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禪僧)들은 누구의 제자들인가, 한국불교가 조교(祖敎)인 이유
출가자는 모두 공인(公人)
각묵스님의 음성강의 파일에 따르면 삭발을 하고 승복을 걸치는 그 순간 ‘공인(公人)’이라고 하였다. 공인이란 원래 공직에 있는 사람을 뜻하나 개념을 좀더 확대한다면 그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도 포함된다. 그래서 축구국가대표선수도 공인으로 보는 것이다.
만일 축구 국가대표 선수가 골을 넣었다고 해서 ‘기도세레모니’를 한다면 공인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공인이란 그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직분과 책임과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출가자는 모두 공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특히 신문이나 방송, 인터넷 등 공중매체에 말이 실렸을 때 그에 책임을 져야 하고 또 그 책임을 망각하였을 때 비판 받아 마땅한 것이다.
제방선원과 토굴에서 50여년 동안 정진한 스님
불교TV사이트에서 간화선과 관련된 대담을 보았다. 간화선 국제학술대회에서 간화선 수행과 관련 하여 대담한 내용이다. 간화선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학자들과 선승들이 봉암사에 모여 선승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이었다.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 스님은 봉암사 수좌 ‘적명스님’이다. 소개에 따르면 제방선원과 토굴에서 50여년 동안 정진하였다고 한다.
스님은 우선 봉암사부터 소개 하였다. 봉암사 창건 당시부터 현재 까지의 역사와 봉암사를 거쳐간 유명한 선지식에 대한 것이었다. 이어서 스님은 초학자들을 위하여 선수행의 기본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 하였다.
스님은 간화선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주로 비교법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관법’과의 비교이다. 관법을 비판함으로서 간화선의 우수성을 부각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졌다.
“내가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후발주자는 선발주자를 따라 잡기 위해서 헛점을 노린다. 마찬가지로 간화선 역시 기존의 묵조선의 비판하에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간화선의 주창자인 대혜종고스님의 ‘서장(書狀)’으로부터 알 수 있다.
간화선은 지금으로부터 천년전 송나라 당시 대혜종고(1089-1163) 스님에 의하여 주창되었다. 이후 간화선은 짧은 기간 동안 중국대륙을 섭렵하였고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파 되기에 이르렇다.
그런데 간화선은 기존의 수행방법인 관법을 딛고 일어섰다는 사실이다. 서장에 따르면 대혜종고 스님은 관법에 대하여 맹렬한 비판을 퍼 부었다. 그 정도가 어떤 가 하면 다음과 같은 ‘서장’ 을 강의한 무비스님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제가 구업을 아끼지 않고 힘써 이런 폐단을 힘써 구제했다 고 그럽니다. ‘차라리 내가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구제해야 된다.’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무비스님의 서장 대강좌 7-4강)
무비스님의 서장 강의에 따르면 대혜스님은 묵조선에 대하여 침을 튀기며 비판하였다고 한다. 일종의 관법이라 볼 수 있는 묵조선은 잘못된 수행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대혜스님은 서장에서 끊임 없이 묵조선을 비판하고 있는데, 구업을 짓더라도,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묵조선의 폐단을 바로 잡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 때 당시 주류수행법인 묵조선 보다 간화선 수행방법이 더 우수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까시나(Kasina) 수행이 관법(觀法)이라는데
이와 같은 전통이 있어서일까 봉암사 수좌 적명스님은 간화선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역시 관법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송나라 시절 대혜스님이 묵조선에 대하여 침을 튀겨 가며 비판 하였듯이 적명스님은 남방불교의 관법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주로 청정도론에 소개 되어 있는 내용에 대해서이다.
일반적으로 관법이라 함은 요즘말로 위빠사나를 말한다. 그런데 적명스님은 위빠사나라는 말은 일체 하지 않고 관법이라고 만 말하면서 청정도론의 예를 들어 관법과 간화선을 비교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설명을 들어 보면 청정도론의 내용을 다 파악하고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간단히 대비시켜서 남방관법을 소개해 드리자면요, 처음 수행해 나가는 삼매 닦는 과정에서 부터도 대상, 그러니까 예컨대 까시나(Kasina)를 대상으로 해서 관법수행을 시작 합니다.
