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에서 본 삼법인, 아닛짜(무상) 둑카(고) 아낫따(무아)
불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잣대, 삼법인
흔히 불교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잣대를 삼법인이라 한다. 한자어로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로 번역된다. 이를 줄여서 무상, 고, 무아라고 한다.
이와 같은 삼법인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법구경에서 볼 수 있다. 법구경에서 삼법인에 대한 표현은 다음과 같다.
“Sabbe saṅkhārā aniccā” ti, “삽베 상카라 아닛짜” 띠
~ yadā paññāya passati, 야다 빤냐야 빳사띠
Atha nibbindati dukkhe ~ 아타 닙빈다띠 둑케
- esa maggo visuddhiyā. 에사 막고 위숫디야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법구경, Dhp277, 전재성님역)
"All conditioned things are impermanent"
- when one sees this with wisdom,
one turns away from suffering. This is the path to purification.
“Sabbe saṅkhārā dukkhā” ti, “삽베 상카라 둑카” 띠
~ yadā paññāya passati, 야다 빤냐야 빳사띠
Atha nibbindati dukkhe ~ 아타 닙빈다띠 둑케
- esa maggo visuddhiyā. 에사 막고 위숫디야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법구경, Dhp278, 전재성님역)
"All conditioned things are unsatisfactory"
- when one sees this with wisdom,
one turns away from suffering. This is the path to purification.
“Sabbe dhammā anattā” ti, “삽베 담마 아낫따” 띠
~ yadā paññāya passati, 야다 빤냐야 빳사띠
Atha nibbindati dukkhe ~ 아타 닙빈다띠 둑케
- esa maggo visuddhiyā. 에사 막고 위숫디야
‘일체의 사실은 실체가 없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법구경, Dhp279, 전재성님역)
"All things are not-self"
- when one sees this with wisdom, one turns away from suffering.
This is the path to purification.
법구경 게송 277번부터 279번까지가 삼법인에 대한 것이다. 막가왁가(Malavagga, 길의 품)에 들어 있다.
게송을 보면 ‘제행무상’에 대한 빠알리어는 ‘삽베 상카라 아닛짜(Sabbe saṅkhārā aniccā)’로 되어 있고, ‘일체개고’는 ‘삽베 상카라 둑카(Sabbe saṅkhārā dukkhā)’로 되어 있고, ‘제법무아’는 ‘삽베 담마 아낫따 (Sabbe dhammā anattā)’로 되어 있다. 먼저 제행무상에 대한 게송이다.
누구나 무상함을 느낀다
빠알리어 삽베(Sabbe)는 ‘일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자어 모두 ‘제(諸)’로 표시 되었다. 또 상카라는 ‘형성되어진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이를 한자어 ‘행(行)’으로 옮겼다. 그래서 ‘삽베상카라’는 ‘제행’이 된다. 그런 삽베상카라는 무상하다고 한다. 제행무상인 것이다.
누구나 무상함을 느낀다. 특히 나이가 먹어 감에 따라 무상함의 강도는 커져 간다. 오랜 만에 본 친척들을 만 났을 때 아이들의 자란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월과 함께 변화된 모습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나이 드신 어른들이 형편 없이 늙어 보이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제행무상을 실감한다.
이와 같은 제행무상은 자연에서도 볼 수 있다. 봄이 되었는가 싶으면 여름이고, 지옥 같은 폭염이 언제이었나 싶게 찬 바람이 분다. 그러다 낙엽이 지면 비로서 계절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또는 자연의 변화에 따라 무상함을 느낀다. 이는 일상적으로 느끼는 무상함이다. 그렇다면 무상의 본질은 무엇일까.
