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단은 서로 통한다, 유일신교와 단멸론자들이 윤회를 부정하는 이유
크리스천 친구
그가 찾아 왔다. 잊을 만하면 찾아 오는 그는 이제 정다운 사회친구이다. 그는 크리스천이다. 그에 대하여 몇 차례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와 친구가 된 것은 대화가 통하였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경청하는 태도등 열린자세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동향이고 더구나 시대의 아픔까지 함께 하였던 공감대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현재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한 때 잘 나가던 벤처회사를 경영한 사장 이기도 하였던 그는 DJ정부시절 ‘신지식인’에 뽑펴 청와대에서 주재하는 만찬에 참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회사가 부도가 나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었다. 그래서 현재 신불자 상태로 되어 있는데 자신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빚에 따른 경제적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하는데,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도시의 들개 마냥 일을 찾아 이리저리 찾아 다닌 끝에 이번 폭염기간에도 땀을 무척 많이 흘렸다고 하였다.
기독교인들의 내세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리를 옮겨 편안한 자세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크리스천이다 보니 주로 종교에 대한 대화가 주류를 이룬다. 대화를 통하여 기독교에 대하여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불교에 대하여 오해 하고 있는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런데 대화를 하다 보면 확실히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을 느낀다. 같은 현실세계에 살고 있지만 정신세계는 다른 것이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내세관’이다.
기독교인들의 내세관은 매우 단순하다. 말을 들어 보니 오로지 ‘현생’과 ‘내생’ 두 가지 밖에 없다. 특히 내생을 중시하는데 그런 내생에 갈 곳은 또 두 가지 밖에 없다. ‘천국’아니면 ‘지옥’이라 한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느낀 것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매우 단순한 사고 방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오로지 현생과 내생 밖에 없다는 것과 내생은 천국과 지옥 밖에 없다는 논리는 명백히 ‘이분법적’ 논리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천국과 지옥은 ‘영원한 곳’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천국에 가면 영원히 천국에서 살고, 한번 지옥에 떨어지면 영원히 헤어 날 길이 없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이분법적 논리에 따르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천국에 가는 문은 매우 좁다고 말한다. 천국의 가는 사람들은 한정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디로 가게 될까. 천국아니면 지옥이라는데 천국에 가지 못하는 자는 모두 지옥으로 가는 것일까.
양극단은 서로 통한다
이렇게 기독교의 세계관은 현생과 내생, 두 가지만 인정되기 때문에 영원한 천국, 영원한 지옥이 될 수 밖에 없는데, 만일 현생만 인정하는 자들이 있다면 어떤 세계관을 가지게 될까.
오로지 한번 뿐인 인생임을 강조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는 현생만 인정하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전생이니 내생이니 하는 것들은 확인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고 믿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보고 느끼는 현실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생만 인정하다 보면 결국 ‘단멸론’으로 가게 된다. 육체의 죽음으로 인하여 정신도 함께 죽어서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공덕을 쌓을 필요도 없고 도덕적인 규범을 지킬 의무도 느끼지 못한다. 오로지 먹고 마시고 즐기다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사는 세계는 두 가지 극단적인 세계관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을 기반으로 내생을 인정하면 영속론이 되고, 내생을 부정하면 단멸론이 되어 버린다. 이는 극단이다. 이런 극단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또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극단에 대하여 전생을 인정하면 어느 정도 완화 된다. 윤회를 말한다. 전생, 현생, 내생을 인정하는 윤회관에 따르면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은 존재할 수 없다. 영속론이 극복 되는 것이다. 또 윤회를 인정하면 단멸론은 설자리를 잃게 된다. 단멸론자들이 왜 그토록 윤회를 부정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
이렇게 전생, 현생, 내생으로 이어지는 윤회는 영속론과 단멸론을 논파하기게 충분하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윤회를 절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극과 극은 통한다고 영속론과 단멸론은 서로 통하는데가 있다는 것이다.
생김새와 성향이 왜 다른지 물었더니
크리스천친구와 대화에서 놀라울만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전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먼저 질문을 하였다. 사람들의 생김새와 성향은 왜 다른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불자들이라면 당연히 업의 결과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에게 그런 답을 기대하기는 무리이었다.
