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초기불교에 가장 가까운 수행법이 간화선이라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2. 8. 28. 18:35

 

초기불교에 가장 가까운 수행법이 간화선이라고?

 

 

 

 

저는 나름대로 간화선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초기불교의 이해 음성파일을 계속해서 듣고 있다. 음성파일 34오력에 대한 강의에서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저는 우리 간화선은 초기경에서 이야기 하는 오근, 오력과 배대해서 이해하면 된다. 간화선도 불교수행인 이상 불교 교학적인 입장에서 간화선을 어떤 식으로 든지 설명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특히 저는 무엇입니까. 초기불교를 전공하는 사람이잖아요. 저는 나름대로 간화선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4: 제23 오력, 제24 칠각지(전반부))

 

 

이 강의를 듣고 놀란 것 중의 하나는 각묵스님이 여전히 간화선 수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불교와 선불교의 추구하는 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초기불교를 연구하고 번역에 매진하고 있는 스님의 입에서 간화선 수행을 지금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리둥절할 뿐만 아니라 혼란 스럽다.

 

배대친다라는 말은 어떤 뜻일까

 

이어지는 강의에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 간화선을 초기경에 나타나는 수행법과 어떻게 배대를 칠것인가. 이건 저의 큰 관심이었고, 지금도 관심이고 앞으로 더 가능하다면 정교하게 더 다듬어 보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야 되겠지요. 그죠. 그래서 저는 간화선과 오근, 오력을 배대시켜 볼 수 있다 이말지요.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4: 제23 오력, 제24 칠각지(전반부))

 

 

스님은 간화선과 초기불교와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배다한다’또는 ‘배대친다’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말뜻은 무엇일까.

 

국어사전을 찾아 보았다. 인터넷국어사전에 배대한다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배대’라는 말 역시 없다. 그렇다면 ‘배다한다’또는 ‘배대친다’라는 어떤 뜻일까.

 

스님이 번역한 빠알리 니까야를 보면 ‘마음챙기다’ ‘잡도리 하다’라는 말이 있다. 모두 생소한 말이다.

 

빠알리어 사띠(sati)에 대하여 마음챙기다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마음챙기다라는 말은 사전에 없는 말이다. 신조어라고 볼 수 있다.

 

또 빠알리어 마나시까라(manasikara)’잡도리하다로 번역하였는데, 이 번역어는 사전을 찾아 보아야 한다. 사전을 찾아 보니 첫 번째 뜻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 족치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두 번째 뜻은 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우다이고 세 번째 뜻은 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루다.”로 되어 있다. 이 들 세 개의 뜻을 보아도 선뜻 의미가 들어 오지 않는다.

 

마나시까라의 영어표현은 ‘attention’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주의 기울임등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잡도리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런 잡도리하다라는 표현은 일상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고 선가에서 사용되는 용어라 한다. 선사들이 화두를 챙길 때 쓰는 표현이라 한다. 선가에서 사용되는 말을 빠알리 니까야의 번역어로 사용한 것이라 보여 진다.

 

그러나 보통불자들이 보기에는 매우 생소한 용어이다. 국어사전을 따로 찾아 보아야 하고, 사전을 찾아 보아도 선뜻 그 뜻이 다가 오지 않는다.

 

배대하다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라 보여진다. 국어사전에 없는 용어이지만 선가에서 사용되는 용어라 보여진다. 그런 배대하다’ ‘배대친다라는 용어는 대입하다또는 치환하다라는 용어와 같은 것이라 보여진다.

 

대신근과 대분지를 배대치면

 

그렇다면 각묵스님은 초기불교의 오근 또는 오력과 간화선의 요체와 어떻게 배대를 쳤을까. 이어지는 강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래서 간화선 하면 대신근, 대분지, 대의정 이것을 핵심으로 삼지요. 조사어록에 보면 대신근, 대분지, 대의정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솥의 세발과 같아서 이 셋이 튼튼하게 갖추어지지 않으면 화두는 결코 타파될 수 없고, 견성이 불가능하며, 간화선은 의리선이 될 수밖에 없다

대신근은 오근 오력의 믿음과 배대가 되고, 대분지는 정진과 배대가 된다. 그렇잖아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입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4: 제23 오력, 제24 칠각지(전반부))

 

 

간화선의 요체는 대신근, 대분지, 대의정 이렇게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 요소와 오근 또는 오력과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대신근은 믿음과 같은 것이라 하고, 대분지는 정진과 같은 것이라 한다.

