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경전에 써 있다고 해서” 깔라마(Kalama)경 다시 읽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2. 8. 14. 12:35

 

경전에 써 있다고 해서 깔라마(Kalama)경 다시 읽기

 

 

 

 

 

교조적 글쓰기라는데

 

보통불자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일상적인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그런데 글쓰기에 있어서 하나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철저하게 경전과 주석에 근거한 글쓰기이다. 그래서 경전이나 주석의 문구를 인용한 글쓰기 위주가 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때로 교조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경전이나 주석에 갇혀 글쓰기를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비아냥이라 볼 수 있다.

 

불자들이 의지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삼보(三寶)’이다.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과 성스런 상가(Sangha)를 말한다. 하지만 불자들이 현실적으로 직접 접할 수 있는 것은 가르침뿐이라 볼 수 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전에 모두 실려 있다.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원음이라 일컬어 지고 있는 빠알리경전이 그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담마)과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하셨다.

 

이렇게 부처님은 가르침과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하였는데, 아직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면 가르침(Dhamma)에 의지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열어 보게 되는데, 단지 경만 보아서는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을 설명해 놓은 주석을 보아야 한다. 마치 천년고찰의 안내판과도 같기 때문이다. 천년고찰에 대한 안내문을 읽고 나면 그 절에 대하여 속속들이 잘 알게 되듯이, 주석을 읽으면 경에 대한 이해를 매우 쉽게 해 준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주석이 없다면 매우 허전하게 여기고, 마치 앙꼬  없는 빵을 먹는 것처럼 느껴지지기도 한다. 그런 주석서 중에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이 있다.

 

회의론자들은

 

어떤 이는 말한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은 읽어 볼만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문구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석서를 읽어 보지도 않고 온갖 희론으로 가득차 있다고 결론을 내 버린다. 과연 그럴까.

 

아비담마나 청정도론에는 근거 없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모두 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밝혀 놓았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른 종교를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철저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그런 것중의 하나가 31가지 세상에 대한 것이다.

 

아미담마와 청정도론에 등장하는 31가지 세상은 모두 부처님이 말씀 하신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구성된 것이다.

 

(, sañña, 산냐)’이 없는 중생

 

31가지 세상 중에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 assañña-satta)이 있다. 색계 사선천에 속해 있고, 수명은 500대겁이고, 화생으로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는 문자 그대로 (, sañña, 산냐)’이 없는 중생이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라 생각하여 인식에 대한 탐욕을 혐오 하고, 이를 제거 하는 수행의 공덕으로 태어나는 자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주석서에 따르면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는 생명이 있는 육체(생명의 9원소)만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마음이 아예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죽은 듯이 산다고 한다. 마치 나무로 만든 조각상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는 인간과 달리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산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마치 죽은듯이 아무생각 없이 500대겁 동안 수명대로 살다가 공덕이 다하여 죽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때 깨어나는 것이다. 죽어서 다른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을 때 비로서 마음이 생겨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들은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회의론자들은 이런 이야기에 대하여 논사들이 만든 허구이자 희론이라 주장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무상유정천의 경전적 근거

 

부처님의 제자들은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여 주석한다고 하였다. 무상유정천에 대한 이야기 역시 경전을 근거로 한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 D1)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실려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우연발생론자들 인데 두 가지 경우자아와 세상은 우연히 발생한다고 천명한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하고 무엇에 의거해서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우연발생론자들이 되어 두 가지 경우로 자아와 세상은 우연히 발생한다고 천명하는가?”

 

 비구들이여,

  무상유정(無想有情)이라는 신들이 있다.

  그들은 인식이 생겨나면 그 무리로부터 죽게 된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중생들이 그 무리로부터 죽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태어나서는 집을 떠나 출가한다. 집을 떠나 줄가하여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마음이 삼매를 얻는다마음이 삼매에 들어 (재생연결)의 인식이 생겨난 것은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아와 세상은 우연히 발생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나는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첫 번째 경우이니, 이것을 근거로 하고 이것에 의거해서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우연발생론자가 되어 자아와 세상은 우연히 발생한다고 천명한다.”

 

(브라흐마잘라경, Brahmajāla Sutta-梵網經, 디가니까야 D1, 각묵스님역)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D1).docx

 

 

 

부처님은 우연론자가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연론자는 일종의 회의론이라 볼 수 있고 또 단멸론의 범주에 들어 간다.

 

논장에 대해 의심한다면

 

경에 따르면 무상유정천에서 수명이 다한 자가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나 새로운 세상에 태어 나게 되었을 때 자신의 바로 이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전 생에서 마음이 아예 일어나지 않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우연히 발생한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우연론이라는 삿된 견해를 가지게 된 이유에 대하여 무상유정천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경전적 근거에 의하여 부처님의 제자들은 주석을 달았고, 이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좀 더 체계화 하기 위하여 일종의 지도역할을 하는 참고서를 만들었는데, 바로 그것이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장이다. 특히 아비담마 논장은 율장, 경장과 함께 빠알리 삼장을 구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론자들이 논장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자신의 깜냥에 벗어난 것은 모두

 

회의론자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눈과 귀 등 감각기관으로 확인 되지 않는 한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깜냥에 벗어난 것은 모두 회의적으로 보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라 볼 수 있다.

 

 

1) 4색계선정(초선, 2, 3, 4)

2) 4무색계선정(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3) 상수멸정

4) 육신통(신종통, 타심통, 천안통, 천이통, 숙명통, 누진통)

5) 사쌍팔배의 성자(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

6) 열반

7) 천상, 지옥등 자신의 현상세계를 제외한 불교의 세계관

8) 윤회

 

 

8개의 사항중 1번부터 6번까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수행의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경지이고, 7번과 8번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연계된 불교의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덟가지 사항은 현대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렇게 수행의 경지에서나 가능하고 불교적 지혜의 눈으로나 확인 가능한 여덟가지 사항에 대하여 회의론자들은 자신들의 감각적 인지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 대면서 대체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7번과 8번의 육도 윤회에 대해서는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경전에 써 있다고 해서

 

그러다 보니 이들 여덟가지 사항이 들어가 있는 경에 대하여 회의적 입장을 보이고, 이를 주석한 주석서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아 볼 가치도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경의 문구를 인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 한다.