크리스천 친구가 설명하기를 지금 현재 내가 있는 것은 부모가 있어서이고 서로 생김새가 다른 이유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유전학적으로 결정짓는 것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과학 교과서에서 배운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류의 답변을 단멸론자들에게서도 보았다는 것이다.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에 빠지는 이유
요즘 단멸론자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터넷 카페의 토론사이트에 가면 종종 단멸론자들의 주장을 볼 수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심하게 왜곡한 것들이다.
단멸론자들은 일종의 회의론자들이라 볼 수 있는데 초기경전의 내용이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하고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그 뜻을 보라고 강조한다. 그러다보니 윤회에 관련된 경은 모두 후대에 편집되었거나 힌두교의 교리가 섞인 것이라 강조한다.
이렇게 윤회에 대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윤회를 인정하는 순간 단멸론은 설자리를 잃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당시부터 단멸론자들을 외도로 간주하였고 영속론 보다 더 저질로 보았다.
어느 인터넷카페 토론사이트에서 누군가 단멸론자에게 질문하였다. 사람은 왜 생김새와 성향이 서로 다른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앞서 크리스천에게 질문하였던 내용과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단멸론자는 부모로 인하여 태어 났고,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유전학적으로 운운하는 답변을 하였다.
이와 같은 답변은 크리스천의 답변과 100% 같은 내용이었다. 놀라우리 만치 일치 하는 답변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영속론자들과 단멸론자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영속론자들은 오로지 현생과 내생 두가지만 인정하고, 단멸론자들은 오로지 현생 한가지만 인정할 뿐, 두 극단의 공통점은 철저하게 전생과 윤회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쪽은 상견(常見)이라는 극단에 빠지고, 또 한쪽은 단견(斷見)이라는 극단에 빠진다. 그렇다면 상견과 단견은 있기나 한 것 일까.
브라만교의 윤회
부처님이 출현 할 당시 고대인도에서는 상견아니면 단견이 지배적 이었다. 상견은 주류 종교인 ‘브라만교’로 대표되고, 단견은 ‘육사외도’ 중 뿌라나 까사빠(Pūrana Kassapa)와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와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의 사상이 대표된다. 그런데 이들 브라만교와 육사외도의 일부에서도 윤회가 인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윤회는 어떤 것일까.
브라만교에도 윤회가 있다. 그러나 이는 아뜨만의 ‘전변(轉變)’에 따른 것이다. 아뜨만이라는 불멸의 윤회 주체가 있어서 태어날 때마다 ‘재육화’한다고 보는 것이다. 마치 옷을 갈아 입듯이 몸만 바꾸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몸만 바꾸는 윤회를 ‘환생(reincarnation)’이라 한다. 우리나라 스님들의 법문에서도 종종 들을 수 있다.
육사외도에도 윤회설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육사외도의 일부에서도 윤회가 인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사외도 중 니간따 나따뿟따(Nigantha Nātaputta)의 자이나교와 빠쿠다 까짜야나(Pakudha Kaccayāna)의 칠요소설이다.
먼저 니간따 나따뿟따의 자이나교이다. 니간따 나따뿟따는 자이나교의 교주로 잘 알려져 있다. 불교와 거의 같은 시대에 개창되어 교리, 용어 등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도 많다.
이들은 처자와 모든 욕망을 떠나 독신 유행생활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불살생(不殺生), 진실어(眞實語), 불투도(不偸盜), 불음(不淫), 무소유(無所有)의 5가지 엄격한 계율을 실천하고 특히 살생을 엄격히 금하며, 또한 무소유를 강조하기 때문에 의복까지도 버리고 나체로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니간따 나따뿟따가 주장하는 핵심적인 가르침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주석에는 “영혼(jīva)이 물질(ajīva)에 흘러들어 윤회·전생하는데, 어떻게 이 영혼을 물질로부터 분리하여 홀로 우뚝 존재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자이나 수행과 교리의 중심체계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니간따 나따뿟따의 교리는 영혼체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혼체가 물질로부터 분리되어 해탈 되었을 때 수행의 완성으로 보는 것이다.