 

대의정과 --(--)

 

그렇다면 대의정은 무엇과 같은 것일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초기불교의 이해에 실려 있는 내용을 읽어 준다. 그 내용은 불교신문 초기불교산책 컬럼에도 실려 있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셋째, 그러면 무엇이 대의정(大疑情)인가. 화두에 강력한 의정을 일으켜서 나아갈래야 나아갈 수도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도 없는 의단독로(疑團獨露)를 말한다. 간화선의 주창자인 대혜스님은 혼침.망회(昏沈.忘懷) 등과 도거.저의.관대(掉擧.著意.管帶) 등 두 가지의 선병(禪病)을 극복하지 못하면 생사윤회의 미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혜스님이 간화선을 주창하게 된 근본이유 중의 하나가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혼침과 도거(들뜸)를 제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혼침은 거듭거듭 화두를 제기함으로 극복되며 이런 화두의 제기는 바로 지혜, 즉 통찰지(
)의 기능이다. 도거 즉 들뜸은 적정처에서 면밀하게 화두를 듦에 의해서 극복되는데 이런 주도면밀함은 다름 아닌 고요함(, 삼매)을 말한다. 한편 이런 화두를 면밀하게 제기하는 것을 ‘우리는 화두를 챙긴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챙긴다는 것은 마음이 화두를 물샐틈없이 들고 있는 것을 말하며 이런 심리현상을 초기불교에서는 사띠(마음챙김, )로 표현하고 있다.

(각묵스님, 불교신문 초기불교산책 36, 2010년 9월 21)

 

 

스님은 대의정에 대하여 오근의 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 대의정은 --(--)와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오근과 간화선의 접목을 보면

 

이와 같은 스님의 주장을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오근

(pañca-indriya)

간화선 3요체

이유

믿음의 기능

(saddhā-indriya),

 

대신근(大信根)

-화두 자체를 믿음과 함께 화두를 제시해 준 스승의 가르침을 믿는 것

-<육조단경>에는 ‘능히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보라’고 말함

정진의 기능

(viriya-indriya)

 

대분지(大憤志)

-화두참구를 줄기차게 진행시켜 나아가는 정진

-해태하는 마음이나 그 외 불선법들이 마음에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고 간단없이 화두를 챙기려는 노력

알아차림의 기능

(sati-indriya)

대의정(大疑情)

혼침과 도거(들뜸)를 제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마음챙김

집중의 기능

(samādhi-indriya)

 

들뜸은 적정처에서 면밀하게 화두를 듦에 의해서 극복되는데 이런 주도면밀함이 고요함(, 삼매)을 말함

지혜의 기능

(paññā-indriya)

혼침과 도거(들뜸)를 제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통찰지의 기능

 

 

이렇게 각묵스님은 간화선의 대신근-대분지-대의단을 초기불교의 믿음-정진-마음챙김-삼매-통찰지(.精進...)의 오근.오력(五根.五力)과 같은 내용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각묵스님의 주장은 획기적인 것이다. 한국불교의 간화선과 초기불교의 수행방법과 접목을 시도한 것이고, 더구나 간화선의 3요체와 오근-오력이 같은 것이라는 주장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앞으로 분명히 주목받을 것

 

그래서일까 스님은 음성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정을 초기불교 수행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염..(..) 즉 마음챙김.삼매.통찰지의 셋이 조화롭게 개발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저자 등의 관점은 앞으로 분명히 주목받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4: 제23 오력, 제24 칠각지(전반부))

 

 

스님은 자신이 주장이 앞으로 분명히 주목 받을 것이라 주장한다. 특히 대의정에 대하여 --(마음챙김-삼매-통찰지)’로 보는 것을 말한다. 과연 이런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

 

버스웰 교수의 간화선 3요체 설명

 

로버트 버스웰 교수가 있다. 미국 켈리포니아 UCLA 석좌교수이자 동국대학술원장이다. 20대 초반 송광사에서 구산스님 밑에서 수년간 간화선 수행도 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세계적인 불교학 교수이다.