(적명스님, 봉암사 수좌, <특집> 간화선국제학술대회 간화선수행과 대담 1부, 불교TV 2012년 8월 7일)
봉암사 선열당에서 7월2일 국제학술대회 참가들이 수좌 적명스님과 대담하고 있다.
사진 : 불교신문
스님은 까시나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관법’이라고 하였다. 까시나를 보고 익힌표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관법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청정도론에 따르면 까시나 수행을 ‘관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까시나 수행은 ‘사마타’ 수행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관법수행을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스님은 까시나 수행에 대하여 사마타수행이라고 말하지 않고 시종 일관 관법수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부적절한 용어의 사용은 듣는 이로 하여금 큰 혼란을 줄 뿐만 아니라 까시나 수행을 위빠사나로 오해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부적절한 용어사용에 대하여 봉암사에 모인 국내외 학자들이나 스님들이 이의를 제기 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그냥 넘어 간 것일까. 아니면 진짜 몰라서 그런 것일까. 아무튼 아무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은 것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대상과 대상을 관하는 마음
이렇게 까시나 수행을 사마타가 아닌 관법수행으로 보고 있는 적명스님은 ‘증과(證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였다. 여기서 증과란 ‘도’와 ‘과’를 말한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와 과를 말한다. 증과에 대하여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은 우리 의식상태가 통일이 되면, 순수해지면 거기서 나오는 희열감과 청정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남방수행에서는 이와 같이 까시나, 빛나는 까시나가 앞에 나왔을 때 그것을 의지해서 초선에서부터 사선에까지 이릅니다.
그런데 이것은 수행단계에만 거치는 것이 아니고 그분들이 소위 증과(證果)라고 하는 열반상태에서도 이것은 계속됩니다. 삼매 수행상태에서 대상인 까시나, 빛나는 까시나, 대상이 존재하고 그 대상을 관하는 내 마음이 존재하는 것처럼, 열반에 이르러서도 열반이 존재하고 열반을 관하는 마음이 존재합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이 열반을 관하는 마음을 증과(證果)의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증과의 마음이 40심이나, 마흔하가지나 된다고 말합니다.
(적명스님, 봉암사 수좌, <특집> 간화선국제학술대회 간화선수행과 대담 1부, 불교TV 2012년 8월 7일)
스님은 초기불교의 열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매우 비판적이다. 초기불교의 열반은 열반이 따로 존재하고 이를 관하는 마음 또한 따로 존재한다고 비판한다. 이른바 ‘이원론’으로 보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 있어서 그 대상에 마음을 내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데, 열반을 추구하는 것 역시 까시나 수행과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까시나 수행하듯이 열반 또한 관하여 얻어 질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앞서 까시나 수행에 대하여 왜 관법으로 설명하였는지에 대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남방불에서 말하는 수행방법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데, 열반이 따로 있고 그 열반을 관하는 마음이 따로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스님이 만든 신조어 ‘4 가지 진리’
이어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남방불교 교리에서는 진리가 4가지가 있다고 설하는데, 색법과 심법과 심소법과 열반입니다. 이것들은 각각 고유한 법이고,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과 마음은 끝까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적명스님, 봉암사 수좌, <특집> 간화선국제학술대회 간화선수행과 대담 1부, 불교TV 2012년 8월 7일)
스님은 남방불교 교리에 진리가 4가지에 대하여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사성제’를 말한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네 가지를 말한다. 그런데 스님은 4가지 진리에 대하여 ‘색법’과 ‘심법’과 ‘심소법’과 ‘열반’이라 하였다. 이런 구분법은 처음 들어 보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법은 ‘고유한 법’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 설명한다. 과연 그럴까.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스님이 설명한 4가지 색법과 심법과 심소법과 열반은 아비담마의 82법을 말한다. 이른바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한 것이다. 이중 물질(색)로 구분되는 것이 28법이고, 정신작용(심소)에 대한 것이 52법, 열반 하나, 마음 하나 해서 모두 82법이 되는 것이다.