“K 스님의 소설적 번역”
먼저 법구경 277번 게송에 대한 거해스님의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백 명의 빅쿠들이 부처님으로부터 무상에 관한 설법을 듣고 좌선 수행주제를 받아 숲속으로 들어가 열심히 정진했다. 그러나 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행이 조금밖에 진전되지 못하가, 그들은 부처님으로부터 자기들의 어려움을 보고드리고 수행 주제를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빅쿠들의 요청에 접하신 부처님께서는 왜 그 수행 주제가 그들에게 맞지 않았는지 알아보시기 위해 신통력으로써 그들의 과거생을 살펴보시고, 그들이 과거 까싸빠 부처님 당시에 아닛짜를 주제로 수행했던 것을 아시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닛짜와 관련된 수행 주제를 정해 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빅쿠들이여, 이 세상의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은 계속 변화되고 늙어 가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현상은 아닛짜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은 아닛짜라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둑카에 싫어함을 갖나니
오직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부처님의 이 설법 끝에 오백 명의 빅쿠들은 모두 아라핫따 팔라를 성취하였다.
(거해스님, 법구경 277번 게송 인연담)
이와 같은 번역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자신의 책 ‘법구경 담마파다’ 해제에서 “K 스님의 소설적 번역”이라고 표현 하였다. 또 다른 번역에 대하여 “K 스님의 ‘감각기관을 대상으로 마음을 집중시켜 닙바나를 깨닫는다’는 이상한 이론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비판 하였다.
법구의석의 인연담을 보면
그렇다면 277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법구의석(法句義釋, (Dhammapadatthakatha) 편에 실려 있는 주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시가 설해진 데는 다음과 같은 인연담이 있다. : DhpA III.405-406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계실 때, 오백 명의 수행승에게 설한 무상의 특징과 관련된 이야기(Anniccalakkhanavatthu)이다.
그들 오백 명의 수행승들이 부처님에게 명상주제를 받아 숲속에서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거룩한 경지를 성취하지 못하자 알맞은 명상주제를 얻고자 부처님 앞에 왔다.
부처님께서는 ‘무엇이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라고 탐구하여 ‘과거불인 깟싸빠 부처님 당시에 이들은 이만 년 간 무상의 특징에 대한 명상을 닦았다. 그러므로 무상의 특징으로서 하나의 시를 가르치겠다’라고 생각하고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세계 등의 세계에서 모든 형성된 것은 실체가 없으므로(abbhavatthena)무상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은 청정의 길이다.”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그 수행승들은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
(전재성박사, 법구경 277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
전재성 박사의 법구의석 인연담에서 눈길을 확 끄는 구절이 있다. 그것은 “모든 형성된 것은 실체가 없으므로(abbhavatthena, 압바왓테나)무상하다”라는 내용이다. 이는 거해스님의 “이 세상의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은 계속 변화되고 늙어 가느니라”라와 대조된다.
법구의석에서는 무상한 것에 대하여 ‘실체가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는 ‘변화하다’라는 말 보다 더 가슴에 다가 오는 말이다.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는 말에 대하여 “모든 형성된 것은 실체가 없으므로(abbhavatthena)무상하다”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핵심을 질러’ 주석한 것이다. 이런 점이 거해스님의 법구경과 전재성박사의 법구경의 차이 중의 하나라고 보여진다.
세 게송에 대한 핵심내용은
이어지는 278번의 일체개고에 대한 게송과 279번의 제법무아에 대한 게송의 인연담은 277번 제행무상의 인연담과 형식이 비슷하다. 다만 핵심어 대한 설명 문구만 다를 뿐이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삼법인 게송 |
핵심내용 |
비고 |
277번 제행무상 |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세계 등의 세계에서 모든 형성된 것은 실체가 없으므로(abbhavatthena, 압바왓테나)무상하다.” |
그 때 그 때 괴멸하는 것이 무상이다.
|
278번의 일체개고 |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세계 등의 세계에서 모든 존재의 다발은 억압되는 것이므로(patipilanatthanena, 빠띠삘라낫타네나)무상하다.” |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해서, 생겨난 것은 괴멸해야 하는 원리에 의해 고통받는다. |
279번의 제법무아 |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세계 등의 세계에서 모든 존재의 다발은 스스로 결정되지 않는 것이므로(avasavatthanatthanena, 아와사왓타낫타네나) 실체가 없다(annatta, 無我).” |
‘죽지 말고, 괴멸하지 말라’라고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전재성박사가 참고한 법구의석의 핵심은 ‘실체 없음(무상)’, ‘억압(고)’, ‘스스로 결정되지 않음(무아)' 이라 볼 수 있다.