 

버스웰 교수는 불교TV에서 간화선 3요체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를 표로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고봉선사

대신근(大信根)

우리가 본래부터 부처이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함

“이것은 마음속에서 수미산에 기댄 것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대분지(大憤志)

열정적인 의도를 말함

“이는 친부를 죽인 범죄자를 맞닥뜨렸을 때 마음에 불끈 올라오는 분심, 이 악당을 단칼에 베고 싶은 분노와 비슷하다”

대의정(大疑情)

불안하고 두려워 하는 마음상태

“혼자 있을 때 뭔가 아주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데, 이것이 발각되기 직전에 느끼는 불안감과 비슷하다”

 

 

 

간화선에서 믿음이란?

 

간화선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다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믿음이란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지만, 간화선에서의 믿음이란 마음속에 있는 불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서 본래부터 우리가 부처이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고봉선사는 수미산에 기댄 것처럼 흔들림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간화선의 믿음이 초기불교의 믿음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근-오력의 믿음을 대신근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단칼에 베어 버릴 듯한 분노로

 

대분지도 마찬가지이다. 간화선에서 대분지는 열정적인 의도를 말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만났을 때 단칼에 베어 버릴 듯한 분노로 표시된다. 그런 분심에 대하여 정진과 같은 것으로 취급한 것 역시 무리가 있다. 초기불교에서 정진은 선법과 불선법을 가려서 선법이면 취하고 불선법이면 버리는 것을 말하는데 원수를 단칼에 베어 버릴 듯한 열정적인 분노와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믿음과 의심은 어떤 관계인가

 

더욱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대의정이다. 고봉선사는 대의정에 대하여 불안하고 두려워 하는 마음 상태라 하였다. 무언가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난 다음 발각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라 한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긴장상태가 존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버스웰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불교에서 밈음과 의심사이에 불가피하게 긴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내가 이미 깨달은 부처라는 사실을 받아 들이는 믿음과 “왜 깨달은 존재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거지?” “나는 부처야” 하는 믿음과 “나는 망상에 빠져 있어”라는 의심을 말한다. 선불교에서는 이 긴장을 깨달음을 이루는 촉매로 활용합니다. 

 

고봉선사는 이런 믿음과 의심이 일종의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고봉은 의심이 일어나는 정도는 믿음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와 일치하며, 믿음의 본질은 의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선불교에서는 의심이라는 것이 우리가 믿음을 가졋다는 사실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은 다름 아닌 우리가 본래부터 부처이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의심을 개발하면 깨달음을 이끌어 내는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주하는 사고방식에서 우리를 밀어내고 ‘나’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의심은 사실 믿음의 가장 깊숙한 후미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긴장이 열정적인 의도를 만들어냅니다. 답을 구하려고 애를 쓰다 너무나 좌절하다 못해 아버지를 살해한 자를 죽이려는 자식처럼 보이는 열정을 말합니다. 

 

공안에 의하여 일어난 의심을 대의정이라 합니다. 큰 의심의 감정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대의정 이외에도 수행의 과정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의심은 많습니다. 그런 의심은 평범한 삶에서도 의심은 일어나는데, 반드시 의심 뿐만 아니라 불안, 우려, 당혹감 등 누구에게나 항상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하여 고봉선사는 다 유용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심지어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작은 의심들도 큰 의심, 화두를 짓는데 사용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화두 수행을 통해 핵심적인 의정이 일어나고, 그 밖에 인생의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작은 의심, 어리둥절함, 교통체증으로 인한 짜증, 돈에 대한 걱정, 결혼 했으면 배우자, 스님이면 신도들에 대한 걱정, 우려, 의심들이 대의정을 중심으로 모여 대의정을 더 커지게 합니다.

