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띠(sati)의 정확한 의미는? 마음챙김과 새김

담마다사 이병욱 2012. 8. 21. 17:50

 

사띠(sati)의 정확한 의미는?  마음챙김과 새김

 

 

 

 

각묵스님의 초기불교 강의

 

각묵스님의 동영상강의를 듣고 있다. 사미니승을 대상으로 한 강연한 것을 음성파일 형태로 초불카페에 올려진 것이다. 대상이 스님들이다 보니 일반재가자들을 상대로 한 강의와 다른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에 대하여 특별히 당부하는 말을 종종 듣늗다.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는 순간 공인이라거나, 스님들은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라는 말이 그것이다.

 

각묵스님의 강의는 여러 차례 들었다. 불교TV에서 여러 차례 방영한  초기불교에 대한 강의와 각종 강연회에서의 강의한 아미담마가 대표적이다. 이들 강의를 통하여 초기불교에 대한 교학의 체계를 이해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런 의미로 보았을 때 각묵스님의 초기불교 강의는 한국불교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각묵스님의 강의는 언제들어도 재미 있고 유익하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은 것은 초기불교의 교학체계를 아는 재미도 있지만 스님 특유의 개성때문이라 생각한다. 그저 듣기만 하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강의를 재미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 아는 이야기일지라도 일을 하면서 동시에 듣기도 하는데, 최근 올려진 강의에서 사띠(sati)’에 대한 이야기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0) 가 있었다.

 

사띠에 번역어 이야기는 늘 논쟁거리

 

사띠에 대한 번역어 이야기는 늘 논쟁거리이다. 지난 2009년도 인경스님에 의하여 제기된 사띠번역어 논쟁이 촉발된 이래 초기불교를 한다는 학자나 스님들이 나서서 모두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였지만 아직까지 결론이 난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두 제 각각의 번역어를 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인경스님은 사띠의 번역어 마음챙김에 대하여 비불교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왜 비불교적 이라고 하였을까. 법보신문에 따르면 마음을 챙긴다는 것은 제행무상법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마음은 끊임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인데 챙겨서 가질 수 있는 대상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챙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논란을 의식해서일까 이번 음성파일에서 각묵스님은 마음챙김용어에 대하여 상당한 시간을 할애 하여 설명하였다.

 

마음챙김은마음이 대상을 챙기는 것이라고

 

음성파일에서 각묵스님은 사띠 번역어가 단순한 마음챙김이 아니라 한다. 문자그대로의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챙김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마음챙김이란 마음이 대상을 챙김으로 정의 하였다고 한다. 요약하면 1)대상에 깊이 들어 가는 것, 2)대상을 거머 쥐는 것, 3)확립, 4)보호 이렇게 네가지라 한다. 이에 대하여 주로 청정도론의 근거를 들었고, 특히 경전적 근거로 운나바바라문경을 들었다.

 

챙긴다는 말은 어떻게 나왔을까

 

각묵스님이 말하는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챙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챙긴다는 말은 어떻게 나왔을까. 음성강의 파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띠는 철저하게 수행용어이기 때문에 기억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 그래서 수행에 맞는 번역을 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번역을 할 것인가. 그래서 운나바 바라문경에서는 사띠는 우리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죠. 그렇게 문답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해탈과 열반으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마음을 챙기는 역할을 한다. 혹은 마음이 대상을 챙겨서 해탈 열반으로 지향한다. 이래 되기 때문에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북방에서 안세고 스님은 아나빠나사띠숫따를 안반수의경이라고 옮겼습니다. 아나빠나는 들숨날숨인데 안반으로 옮기고 사띠를 수의(守意)’로 옮겼습니다. 사띠를 마음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지킴으로 해야하나 마음챙김으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옛날 스님들 번역과 경전적 근거가 충분히 있기 때문에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긴 것입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0:, 제18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하))

 

 

