕이 치성할 때 물로 인해 파괴된다고도 주장한다.

 

어리석음이 치성할 때 바람으로 인해 파괴된다.

 

(청정도론, 13장 초월지 64 )

 

 

 

청정도론에서 붓다고사는 세계가 주기적으로 파괴 되는 이유에 대하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치성하게 될 때라 하였다. 그런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따르면 새롭게 세계관이 정립된다. 그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돌아가는 세계를 말한다. 이는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세계관과 다른 것이다. 유일신교의 경우 창조주가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믿는다. 그 속에 내가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도 마찬가지이었다. 세상의 근원이라는 브라만이 있고, 이와 합일 할 수 있는 개아 즉, 아뜨만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선불교도 마찬가지라 본다. 우리 모두에게 내재 되어 있는 불성이 있어서 그런 성품을 보면 부처를 이루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떠나서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모든 것이 연기로 작용되는 세상에서 이 세상의 주체는 내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히땃사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그러나 벗이여,

나는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도 괴로움의 끝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벗이여,

나는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가르친다.

 

걸어서는 결코 세계의 끝에 이르지 못하지만

세계의 소멸에 이르면 괴로움에서 벗어남이 있네.

 

참으로 세계를 아는 슬기로운 이는 세계의 끝에 이르고 깨끗한 삶을 성취하여

고요함에 이르러 세계의 끝을 잘 알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네."

 

(로히땃사경-Rohitassasutta-Rohita the Son of the Gods, 상윳따니까야 S2.3.6, 전재성님역)

 

  로히땃사경(S2.3.6).docx

 

 

 

Barred Spiral Galaxy NGC 6217

 

 

 

부처님은 육척단신의 몸안에 세상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름아닌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매우 혁명적인 발상이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의 브라만-아뜨만 사상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한 몸안에 우주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정도론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치성하였을 때 불에 의하여 우주가 파괴된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탐욕이 치성하였을 때 불에 의하여 색계 초선천까지 파괴되고, 성냄이 치성하였을 때 물에 의하여 색계 2선천까지 파괴되고, 어리석음이 치성하였을 때 바람에 의하여 색계 3선천까지 파괴 된다는 것은 모두 이 한몸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비유적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패가망신하는 사례를 보면

 

실제로 탐욕을 부렸을 때 모든 것을 잃어 버리는 것은 허다한 일이다. 주식을 하여 전재산을 날려 버리고 이혼까지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는 탐욕이 극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탐욕이 치성하였을 때 겁화(刧火)’가 일어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 또한 이 한몸안에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에서 벌어진 일이다.

 

성냄은 어떨까. 성을 내면 자기자신도 괴롭지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이제까지 쌓은 공덕이 모두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친구와 사귀다 화를 내었을 때 다시는 만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수년간 잘 유지해 오던 거래처가 있는데 사소한 잘못으로 인하여 화를 내었다면 다시는 주문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화를 내면 이제까지 쌓은 공덕이 한 순간에 와르르무너진다. 그래서 성냄이 치성하면 물에 의하여 색계 2선천까지 파괴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치 마음에 쓰나미가 일어나는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어리석음의 바람이다. 청정도론에 어리석음이 치성할 때 바람에 의하여 색계3선천까지  파괴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 어리석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리석음은 일반적으로 무명으로 비유된다. 지혜가 없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삿된견해를 말한다. 그런 사견은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 D1)에 실려 있는 62가지 사견이 잘 말해준다. 이런 삿된견해가 치성하면 어리석음의 바람에 의하여 색계3선천까지 남김없이 파괴되듯이 이 몸안의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파괴 하는 것과 같다거 본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불과 물과 바람에 의한 세상의 파괴는 우리 몸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한 비유적 설명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일생을 살아가면서 탐욕의 불길로 패가 망신한 경우도 있고, 성질 한번 잘못 부려 살인을 하였을 경우 모든 것이 떠나가는 경우도 있고, 삿된 견해에 치우쳤을 때 엉뚱한 것에 목숨을 걸 수 때문에 일생을  허비할 수 있다.

 

그러려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정도론에 설명되어 있는 불교적 우주론에 대하여 단지 ‘SF환타지 소설 같다거나 논사의 희론으로 보는 것은 대의(大意)를 파악하지 못한 단견이라 본다.

  

빠알리 니까야와 주석서를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성제와 연기법 등 부처님이 설한 근본 가르침을 벗어나지 않는다. 경이나 주석서에 신통이나 초월적인 이야기, 천신, 마라와 같은 내용이 나와도 이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상, , 무아, 연기 등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통 그 자체만 문제삼는다면 이는 한면만 보고 다른 면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 현상을 단멸론자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데, 이처럼 한쪽면만을 보게 되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방법에 이르는 길을 설하였을 때 이를 현재 당면한 나의 현실과 맞다고 느꼈을 때 비로서 의심없이 받아 들이게 된다. 이렇게 믿게 되면 설령 초기경이나 주석서에 초월적인 내용이나 신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의심없이 받아 들이게 된다. 이는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편일 뿐 초월이나 신통 그 자체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설령 의심이 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감각적 인지 능력이 미치지 못할 때는  판단을 유보 하거나 그저 그러려니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매사를 의심하게 되면

 

그래서 부처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도 잘 나타난다.

 

 

Sahāvassa dassanasampadāya              사하-왓사 닷사나삼빠다-
Tayassu dhamm
ā jahitā bhavanti,         따얏수 담마- 자히따- 바완띠
Sakk
āyadiṭṭhi vicikicchitañca            삭까-야딧티 위찌낏치딴짜
S
īlabbata vāpi yadatthi kiñci,        -랍바땅 와-삐 야닷티 낀찌
Cat
ūhapāyehi ca vippamutto              짜뚜-하빠-예히 짜 윕빠뭇또
Cha c
ābhihānāni abhabbo kātu         차 짜-비타--니 아밥보 까-
Idampi sa
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존재의 무리에 실체라는 견해

매사의 의심,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라따나경-Ratanasutta-The three Jewels-보배경-寶石經 10번째 게송,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나가 있다는 견해(유신견), 매사에 대한 의심(회의적 의심), 그리고 잘못된 수행방법(계금취견)에 대한 것을 버리라고 하셨다. 그런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장애 요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매사에 대한 의심은 법에 대한 의심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연기법을 말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초기경이나 주석서에 실려 있는 모든 내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을 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말과 같다.

 

 

 

 

2012-08-06

진흙속의연꽃

 

로히땃사경(S2.3.6).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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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라딧티경(다른 견해경-S6.1.5).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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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왁고(갈대의 품-S1.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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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라딧티경(다른 견해경-S6.1.5).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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