 

이 모든 의심이 공안으로 일어난 의정을 중심으로 모이면 마음속에 압력을 더욱 거세게 하는데 도움을 주며 궁극적으로 공안을 해결로 이끕니다. 따라서 공안의 한 의심을 해결 할 수 있으면 어떠한 의심도 일으킬 수 없을 것입니다.  대의정이 핵이 되어 모든 의심을 다 해결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고봉선사는 이렇게 모든 의심이 사라지면 석가모니와 미륵과 똑같아 진다고 하였습니다. 석가모니는 현세불이고 미륵은 미래불이기 때문에 그들과 똑 같아 진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버스웰, 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28, 불교TV 2012-01-07)

 

 

버스웰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간화선에서 믿음(대신근)과 의심(대의정)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서로 긴장관계에 있고 동시에 공생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나는 이미 깨달은 부처다라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깨달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망상에 빠져 있어라고 하는 의심이 함께 병존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의심을 개발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화두 타파의 의미는

 

이렇게 내가 이미 깨달은 부처님임에도 불구 하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을 때 괴리감이 생겨 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 의구심, 당혹감, 짜증, 걱정, 스트레스 등이 자질구레한 것들이 뭉쳐서 하나의 의단을 형성 하게 되는데 이를 의정이라고 한다. 의정은 의심의 감정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정이 커져서 을 이루었을 때 대의정이라 한다. 대의정으로 인하여 마음속에서 압력을 더욱 거세게 받으면 궁극적으로 공안이 해결될 것이라 한다. 화두가 타파된 것을 말한다.

 

의심은 장애요인

 

이와 같은 버스웰 교수의 대의정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대의정의 기본이 되는 의심은 초기불교 입장에서 극복해야 할 장애 요인으로 보고 있다.

 

선정을 예로 든다면 선정을 방해 하는 요인으로서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악의(v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④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⑤ 회의적 의심(vicikichā)이 있다. 이를 오장애또는 오개라 한다. 이 오장애 안에 의심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심을 깨달으로 이끄는 수단으로

 

이렇게 초기불교 교학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의심은 매우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오히려 깨달음의 성취 수단으로 활용 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의심이 깨달음을 성취하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버스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오가 “금강검으로 의정을 절단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는 의심은 믿음 그리고 이해의 장애물이기 때문에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의심에 대한 원오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서 그것을 오히려 수행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주요한 힘으로 다시금 착상해 낸 것은 그의 유명한 제자인 대혜종고이다.

 

(로버트 버스웰, 간화선에 있어서 의정의 전환 고봉원묘의 증언, 불교tv 2011-11-01)

 

 

간화선을 주창한 대혜종고 스님 이전에 의심은 극복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믿음과 이해를 방해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혜종고스님은 스승인 원오스님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서 의심을 오히려 깨달음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동종요법(homopathy)

 

이와 같이 의심을 특징으로 한 간화선의 접근 방식에 대하여 버스웰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학적 접근방법인데요, 동종요법(homopathy)이라고 합니다. 오래된 의학법인데요, 동종요법은 병을 치료 하기 위하여 의사들이 아주 소량의 독극물을 사용하여 몸의 질병 극복반응을 촉발시켜 병을 치료 하는 것입니다.

 

몸에 안 좋은 독약을 사용하여 보다 심각한 질병을 낫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주 극소량의 비소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비소는 아주 위험한 독소이지요.

 

하지만 극히 미세한 분량을 처방하면 몸에 질병극복 반응을 촉발시켜 질병이 치유 될 수 있습니다. 꽤 오래된 의학이론으로 아마 신빙성을 잃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구의학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이론입니다.

 

(로버트 버스웰,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제 27, 불교TV 2011-12-13)

 

 

버스웰 교수는 동종요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독을 써서 병을 치료 하는 방법이다. 간화선도 마찬가지라 한다. 의심이라는 작은 번뇌를 이용하여 보다 큰 번뇌를 해결 하고자 하는 것이다. 화두를 이용하여 사량분별과 개념화를 방지함으로서 선불교식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각묵스님의 새로운 주장

 

이와 같은 방식이 기존의 간화선 수행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초기불교의 수행방식, 그것도 오근-오력의 수행방식과 간화선의 접목을 꾀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처럼 화두공부는 자성청정심과 선지식을 신뢰하는 믿음(), 분발하는 정진(精進), 화두를 챙기는 마음챙김(), 고요함(), 그리고 통찰지()라는 다섯 가지를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간화선의 대신근.대분지.대의단을 초기불교의 믿음.정진.마음챙김.삼매.통찰지(.精進...)의 오근.오력(五根.五力)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간화선의 의정(疑情)은 초기불교와 상좌부불교에서 강조하는 念(마음챙김).(선정).(통찰지)의 세 가지 심리현상이 극대화된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다.

