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노출의 계절에 중노릇 하기 힘들다고? 어느 스님의 글을 읽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2. 8. 4. 21:52

 

 

노출의 계절에 중노릇 하기 힘들다고? 어느 스님의 글을 읽고

 

 

 

 

중노릇 하기 힘들다는데

 

불교포커스에 다음과 같은 칼럼이 실렸다.

 

 

바야흐로 노출의 계절이다. 도시에 나가면 여기저기서 화장을 멋지게 하고 속살이 훤히 드러나는 옷과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산속에 사는 수행자가 어쩌다가 도시에 나갈 일이 있어 이런 여성들과 마주치는 것은 민망하고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런면에서 보면 도시 포교당에 사는 스님들은 산속에 사는 스님들보다 더 근기가 수승한 분들인지도 모르겠다.

 

(조신, 중노릇 힘들다, 불교포커스 2012-07-30)

 

  중노릇 힘들다.docx

 

 

 

일본 오사카 도톤보리

 

 

 

조신이라는 익명으로 실린 칼럼이다. 글의 내용을 보니 스님이 작성한 글이다. 산속에 사는 수행자가 어쩌다 도시에 나왔을 때 마주치는 여성들을 쳐다 보기가 민망하다는 내용이다. 그 이유는 여성들의 과도한 노출때문이라 한다.

 

이러한 과도한 노출은 필연적으로 성적욕망을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이어지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적욕망은 탐진치 중에서 탐욕에 해당한다. 이 성욕이라는 감각적 욕망은 아나함과를 얻어야 없어지게 된다고 한다. 일반 범부는 물론이거니와 예류과를 얻은 성인이나 일래과를 얻은 성인도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조신, 중노릇 힘들다, 불교포커스 2012-07-30)

 

 

성욕은 아나함이 되어야 없어지는 것이라 말한다. 이는 중생을 윤회하게 하는 열가지 족쇄에 근거한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아나함이 되어야 성욕이 없어질까.

 

왜 아나함이 되어야 성욕이 없어질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하면 성자가 될 수 있는데, 가장 첫번째 단계가 수다원이다. 수다원은 유신견, 법에 대한 의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 끊어졌을 때 성취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도둑질이나 성폭행을 할정도로 탐진치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라 한다.  

 

이렇게 수다원이 되면 비록 성자의 흐름에 들었을 지라도 탐욕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정생활이 가능하다고 한다. 초기경에 따르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예류자가 된 재가자가 많다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다음으로 사다함이 되면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은 매우 옅어진다고 한다. 단지 매우 옅어졌을 뿐 탐욕 등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가정생활 역시 가능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탐욕과 성냄은 언제 완전히 뿌리가 뽑히게 될까.

 

담마딘나 비구니 이야기가 있다. 법구경 인연담에 나온다. 담마딘나 비구니의 전남편 위사카가 아나함이 되었을 때 더 이상 가정생활을 유지 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탐욕이 완전히 뿌리 뽑혔기 때문이다. 아나함이 되면 탐욕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므로 가정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경우 출가를 하여 궁극적으로 아라한 되는 공부를 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아나함(불환자)이 되어야 더 이상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경계를 부딪쳐도 흔들리지 않는 다고 한다. 그런데 글을 쓴 스님은 범부는 물론이거니와 예류과를 얻은 성인이나 일래과를 얻은 성인도 성욕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고 하였다. 일반 범부나 성인의 흐름에 들어간 자를 성적 욕망에 있어서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열반이 보장된 존재가 예류자인데

 

성인은 범부와 다르다. 왜 다를까.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 즉, 예류자(수다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최대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 갈 것이라고 초기경전 도처에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예류자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셨다.

 

 

 

Ye ariyasaccāni vibhāvayanti            예 아리야삿짜-니 위바-와얀띠
Gambh
īrapaññena sudesitāni              감비-라빤녜나 수데시따-
Kiñc
āpi te honti bhusappamattā          낀짜-삐 떼 혼띠 부삽빠맛따

Na te bhava aṭṭhama ādiyanti,        나 떼 바왕 앗타망 아-디얀띠
Idampi sa
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심오한 지혜를 지닌 님께서 잘 설하신,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They that develop the noble truths, preached with deep wisdom,

Even if they live negligently, would not have an eighth birth.