 

 

깔라마들이여,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

 

라는 생각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깔라마 경- Kālāma Sutta , 앙굿따라니까야-A3:65, 대림스님역)

 

  깔라마 경(A3-65).docx

 

 

 

깔라마경에서 부처님은 열가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회의론자들은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라는 문구를 들어 초기경전에 쓰여 있는 문구들이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없다는 회의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앞서 언급한 신통이나 육도윤회 같은 것들이 타겟으로 될 것이다.

 

이렇게 회의론자들의 특징은 거두절미하고 깔라마경의 한구절만을 토대로 초기경전이나 주석서의 내용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각자의 판단대로 결정할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경의 내용을 모두 파악하지 않은 단견에 불과하다. 그래서 주석이 필요한 것이다.

 

회의론자들의 견해는 단편적이고 단멸론적인 경향이 있다. 또 그들의 주장은 미확인 된 것이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한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 하다. 그래서 경을 올바로 해석한 주석서가 필요 한 것이다. 그런 예를 다음과 같은 글에서 볼 수 있다.

 

 

 

Tipitaka

 

 

 

 

불교와 합리주의 –‘깔라마 경다시 읽기

불교와 합리주의
-
『깔라마 경』다시 읽기 -

 

사나트 나나야까라 지음
이순주 옮김

 


How Free is Freedom of Thought

Sanath Nanayakkara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Bodhi Leaves No. 156)

 

 

*모든 주는 역주(譯註)

 


불교와 합리주의
-
『깔라마 경』다시 읽기 -


불교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증거에 기반한 합리적 가르침이라는 인식이 최근 널리 퍼져 있는데, 이는 지식층 불자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이런 관점을 구체화시키고자 많은 저술이 쏟아져 나왔으며, 이들 저술로 인해 그 견해가 더욱 강화되고 확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은 견해를 내세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증지부』의 「깔라마 경」1)을 끌어내어 반론의 여지가 없는 증거물로 삼고 있다. , 불교가 완벽한 과학적 기반 위에 성립한 합리주의적 가르침이며, 부처님이 당신의 모든 가르침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로서 합리주의적 접근 방식을 설파하셨다는 것이다.

 

「깔라마 경」을 이처럼 ‘자유로운 탐구를 위한 헌장’이나 되는 듯이 부각시킨 것은 서구의 학계라 해도 조금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서구 교육을 받은 당시 불교학자들은 이를 ‘새로운 발견’으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 강하게 지지하였다. 이로 인해 새삼 조명을 받게 된 것은, 부처님께서 맹신과 독단을 강력하게 비난하셨으며 그 대신 자유로운 질문과 탐색을 격려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들 학자들은 부처님이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신 점, 자유 의지를 수용하셨던 점, 인간이 처한 제반 곤경에 대하여 인간중심적으로 접근하셨다는 점,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셨다는 점, 당신이 가르치신 법에 대해서 뿐 아니라 당신이 주장한 깨달음에 대해서마저도 추종자들이 묻고 확인하도록 요청하셨다는 점 등을 적극 인용해 자신들의 견해를 한층 더 확고히 하였다.

 

한편 신중한 불교학자들은 사고의 자유와 질문의 자유에 대한 부처님의 태도에 대해서, 이런 자유가 어떤 변수 내에서 어디까지 실현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깔라마 경」을 열심히 검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과열된 불자들은 여전히 앞서 말한 ‘새로운 발견’에 도취되어 불교를 순전히 과학적 사실에만 근거를 둔 철저하게 합리적인 가르침으로 단정하고는, 「깔라마 경」을 그러한 의도에서 무분별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시도를 해나가던 중에 이들은 완강한 합리주의자들의 강력한 뒷받침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들 합리주의자 역시 부처님께서도 자유로운 질문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창하셨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깔라마 경」을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전적으로 합리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라는 견해를 강력히 견지하게 된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지나쳐 주저 없이 다음 두 가지 중대한 결론을 서둘러 내렸다.

첫째, 불교의 접근 방식은 참으로 합리적인데, 「깔라마 경」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당시 일반인들에게 통용되었던 열 가지 지혜의 방편, 어떤 가르침이나 견해가 진실하고 건전한지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던 방편을 「깔라마 경」에서는 완전히 거부할 것을 주창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결론은, 「깔라마 경」에서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만이, 종교적이거나 다른 일이거나 간에 모든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유일하고 타당한 방법이라고 주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결론은 불교의 교리와 실수행, 양쪽 모두와 중대한 연관이 있으므로 차제에 신중하게 검토 평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깔라마 경」을 편견 없이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 안에는 부처님께서 열 가지 지혜(진리)의 방편(판단 기준)‘거부하도록’ 권고하셨음을 보여주는 그 어떤 증거가 분명히 드러나 있지도 않고 암시되어 있지도 않다. 오히려 진실을 가려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부처님께서는 이들 열 가지 방편을 거의 모두 다 적절하게 활용하신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깔라마 경」에 많이 있으며, 이 점에 대해 여러 주석서들 또한 지지하고 있다.

 

열 가지 지혜의 방편(판단 기준)과 일반적 뜻은 다음과 같다.

 

1. 전통(Anussava) - 베다 성전의 전통에 의해
2.
전승(Parampar?) - 여러 세대에 걸쳐 스승들을 통해 전승되어 온 온전한 전통에 의해
3.
소문(Itikir?) - 들려오는 소문에 의해
4.
장경구족(藏經具足, Pi?akasampad?) - 공인된 문헌상의 전통이 그러하므로
5.
논리(Takkahetu) - 추측에 의해
6.
추론(Nayahetu) - 공인된 도리(공리)가 그러하므로
7.
논거의 연구(?k?raparivitakka) - 가르침에 들어 있는 논거의 타당성에 의해
8.
견심체인(見審諦忍, Di??hinijjh?nakkhanti) - 가르침과 개인적 견해들 간의 일치에 따라
9.
유능한 형상(Bhabbar?pat?) - 스승의 권능에 미루어보아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10.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Sama?o no gar?) - 스승의 인품과 평판에 대한 존경심에서

 

 

이 열 가지 기준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 2, 3, 4, 9, 10은 밖으로 권위에 의존하는 지혜의 방편(판단 기준)이고, 나머지 넷인 5, 6, 7, 8은 자신의 이성에 의한 지혜의 방편(판단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부처님께서는 몇몇 사문 스승들과는 달리 베다를 어리석은 허튼소리라 해서 전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으셨다. 그 대신 『장부』의 「떼윗자 경2)에서 보듯이 부처님께서는 다른 견지에서 베다를 비판하시며 그 한계와 단점을 지적하셨다. 그러고는 베다를 무오류의 절대 진리를 담은 것으로 생각하여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도록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셨다.

