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세상에 대하여 ‘눈곱’ 만큼도 미련이 없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2. 8. 23. 10:50

 

세상에 대하여 눈곱만큼도 미련이 없을 때

 

 

 

같은 영화를 매일 100번 보여 준다면

 

중학교 시절 시험이 끝나면 단체로 영화관람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 영화는 자이언트이다.  그때 당시 대한극장에서 보았다. 화면이 약간 굽어진 대형 시네마스코프 스크린으로 본 그 영화이다.

 

자이언트에 여러 가지 명 장면이 있었지만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여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이다. 그 후 TV에서 몇 차례 더 보았는데 볼 때 마다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잘 만들어진 한편의 영화는 세월에 구애 받지 않고 볼 때 마다 늘 새로운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명작을 매일 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하루도 쉬지 않고 똑 같은 영화를 매일 100번 보여 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고문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 류의 방송을 매일 접하고 있다.

 

법화경 사경만 하면 만사 OK!”

 

매일 아침 불교방송을 청취하고 있다. 6시 이전의 경전공부 6시 이후의 불교강좌시간이 그것이다.

 

경전공부의 경우 도림스님이 법화경을 법문하고 있다. 법화정사에서 법문한 것을 그대로 올려 주고 있는 형식이다. 라디오로 듣는 스님의 법문특징은 한마디로 법화경 사경만 하면 만사 OK!”다 라고 말 할 수 있다.

 

스님은 우리말 법화경을 교재로 하여 법문을 하고 있다. 현재 제바달다품을 법문하고 있는데, 한품이 끝나는데 몇 개월이 걸리는 것 같다. 제바달다품 바로 이전이 견보탑분이 있었는데 거의 3-4개월 걸린 것 같다. 법화경이 총 28품이니 아직도 16분이나 남아서 2년이 걸릴지 3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스님의 법문 특징은 교재를 중심으로 진도를 나가고, 교재 중에 실려 있는 게송을 독특한 게송노래로 읊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불교 현실에 대하여 비판을 종종한다. 우리나라 불교가 설법위주의 불교로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스님들이 산중에서 참선에만 올인하는 것을 때로 강도 높게 비판한다.

 

이뭐꼬만능주의

 

다음으로 아침6시 이후에 방송 되는 것이 불교강좌시간이다. 현재 인천 용화선원 송담님의 법문을 들려 주고 있다.

 

송담스님의 경우 도림스님과 달리 교재가 없다. 인천 용화선원에서 법문한  테이프를 들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오래 전의 것이다.

 

스님은 법문 중에 “70평생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루 미루어 보았을 때 스님이 70세 당시에 법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몇 년 전의 것일까.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스님의 나이가 올해로 84세이다. 그렇다면 현재 방송되고 있는 법문은 14년 전의 것, 1998년도 부근 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불교방송에서는 이런 사실을 일체 알려 주지 않고 있다. 불교방송 홈페이지에 법문에 대한 정보가 일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송을 듣는 불자들은 올해 법문 한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10년도 넘은 법문을 매일 라디오에서 방송하고 있다. 그런데 들을 때 마다 느끼는 것은 매번 똑같은 내용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호기김에 열심히 들었지만 매번 똑 같은 내용이 반복됨에 따라 식상하게 된 것이다. 마치 어제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여 주는 것처럼 같은 내용이 반복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말을 할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항상 내는 결론은 이뭐꼬 수행만 하면~”으로 귀착 된다. 한마디로 이뭐꼬 만능주의이다.

 

마치 녹음기를 틀듯이

 

마치 녹음기를 틀듯이 매번 똑 같은 이야기를 반복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뭐꼬때문이다. 용화선원의 신도를 대상으로 이뭐꼬화두 드는 방법과 그 공덕에 대한 이야기를 수 도 없이 매일 반복 하는 것이다. 그런 법문을 전국민과 전 불자들을 대상으로 한 아침 불교방송으로 매일 틀어 주고 있다.

 

그런 스님의 법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경전, 어려운 경전을 해석하고 많이 알고 많이 읽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간단한 이뭐꼬’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놈이 무엇인고.  이 한마디가 온 천지 온 세계, 온 법계에 불을 끌 수 있는 청량제가 됩니다.