아닛짜경(무상경, S21.1.1.2.1)에서
제행무상에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무상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은 무엇일까. 초기경을 보면 도처에 깔려 있다. 그 중에 상윳따니까에 아닛짜경(무상경)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감수는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지각은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형성은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거룩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아서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감수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지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 는 지혜가 생겨나서
'다시 태어남은 파괴되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다시는 윤회하는 일이 없다'
고 그는 분명히 안다.”
(아닛짜경-Anicca suttaṃ -Impermanent-무상경, 상윳따니까야 S21.1.1.2.1,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오온이 무상함을 말하고 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세상으로 본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은 ‘형성되어진 모든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오온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왜 무상한 것일까. 그 때 그 때 괴멸하는 것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의 눈으로 보았을 때 게송에서와 같이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보았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염오, 이욕, 해탈
이렇게 조건지워져 발생한 모든 현상이 무상함을 통찰 하게 되었을 때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경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라고 하였다. 이 문구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염오, 이욕, 해탈이라 하였다. 이 부분에 대한 두 번역자의 번역을 비교해 보았다.
빠알리어 |
전재성 박사 |
각묵스님 |
Nibbindaṃ virajjati, (닙빈당 위랏자띠) virāgā vimuccati, (위라가 위뭇짜띠) vimuttasmiṃ (위뭇따스밍)
|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
빠알리어 ‘닙빈당 위랏자띠 위라가 위뭇따스밍 위뭇짜띠(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라고 우리 말로 가급적 풀이하여 번역하였다.
반면 각묵스님은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라고 번역 하여 한자어를 이용하여 번역 하였다. 같은 빠알리어를 두고 양번역자의 번역 스타일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각묵스님의 음성강의 파일에서 늘 듣는 것은 염오, 이욕, 해탈에 대한 것이다. 이 들 용어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닛짜 경에서 보이고, 이 문구는 정형화 되어 있어서 초기경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오온도 미워 하는 대상일까
흔히 말하기를 해탈과 열반을 실현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싫어 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고 한다. 세상에 대한 애착이 없어야 된다는 말이다. 이 때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어떻게 싫어 하는 마음을 내야 할까. 경에 따르면 무상을 철저하게 자각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세상에 대하여 눈곱만큼이라도 미련이 남아 있다면 결코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용어가 빠알리어 ‘닙빈당 위랏자띠(Nibbindaṃ virajjati)’이다.
이 용어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싫어하여 떠나서”라고 하여 비교적 원어에 가까운 번역을 하였으나 각묵스님은 한자 용어를 사용하여 “염오하면서”라고 번역하였다.
염오에 대하여 국어사전을 찾아 보았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염오(厭惡)는 “마음에 들지 않고 싫어서 미워함.”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염오는 미움에 사무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염오를 사용한 아닛짜경의 오온에 대한 문구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도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각묵스님, 무상경-S22:12)
염오라는 말이 미워함의 의미라면 물질에 대해서도 미워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미워하고 등이 되어 버린다. 오온이 미워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
“탐욕이 빛바래고”
다음으로 빠알리어 위라가 위뭇짜띠( virāgā vimuccati)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사라지고”라고 번역하였고, 각묵스님은 “탐욕이 빛바래고”라고 번역하였다. “사라지고”와 “탐욕이 빛바래고”라는 두 개의 말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왜 이런 번역이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사라져서.. :
virajjati viraga. 이탐(離貪)을 뜻하기는 하지만 원래 빛이 바래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사라지고, 사라짐으로서' 의 뜻이다.
(전재성박사, 아닛짜경 주석)
위랏자띠 위라가(virajjati virago)가 ‘탐욕(virago)이 떠남’이라는 뜻인데, 이는 ‘빛이 바래지는’ 현상이라 한다. 아마도 주석에 그렇게 쓰여져 있어서 언급된 것이라 보여진다. 그래서 ‘탐욕이 떠난다’거나 ‘탐욕이 빛바랜다’는 표현을 사용 하지 않고, 다만 “사라지고”로 의역한 듯 하다.