 

부처님께서는 베다뿐 아니라 ‘권위’의 범주에 속하는 다른 방편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로 대하셨다. 여러 세대에 걸쳐 스승들을 통해 끊이지 않고 전승되어 온 전통과 성전이든지, 아니면 그 밖의 전통이든지 가릴 것 없이 모든 전통을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거니와, 맹종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관점이었다.

 

예를 들어『장부』의 「대반열반경」에 언급되어 있는 ‘네 가지 권위의 원천’에 대한 가르침3)은 부처님께서 그러한 전통들을 중요하게 여기셨음을 잘 보여준다. 『장부』의 「빠야시 경」4)은 모든 종류의 전통에 대한 부처님의 전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부처님께서 꾸짖으신 것은 바로 전통을 맹종하는 태도이다. 그 경에는 심지어 소문(Itikir?)까지도 검증해 보면 쓸모가 있는 것일 수도 있으므로 무턱대고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논리와 이성의 사용을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을 입증할만한 증거는 경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중부』의 「산다까 경」5)에서 보듯이 논리와 이성은 둘 다 본래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아주 분명히 못 박으시고, 그렇기 때문에 논리와 이성이 때로는 끝없는 갈등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밝히셨다.

 

『숫따니빠따』의 「깔라하위와다 경」, 「쭐라위유하 경」, 「마하위유하 경」 등에서의 가르침6)은 소위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온갖 종류의 지혜에 대한 부처님의 태도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들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논리와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가치 없고 쓸데없는 짓이라 하여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으셨다는 점 또한 경전이 증명해 준다. 『중부』의 「우빨리 경」7), 「아빠나까 경」8), 「쭐라말룽꺄 경」9)을 보면 부처님께서 논리와 이성의 한계성, 그리고 이들을 분별없이 쓰는 사람들이 빠져들 수 있는 함정을 유념하시면서 어떻게 이들을 적절히 사용하고 계시는지 잘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네 가지 권위의 원천’을 검토해 보면 ‘스승의 권능, 스승의 인품과 평판’에 대해서도 중요한 위치를 부여하고 계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스승의 권위를 전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신 흔적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스승의 가르침과 지도를 포함한 외부로부터의 가르침을 ‘남의 발언(paratoghosa)’이라 하여 정견(正見)을 계발하는 데 긴요한 두 요소 중의 하나로 간주하셨다. 나머지 한 요소는 ‘적절한 주의(yoniso manasik?ro)’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깔라마 경」에서 부처님이 열 가지 지혜의 방편(판단 기준)을 거부하라고 주창하셨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주창하시는가. 부처님께서 어떤 특정한 종교적 가르침, 특히 윤리 도덕에 관한 가르침일 경우, 그 가르침의 질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 내지 표준이나 척도로서 열 가지 지혜의 방편 중 어느 것도 절대적인 것으로 의존하지 말도록 깔라마인들에게 충고하셨다는 것은 경의 내용상 분명하다.

 

어떤 가르침이, 신성하다고 소중히 여기는 성전에 들어있다거나, 훌륭하고 존경할만한 스승이 가르쳤다거나, 논리와 이성에 완전히 부합된다든가 하는 등의 단순한 사실만으로는, 그것이 참되고 건전하다고 받아들일 만한 충분하고 타당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각자가 자신의 이해와 경험을 통해 그 가르침을 직접 시험해보라는 새 기준을 제시하신다.

 

『중부』의 「바히띠까 경」10), 「암발라티까 라훌로와다 경」11)에서도 이러한 새 기준에 대해 가끔 언급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아주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쉽게 시험해 볼 수 있는 방법이다. 깔라마인들에게 앞서 언급한 열 가지 기준들 중 그 어느 것에도 전적으로 의지하지는 말라고 하시면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깔라마인들이여,

‘이것들은 무익하며, 이것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며, 이것들은 지혜로운 이들로부터 책망 받을 일이며, 이것들을 시행하고 수용하면 손해 보고 괴롭게 된다’는 것을 너희 스스로 알게 될 때, 실로 그때야말로 너희들은 마땅히 그것들을 버려야 하리라.

 

그리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부언하신다.

 

“너희가 ‘이것들은 이롭고 비난할 점이 없고, 지혜로운 이들이 칭찬할 일이고, 시행하고 수용했을 때 이익과 행복에 도움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때 그 일들을 수용하고 계속 준수해 나아가라.

 

, 그러면 이러한 부처님의 새 기준에서 볼 때 합리주의자들의 두 번째 결론, 즉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만이 모든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유일하고 타당한 방법이라는 주장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이는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새 기준을 어떤 범위까지 적용시켜도 되는가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범위를 넓게 잡을 경우, 이 새 기준의 적용 범위에 관해서 두 가지 관점이 성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소문자로 표기되는 담마(dhamma), 즉 세상 모든 것에 이러한 사고를 적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소문자 담마(dhamma)를 포함하여 대문자로 표기되는 담마(Dhamma), 즉 붓다의 가르침에까지도 이러한 사고를 적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깔라마 경」이 설해진 구체적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경에 보면 이런저런 여러 종교의 스승들이 마을을 방문하여 자기의 가르침만을 자랑하고 그 밖의 다른 가르침들은 모두 잘못이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깔라마인들이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했다.

 

 부처님께서 께사뿌따 마을을 방문하셨을 때 그곳에 살고 있던 깔라마인들이 부처님께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존자시여, 여러 사문, 바라문들이 께사뿌따에 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 이론은 장황하게 설명하고 자랑하면서 다른 이론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헐뜯고 멸시하고 저주만 합니다. 존자시여, 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들 중 누가 진리를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우리는 의심과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특정한 ‘의심과 혼란’을 덜어주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이렇듯 혁신적인 새 기준을 제시하시고 그런 가르침을 직접 몸으로 시험해 보게 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주신 해답으로 미루어 볼 때, 부처님께서는 문제의 핵심을 윤리적 맥락에서 파악하고 계신 것이 틀림없다.