이들 82법은 각각 고유한 성질이 있는 것은 맞다. 예를 들어 ‘성냄’의 경우 밀쳐 내려 하는 고유성질이 있고, ‘탐욕’의 경우 거머 쥐려는 고유 성질이 있다. 그러나 스님의 말한 것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열반을 제외 하고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제행무상, 제법무아가 이를 말해 준다.
그런데 스님은 스님이 만든 신조어 4 가지 진리 즉, ‘색법’과 ‘심법’과 ‘심소법’과 ‘열반’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스님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아직도 아공법유(我空法有)를 써 먹는가
부파불교 당시 설일체유부의 주장이면 모를까 82법이 변하지 않는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초기불교를 ‘아공법유(我空法有)’로 보는 관점이고, 또 하나는 초기불교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일 것이다. 아마도 전자로 본다.
대승불교에서는 공사상에 입각하여 ‘아공법공(我空法空)’이라 한다. 아도 공하고 법도 공하는 논리이다. 이런 논리를 이용하여 대승이외의 불교는 ‘아공법유’라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를 이용하여 소승불교를 비판할 때 주로 사용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적명스님 역시 남방 테라와다 불교나 초기불교를 아공법유의 관점에서 본 것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초기불교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논리는 잘 못된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라와다불교에 대하여 아공법유라고 주장한다면 초기불교 교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 했기 때문이라 판단 된다. 더구나 청정도론을 언급하며 설명하였는데, 과연 청정도론을 다 이해하고 발언 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아공법유로 몰아 부친 이유
스님은 왜 테라와다불교와 초기불교에 대하여 아공법유로 몰아 부치는 것일까. 그것은 이어지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과 마음은 끝까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적명스님, 봉암사 수좌, <특집> 간화선국제학술대회 간화선수행과 대담 1부, 불교TV 2012년 8월 7일)
스님은 열반과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말하며 테라와다 불교 수행방법을 비판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색법’과 ‘심법’과 ‘심소법’과 ‘열반’이 변화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 지은 이유가 될 것이다. 82법이 변하지 않는 아공법유가 되어야 위의 문장 “열반과 마음은 끝까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이 성립 될 수 있기 떄문이다.
하지만 이는 왜곡이다. 청정도론을 다 이해하였다면, 초기불교 경전과 주석을 보았다면 결코 이와 같은 말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스님이 하고 싶었던 말은?
그렇다면 스님은 결국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다음과 같은 결정타를 날린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이 마음이 있는 동안은 이 마음이 열반이라고 관하고 있는 동안은 온전한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끝까지 상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상체계입니다.
(적명스님, 봉암사 수좌, <특집> 간화선국제학술대회 간화선수행과 대담 1부, 불교TV 2012년 8월 7일)
스님은 결국 이 한마디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테라와다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진정한 진리가 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그리고 상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상체계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런 비판은 사실상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부정’이라 볼 수 있다. 오늘날 왜 대승불교와 선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불교라고 말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이유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러시아 출신의 저명한 불교학자 체르바츠키(Stcherbatsky)박사는 “마하야나(대승)주의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온전한 열반이 아니라는데
이렇게 적명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말을 하였는데, 그렇게 말한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발언을 들 수 있다.
아라한이 되고서도 열반의, 무여열반에 들기 이전까지는 열반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생각을 하고 몸과 마음이 다 멸해서 열반만이 남아 있는 상태, 죽음이후의 상태의 열반을, 열반만을 완전한 열반이라고 이들은 말합니다.
아라한이 되고서 열반을 관하면서도 그것을 온전한 열반이라고 못하는 이유는 열반을 관하는 마음이 있고, 마음이 의지하고 있는 몸이 있기 때문입니다.
(적명스님, 봉암사 수좌, <특집> 간화선국제학술대회 간화선수행과 대담 1부, 불교TV 2012년 8월 7일)
무여열반과 유여열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라한이 되어 열반을 증득 하였더라도 이는 진리가 못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열반을 관하는 마음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가장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출세간을 마음을 내는 것이 잘못된 수행방법일까.