각묵스님은 두 개의 경전적 근거를 들고 있다. 하나는 운나바바라문경(S48:42)’이고,  또 하나는 2세기 중국에서 안세고 스님에 의하여 번역된 안반수의경을 들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들 경을 중요시 하고 있을까. 그것은 사띠에 대하여 우리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 주는 것마음을 지키는 것이렇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마음챙김이라고 번역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띠는 기억으로 번역하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번역어 마음챙김의 모순점 네 가지

 

이런 관점은 전재성박사의 주장과 매우 차이가 난다. 4부 니까야 완역자 전재성박사는 사띠를 새김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면 발생하게 될 모순점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싸띠는 내용적으로, 마음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것이며, 분별적 사유나 숙고에 휩싸이지 않고 대상을 알아채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을 단순히 고려한다면 싸띠를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으로 번역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을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몇 가지 모순을 갖는다.

 

첫째, 모든 가르침의 요소들이 마음과 관계되는 것인데 유독 싸띠에만 별도로 원래 없는 마음이라 단어가 부가될 이유가 없다.

 

둘째, 올바른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이라는 말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지향하는 올바른 정진과 특히 내용상 구분이 어려워 질 수 있다.

 

셋째, 네 가지 새김의 토대(사념처)에서 토대가 되는 명상주제의 하나에 마음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을 두고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챙김’이나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지킴’이라고 삼중적으로 번역하는 잘못이 발생할 수 있다.

 

넷째, 싸띠라는 빠알리어 자체는 마음은 커녕 챙김이나 지킴이라는 뜻도 어원적으로 없다.

 

(전재성박사, 싸띠(sati:)와 새김, 맛지마니까야 해제, 중요한 번역 술어에 대한 설명)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은 겉으로 보기에 마음챙김의 결합어로 보인다. 그런데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마음에 대한 것인데 사띠에다 없는 마음을 또 붙여서 마음챙김으로 하였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사띠라는 말 자체에는 그 어떤 마음과 관련된 어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사띠를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였을 때 사념처 중 심념처에서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챙김이 되어 버려 하나의 마음에 대하여 삼중적으로번역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띠의 어원을 보면

 

그래서 사띠는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는 것이 맞다고 한다. 그런 사띠에 대한 경전적 근거가 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 한다.

 

 

 

이 싸띠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직접 <<쌍윳따니까야>>에서 정의 내린 부분-‘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anussarati anuvitakketi),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한다.(S45:3)’-을 참고 하여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는 분명히 기억과 사유가 새김의 전제조건으로 확실한 싸띠에 대한 해석학적 설명, 즉 기억과 새김의 전제조건으로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싸띠라는 말은 범어의 스므리띠(smurti)의 빠알리어 형태로 원천적으로 기억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나,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이란 의미도 갖고 있으므로 그 둘 다의 의미를 지닌 우리 말을 찾던 역자는 새김이란 가장 적당한 번역어라고 생각했다.

 

새김은 과거에 대한 기억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조각(彫刻)-물론 사유를 은유적으로 이해할 때에-이라는 의미를 모두 함축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이 없이는 사물에 대한 지각을 올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재성박사, 싸띠(sati:)와 새김, 맛지마니까야 해제, 중요한 번역 술어에 대한 설명)

 

 

전재성박사의 해제글에 따르면 각묵스님의 주장과는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전박사는 사띠에 대하여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이라고 강조하였다. 반면 각묵스님은 음성강의에서 사띠는 수행용어이기 때문에 기억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고 강조 하였다. 대체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전재성박사와 각묵스님은 빠알리 니까야를 우리말로 옮긴 번역자들이다. 전재성박사의 경우 4부 니까야를 완역하였고, 그외 숫따니빠따와 법구경과 우다나 등 쿳다까니까야 일부도 완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빠알리 경전 번역자로 알려져 있다.

 

각묵스님은 4부 니까야 중 디가니까야와 상윳따니까야를 완역하였고 현재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강연등으로 초기불교를 전법하기 위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두 번역자의 번역에 대한 것을 보면 일부 용어에 있어서 상반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사띠 번역어가 대표적이다.