 

깔라마인들에게 주신 부처님의 훈계는, 요컨대 그러한 가르침이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증대시키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탐욕?성냄?어리석음, 이 세 가지야말로 악의 뿌리요 원인이며, 이들을 피하는 것이 도덕적 삶을 사는 확실한 길이며, 이 길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열반으로 이끌어 준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스스로 깨달을 때(attan? va j?neyy?tha)’라는 훈계는 이런 맥락 속에서만 이해해야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Dhamma)과 관련된 것이나, 또는 그 밖의 모든 것에 「깔라마 경」의 가르침을 확대 적용하도록 정당화해 주는 어떤 빌미도 경에서 찾을 수 없다.

 

합리주의자들의 두 번째 가정은 분명히 억지이다. 세상에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그래도 그 알기 어려운 일들에 대해서 무어라고 견해를 표명하는 이들의 권능을 믿고 그들의 견해를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가 날마다 당면하게 되는 어려운 문제나 사건들을 하나하나 다 알고 이해하려고 애쓴다면, 우리는 일상적 삶의 자잘한 일조차 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식견이 높고, 여러 분야의 전문지식이 있는 이들의 충고와 도움을 구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합리주의자들의 첫 번째 결론, 즉 「깔라마 경」에서 열 가지 지혜의 방편(판단 기준)을 완전히 거부하도록 하였다는 것만을 바탕으로, 불교는 합리주의적인 가르침이라고 하는 주장 역시 의문의 여지가 너무나 많다.

 

부처님께서는 이 훈계를 일반적인 범부들에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이러한 범부들이 높은 전문적 지식이나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으셨던 것이 분명하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일상적 상황에 부딪쳤을 때 그 상황이 그들을 탐욕?성냄?어리석음으로 이끌 것인지 아닌지를 그들의 상식과 개인적 경험을 가지고 판단하라고 권고하신 것이었다.

 

궁극의 지혜는 수행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점진적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는 『중부』의 「끼따기리 경」12)에서 분명하게 설하셨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기본 원리들이 담겨 있으며, 이러한 원리들은 초심자나 공부가 미진한 사람들의 이해범위를 넘어선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해탈을 성취한 큰 제자 스님들까지도 부처님께 나아가 어떤 근본적 문제점들에 대한 설명을 구하는 장면이 경에도 꽤 자주 나온다. 그 장로스님들은 부처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와 같은 쟁점들에 관해 지혜가 밝아져 분명한 통찰력을 얻고 있다.

 

(), 윤회 등과 관련된 문제들은 출세간 지혜의 형태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이런 지혜는 일반인들의 능력으로서는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큰 지혜를 얻기 전까지는 이런 법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모든 사람이 자유 탐구라는 방법을 써서 붓다의 가르침(Dhamma)에 관한 일체의 지혜를 얻도록 「깔라마 경」이 백지위임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깔라마 경」뿐 아니라 다른 어떤 주석서에서도 이런 가정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 해서 이런 기본 쟁점들에 대해 우리가 탐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쟁점에 대해서 탐구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조급하게 진리에 도달했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되며, 그래서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거나 다른 모든 견해는 다 그릇된 것이라고 비방하면서 자기 것을 선양해서도 안 된다.

 

자의적인 탐구를 통해 진리에 도달할 경우 실제로 이런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그럴 때 그 사람의 결론은 ‘자신만의 견해’가 되어버리며, 그런 경우 자기 견해를 선전하고, 자기 견해를 방어하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르고자 한다. 이런 전개과정은 한편으로는 갈등을 가져오고 또 한편으로는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야기시킨다. 이러한 경우 양쪽 다 그 결과는 해롭다.

 

무조건적인 ‘믿음’이란 원시적인 것이며 덜 발달된 종교의 특징이라는 신념과, 서양에서는 새로운 가르침이었던 불교가 모든 형태의 믿음을 배척하고 있다는 신념, 이 두 가지가 많은 이들이 자유로운 탐구의 적용범위를 확대하고 싶어 하는 강한 이유이다. 이 또한 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삿다’(Saddh?, )를 확신, 믿음, 신앙 등 그 어떤 용어로 옮기든, 이 ‘삿다’가 불교 수행의 본질적인 특질이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삿다’는 맹목적 믿음(am?lik? saddh?) 같은 것이 아니고 합리적 토대위에 세워진 믿음(?k?ravati saddh?)을 말한다.

 

‘삿다’를 계발하기 위하여서는 절대적인 증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증거가 필요하다. 자유로운 탐구는 우선 ‘삿다’가 있고 난 다음 그 보다 훨씬 뒤에 오는 것이다.

 

『중부』의 「짱끼 경」13)에는 이 자유로운 탐구를 적용하는 적절한 절차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절차는 ‘삿다’에서 시작해서 ‘빤냐(지혜)’로 끝난다.14) 그 사이에는 진리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있고 이 과정들은 유익하고도 건전한 것이다.

 

불교가 수행에 있어서 근본적이고도 아주 중요한 요소로서 ‘삿다’의 유용함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불자들이 꺼려할 이유는 없다. ‘삿다’는 우리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좋은 출발점이 되어준다.

 

『중부』의 「알라갓두빠마 경」15)에서 불법을 잘못 이해하는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를 밝히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그 경에는 뱀의 몸뚱이나 꼬리를 잡는 사람이 뱀에 물리게 되는 것처럼, 불교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도 그와 같이 해를 입거나 고통을 당하게 되리라고 나와 있다.

 

자유로운 탐구는 불자들 사이에 거의 유행이 되었다. 그 결과 흥미를 끌 만하고 신기한 해석을 담은 책들이 쏟아져 나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억지소리를 하거나 전혀 엉뚱하게 전하는 것들도 많다.