최악의 견해(Mahādiṭṭhi)
다음으로 ‘빠쿠다 까짜야나(Pakudha Kaccayāna)’이다. 빠쿠다 까짜야나는 7요소설을 주장하였다. 영혼은 물질적인 것으로, 이 7요소는 생주이멸치 않고 서로 인과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만약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잘라도 아무도 누구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 아니며 단지 7요소 사이를 칼이 통과한 것 뿐이다” 라고 말한다.
이렇게 유물론적 영혼론을 주장한 빠꾸다 까짜야나의 윤회관은 무엇일까. 초기경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무엇을 일곱 요소라고 하는가?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 괴로움의 요소, 즐거움의 요소, 목숨의 요소이다. 이 일곱가지는 만든 것이나 만들게 한 것이 아니고 창조된 것이거나 창조하게 한 것이 아니고 생겨나지 않았으나 견고해서 석녀와 같고 산봉우리와 같이 서 있고 기둥처럼 단단하여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서로 핍박하지 않는다. 서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것이 조금도 없다.
누구든지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잘라도 그 목숨을 빼앗을 수 없고 오로지 그 칼이 일곱 요소 사이의 간극을 통과한 것 뿐이다.
또한 140만의 생류를 비롯해서 7백 다시 6백의 생류가 있고 5백 업류, 5업류, 3업류가 있고 거기에는 하나의 완전한 업과 그 절반의 업이 있다. 62가지의 업도가 있고 62주기의 겁이 있고 6가지의 인종이 있고 8가지의 인간의 지위가 있고 4천9백종류의 사명외도가 있고 4천9백 종류의 출가자가 있고 4천9백종류의 이름을 지닌 나가족이 있다. 2천 가지의 감각능력이 있고 3천 가지의 지옥이 있고 36가지의 티끌세계가 있고 7가지의 의식의 모태가 있고 7가지의 무의식의 모태가 있고 7가지 마디의 모태가 있고 7가지 신들이 있고 7가지 인간들과 7가지 아귀 7가지의 호수 7가지의 매듭 7가지의 절벽 7백가지의 절벽이 있으며 7가지의 꿈 7백가지의 꿈이 있는데, 8백4십만 대우주기 사이에 어리석은 자도 슬기로운 자도 유전하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의 종극에 이른다.
내가 이러한 계행이나 금계나 고행이나 청정행으로 아직 익지 않은 업을 익게 하고 이미 익은 업을 감내하여 소멸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없다. 나에게 부과된 윤회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끝나거나 증가하거나 감소되거나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
예를 들어 실타래를 던지면 풀려질 때까지 굴러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똑같이 그들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다할 때까지 윤회한다' 라고."
(마하딧티경-Mahādiṭṭhi suttaṃ-With the Worst View-견해로 경, 상윳따니까야 S23.3.1.8, 전재성님역)
이와 같은 빠쿠다 까짜야나의 견해에 대하여 빠알리어 제목은 마하딧티 (Mahādiṭṭhi)라 하였고 영문제목은 ‘With the Worst View’로 되어 있어서 ‘최악의 견해’라 볼 수 있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이는 한마디로 도덕을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가택을 침입하고 노략질하고 타인의 처를 겁탈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 하였기 때문이다.
실타래의 비유
이와 같이 ‘절대적 도덕부정론’을 주장한 빠쿠다 까짜야나의 윤회관을 보면 ‘실타래의 비유’가 있다. “실타래를 던지면 풀려질 때까지 굴러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똑같이 그들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다할 때까지 윤회한다”라는 견해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수행을 하는 등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윤회 하도록 내버려 두어도 마치 아침이 되어 꿈에서 깨어나듯이 모두 해탈하도 먼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육사 외도 중에 니간따 나따뿟따와 빠꾸다 까짜야나가 윤회를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영혼론에 기반한 윤회이기 때문에 브라만의 아뜨만과 유사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윤회는 이와 다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힌두교의 윤회는 이 아트만의 전변(轉變)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taṇhā)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 즉 ‘재생(再生)’을 말한다.