 

 

번역어마음챙김의 경전적 근거

 

사띠 번역어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각묵스님은 경전적 근거로서 운나바바라문 경을 들고 있다. 스님이 근거로 들고 있는 문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바라문이여, 이처럼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각각 다른 대상과 각각 다른 영역을 가져서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마음[]의지한다.

마음이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챙김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해탈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열반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그대는 질문의 범위를 넘어서버렸다. 그대는 질문의 한계를 잡지 못하였구나.

바라문이여,

청정범행을 닦는 것은

 

열반으로 귀결되고

열반으로 완성되고

열반으로 완결되기 때문이다.

 

(운나바 바라문 경, 상윳따니까야 S48:42, 각묵스님역)

 

 

경에서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라고 하였다. 각묵스님은 이부분을 매우 중시한다.  왜 그럴까. 마음챙김은 해탈과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의지하는 대상 순서로 나열하면 마음[]- 마음챙김-해탈-열반순으로 된다.

 

이렇게 마음챙김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징검다리이기 때문에 수행적 요소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사띠는 기억이 될 수 없고 챙겨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마치 화두 챙기듯

 

마치 화두 챙기듯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음성강의에서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그냥 멋대로 지 생각나는대로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긴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적어도 이런 두가지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겼고, 그리고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거의 대부분 마음챙김으로 통일 되고 있다는 겁니다.

 

챙긴다는 것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에서 수행법인 화두 챙기는 것, 화두를 챙긴다, 챙김이라는 말을 따와가지고 마음챙김이라 했습니다. 마음챙김이라는 단어 하나에 한국불교 전통수행법을 초기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수행법하고 연결시켜 주는 번역입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0:, 제18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하))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경전적 근거(운나바 바라문경과 안반수의경)와 더불어 한국의 화두선에 근거한 것이라 한다. 화두를 들 때 일반적으로 화두를 챙긴다라고 하는데, 그 때 챙긴다라는 말이 마음챙김과 같은 의미라 한다.

 

이와 같은 각묵스님의 주장에 따르면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은 단지 문자적 의미인 기억이 결코 될 수 없고 반드시 수행의 관점으로 파악해야 올바른 것이라 한다. 그래서 수행의 단계를 설명한 운나바바라문경에서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라는 문구를 이용하여 화두 챙기듯이 마음 또한 챙겨야 할 대상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전재성 박사는 이와 다르다.

 

번역어 새김의 경전적 근거

 

전재성 박사는 사띠 번역어 새김을 설명함에 있으서 역시 경전적 근거를 들었다. 각묵스님이 수행의 단계를 알려 주는 운나바바라문경을 들었다면, 전박사는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를 들었다.

 

 

Yasmi samaye bhikkhave, bhikkhu yathā vūpakaṭṭho viharanto ta dhamma anussarati anuvitakketi. satisambojjhago tasmi samaye tassa bhikkhuno āraddho hoti.

 

Satisambojjhaga yasmi samaye bhikkhu bhāveti, satisambojjhago tasmi samaye bhikkhuno bhāvanāpāripūri gacchati. So tathā sato viharanto ta dhamma paññāya pavicinati pavicarati parivīmasamāpajjati.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함으로서 비로서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시작된다.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깨달음 고리를 닦을 때에 수행승의 새김의 깨달음 고리는 닦임으로 원만해진다. 이와 같이 마음에 새겨 그 가르침을 지혜로서 탐구하고 조사하고 관찰한다.

 

(실라경-Sīlasutta-계행경, 상윳따니까야S45.1.3, 전재성님역)

 

실라경(계행경-S45.1.3).docx

 

 

 

보장가상윳따(Bojjhaga Sayutta,S45)에 실려 있는 실라경의 내용이다. 경에서 사띠에 설명이 보인다. 그것은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 (anussarati anuvitakketi)’으로 되어 있다.