 

일부 편견 없는 저술가들이 「깔라마 경」의 진정한 중요성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 : BPS 소식지 No. 9, 1988, 봄호)16) 지나치게 열성적인 포교자들에게 경고를 주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이러한 시도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무제한적 사고의 자유가 마치 불교의 등록상표인양 야단스레 떠들어 대면서, 잘못된 해석을 더 많이 쏟아내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보리수잎 45
불교와 합리주의
-
『깔라마 경』 다시 읽기

 2005 12 15일 초판 1쇄 발행

 

 

 

 

각주)-----------------

「깔라마 경」 (『증지부』Ⅲ 대품 65)


    
부처님께서 꼬살라 국, 께사뿌따 마을의 깔라마인들에게 해주신 법문이다.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께사뿌따 마을에 와서 자신들의 이론만 주장하고 다른 사람의 이론들은 비난하기 때문에 깔라마인들은 누구의 말을 진리로 믿어야 할지 몰라 심한 혼란에 빠져 있음을 호소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어떤 가르침의 질을 판단함에 있어 당시 통용되던 열 가지의 가치 판단기준에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실제 체험에 의해 스스로 판단하도록, 즉 그 가르침을 따르면 자신의 마음속에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일어나는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삼으라고 가르치신다.

 

거기서 더 나아가,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여읜 사람은 자(), (), (), ()로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살며, 바로 지금 여기의 삶에서 네 가지 편안한 마음을 누리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 내생이 있고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가 드러난다면 자신은 선을 행한 만큼 천상세계에 태어날 것이 틀림없다는 첫 번째 편안한 마음, 만일 내생과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가 없다 해도 자신은 지금 세상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두 번째 편안한 마음, 악행을 한 사람이 악한 과보를 받는다 해도 자신은 악행을 하지 않았으므로 괴로움이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세 번째 편안한 마음, 악행을 한 사람이 악한 과보를 받지 않는다 해도 자신이 청정해졌음을 아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우니 마음 쓸 것 없다는 네 번째 편안한 마음이 그것이다.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깔라마인들은 크게 환희심을 내며 부처님께 귀의했다.
    

 법륜?둘 『구도의 마음, 자유 - 칼라마 경』 참조.

 

「떼윗자(삼명) 경」 (『장부』 13)
    

여기서 삼명(tevijj?, 三明)은 불교의 숙명, 천안, 누진의 삼명이 아니라 세 가지 베다(리그, 아유르, 사마)에 대한 지식을 갖춘 바라문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꼬살라 국의 한 시골 읍 근처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두 젊은 바라문이 찾아와 여쭈었다. 자기네 마을에 수많은 바라문 스승들이 와서 제각기 진리를 설하며 그 길을 따라만 가면 브라흐마와의 합일이라는 바라문 최고의 목표에 도달한다고들 말하는데 마을의 골목길도 아니고 최고 경지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그렇게 여러 갈래일 수 있느냐며 자기들 역시 각자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다 보니 견해가 상충하여 부처님께 판정을 구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들 베다에 능통한 많은 스승들 중에 브라흐마를 직접 만나본 사람이 있다더냐. 없다면 그들의 스승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더냐. 그도 없다면 그들의 스승의 스승, 7()로 소급해 올라가면서 그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브라흐마를 목격한 사람이 있다더냐. 그 또한 아니라면 옛 성구(聖句)를 모아 베다서를 편집한 초기의 성자들 중에 ‘우리는 안다. 우리는 본다. 언제 어떻게 어디서 브라흐마가 출현했는지를.’ 하고 말한 사람이 있다더냐. 그 모두가 아니라면 그들이 선언하는 진리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냐. 그들은 앞 못 보는 장님들의 행렬이나 마찬가지로 맨 앞에 선 사람도 중간에 선 사람도 맨 뒤에 선 사람도 그 누구도 아무것도 본 것이 없는 것이나 뭐가 다른가.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유를 들어 세 베다의 권위만 맹종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말씀하시고, 브라흐마와 합일하려면 브라흐마처럼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없는 청정한 사람이 되는 길 밖에 없으니, 세속에 매여 오욕락에 물들지 말고 출가의 청정한 길을 걸으라며 구체적 공부 길을 적시해 주신다.

 

 

네 가지 권위의 원천(Mah?padese) :「대반열반경」(『장부』16)에 나오는 이야기
     

 비구나 불자들이 새로운 경이나 율을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내세울 때, 그것의 근거로 다음 네 가지 출처를 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 ①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② 모처에서, 장로와 뛰어난 스승들이 있는 승가(조실 스님 회상(會上))로부터 들었다. ③ 모처에서, 아함을 전승받아 법과 율과 논모(論母)를 수지하는 학식 높은 장로 비구들(대덕스님들)에게서 들었다. ④ 모처에서, 아함을 전승받아 법과 율과 논모를 수지하는 학식 높은, 한 장로 비구(대덕스님)에게서 들었다.

 

 따라서 ‘이것은 법이며, 이것은 율이며, 이것은 스승의 가르침이다’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경우, 함부로 거부하거나 수용하지 말고 확립된 경과 율에 비추어 면밀히 검토한 후 판단하라고 가르치신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께서 생애의 마지막 해에 라자가하로부터 암발라티까, 날란다, 웨살리 등을 지나 꾸시나가라까지 유행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수록한 경으로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이 되는 아주 중요한 말씀들을 많이 담고 있다.

 

예를 들어 꼬띠가마에서는 사성제를, 나디까에서는 진리의 거울을, 벨루바에서는 ‘자신을 섬(등불)으로 삼고, 법을 섬(등불)으로 삼을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않다. 방일하지 말고 힘써 정진하라’는 마지막 유훈을 남기신다.

 

「대반열반경」의 제4장에서는 반다가마에서 설하신 ‘, , , 해탈 이 네 가지를 이해하지도 붙잡지도 못해 우리는 그렇게 오래도록 윤회의 길을 걸어왔다’는 가르침을 주시고, 보가나가라에서는 ‘네 가지 권위의 원천(Mah?padese)’에 관해 설하신다.

 

「빠야시 경」 (『장부』23)
     

꼬살라 국의 빠야시 왕자는 ‘이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은 없다. 화생(化生:신이나 지옥 중생들처럼 모태를 빌리지 않고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몸을 바로 받는 탄생 과정 및 그 존재)은 없다. 선행과 악행의 열매나 과보라는 것도 없다.’라고 하는 삿된 견해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마을에 온 꾸마라 까사빠 비구가 여러 가지 비유로써 그 견해의 잘못됨을 일깨워 주고 버릴 것을 충고하지만 갖가지 이유를 들어 버티다 마침내 승복하게 되는데 그 마지막 비유를 줄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두 남자가 길을 가다가 버려진 삼[] 더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 삼은 실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므로 둘이 나누어서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다시 삼으로 만든 실 더미를 줍게 된다.