This is precious in the jewel of the Community, by this truth may there be mental happiness.

 

(라따나경-보배경 9번 게송, 숫따니빠따 Sn2.1, 전재성님역)

 

  라따나경(ratana sutta) 전문.docx

 

 

 

Imee Ooi창송

经与吉祥利偈慧音

 

 

 

경에서 부처님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이는 여덟번째 윤회를 받지 않는다(Na te bhava aṭṭhama ādiyanti, would not have an eighth birth)고 하였다. 이렇게 열반이 보장된 존재가 예류자인데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일곱생 이내에 윤회를 멈추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라는 말이다.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성자가 되어 윤회의 종식이 보장 되어 있다면 설령 잘못을 하였더라도 성폭행과 같은 행위는 절대로 일어 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예류자가 성적 충동으로 인하여 성폭행을 하였다면 악처에 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결코 예류자라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라는 말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라는 말에 대한 영문은 ‘Even if they live negligently’로 되어 있다. 영어 ‘negligently’는 태만하게, 부주의하게, 무관심하게, 소홀하게 라는 뜻이다. 그런 뜻으로 보아 악처에 나게 할 정도로 커다란 잘못이 아니리 작은 실수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전재성박사의 번역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미 성자의 흐름에 든 자에게 있어서 잘못이라는 것은 매우 사소하고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하지만 성자에게 있어서 그런 잘못도 커다랗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라고 해석 하였을 것이다.

 

예류자의 번뇌란?

 

그런데 이런 해석을 뒷 받침하는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티끌과 어느 쪽이 더 큰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이 큰 대지가 훨씬 크고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드신 티끌은 아주 작습니다.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든신 티끌을 큰 대지와 비교한다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는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나카시카경-Nakhasikhāsutta- on the Nail- 손톱 끝 경, S12.1.10.1)

 

  나카시카경(손톱 끝 경-S12.1.10.1).docx

 

 

 

나가시카경에 따르면 성자에 흐름에 든 자의 번뇌는 매우 미미한 것이라 한다. 부처님은 최대 일곱생 이내에 윤회가 종식 되는 예류자에게 남아 있는 번뇌에 대하여 손톱 끝에 있는 티끌로 비유하였다. 그래서 경의 이름도 손톱 끝 경이다.

 

이어서 부처님은 예류자에게 남아 있는 번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올바른 세계관을 갖추고 진리에 대한 올바른 현관에 도달한 거룩한 제자들에게는 이미 파괴되어 끝나 버린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 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환생한다 할지라도 아직 남아 있는 괴로움을 이미 파괴되어 끝나버린 괴로움과 비교하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는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카시카경-Nakhasikhāsutta- on the Nail- 손톱 끝 경, S12.1.10.1)

 

 

성자의 흐름에 들어선 수다원은 거의 대부분의 번뇌는 파괴 되었고 남아 있는 번뇌는 매우 미미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남아 있는 번뇌는 이미 파괴되어 버린 번뇌의 십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 한다. 손톱끝에 있는 때 보다 적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다원만 되어도 어지간한 번뇌는 다 제거 되거나 약화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수다원이 아무리 큰 잘못을 한다고 할지라도 여덟번째는 윤회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신이라는 필명의 스님은 범부나 수다원이나 사다함의 성적 욕망에 대하여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초기경전을 접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글을 썼기 때문이라 판단 된다.

 

여인을 보거든

 

이렇게 범부와 성자의 흐름에 든 이의 성적 욕망을 동일시하고 글을 쓴 스님은 성적 욕망이 일어 났을 때 대처 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디가 니까야에서 부처님과 아난다존자가 말씀하신 것을 예로 들고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어떻게 여인을 대처해야 합니까?"
"
아난다여, 쳐다보지 말라."

"세존이시여, 쳐다보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
아난다여, 말하지 말라."