 

이뭐꼬’. 물론 앞으로 열심히 정진해서 타성일편이 되어 가지고 공안을 타파해서 확철대오 하면 그건 말할 것도 없고, 반드시 그런 때가 꼭 오고야 마는 것이지만 그러기 전에도 한생각 한생각 일어날 때 마다 퍼뜩 화두를 챙기고 바로 그 찰나가 찰나생불, 일초 동안 화두를 들면 일초동안 부처님이고, 10분동안 화두를 챙기면 10분 동안 부처님이여.

 

(인천 Y선원 S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 8 19일자)

 

 

스님은 경전을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이다. 오로지 이뭐꼬하라고 한다. 어떻게 하는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놈이 무엇인고라고 의심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이뭐꼬 하면 된다고 한다.

 

경전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경전을 보거나 교리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입장인데 다음과 같은 법문을 보면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금강경을 보고 원각경을 보고 법화경을 보고 뜻을 알면 재미가 있으니까 또 보고 싶고 또 보고 싶고 그 경전이 모두 부처님의 말씀이니까 경전 보는 것도 한량없는 공덕이 있으니까 공마다 공덕찬을 보면 그 경외에는 달리 더 없는 것으로 그렇게 되어 있지만, 그 경전을 보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 마음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평생동안 경을 보는 것은 바다속에 들어가서 모래알속에 반짝거리고 빛깔 좋고 예쁘게 생긴 조개껍질이라도 하나 없느가 하고 찾는 것과 같다.

 

(인천 Y선원 S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 8 19일자)

 

 

금강경, 원각경을 거론 하는 것으로 보아 대승경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님은 한 번도 초기경전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사성제나 팔정도, 십이연기 등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수 없다.

 

스님은 경전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바다속에 들어가 조개 껍질 줍는 것 같다는 표현을 하였다. 한마디로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공부를 하느니 이뭐꼬 한 번 하느니 못하다고 한다.

 

~알 쑤없는 의심으로

 

이어지는 법문에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전을 보고 경전속에서 무엇을 찾는 것은 그와 같다. 그 모래가 몇말이나 되로다 되어 본들 다 되지도 못하고 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보기 좋게 생긴 조개껍질을 열개 스무개 백개 천개 만개 줏어 모아 보면 그것이 무엇이 되는 것이냐. 세월만 지나가고 피로 해서 쓰러져 버릴 것 밖에 무엇이 있느냐. 경전도 바로 보면 아주 가지를 쳐.

 

참선으로 돌아 와야지, 사교입선이 되어야지. 경을 떠들어 읽어 보면 마음이 시원하니까 그 재미로 자꾸 경을 읽어. 화두를 들면 수록 별 재미가 없고 알아지는 것도 그러니까 조금 하다 그만 두어 버리고 책을 떠들어 보고.

 

그러지를 말고 자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떡히 이뭐꼬~알 쑤 없는 의심으로 이뭐꼬~알 쑤 없는 의심이 딱 흩어지지 않고 성성 적적하게 되면 그 의심을 관조하는 것이여. 관조하다가 의심이 희미해져 없어지거나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그럴때는 이뭐꼬자꾸 그렇게 해 나갑니다.

(인천 Y선원 S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 8 19일자)

 

 

스님은 사교입선하라고 하였다. 교학을 버리고 선을 취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단전 호흡을 하면서 숨을 내면서 이뭐꼬하며 알 수 없는의심을 하라고 한다. 이때 알 수 없는이라는 말에 대하여 ~알 쑤 없는이라고 하여 매우 심한 의성어을 쓰기도 한다.

 

나무아미타불 게송 노래

 

이렇게 오로지 이뭐꼬에 대한 이야기를 천편일률적으로 매일 들려 주었는데, 법문 하는 중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무아미타불 게송 노래이다. 법문을 시작하기 전에 시원하게 한 수 뽑고 법문 도중에도 여러 차례 읊곤 하는데, 독특한 노래 가락으로 된 게송 노래가 끝나면 나무아미타불로 마무리 하는데, 이때 목탁소리와 함께 신도들은 일제히 합송한다.