 

한 남자는 삼실을 주웠으므로 삼더미는 필요 없고 무거우니 버리고 삼실만 가지고 가자고 하지만, 다른 한 남자는 이미 여기까지 오랫동안 무겁게 삼더미를 지고 온데다 그 삼더미는 단단히 잘 묶여져 있으므로 버리지 않고 그냥 그걸 지고 가겠다고 한다.

 

다른 마을 앞을 지나 집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차례로 삼옷감, 좀 더 나은 아마, 아마실, 아마천, 목화더미, 목화 실, 면 옷감, , 구리, , 은 등을 발견하다가, 결국 금덩이를 발견하게 된다.

 

한 남자는 더 나은 가치의 물건을 발견할 때마다 낮은 가치의 것은 버리고 새로 주운 물건들을 지고 가다가 결국 금덩이를 지고 집에 돌아가게 되고, 다른 한 남자는 처음 주운 삼더미만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고 집에 돌아간다.

 

금덩어리를 지고 집에 돌아온 남자는 자신은 물론 가족들, 친지, 동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었지만, 삼더미만을 지고 온 남자는 자신은 물론 가족, 친지, 동료들에게 아무런 기쁨도 행복도 주지 못했다.
     

이처럼 자신이 부딪히는 경험을 향상의 계기로 살려내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은 언제나 향상의 기회가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모처럼 사람 몸을 받아 태어나서도 향상을 이루지 못한 채 기존 전통이나 관념, 편견 따위에 매인 채 헛된 삶을 살고 만다는 점을 절절이 가르치고 계시다.

 

 

「산다까 경」 (『중부』76)
    

부처님께서 꼬삼비의 고시따 승원에 계실 때, 아난다 존자가 떠돌이 수행자 산다까에게 설한 법문이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성스러운 삶[梵行]을 부정하는 외도들의 네 가지 견해를 통해서는 올바른 진리에 이를 수 없음을 비유를 들어 자세히 가르쳐준다. 또한 성스럽되 궁극적으로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네 가지 가르침에 대해서도 설한다.

 

이와 같은 외도들의 견해나 가르침을 통해서는 올바른 범행을 닦아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산다까는 아난다 존자에게 현명한 이가 나아가야 할 길을 묻게 되고 아난다 존자는 바른 공부길을 일러준다. 그러자 유행자 산다까는 기뻐하며 수많은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다.
     

 위의 네 가지 견해와 가르침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스러운 삶을 부정하는 외도들의 네 가지 견해 : ① 어리석은 자든 현명한 자든 죽은 후에는 모두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다[단멸론(허무주의)].  ②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고 아무리 좋은 일(계행, 보시, 수행)을 해도 공덕이 없다[인과의 부정].  ③ 정진, 노력은 필요 없고 운명과 팔자대로 고와 낙을 누릴 뿐이다[운명론].  ④ 일곱 가지 요소[地身, 水身, 火身, 風身, , , 靈魂]의 부동의 존재만 있을 뿐이고, 어떤 변화도 선악의 행위도 없다[유물론].
     

성스럽되 궁극적 평안으로 이끌어주지 못하는 네 가지 가르침 : 자신은 항상 지견이 현전해 있으며, 신상에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전해들은 바를 진리라고 알고 이를 설하는 경우, 그 전해들은 기억이 바를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으므로 완전할 수 없다추론과 심찰(審察)에 따라 가르치는 스승의 경우, 잘못 고찰할 수도, 잘못 추론할 수도 있으므로 완전할 수 없다④ 어떤 스승의 경우, 삶은 청정하지만 지혜가 없어서 자문을 받게 되면 모호하게 대답하거나 궤변을 일삼는다.

 

「깔라하위와다(언쟁과 논란에 관한) 경」 (『숫따니빠따』IV 11게송)
     

언쟁, 논란, 비탄, 자만, 중상 등은 대상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서 일어나고 존재와 비존재, 쾌락과 불쾌는 접촉에서 일어나고 접촉은 명색(名色)에서 일어나며 일체 희론적 개념은 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명색(名色)과 상()의 차원을 떠나 해탈의 경지에 들면 논쟁에 끼어들지 않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쭐라위유하(다툼에 관한 작은) 경」 (『숫따니빠따』IV 12게송)
    

서로 자기가 현명하고 상대방은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결국 각자의 주관적인 상()을 고집하기 때문이며 독단을 버리면 다툼은 없어진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마하위유하(다툼에 관한 큰) 경」 (『숫따니빠따』IV 13게송)
    

구하는 바가 있으면 욕망이 일어나고 도모하는 바가 있으면 두려움이 일어나며, 명색과 식()에 입각한 주장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다툼을 떠날 수 없지만 성자는 견해에 흐르지도, 지식에 묶이지도 않고 성찰을 통해 평정을 누리기 때문에 일체 다툼에서 초연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결국 이 경들은 모두 해탈분상에서 볼 때 식과 명색은 주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이성’이라는 것 역시 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주관적 범주를 탈피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빨리 경」 (『중부』56)
    

부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 나따뿌따는 신업(身業)이 가장 무겁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의업(意業)을 중시하는 불교와 대립한다.

 

그의 제자인 재가자 우빨리는 자신이 직접 부처님을 논파하겠다며 부처님께 찾아온다. 부처님께서 ‘몸에 열이 있는 사람이 찬물을 먹지 않고 따뜻한 물만 먹다 죽으면(자이나교에서는 찬물에 유정물이 살고 있으므로, 살생을 피하기 위해 찬물을 먹지 못하게 한다고 함), 어디에 태어난다고 자이나교에서는 가르치는가’라고 물으셨다.

 

이에 대해 우빨리는 ‘의()에 속박된 채 죽었으므로 ‘의중생천(意衆生天)’에 태어난다’고 대답하였다. 그 뒤로도 문답이 계속 이어지지만 우빨리는 이 첫 문답에서 이미 자기가 논쟁에서 패한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부처님의 지혜를 알아보기 위해 계속 버티다가 충분한 확신을 얻고 승복하여 부처님께 귀의한다.