고대 인도의 사상 흐름
참고로 부처님 당시 고대 인도의 사상 흐름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인도의 외도사상
No |
구 분 |
사상 내용 |
비고 |
1 |
브라만교 |
아뜨만(atman)은 힌두교와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 개아(個我), 진아(眞我)로 만물 속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을 뜻한다. 인도의 철학자들은 이 말을 둘러싸고 많은 학설을 전개하였다.
우파니샤드나 베단타학파에서는 이것을 보편적 실재라고 생각하여 세계원리인 브라만[梵]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으며, 현실의 나인 아뜨만은 브라만과 하나가 됨[梵我一如]으로써 최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 창조론, 영원론 영혼론, |
2 |
도덕 부정론 뿌라나 깟사빠(Pūrana Kassapa) |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푸라나는 원인과 업보를 부정하는 주장을 폈다. 악한 일을 하거나 선행을 하거나간에 둘 다 선악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단멸론 |
3 |
숙명론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
|
아지비까(Ājīvika)교파의 개조인 막칼리는 삶의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결정된 숙명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체 생명체의 윤회나 해탈도 원인이 없으며, 다만 자연의 상황과 결정에 따른다고 하였다.
부처님 당시에 상당한 세력을 가졌으며 후대의 아소까(Asoka)왕 비문에도 독립종교로 기록되었으나, 후에 자이나교에 흡수되었다. 아지비카(Ājīvika)란 생계수단을 뜻하는 ājiva(命)에서 파생된 단어로 그들은 바르지 못한 생계수단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사명외도(邪命外道)로 옮겼다. 이들은 나체수행자들이었다고 한다. |
숙작인설 (宿作因說), 운명론 단멸론 |
4 |
유물론 아지따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
|
아지따는 모든 것이 지·수·화·풍의 4요소와 활동하는 공간인 허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오직 현세만이 있을 뿐이며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으며, 생명체가 죽으면 신체구성의 4요소가 자연계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존재론적으로는 유물론이고, 인식론적으로는 감각론이며,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인 아지따의 사상은 푸라나의 도덕부정론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유물론의 전통은 그 후에도 인도에 존재했는데, 이것을 로까야따(Lokāyata)라 하며 불전에서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하였다. 또한 후세에는 쨔르바카(Cārvāka)라고도 한다. |
우연인설 (偶然因說), 단멸론 |
5 |
7 요소설 빠꾸다 까짜야나(Pakudha Kaccayāna)
|
빠쿠다는 지·수·화·풍의 4요소 외에 괴로움, 즐거움, 영혼을 더해 7요소를 인정했는데, 이 영혼도 물질적인 것이므로 그의 사상도 유물론적이다.
이 7요소를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 보았으며, 칼로 사람을 베어도 칼이 다만 7요소 사이를 통과한 것뿐이어서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요소만의 실재를 인정하는 사고방식은 후세의 승론학파(勝論學派, Vaiśeṣika)로 계승 발전되어 갔다. |
유물론적 영혼론 |
6 |
회의론 산자야 벨라띠뿟따(Sañjaya Belaṭṭiputta)
|
산자야는 ‘내세, 선악의 과보, 윤회’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장하였다. 당시 이러한 회의론은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으며, 부처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Sāriputta)와 목갈라나(Moggalāna)도 처음에는 산자야의 제자였었다. |
불가지론 |
7 |
자이나교 니간따 나따뿟따(Nigantha Nātap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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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를 Jīva(영혼)과 Ajīva(비영혼)로 나누고, 비영혼을 다시 Dharma(운동의 조건), Adharma(정지의 조건), 허공, 물질로 나눈다. 업(karma)은 미세한 물질로서 외부에서부터 신체로 유입되어 영혼에 부착함으로써 윤회에 속박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고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땅바닥의 벌레를 밟지 않도록 비를 들고 다니며, 공기 중의 미생물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도 하였다. 또 무소유계를 지키기 위해 나체로 수행했기 때문에 나형외도(裸形外道)라 불리었다. |
영혼론 |
표를 보면 브라만교를 포함하여 모두 7개의 사상이 있는데, 이중 영혼을 인정하는 외도에 대한 것은 브라만교와 육사외도 중에는 니간따 나따뿟따와 빠꾸다 까짜야나 이렇게 세 개의 사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멸론의 범주에 들어 가는 것은 뿌라나 깟사빠, 막칼리 고살라, 아지따 께사깜발린 이렇게 세 명의 사상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외도의 난립을 보는 듯한 한국
이와 같이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는 영속론과 단멸론, 불가지론, 숙명론 등 갖가지 사상이 난립 하고 있었는데 이런 난립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갖가지 사상의 난립장소와도 같아 보인다. ‘예수천국불신지옥’을 주장하는 영속론이 있는 가 하면 운명감정을 해주는 점집이 많은 것으로 보아 운명론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또 밤만 되면 화려한 네온싸인 불빛과 함께 유흥접객업소는 불야성을 이루는데 이는 단멸론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영향도 없지 않다.