 

위기에 처해 있는 불교방송

 

현재 불교방송은 위기에 처해 있다. MB정부의 방통위가 불교방송에 대하여 민영미디어랩으로 편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종교방송인 기독교방송과 평화방송은 공영미디어랩으로 분류를 해 놓았다. 기독교방송은 공영이고, 불교방송은 민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불교방송에서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불교방송에서는 현재 매일 아침 7고성국의 아침저널시간에서 문자릴레이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런 청취자의 사연 중에 불교방송을 아끼는 청취자가 매우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청취자는 자신이 암환자라 하며 불교방송을 청취하는 것이 이라고 하였다. 어느 청취자는 자신에게 있어서 불교방송은 등대와도 같은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갖가지 사연을 담은 청취자의 문자를 보면 불자들이 불교방송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 많은 불자들이 하나 밖에 없는 불교방송에 채널을 고정하여 놓고 하루일과를 시작하고 집에서나 차에서나 항상 불교방송과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편성을 보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특히 아침 방송시간에 방송되는 경전공부와 불교강좌시간이 그렇다. 도대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스님들의 법문을 들려 주고 있는데, 그것도 특정한 절에서 법문한 것을 틀어 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매번 같은 이야기만 반복 하는 것이다. 그런 방송을 듣다 보면 결론은 법화경 사경만 하면~” 또는 이뭐꼬만 하면~” 만사 OK라는 식이다.

 

부처님이 견성성불하였다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법화경만 있고 이뭐꼬 수행만 있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84천 법문이라 하는데, 특정 경전과 특정 수행방법만을 언제까지나 틀어 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왜곡할 수 있다. 방송을 듣다 보면 실제로 왜곡하고 있다. 부처님이 견성성불하였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골방에서 외롭게 방송을 듣는 이들에게

 

위기에 처한 불교방송이 지금부터라도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알리는데 앞장서야 한다. 대승경전과 화두선 위주의 방송에서 탈피하여 초기불교의 가르침도 알려 주어야 한다. 부처님의 원음이 들어가 있는 빠알리 니까야를 말한다. 대승경전의 가르침도 좋지만 빠알리 니까야를 보면 마치 부처님이 현전 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롭게 골방에서 방송을 듣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런 부처님의 원음은 매우 현실적인 가르침이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고통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병에 걸려 있는 사람, 외로운 사람, 삶이 힘든 사람에게 부처님의 원음을 들려 주면 삶의 의미를 알 수 있고 용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은 경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의 양과 사대양에 있는 물의 양과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으로 미루어보건데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세존]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설한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형제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형제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자매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자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아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딸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딸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친지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친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재산의 상실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재산의 상실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질병의 비참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질병의 비참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

- 사대양 :

mahasammudda. 불교(인도)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는 지구의 오대양이 아니라 동서남북의 사대양으로 되어 있다.

 

(앗수경-Assusutta-Tears-눈물경, 상윳따니까야 S14.3.1.3, 전재성님역)

 

  앗수경(눈물경-S14.3.1.3).docx

 

 

 

tears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앗수경(Assusutta)이다. 다른 말로 ‘눈물경’이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윤회하면서 그 동안 흘린 눈물이 사대양의 그것과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 부모형제와의 이별, 질병으로 인한 비참함 등으로 인하여 흘린 눈물이 사대양의 바다 보다 더 많다고 한다.

 

보살사상 보다 더 따뜻한 가르침

 

스님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자비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보살정신을 말한다. 티벳에서는 우주공간이 존재하고 중생이 남아 있는 한 나 역시 여기 남아서 세상의 고난을 없애도록 하소서!”라고 외친 산띠데바의 자비심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도 한다. 좋은 말들이다. 하지만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힌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오랜 세월을 통해서 일찍이 한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마뚜경-Mātusutta- Mother- 어머니경, 상윳따니까야 S14.3.2.4, 전재성님역)

 

  마뚜경(어머니경-S14.3.2.4).docx

 

 

 

역시 같은 상윳따니까야에는 경으로서 ‘마뚜경(Mātusutta)’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어머니경’이다.