 

「아빠나까(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경」 (『중부』60)
    

부처님께서 환대를 받으며 꼬살라 국 바라문 마을인 살라 마을에 도착하셨다. 부처님께서 바라문들에게 이치에 합당한 믿음을 가르쳐준 스승이 있었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이 그런 스승을 갖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런 스승을 못 만났으면 논란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법을 찾아 취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며 다음과 같은 순서로 각기 상반되는 두 입장을 부각시키신다.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허무론자와 그 반대론자, ② 결과를 부정하는 자(무결과론자)와 그 반대론자, ③ 원인을 부정하는 자(무원인론자)와 그 반대론자, ④ 무색계를 부정하는 자(무무색계론자)와 그 반대론자, ⑤ 멸()을 부정하는 자(무멸론자)와 그 반대론자.

 

이들 상반된 두 입장들 중 전자의 입장이 틀리고 후자의 입장이 맞는 것은, 사실에 의해 분명히 밝혀지는 바로서 더 이상 논란할 여지가 없으므로 맞는 쪽을 택함으로써 향상 해탈의 이익을 누리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을 설하신 후 이 세상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자, 남들을 괴롭히는 자, 자신과 남들을 괴롭히는 자 등의 어리석은 세 부류와 자신과 남 모두를 괴롭히지 않는 현명한 자들이 있으니, 마땅히 논란의 여지가 없는 법을 누리는 자는 이런 현명한 자가 될 것임을 가르치셨다.

 

「쭐라말룽꺄(말룽꺄 작은) 경」 (『중부』63)
    

세계는 영원한가 아닌가,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몸과 마음은 동일한 것인가 아닌가, 부처님의 사후세계는 있는가 없는가 등의 문제에 해답을 주시지 않으면 수행을 포기하겠다는 말룽꺄 비구의 다그침에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이런 의문을 풀어줄테니 수행을 하라고 권하신 적은 없노라 하신 후,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말룽꺄 비구의 태도가 잘못임을 일깨워 주셨다.
     

“말룽꺄뿟따여, 그것은 마치 독을 잔뜩 바른 화살에 맞은 사람이 있어 그 친구와 친척들이 의사를 데려오자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내가 누구에게서 상처를 입었고 내가 맞은 화살의 성질은 어떤 것인지 등 모든 것을 상세히 알기 전엔 이 화살을 뽑게 하지 않겠다.’ 그 사람은, 말룽꺄뿟따여, 그런 사실을 알아내기 전에 숨지고 말 것이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왜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다루지 않는지 설명해주셨다.

 

“나는 이 세상이 영원한 것인지 아닌지, 유한한 것인지 무한한 것인지 밝히려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논의들은 이익됨이 없고 성스러운 삶[梵行]의 기초와 관계가 없으며, 염리(厭離), 이욕(離欲), (, nirodha), 적지(寂止, upas?ma), 증지(證智, abhi???), 등각(等覺, sambodhi), 열반(涅槃, nibb?na)에 도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말룽꺄 비구는 부처님의 이러한 말씀에 만족하고 기뻐했다

 

「바히띠까(겉옷) 경」 (『중부』88)
     

꼬살라 국의 빠세나디 왕이 아찌라와띠 강가에서 아난다존자를 만나 왕이 묻고 아난다 존자가 이에 답하며 다음과 같은 문답을 나눈다.
   

“부처님께서는 신()?()?() 삼면에서 현자와 바라문들이 비난할 만한 행위를 할 수도 있는가?
   

“그렇지 않다.
   

“몸으로 하는 어떤 행위가 비난받게 되는가?
   

“불건전한 행위가 비난을 받는다.
   

“불건전한 행위란 무엇인가?
   

“결함이 있는 행위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결함이 있는 행위란 아픔을 주는 행위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아픔을 주는 행위는 고통의 과보를 맺는 행위이며, 이는 자신을 아프게 하고 남을 아프게 하고, 또는 나와 남 모두를 아프게 하여 그로 인해 불건전한 상태가 증대하고 건전한 상태가 줄어드는 것, 그것이 현자나 바라문들이 비난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불건전한 것을 끊고 버리도록만 가르치      시는가?
   

“부처님께서는 불건전한 법은 끊고 버리고, 건전한 법은 성      취하도록 가르치신다.
     

왕은 위와 같은 아난다 존자의 대답을 듣고 크게 기뻐하      , 어떤 보물이라도 아낌없이 보시하고 싶은데 비구에게는      보물이 닿지 않을 것이므로, 마가다 국왕이 선물로 보내온      겉옷(바히띠까)을 보시하겠다고 한다.

 

아난다 존자가 그것마      저도 거절하자, 이 옷으로 비구의 삼의(三衣)를 능히 만들 수      있으니 받아 주십사고 간청한다. 아난다 존자는 그것을 받      아서 부처님께 돌아가 바친다. 그러자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빠세나디 왕은 아난다를 만날 수 있었고 공경을 바칠 수 있      었으니 그 이득이 컸다고 말씀하신다.

 

「암발라티까 라훌로와다 경」 (『중부』61)
    

부처님께서 암발라티까에 머물고 있던 일곱 살 사미이자 당신의 아들인 라훌라에게, 특히 거짓말을 경계하시며 신중한 처신으로 거짓말하는 일이 없게 되도록 간절히 신칙(申飭)하신 법문이다.

 

코끼리가 전쟁터에서 코를 내두르며 싸우기에 이르면 이미 더 이상 못 할 일이 없듯이, 수행자가 거짓말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면 못할 악이 없게 된다는 것을 비유하여 고의로 거짓말을 하면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게 되는 일이 없도록 타이르셨다. , 코끼리에게 코가 생명이듯 사문에게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생명이라는 뜻이다.

 

??의 삼업을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거울로 비추어 보듯 ‘내가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장차 하고 싶어 하는 일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과거에 했던 일이 자신을 해치는 일은 아닌가, 남을 해치는 일은 아닌가, 나와 남 모두를 해치는 일은 아닌가. 이 행위가 불선한 것, ()를 일으키는 것, 고의 과()를 맺는 것이 아닌가’ 신중히 살펴 만일 그러하면 결단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기를 해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고, 자기와 남 모두를 해치지 않고, 선하며, ()을 일으키며, 낙의 과()를 맺으면’ 그런 행위는 계속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미 저지른 잘못은 스승이나 도반들 앞에 드러냄으로써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각오를 다짐해야 할 것이다.