하지만 각묵스님은 원어의 탐욕(viraga)이라는 용어를 살려 “탐욕이 빛바래고”라고 번역 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빛 바래고’라는 뜻이다. 그런데 경의 원문에 ‘빛 바랜다’라는 뜻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석을 참고하여 번역하였을 때
원문에 ‘탐욕을 떠난다’는 뜻의 ‘위라가자띠(virajjati)’는 있어도 경의 그 어디에도 ‘빛 바랜다’는 말을 찾아 볼 수 없다. 왜 이와 같은 번역이 나오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주석적 번역’을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전재성 박사의 법구경 담마파다 해제 글에 따르면 97번 게송 중에 빠알리어‘산딧체도(sandhicchedo)’ 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결박을 끊은 님’으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번역자들은 각각 “모든 속박을 끊고” “윤회의 속박을 끊고” “생사의 올가미를 끊고” “세속 굴레를 벗어 버리고” “윤회의 줄을 끊어 버리고” “생사윤회의 얽매임을 끊어 버리고”와 같이 번역 하였다고 한다. 원문에도 보이지 않는 ‘윤회’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이런 번역이 나온 것일까.
이렇게 타 번역자들이 원문에 없는 윤회를 집어 넣어 자유롭게 번역한 것은 주석을 보고 번역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주석은 원문을 설명한 것인데, 주석적 설명문을 보고 원문에도 없는 용어를 사용하여 자유롭게 번역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각묵스님이 번역한 “탐욕이 빛바래고”라는 문구에서 ‘빛 바래고’ 라는 문구는 원문에 없는 것으로서 아마도 주석을 참고하여 번역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를 입증하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탐욕의 빛바램(이욕, virāga)’이란 도(magga, 즉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이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는 것은 탐욕의 빛바램이라는 도에 의해서 해탈한다라는 과(phala)를 설하셨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라는 것은 여기서 반조(paccavekkhaṇā)를 설하셨다.(MA.ī.115 = 맛지마 니까야 뱀의 비유 경(M22) 29에 대한 주석)
또 다른 주석서를 인용하자면, “‘염오(nibbidā)’는 강한 위빳사나(balava-vipassanā)이고 ‘탐욕의 빛바램(virāga)’은 도이다. ‘해탈지견(vimutti-ñāṇadassana)’은 과의 해탈(phala-vimutti)과 반조의 지혜를 뜻한다.”(AA.īi.228) 이 주석서에서는 있는 그대로 알고 봄[如實知見]을 얕은 단계의 위빳사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
법구경 277번 제행무상 게송은
법구경 277번 제행무상 게송은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대 전제를 달아 놓고 그 해결책도 제시 하였다. 그것은 “지혜로 본다면,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 문구에 대한 근거가 바로 상윳따니까야 아닛짜경(무상경, S21.1.1.2.1)에서 보여지는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라는 문장이라 볼 수 있다.
형성된 모든 것이 변화하고 고정된 것이 없고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다. 그래서 오온의 괴로움을 싫어 하고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에 대하여 눈곱 만큼도 애착이나 미련을 가지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좋아하거나 미워 하는 감정이 있을 수 없다. 싫어 하여 떠나서 그 괴로움을 완전히 알게 되었을 때 진리를 꿰뚫게 된다고 한다.
삽베 상카라 둑카(Sabbe saṅkhārā dukkhā,일체개고)
다음으로 ‘삽베 상카라 둑카(Sabbe saṅkhārā dukkhā)’에 대한 것이다. 일체개고를 말한다. 법구경 게송 278번에 대한 내용이다. 이 때 한자어 일체는 삽베상카라를 말한다. 제행무상할 때의 삽베상카라(제행)와 같은 용어이다.
부처님은 왜 형성되어진 모든 것들이 괴로움이라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경전적 근거를 찾는다면 아마도 ‘담마짝까왓타나경(초전법륜경)’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Idām kho pana. Bhikkhave, dukkham ariya-saccām: jātipi dukkhā, Jrāpi dukkhā vyādipi dukkho, maraṇampi dukkham,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 piccam na labhati tampi dukkham, samkhittena pancupādanakkhandā dukkhā.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질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대상, 또는 싫어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만나고, 접촉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데 오취온(五取蘊)자체가 괴로움이다.”