이렇게 상견, 단견, 운명론 등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 현실인데 불교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스님들 법문을 들어 보면 분명히 영혼체를 인정하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고 , 또 “오직 모를 뿐”이라는 법문이 있는 가 하면, 점을 보아 주는 스님이 있다. 또 어느 스님은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라는 책을 출간한 바 있어서 이책은 현재 단멸론의 바이블처럼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한국불교에는 상견, 단견, 불가지론 등 마치 부처님 당시 외도의 사상이 판을 치는 것처럼 보인다.
깟짜나곳따경(S12.1.5)에서
타종교를 비롯하여 불교계는 물론 사회전반적인 분위기는 크게 상견 아니면 단견으로 구분된다. 이런 상단견은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 하지만 부처님은 상견이나 단견은 있을 수 없는 견해라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상단견에 대하여 어떻게 논파하였을까. 이는 초기경을 보면 알 수 있다.
[깟짜야나]
"올바른 견해, 올바른 견해 하는데 세존이시여, 올바른 견해란 어떤 것입니까?"
[세존]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나 비존재의 두 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접근, 취착, 주착을 통해 얽매여 있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접근하고 취착하고 마음으로 욕구하여 유입되고 잠재되는 것에 다다르지 않고 붙잡지 않고 주착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괴로움이 일어나면 일어난다. 괴로움이 사라지면 사라진다'고 의심하지 않고 혼란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에게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지식이 생겨난다. 깟짜야나여,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가 생겨난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ṃ- Venerable Kacchānagotta, 상윳따니까야 S12.1.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먼저 존재와 비존재에 대하여 이야기 하신다. 여기서 존재는 상견을 말하고, 비존재는 단견을 말한다. ‘있음(有)’과 ‘없음(無)’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유’는 존재의 영원성을 말하는데, 절대적으로 소멸될 수 없다는 견해를 말한다.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 같은 개념이다. 반대로 ‘무’란 존재의 불연속적인 허무성을 뜻한다. ‘미래가 없다’든가 ‘내생이 없다’는 단견을 말하는데, 이는 ‘죽음과 함께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이 대표적이다.
중도(中道, majjhima-paṭipadā)란
하지만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세상을 관찰하면 상견과 단견은 사라진다고 하였다. 상견과 단견이 생기는 원인은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갈애가 생겨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이 생겨 영속론이 발생하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생겨 죽음과 함께 더 이상 내생이 없다는 단멸론이 발생한 것으로 본다.
이런 견해가 생겨 나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 대하여 취착하지 않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올바른 견해가 생겨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세상을 보라고 하였다. 법이 조건에 따라 연이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상견이 타파되고, 법이 조건에 따라 뒤이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단견이 타파 되는데, 이렇게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부처님은 ‘중도(中道, majjhima-paṭipadā)’라 하였다.
중도라 하여 양극단을 떠난 ‘가운데 길’이라는 의미보다 ‘바른 길’이라는 뜻에 더 가깝다. 중도라는 의미와 같게 사용되는 팔정도에서 바른 것에 대한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는 불자라면
모처럼 크리스천 친구와 대화를 가지면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그것은 영속론자들과 단멸론자들이 때로 통하는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양극단임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왜 사람들의 생긴모습과 성향에 대하여 다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양극단의 공통적 답변은 교과서에서 배운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유전적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라는 식의 답변이었다.