 

「끼따기리 경」 (『중부』70)
     

부처님께서는 오랜 경험에 비추어 밤에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끼따기리에서 수행 중인 아싸지 비구(초전법륜 때의 다섯 비구 중 하나인 아싸지 비구가 아니고, 품행이 방정하지 못했던 여섯 비구군에 드는 비구임. 뿌나빠숫까 비구 역시 그러함)와 뿌나빠숫까 비구는 장래의 이익을 위해 지금 당장의 이익을 버려야 할 이유가 없다며 하루 세끼 식사를 고집함으로써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이 두 비구를 불러서 당신은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닌 불분명한 것을 가르친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신 후, 이 세상에는 심?혜 양면에서 해탈한 자, 지혜로 해탈한 자, 몸으로 실증(實證)한 자, 법에 이른 자, 믿음으로 해탈한 자, 불법을 따르는 자, 믿음을 따르는 자의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해탈열반은 ‘점진적 공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지적해 주신다.
     

어떤 사람이 스승에게 믿음이 있으면 스승을 찾게 되고, 스승을 찾게 되면 존경을 표하게 되고, 존경을 표하게 되면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귀를 기울이면 법을 듣게 되고, 법을 들으면 법을 기억하게 되고, 법을 기억하면 그 의미를 궁구하게 되고, 그 의미를 궁구하면 그 가르침을 성찰하여 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고, 그 가르침을 수용하면 열정이 솟아나게 되고, 열정이 솟아나면 뜻이 확고히 서게 되고, 뜻이 확고히 서면 정사(精査)하게 되고, 정사(精査)하면 열심히 정진하게 되고, 정진하면 마침내 지혜로써 꿰뚫고 구경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설명하시며 공부의 길에 든 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스승에 대한 믿음(삿다)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짱끼 경」 (『중부』95)
     

부처님께서 꼬살라 국왕의 영지인 오빠사다에 방문하셨을 때였다. 그곳에 살고 있던 대 바라문인 짱끼가 여러 바라문들과 같이 부처님을 찾아뵈었을 때, 십육세 바라문 소년 까빠티까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베다에 통달하여 바라문들 가운데 높은 평판을 누리고 있었다.

 

까빠티까는 부처님께, 바라문들은 구전이나 성전으로 내려오는 옛 바라문들의 성구(聖句)를 두고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명확하게 결론지어 버리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나는 이것을 알고 이것을 본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바라문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없다는 대답에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럼 7()를 거슬러 올라가는 스승 중에는 있느냐, 그도 없다면 앗타까, 와마까, 와마데와, 사밋따, 야마딱기, 앙기라사, 브라하다와자, 와세타, 깟사빠, 브하구 등 옛 성전의 편찬자들 중에는 있느냐’고 물으신다. 그러고 나서, 그도 없다면 믿음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이 책의 주 2, 「떼윗자 경」에서처럼) 장님의 행렬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다.

 

그러자 이 진지한 청년 바라문은 진리의 보존에 대해, 진리의 발견에 대해, 진리에의 궁극적 도달에 대해, 다시 거기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들에 관해 차례로 묻고 부처님의 자세한 대답에 크게 환희심을 발하여 마침내 부처님께 귀의한다. 앞의 주 12 「끼따기리 경」의 셋째 문단 참조.

 

「알라갓두빠마(뱀의 비유) 경」 (『중부』22)
    

독수리 사냥꾼 출신 아리타 비구가 ‘부처님께서 장애라고 가르치신 법들이 반드시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삿된 견해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의 이런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을 수 없었던 다른 비구들이 부처님께 이 사실을 고하게 된다.

 

이에 부처님께서 아리타 비구를 불러 꾸짖으신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과 근심과 재난이 많다고 열 가지 비유로써 말씀해주셨던 가르침을 상기시켜주시며, 불법을 배우고는 그 의미를 슬기롭게 궁구하지 않고 불법에 관한 지식을 잘못 파악하고 남들과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함부로 남용하는 것은 뱀을 잡을 때 몸뚱이나 꼬리를 잘못 잡다가 해를 입는 것처럼 위험한 일임을 지적하신 후 ‘그대는 스스로 잘못 해석하여 오히려 우리를 왜곡하고 스스로를 파괴하고 많은 해악을 쌓는다.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실로 그대를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위의 열 가지 비유,

 

갖가지 욕망은 맛없는 것이 살 없는 뼈와 같고,

뭇사람들에게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고기 덩어리와 같고,

끊임없이 불타는 것이 건초 횃불과 같고,

뜨겁기가 숯불 구덩이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꿈과 같고,

남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빌린 물건과 같고,

다치기 쉬운 것이 열매 딸 때 잎과 줄기가 상하기 쉬운 나무와 같고,

도살장과 같고,

몸을 난자하는 칼과 창 같고,

위험하기가 독사의 머리 같다는 비유이다.
     

이 경에는 또 유명한 ‘뗏목의 비유’도 나온다. 아리타 비구가 자신의 견해에 너무나 집착하는 것을 딱하게 여기신 부처님께서 유용한 뗏목도 버려야 할 때에는 버려야 마땅한데, 하물며 유용하지 못한 견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자비로운 가르침을 주신다.
 

‘「깔라마 경」에 대한 한 고찰’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비구 보디는 「깔라마 경」의 한 구절만을 토대로 부처님이 일체의 원리와 믿음을 포기하고 진리탐구에 있어서 각자의 판단대로 결정하라고 하신 것으로 해석되는 경향에 대해 과연 이 경을 그렇게 해석해도 좋은지를 묻고 있다.

 

이 경의 ‘너희 스스로 판단하라’는 말씀은 일반론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시 깔라마인들이 당하고 있었던 특수한 혼란상황에 대처하는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당시 깔라마인들이 바른 도덕적 삶을 사는 사람들임을 전제로 이런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에 이를 도덕적으로 미숙한 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비구 보디는 보고 있다. 또 당시 깔라마인들은 아직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한 불자들이 아니라 부처님께 단지 자신들의 혼란한 입장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묻고 있는 속인들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에 본격적으로 귀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은 처음부터 심오한 가르침을 펴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누구든 실제 체험으로 확인될 수 있는 도덕률, 즉 탐욕?성냄?어리석음이라는 삼독심을 다스리는 쪽이 이에 끌려가는 쪽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부터 스스로 확인해 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한 부처님에의 신뢰야말로 믿음을 지혜로, 신념을 확신으로 발전시켜 일체 고로부터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데 불가결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출처: http://blog.daum.net/devamitta/234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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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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