“그 혜안은 열반을 대상으로 삼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주석서인 청정도론에 따르면 열반을 성취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간략히 설하면 네 가지 진리를 통찰하기 위해서 도닦는 수행자의 통찰지의 눈이 바른 견해이다. 그 혜안은 열반을 대상으로 삼으며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는다. 바른 견해의 특징은 바르게 보는 것이다. 이것은 요소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무명의 어둠을 쓸어버림으로 나타난다.
(청정도론, 제 16장 기능과 진리, 76절 (라) 도의 해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로 요약된다. 마치 꼬끼리 발자국 안에 모든 동물들의 발자국이 들어 가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사성제의 테두리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성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르침이다. 궁국적으로 윤회의 종식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성제는 고통과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가르침인데 이는 팔정도를 닦음으로 성취된다. 그 닦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것이 청정도론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은 빠알리 니까야 주석서인 동시에 ‘수행지침서’이다. 그런 청정도론에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내용이 없을 수 없다.
청정도론에서는 명백히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을 낼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대승불교와 달리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출세간의 마음’을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위 청정도론 문구에서 “혜안은 열반을 대상으로 삼으며”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런 통찰지가 ‘바른 견해(正見)’라고 한다.
후학들에게 당부하는 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명스님은 이와 같은 정견을 부정한다. 열반이 따로 있고 열반을 관하는 마음이 따로 있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상대성을 벗어나지 못한 체계라고 하였다. 그리고 후학들에게 다음과 당부 한다.
대승불교의 기본은 불이사상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관하는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서 젊은 스님들 한테 얘기 할 때 남방위빠사나 관법을 수행해도 좋지만은 그 사상이 처음과 끝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서 시작해야 된다고 권합니다.
남방수행을 통해서 그와 같은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고 남방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의미는 우리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잘 알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적명스님, 봉암사 수좌, <특집> 간화선국제학술대회 간화선수행과 대담 1부, 불교TV 2012년 8월 7일)
스님이 강조한 것은 불이(不二)사상이다.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실례로서 마음과 마음이 관하는 대상이 둘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과 열반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말미에 “남방수행을 통해서 그와 같은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고”라 하여 빠져 나올 구멍을 마련해 두었지만, 스님의 한결 같은 주장은 ‘불이사상’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 보는 진리의 개념과 테라와다와 초기불교의 진리의 개념이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보아 서로 다른 불교임에 틀림 없다.
초기불교는 샤카무니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일 뿐이라고?
그런데 적명스님과 같은 관점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선수행을 하는 선사들은 예외 없이 불이사상을 주장 하는데 그 특징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비판하거나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적명스님이 불이사상이 아닌 것은 진리가 아니라 하였고, 또 상대성을 벗어나지 못한 사상체계라고 비판 하였는데, 이런 주장을 또 다른 선사로부터 보았다. 어느 선사로부터 받은 댓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꾸만 [초기불교]를 들먹이시는데, 과연 [초기불교]라는게 있었습니까? 혹시 [원시불교]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이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지요. 그냥, 샤카무니'의 설법시대'였을 뿐이죠.
샤카모니 열반하신 후에 10대불제자를 중심으로, [불교적 교리]가 체계화되고,
[불경]이 집대성 된후에 비로소 컬리큘럼이 만들어지면서 [佛敎]라는 宗敎가 성립되어진 것이지요.
그때로 부터 수천년을 지나오면서 [불교]는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즉, 사카무니'께서 확연하게 다 말씀 못하고 가신, 우주의 진리 아눝따라 삼먁삼보리'에 대한 이해 체계가, 그 수많은 히말라야 수행승들과 [대승불교의 중국 불교계]에서 수많은 고승들이 '깨달아 얻은 진리들로서, 불교교리는 엄청나게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감히 초기(원시)불교'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불교는 믿음'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여여하게 있는 우주의 진리]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無常한 것이고 一體唯心造'인 것입니다.