"세존이시여,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
아난다여,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스님은 첫번째인  여인을 쳐다보지 말라  두번째인 여인과 말하지 말라는 정확한 처방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三界 導師이시며 四生 慈父이신 부처님도 여인을 대처하는 방법에는 뾰쪽한 수가 없나보다라고 토를 달았다. 그리고 세번째인 마음 챙김을 확립해야 한다라는 말에 방점을 찍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결국 현실을 감안한 최선의 방법은 세 번째 답변처럼 여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을 관찰하는 마음챙김의 확립뿐이다. 여인이 늙었거든 어머니 같이, 나이가 조금 많으면 누님같이 생각하고, 적으면 여동생 같이 생각하면서 대화를 하라고 부처님은 가르치신다.

 

(조신, 중노릇 힘들다, 불교포커스 2012-07-30)

 

 

여인을 보거든 나이가 많이 먹었거든 어머니같이, 조금 많으면 누님같이, 적으면 여동생 같이 보라는 이야기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출처는 밝히지 않고 있다. 대체 어느 경에 있을까.

 

어머니처럼, 자매처럼, 딸처럼

 

이와 같은 이야기를 법문이나 칼럼에서 종종 보았다. 대부분 출처를 밝히지 못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만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사십이장경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런 내용을 근거로 하여 글 (여인과 수행자, 감각적욕망은 언제 없어지나)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늘 경전적 근거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에 관한 경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상윳따니까야 이곳 저곳을 보다가 눈에 확 들어 온 것이 있었다. 그것은 위에 언급된 여인을 보았을 때 마음가짐에 대한 것이었다. 경전적 근거를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상윳따니까야에 어떻게 표현 되어 있을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라드와자]

대왕이여,

알고 또한 보는 거룩하고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머니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자매같은 여인에 대하여 자매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라드와자경-Bhāradvājasutta - Venerable Piṇḍola Bhāradvāja, 상윳따니까야 S34. 13. 4, 전재성님역)

 

  바라드와자경(S34. 13. 4).docx

 

 

 

상윳따니까야 바라드와자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경에서 부처님의 제자 바라드와자는 부처님의 말을 빌어 어머니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자매같은 여인에 대하여 자매를 대하는 마음을,  딸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고 대왕에게 말하고 있다. 앞서 스님이 말한 것과 약간 차이가 있다.

 

스님은 어머니, 누님, 여동생이라고 하였으나 부처님은 어머니, 자매, 딸이라고 말하고 있다. 딸이 다른 것이다.  , ‘딸 뻘 되는 여인을 보면 딸 같이 생각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과 스님의 말과 다른 것이다. 

 

가족처럼 생각해도 동요 되면

 

이처럼 여인을 보았을 때 어머니처럼, 자매처럼, 딸을 보는 것처럼 마음을 일으켜도 동요 되면 어떻게 할까. 이에 대하여 대왕이 묻자 바라드와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바라드와자]

대왕이여,

알고 또한 보는 거룩하고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오라.

그대들의 이 몸은 발바닥부터 머리 가운데 아래 피부 끝까지 여러 가지의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있는 것을 개별적으로 이와 같이 이 몸에는 머리카락, 몸털, 손발톱, 이빨, 피부, 근육, 신경, , 골수, 신장, 심장, , 늑막, 비장, , 대장, 소장, , , 뇌수, 담즙, 가래, 고름, , , 지방, 눈물, 임파액, , 점액, 관절액, 오줌이 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바라드와자경-Bhāradvājasutta - Venerable Piṇḍola Bhāradvāja, 상윳따니까야 S34. 13. 4, 전재성님역)

 

 

바라드와자는 부정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아름다운 우리 몸안에는 피, 고름, 오줌 등 온갖 더럽고 부정한 것 들로 가득차 있다고 관찰 하라는 것이다. 이런 부정상에 대한 이야기는 초기경 도처에 등장하는데 숫따니빠따 위자야경(승리의 경, Sn1.11)에서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부정상을 닦아도 욕망이 생기면

 

이렇게 부정상을 닦아도 여인에 대한 욕망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바라드와자]

대왕이여, 알고 또한 보는 거룩하고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오라. 그대들은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해야 한다.