 

왜 어머니경이라 하였을까.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한량 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모든 존재들이 언젠가 한 번쯤 나를 낳아 준 어머니이었을 것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런 가르침이야 말로 보살사상 보다 더 따뜻하고 강력한 메시지라 아니 할 수 없다.

 

뼈무더기의 산 웨뿔라(Vepulla)’

 

이렇게 사람들은 윤회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괴로움과 아픔과 허탈을 맛 보았다. 그리고 또 앞으로 맛 볼 것이다. 그럴 때 마다 무덤은 증가 하여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마다 뼈를 남겼는데, 그들 뼈를 쌓아 놓는 다면 산을 이룰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윤회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뼈의 무더기를 웨뿔라(Vepulla)이라 하였다.

 

세상에 대하여 눈곱만큼도 미련이 없을 때

 

이와 같이 윤회과정에서 괴로움과 아픔과 허탈을 맛 보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라는 정형구로 말씀 하신다. 이 정형구를 빠알리로 보면 다음과 같다.

 

 

Yāvañcida bhikkhave,     야완찌당 빅카웨

alameva sabbasakhāresu   알라메와 샅바상카레수

nibbinditu,              닙빈디뚱

ala virajjitu,         알랑 위랏지뚱

ala vimuccitunti.        알랑 위뭇찌뚠띠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Monks,

it is suitable that you should turn away from all determinations,

fade and be released from them.

 

 

이른바 염오, 이욕, 해탈에 대한 것이다. 먼저 형성된 모든 것들에 대하여 싫어 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싫어 하는 마음이 나지 않으면 결코 해탈과 열반을 실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세상에 대하여 눈곱 만큼도미련이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는 윤회의 과정에서 괴로움과 아픔과 허탈을 충분히 맛 보았다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렇게 상카라에 대한 염오가 일어나야 다음 단계인 이욕이 일어나고, 이어서 해탈과 열반을 실현 할 수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적멸이 행복이네

 

마침내 해탈과 열반이 실현 되었을 때 상태는 어떠할까. 이에 대하여 같은 상윳따의 웨뿔라빱바따경(Vepullapabbatasutta, S14.3.1.10) 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Aniccā vata sakhārā      아닛짜 와따 상카라

uppādavayadhammino         웁빠다와야담미노

Uppajjitvā nirujjhanti     웁빳지뜨와 니룻잔띠

tesa vūpasamo sukho ti   떼상 우빠사모 수코 띠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성하고 다시 소멸해야 하리.

생성하고 또한 소멸하니

그것들의 적멸이 행복이네

 

Their nature is to rise and fall.
They rise and then fall,
Their surcease is bliss

 

諸行無常     제행무상

是生滅法     시생멸법

生滅滅已     생멸멸이

寂滅爲樂     적멸위락

 

 

상윳따니까야 실려 있는 이 게송은 열반경 등에도 실려 있고, 특히 설산동자의 구도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게송이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 국가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권에서도 매우 애송되고 있다고 한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게송에서는 적멸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열반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이다. 시작을 알 수 없는 한량없는 윤회 과정에서 그 동안 흘린 눈물과 피, 뼈 무더기등이 더 이상 발생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하여 눈곱 만큼도 애착을 갖지 않게 되었을 때 더 이상 마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세상 또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태를 우빠사모(vūpasamo)라 하였다. 빠알리어 upasama(우빠사마)는 고요, 평온, 평화, 적정 등의 뜻이다. 게송에서는 적멸(寂滅)’로 옮겼는데, 바로 이 우빠사마(upasama)가 행복(sukha)이라는 것이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원음을 듣고 싶다

 

불자들은 이와 같은 부처님의 원음을 듣고 싶다. 대승경전의 가르침도 좋고, 화두선 이야기도 좋지만 부처님의 원음이 담겨 있는 빠알리니까야의 생생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싶다. 불교방송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이 들에게 감로수와 같은 원음을 들려 주기 바란다.

 

 

 

2012-08-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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