끝없이 진화하는 교리체계'가 대승적인 현대불교입니다. 아무런 교리체계도 없던 시절의 초기불교'는 종교적인 수준이 아닌,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
(어느 산중승의 댓글)
언젠가 글을 썼는데 어느 산중승님으로부터 받은 댓글이다. 오랜 세월 동안 선수행을 한 스님으로서 글을 보고 자신의 견해를 댓글로 남겨 준 것이다.
대부분 선승들의 생각은
이 글을 보고 매우 충격을 받았다. 선사들이 생각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한 선승이 남겨 준 글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나라 대부분 선승들의 생각이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불교를 하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댓글을 보면 ‘초기불교는 불교가 아니다’라는 말이 놀라웠고, 더구나 초기불교는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산중승의 견해가 다른 선사들의 견해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법문등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이런 견해를 뒷받침 해 주듯이 이번 봉암사 간화선 국제학술대회에서 강의한 적명스님을 통하여 또 한 번 확인 하였다.
스님은 한마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온전한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끝까지 상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상체계입니다.”라고 잘라 말하였기 때문이다.
선승들은 누구 제자인가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산중승과 적명스님과 선승들은 누구의 제자들이란 말인가.
무비스님의 서장 강좌에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석가모니불부터 보리달마로 해서 쭉 내려와서 육조혜능. 육조단경을 통해서 누누이 들어왔던 육조혜능. 육조혜능 밑에 큰 제자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소위 오가칠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남악회양과 청원행사. 두 거대한 산맥이 육조스님으로부터 뻗어 나가게 된 것입니다.
남악회양 밑에 마조도일. 백장회해. 황벽희운. 임제의현. 그래서 소위 임제종이 등장하게 됐고, 우리 한국의 禪脈(선맥)은 바로 이 임제의현의 임제종을 근거로한 선맥 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고승들 비문에 가 보면, “석가모니로부터 몇 대 제자” “몇 대 손” 이렇게 쓰지를 않고, 꼭 “임제 몇 대 손” 그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중국에 가서 우리가 중국 스님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도,“우리도 임제종 계통입니다.”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대충 짐작을 하지요.
우리나라 스님들 碑文(비문)을 보면, 거의가 “임제 몇 대 손” “임제 몇 대 손” 모두가 가섭존자의 몇 대 손도 아니고, 달마의 몇 대 손도 아니고, 육조혜능의 몇 대 손도 아니고, 전부 “임제 몇 대 손” 이렇게 했습니다.
(무비스님, 서장 대 강좌 제 1 - 1 강)
간화선 주창자인 대혜스님이래 우리나라 선승들은 간화선 수행의 전통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간화선의 발생지인 중국에서 간화선이 자취를 감춘지 오래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 만큼은 매 안거마다 수천명이 선방에서 방부를 틀고 있다. 그런 선승들에게 있어서 ‘계보’는 어떤 것일까.
무비스님에 따르면 우리나라 선승들은 부처님의 제자라기 보다 임제스님의 제자에 더 가깝다. 그래서 “석가모니로부터 몇 대 제자”이렇게 말하지 않고 꼭 “임제 몇 대 손”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임제스님 밑으로 줄을 서고 싶으면
더구나 무비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나라 불교는 이렇게 임제스님을 가장 숭상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열반하시면요? 축원문에 꼭 들어가는 구절이 있습니다.
“스님 열반하셨으니까 速還娑婆(속환사바). 사바세계에 빨리 다시 돌아오셔서 永作人天之眼目(영작인천지안목). 임제스님의 문중에서 길이 인천의 안목이 되어주십시오.”
라고 하는 축원을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 불교에서 얼마나 임제스님을 그리워하고, 임제스님의 사상이 중요하고, 임제스님의 정신을 본받고 싶고, 임제스님 밑으로 줄을 서고 싶으면, 축원문에 그렇게 하겠습니까?
(무비스님, 서장 대 강좌 제 1 - 1 강)
한국불교가 조교(祖敎)인 이유
이와 같은 설명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 선승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중국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어느 교수는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한국불교는 ‘조교(祖敎)’라고 언급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교라기 보다 중국 조사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조사불교(祖師佛敎)’라는 뜻이다.
2012-08-2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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