 

간화선도 불교수행법인 이상 부처님의 가르침 특히 초기불전에서 그 이론적인 출처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한 간화선은 정통 수행법으로 인정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각묵스님, 불교신문 초기불교산책 36, 2010년 9월 21)

 

 

초기불교의 오근-오력과 접목된 간화선 수행방식이 아니라면, 기존의 간화선 수행방법은 정통 수행방법으로 인정받기가 어려울 것이라 한다. 하지만 오근-오력을 간화선의 3요체에 대입하여 설명한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특히 대의정이 그렇다

 

오근-오력의 역할을 보면

 

먼저 오근-오력의 역할에 대한 것을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표에서 믿음이 강화되면 미신이 되고, 정진이 강화되면 들뜸이 되고, 삼매가 강화되면 게을러지고, 통찰지가 강화되면 교활해진다고 하였다. 이를 잘 조절하는 것이 사띠라 한다. 그래서 사띠에 대하여 음식을 맛을 내는 소금이나 향신료또는 정치력을 발휘하는 대신으로서의 역할로 보기도 한다.

 

아니면 말고?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오근-오력에 있어서 사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간화선 3요체 중에 대의정을 염정혜로 묶어 놓았을 경우 사띠 역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대의정이 사띠이면서 동시에 삼매이고 지혜라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이 명확하지 않다. 단지 대신근을 믿음의 기능으로, 대분지를 정진의 기능으로, 대의정을 염정혜의 기능으로 구분 하였을 뿐, 대의정이 소금과 정치력을 발휘하는 대신 역할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일까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정을 초기불교 수행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염..(..) 즉 마음챙김.삼매.통찰지의 셋이 조화롭게 개발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저자 등의 관점은 앞으로 분명히 주목받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목 안 받으면 그만입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4: 제23 오력, 제24 칠각지(전반부))

 

 

염정혜를 대의정으로 묶어 설명한 것에 대하여 언젠가 주목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주목 받지 않아도 그만이라 한다. 어찌 보면 아니면 말고식 같다.

 

초기불교에 가장 가까운 수행법이 간화선이라고?

 

이와 같은 각묵스님의 음성강의를 듣고 많은 혼란을 느낀다. 그것은 초기불교와 간화선의 접목에 대한 것이다. 대신심과 대분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대의정을 염정혜로 본 것은 버스웰 교수의 강의나 조사스님들의 이야기에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양학자들도 특히 스리랑카에서 돌아 가신 아주 뛰어난 학자 한 분이 계셨거든요. 그분도 그렇습니다. 초기불교에 가장 가까운 수행법은 자기 생각으로는 북방 간화선이라 생각한다 그 학자도 그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4: 제23 오력, 제24 칠각지(전반부))

 

 

스님은 스리랑카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유명한 교수의 예를 들어 간화선의 수행방법이 초기불교 수행법과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갓쓰고 양복입은 것 처럼

 

그런 스님은 출가하여 7년간 간화선 수행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초기불교를 전공하고 있는 현재에도 간화선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모습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원융을 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원융이 마치 반야심경을 독송하면서 빠알리어 의식을 하는 것 같다. 어딘지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마치 갓쓰고 양복입은 것 처럼 보인다.

 

대체  스님은 간화선 수행을 하여 무엇을 얻기 위함일까. 간화선 수행에서 대신근이 본래 내가 부처임을 믿는 것이라는데, 그렇다면 본래 나를 찾는 수행을 하는 것일까.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놈은 무엇인고?”라는 이뭐꼬화두가 있듯이 혹시 각묵스님도 소소영영한 그놈을 찾는 수행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머리가 혼란 스럽다.

 

 

 

 

 

2012-08-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