이와 같이 과학을 기반으로 한 답변이 틀리다고 볼 수 없지만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는 불자라면 대부분 ‘업(業, kamma)’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전생에 몸과 말과 뜻으로 지은 업이 익어 과보로 나타난 업보 때문에 사람들마다 생긴모습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생긴모습과 성향차이에 대한 견해는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라 본다. 이런 업설을 크리스천친구에게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대화 한 장소도 문제이지만 업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사전에 긴 설명을 이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맛지마니까야에 발라빤디따경(M129)이 있다.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이라는 긴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자어를 써서 ‘우현경’이라 한다.
경에서 왜 우리가 서로 다른 얼굴, 서로 다른 성향, 심지어 서로 다른 가문에 태어 났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먼저 어리석은 자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 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면 어리석은 자는 이와 같이 생각한다. ‘참으로 나는 착한 일을 하지 않았다. 참으로 나는 건전한 일을 하지 않았다. 두려움에서 나를 수호하지 않았다. 참으로 나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참으로 나는 불건전한 일을 하였다.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나는 악을 짓고 포악하고 죄과를 지은 자들의 운명, 그 운명으로 수명이 다하면 떨어질 것이다. 그는 슬퍼하고 우울해 하며,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다가, 실신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는 지금 여기에서 이와 같은 세 번째의 고통과 불쾌를 느낀다.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는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해서 몸이 파괴되고 죽은 후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
발라빤디따경(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M129).docx
부처님은 악처에 나는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 하신다. 이는 크리스천 친구가 말하는 지옥관과 다른 것이다.
크리스천 친구는 말하기를 예수를 믿지 않으면 모조리 지옥행이라고 하였다. 그것도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지옥이라 한다. 불교인이 보았을 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지만 실제로 유일신교에서는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이렇게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악한 행위에 따라 지옥에 나서 갖은 고통을 겪는 과정이 경에서 매우 실감나게 묘사 되어 있다. 또 맛에 탐착하여 축생으로 태어나는 과정도 묘사 되어 있는데,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악처에 있다 인간의 몸을 얻어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경에서는 이에 대하여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 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
라고 표현 하였다. 이 문구에 대한 주석을 보면
“그는 사람이 다시 되었지만 낮은 계급의 사람이 되었다. 말세의 흐름에 든 지위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의 우주기가 시작할 때 기초적인 조건을 다시 갖추어야 한다.”
라고 설명해 놓았다.
모처럼 인간의 몸을 얻었건만
이렇게 한번 악처로 타락한 자가 맹구우목의 비유처럼 어렵게 사람 몸을 받았을 때 어떤 생김새와 성향 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일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는 오랜 세월이 지나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인간의 몸을 얻는다면, 그때마다 비천한 가문 즉 짠달라의 가문, 사냥꾼의 가문, 죽세공의 가문, 수레공의 가문, 백정의 가문과 같은 가난하고 음식이 모자라고 곤궁하게 사는 가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곳에서는 음식과 의복을 얻기도 힘들다. 그는 용모가 악하고 모습이 추하고 왜소하고 질병이 많고,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이고, 음식, 의복, 수레, 화환, 향료, 크림, 침대, 집, 등불을 얻지 못한다.
그는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
지옥과 같은 악처에서는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 되어 있지 않다. 축생으로 있었을 때는우 오로지 ‘약육강식’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동안 지옥과 축생에 있다 한량 없는 세월이 지나 맹구우목의 비유처럼 간신히 인간의 몸을 얻게 되었을 때 설명에 대한 것이다.