 

깨달음의 연결고리에 있어서 사띠의 역할을 말한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함에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이를 잊지 않고 생각해 냄으로서 비로소 깨달음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새김의 깨달음 고리를 닦음 (Satisambojjhaga)’이라 표현 하였다. 

 

두 번역자의 입장차이를 표로 보면

 

이렇게 두 번역자의 사띠에 대한 인식차이가 큼을 알 수 있다. 이를 표로 정리하여 보았다.

 

 

사띠(sati) 번역어 대한 니까야 번역자의 입장

 

각묵스님

전재성박사

번역어

마음챙김

새김

번역어 관점

수행적 요소로 보아야

원어에 충실해야

경전적 근거

운나바 바라문 경

(상윳따니까야 S48:42)

실라경

(상윳따니까야S45.1.3)

 

Manassa kho, brāhmaa, sati paisaraa

Satiyā kho, brāhmaa, vimutti paisaraa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한다.

 

Yasmi samaye bhikkhave, bhikkhu yathā vūpakaṭṭho viharanto ta dhamma anussarati anuvitakketi. satisambojjhago tasmi samaye tassa bhikkhuno āraddho hoti.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함으로서 비로서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시작된다.

용어 설명

마음챙김을 "마음이 대상을 챙김"이라 정의한다.

새김은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라는 뜻이다.

용어 비판

(‘새김용어 비판)

 

사띠는 철저하게 수행용어이기 때문에 기억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

 

(‘마음챙김용어 비판)

 

1)모든 가르침의 요소들이 마음과 관계되는 것인데 유독 싸띠에만 별도로 원래 없는 마음이라 단어가 부가될 이유가 없다.

 

2)올바른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이라는 말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지향하는 올바른 정진과 특히 내용상 구분이 어려워 질 수 있다.

 

3)네 가지 새김의 토대(사념처)에서 토대가 되는 명상주제의 하나에 마음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을 두고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챙김’이나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지킴’이라고 삼중적으로 번역하는 잘못이 발생할 수 있다.

 

4)싸띠라는 빠알리어 자체는 마음은 커녕 챙김이나 지킴이라는 뜻도 어원적으로 없다.

 

기 타

한국불교 전통수행법을 초기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수행법하고 연결시켜 주는 번역어이다.

새김은 과거에 대한 기억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조각(彫刻)-물론 사유를 은유적으로 이해할 때에-이라는 의미를 모두 함축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이 없이는 사물에 대한 지각을 올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Mindfulness

 

 

 

대체 누구 말이 맞는가

 

이렇게 두 번역자의 사띠에 대한 관점이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사띠에 대하여 기억의 관점으로 보느냐, ‘수행의 관점으로 보느냐의 차이다.

 

각묵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기억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하였다. 철저하게 수행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성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화두는 무엇입니까? 화두야말로 가장 멋진 명상주제이고 마음챙김의 대상입니다. 화두를 챙기는 거잖아요. 그렇죠? 챙긴다는 표현을 쓰잖아요. 그래서 이런 발상구조가 초기경에서 말하는 수행의 발상구조와 똑같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마음챙김으로 대상이 굳게 이렇게 하고 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0:, 제18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하))

 

 

각묵스님은 마음챙김에 대하여 화두를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화두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이뭐꼬’ ‘판치생모’ ‘등의 화두는 늘 챙겨야 할 대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사띠 역시 수행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챙겨야 할 대상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사띠에 대하여 화두챙기듯이 마음챙김이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박사는 새김은 과거에 대한 기억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조각(彫刻)의 의미를 모두 함축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기억이 없이는 사물에 대한 지각을 올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을 강조 하였다.

 

사띠에 대하여 한편에서는 기억이라는 뜻으로 번역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또 한편에서는 사띠는 기억이라는 뜻이라 한다. 대체 누구 말이 옳은 것일까?

 

 

 

2012-08-21

진흙속의연꽃

실라경(계행경-S45.1.3).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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