 

형상을 보고 그 특징을 취하지 말고 그 속성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시각능력을 수호하지 못해서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우울과 죄악의 건강하지 못한 법들이 그를 공격한다면, 그는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해야 한다. 소리를 듣고 그 특징을 취하지 말고 그 속성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청각능력을 수호하지 못해서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우울과 죄악의 건강하지 못한 법들이 그를 공격한다면, 그는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청각능력을 보호하고 청각능력을 수호해야 한다.

 

냄새를 맡고 그 특징을 취하지 말고 그 속성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후각능력을 수호하지 못해서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우울과 죄악의 건강하지 못한 법들이 그를 공격한다면, 그는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후각능력을 보호하고 후각능력을 수호해야 한다.

 

맛을 보고 그 특징을 취하지 말고 그 속성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미각능력을 수호하지 못해서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우울과 죄악의 건강하지 못한 법들이 그를 공격한다면, 그는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미각능력을 보호하고 미각능력을 수호해야 한다.

 

감촉을 느끼고 그 특징을 취하지 말고 그 속성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촉각능력을 수호하지 못해서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우울과 죄악의 건강하지 못한 법들이 그를 공격한다면, 그는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촉각능력을 보호하고 촉각능력을 수호해야 한다.

 

사물을 인식하고 그 특징을 취하지 말고 그 속성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정신능력을 수호하지 못해서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우울과 죄악의 건강하지 못한 법들이 그를 공격한다면, 그는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신능력을 보호하고 정신능력을 수호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라고.

 

대왕이여,

젊은 수행승들이 아직 어리고 머리카락이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꽃다운 시절에 쾌락을 즐기지 못하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충만하고 깨끗한 청정한 삶을 살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다른 원인은 이것이고 다른 조건은 이것입니다.

 

(바라드와자경-Bhāradvājasutta - Venerable Piṇḍola Bhāradvāja, 상윳따니까야 S34. 13. 4,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마지막으로 감각의 문을 단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 코 등의 감각기관을 말한다. 그 중에 눈에 대한 것을 보면 형상을 보고 그 특징을 취하지 말고 그 속성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강조 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자다” “예쁘다 매력적이다 눈이 크다

 

 

 

사람이 눈으로 대상을 볼 때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냥 보여 지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그 특징을 취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이것은 전체상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남자라든가 여자라든가 하는 전체적인 표상을 말한다. 여자라면 예쁘다거나 아름답다” “매력적이다라는 개념이 달라 붙는 것을 말한다. 이런 특징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처님은 속성을 취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이것은 부분상을 취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 “코가 높다든가 눈이 크다든가 하는 부분적이고 세세한 것들을 말한다. 이렇게 여인에 대하여 전체상과 부분상을 취하면 번뇌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구체적이다. 여인을 보았을 때 단계적인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첫번째가 가족처럼 보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부정상을 닦으라는 것이고, 세번째는 감각의 문을 수호하라는 가르침이다.

 

왜 빠알리니까야를 보아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포커스에 칼럼을 쓴 조신이라는 필명의 스님은 오로지 여인을 볼 때 가족처럼 보고 마음챙김하는 것 한 가지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또 그 이전에 일반 범부와 성자의 흐름에 든 이의 성적 욕망이 같은 것으로 취급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제자에 대한 모욕이다. 성자의 흐름에 든 이는 늦어도 일곱생 이내에 열반이 보장 되어 있는데, 범부들과 똑 같이 예류과를 얻은 성인이나 일래과를 얻은 성인도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라고 단정한 것은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글을 보았을 때 왜 출가자니 재가자들이 부처님의 원음이 들어가 있는 빠알리 니까야를  보아야 하는지에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 같다.

 

 

2012-08-04

진흙속의연꽃

나카시카경(손톱 끝 경-S12.1.10.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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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노릇 힘들다.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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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드와자경(S34. 13. 4).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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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따나경(ratana sutta) 전문.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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