또 다시 악처에 날 수 밖에 없는 이유
이렇게 어렵게 인간의 몸을 얻게 되었더라도 또 다시 악처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도박꾼이 최초의 승부에 져서 아들을 잃고, 아내를 잃고, 모든 재산을 잃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얽어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도박꾼이 최초의 승부에 져서 아들을 잃고, 아내를 잃고, 모든 재산을 잃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얽어매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가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곳, 지옥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훨씬 커다란 패배이다.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의 단계가 완전히 성숙하면 이와 같다.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
도박꾼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도박을 하는 자들은 중독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돈이 떨어지면 아내도 팔고 자식들을 팔아 도박비용으로 충당한다. 그러다 마침내 모든 것을 다 잃고 마는데,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다. 그 동안 지은 악행의 과보로 인하여 악처에 날 것이라 한다. 그래서 도박에서 진 것 보다 악처로 떨어진 것이 더 큰 패배라 한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정신구조를 가진 자들
악행을 서슴없이 일삼는 자들이 있다. 마치 빠꾸다 까짜야나의 도덕부정론을 보는 것 같은 자들이다. ‘조폭’을 예로 들 수 있다.
크리스천 친구는 조폭의 세계에 대하여 매우 실감나게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자신이 벤처사장으로 있을 때 어떤 이유로 인하여 조폭과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한마디로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폭행을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이라 한다. 한 번 쳐다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폭행을 하였다는 말을 듣는데 폭행을 하고도 태연한 것은 상대방이 맞을 짓을 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혀 미안한 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조폭은 평소에는 보통사람들과 똑 같이 웃고 떠들고 하지만 일단 사건이 일어나면 매우 잔인하게 돌변하고 아무런 죄책감, 미안함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보통사람들과 다른 정신세계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그 친구는 동물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동물적 본능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과거 전생에 축생으로 있었을 때 약육강식에 대한 습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도박을 하다 돈이 떨어지면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 도박비용을 충당하는데 서슴지 않는 것도 동물적인 본능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어렵게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 났지만 악행에 대한 과보로 또 다시 악처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좋은 가문, 아름다운 용모,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
이처럼 어리석은 자도 있지만 반면에 현명한 자도 있다. 현명한 자는 오계를 준수 하고 몸과 말과 뜻으로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자를 말한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몸이 파괴되고 죽은 후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경에서는 하늘나라에서 행복에 대하여 매우 실감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천상에 태어나 즐거움을 누리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인간의 지위을 얻어 태어날 경우 생김새와 성향 등은 어떠할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현명한 자는 언젠가 어디선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인간의 지위를 얻더라도, 높은 가문, 왕족의 대부호의 가문, 또는 바라문의 대부호의 가문이나 장자의 대부호의 가문과 같은 부유하고 대부호이고 대자산가이고 금은이 많고 재물이 많고 돈과 곡식이 많은 가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는 잘 생기고, 보기에 좋고, 청정하고 연꽃처럼 최상의 용모를 갖추었고, 음식, 의복, 수레, 화환, 향료, 크림, 침대, 집, 등불을 얻는다.
그는 신체적으로 선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선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선행을 한다.
신체적으로 선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선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도박꾼이 최초의 승부에 이겨서 커다란 재산을 취득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도박꾼이 최초의 승부에 이겨서 커다란 재산을 취득하더라도 그 승리는 오히려 작다. 현명한 자가 신체적으로 선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선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이 훨씬 커다란 승리이다.
수행승들이여,
현명한 자의 단계가 완전히 성숙하는 것은 이와 같다.”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
앞서 언급한 악처에서 인간으로 난 것과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천상에 있다가 인간으로 났을 때 좋은 가문, 아름다운 용모,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세가지 선행 즉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짓는 선행공덕으로 인하여 다시 천상에 나게 될 것이라 한다.
하지만 주석에 따르면 현명한 자들 완성하는 것은 세간적이라 한다. 해탈의 길에서 본다면 보다 탁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양극단과 윤회
이와 같은 가르침으로 보았을 때 왜 사람들의 외모가 서로 다르고 성향이 서로 다른지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받아 들일 것이다. 그러나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영속론자나 단멸론자들은 받아 들이기 힘들 것이다. 이를 받아 들이는 순간 영속론과 단멸론의 토대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영속론과 단멸론은 서로 양극단이지만 전생과 윤회를 부정하는데 있어서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2012-08-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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