(담마짝까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suttaṃ -초전법륜경,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에서)
경에서 생노병사 네가지 괴로움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대상과의 만남 등 고통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괴로움의 종류는 다음과 같이 정리 될 수 있다.
1. 태어남(jāti)
2. 늙음(Jrā)
3. 죽음(maraṇa)
4. 슬픔(soka)
5. 비탄(parideva)
6. 육체적 고통(dukkha)
7. 정신적 고통(domanassa)
8. 절망(upāyāsa)
9. 싫어하는 것과 만남(appiyasampayoga)
10.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piyavippayoga)
11.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icchitālābha)
12. 오취온(upādāna-kkhandha)
모두 12개로 정리 될 수 있는데, 경에서는 ‘오취온(upādāna-kkhandha)’ 자체가 괴로움이라 하였다.
왜 오취온이 괴로움의 근원이라고 하였을까
그렇다면 왜 오취온이 괴로움의 근원이라고 하였을까. 이에 대한 경전적 근거는 초기경 도처에 보이는데 그 중 둑카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괴롭고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올바른 지혜로서 여실하게 보아야 한다.
(양둑카경-Yaṃdukkha suttaṃ-괴로운 것, 상윳따니까야 S21.1.1.2.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이것은 내 것, 나의 자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오온 즉, 물질,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내 것, 나의 자아가 아님을 알라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오온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를 한자어로 줄이면 ‘오취온’이 된다.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해서, 생겨난 것은 괴멸해야 하는 원리에 의해 고통받는다는 뜻이 삽베 상카라 둑카이다. 이와 같은 괴로움으로 부토 벗어 나기 위한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법구경 인연담에 있다.
법구의석에 따르면 “존재의 다발은 억압되는 것이므로(patipilanatthanena, 빠띠삘라낫타네나)무상하다”하고 하였다. 생겨난 것은 소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의 모든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는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다’라는 말은
마지막으로 삽베 담마 아낫따(Sabbe dhammā anattā)에 대한 것이다. 제법무아를 말한다. 법구경 게송 279번을 말한다. 여기서 제법(Sabbe dhammā) 이라고 하는 것은 주석에 따르면 ‘오온’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아(anattā)라고 하는 것은 “‘죽지 말고, 괴멸하지 말라’라고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다’라는 말은 무슨 내용일까.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빤짜왁기야경이 그것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물질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빤짜왁기야경-Pañcavaggiya suttaṃ- The Five –다섯경, 상윳따니까야 S21.1.2.1.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오온 중 ‘물질’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만일 이 몸이 진정한 내 몸이라면 내 뜻대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몸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 몸이라고 여겼던 것이 늙어 가고, 병이 나기도 하는 것은 나의 통제 밖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몸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사 할 수 없다. 감수나 지각, 형성,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오온에 대하여 나는 아무런 통제권도 지배권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오온은 나의 것, 나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의 사실은 실체가 없다 (Sabbe dhammā anattā)’라고 하였다.
실감나는 말 “실체가 없다”
삽베 담마 아낫따(Sabbe dhammā anattā)는 한자어로 ‘제법무아’이다. 이를 전재성 박사는 “일체의 사실은 실체가 없다”라고 번역 하였다. 담마(법)에대하여 ‘사실’이라 하였고, 아낫따(무아)대하여 ‘실체가 없음’이라 하였다.
여기서 아낫따를 ‘실체가 없음’이라고 번역한 것은 매우 실감나는 말이다. 아낫따를 단지 ‘무아’나 ‘자아 없음’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오온 중 정신작용에 대한 것만 말할 수 있으나 실체가 없음이라고 번역한 것은 물질을 포함하여 감수, 지각, 형성, 의식에 이르기 까지 총망라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무아’라는 말 보다 ‘실체가 없다’라는 말이 더 실감나는 것이다.
삼법인과 열반과의 관계
이상 법구경의 277번의 제행무상, 278번의 일체개고, 279번의 제법무아에 대하여 경전적 근거를 들어 알아 보았다. 그런데 게송을 보면 일체라는 뜻의 삽베(Sabbe)가 쓰이고 있다. 그래서 제행은 무상한 것이고, 일체는 괴로움이고, 제법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 설명 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적용 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가지 예외가 있다. 그것은 열반이다.
불교 수행의 최종 목표는 열반이다. 그 열반에 대해서 삼법인의 적용대상이 다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삼법인 |
열반 |
비 고 |
제행무상 (Sabbe saṅkhārā aniccā) |
적용되지 않음 |
유위법 ( All conditioned things) |
일체개고 (Sabbe saṅkhārā dukkhā) |
적용되지 않음 |
유위법 ( All conditioned things) |
제법무아 (Sabbe dhammā anattā) |
적용됨 |
무위법 (All things) |
표를 보면 제행무상과 일체개고는 열반을 포함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법무아의 법칙에 열반이 포함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제법(Sabbe dhammā)이라는 말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의 주석에 따르면 아낫따(무아)라는 것은 유위법적인 ‘제행’이나 ‘일체’뿐만 아니라 무위법인 열반마저 관통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제행무상과 일체개고는 유위법을 말하고, 제법무아는 무위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유위법이라는 것은 형성된 모든 것을 말하며 또 다른 말로 조건 지워져 발생된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영어로 제행과 일체의 빠알리어인 삽베상카라(Sabbe saṅkhārā)에 대하여 ‘All conditioned things’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조건에 따라 발생된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반면 제법의 ‘삽베 담마(Sabbe dhammā)’에 대해서는 ‘All things’라고 표현 하였다.
한국불교가 일법인(一法印)이 된 이유
선사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마음에 대한 이야기, 업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런 이여기들을 많이 듣다 보면 어느 샌가 ‘마음타령’, ‘업타령’으로 변질 되곤 한다. 또 하나의 자주 하는 이야기가 ‘무상’에 대한 것이다. 주로 늙어 죽어 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나 오욕락의 허망함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선사들의 법문 중에 제행무상에 대한 이야기가 빠짐 없이 나오지만 일체개고나 제법무아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한국불교의 현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스님들이 제행무상에 이어 제법무아에 대한 법문을 하게 된다면 “이 몽띵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 놈은 무엇인고?”하는 화두선이 성립되지 않는다. 또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법문을 한다면 영가천도에 대한 모순이 발생한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우리나라 스님들은 무상에 대한 법문은 실감나게 하지만 제법무아에 대한 법문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삼법인이 1/3 법인 밖에 되지 않아 제행무상 ‘일법인(一法印)’이 되어 버린다. 그런 일법인도 온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자아를 기반으로 한 ‘무상타령’
삼법은 불교인지 아닌지 판단 하는 잣대라 하였다. 비록 겉으로 불교가 아닌 것 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용이 삼법인과 관련된 것이라면 불교로 인정할 수 있고, 겉 모습은 불교인 것 같은데 내용을 들여다 보면 삼법인과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은 결코 불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설령 1/3만 불교라고 볼 수 있을 지라도 끝까지 제행무상의 법칙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면 역시 불교라고 볼 수 없다. 이는 형성된 모든 것에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 주석에서도 제행무상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세계 등의 세계에서 모든 형성된 것은 실체가 없으므로(abbhavatthena, 압바왓테나)무상하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면 한국불교에서 선사들이 말하는 무상에 대한 법문은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한 무상이야기’라 볼 수 있다.
나이가 먹어 감에 따라 느끼는 세월의 무상함, 계절이 바뀜에 따라 느끼는 감정상의 무상함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무상이다. 그런데 이런 무상함을 느끼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자신이다.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한 무상을 말한다. 그래서 나이 들어 늙어 감을 슬퍼하는 것도 나이고, 낙엽이 떨어짐으로 하여 센티멘탈해지는 것도 나의 감정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한 무상함은 느낌일 뿐이다.
이처럼 나를 기반으로 한 무상함으로는 결코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없다. 그래서 법구경 게송 277번 에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지혜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제법무아를 말한다. 그래서 “모든 형성된 것은 실체가 없으므로(abbhavatthena, 압바왓테나)무상하다”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만일 누군가 제행무상만을 이야기 한다면 이는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한 ‘무상타령’을 하는 것임에 틀림 없다.
2012-08-2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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