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갈애에 끌려 다닌 늙은 인생
늙음의 품
1.
오, 어찌 웃고, 어찌 즐기는가?
언제나 세상은 불타고 있고,
그대들은 어둠에 덮여 있는데,
등불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146)
2.
보라. 아름답게 꾸며진 영상,
상처투성이로 세워진 몸,
고통스럽고 망상으로 찬 것,
영원하지도 않고 견고하지도 않다.(147)
3.
이 영상은 마침내 노쇠하고
질병의 소굴로 쉽게 부서진다.
이 부패한 축적물은 파괴된다.
삶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라.(148)
4.
참으로 가을에 버려진
이 호리병박들처럼
회백색의 해골들이 있다.
그것들을 보고 어찌 기뻐하겠는가?(149)
5.
뼈로 만들어지고
피와 살로 덧칠해진 도시,
거기에 늙음과 죽음과
자만과 위선이 감추어져 있다.(150)
6.
잘 꾸며진 왕의 수레도 낡아 가듯,
마찬가지로 몸도 또한 늙어 간다.
그러나 참사람의 가르침은 부패하지 않는다.
참사람이 참사람에게 전하기 때문이다.(151)
7.
배우지 못한 사람은
황소처럼 늙어간다.
그의 살은 뚱뚱해지지만
그의 지혜는 자라지 않는다.(152)
8.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153)
9.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154)
10.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고기 없는 연못에 사는
늙은 백로처럼, 죽어간다.(155)
11.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누워서 옛날을 애도한다.(156)
(늙음의 품, 법구경 Dhp146-156, 전재성님역)
나이를 먹음에 따라 늙어 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더구나 해 놓은 것도 없고,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도 없는데 나이만 먹어 죽음에 이르렀을 때 ‘비참한’ 심정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리얼(real)한 이야기
초기경전은 대승경전과 달리 매우 솔직하고 소박하다. 일반적으로 인도영화와 같은 것으로 표현되는 대승경전에서 늙음이나 죽음 등 어두운 면을 찾아 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삼매의 경지에서 본 행복과 희열, 평정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승경전이나 선어록에 표현 되어 있는 문구는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현실은 선정삼매의 경지와 다른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는 희로애락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 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표현 되어 있는 문구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리얼(real)한 이야기 들이 많다.
법구경에서 본 늙음에 대한 이야기 역시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느끼는 감정은 비슷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구경에만 늙음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의 ‘늙음의 품(Jarāvagga)’
법구경에 ‘늙음의 품(Jarāvagga)’이 있듯이 상윳따니까야에서도 역시 같은 이름의 품이 있다. 똑 같은 제목의 ‘늙음에 대한 품(Jarāvagga)’이 있다. 모두 10개의 짤막한 경으로 이루어져 있는 ‘늙음의 품’은 다음과 같다.
1) 늙음(Jarāsuttaṃ)
[하늘사람]
"무엇이 늙을 때까지 좋고 무엇이 좋은 의지처이며
무엇이 인간의 보물이고 무엇이 도둑이 빼앗기 어려운 것입니까?"
[세존]
"계율이 늙을 때까지 좋은 것이고 믿음이 좋은 의지처이며
지혜가 인간의 보물이고 공덕이 도둑이 빼앗기 어려운 것이네."
2) 늙지 않음으로(Ajarasāsuttaṃ)
[하늘사람]
"무엇이 늙지 않음으로 좋고 무엇이 좋은 의지처이며
무엇이 인간의 보물이고 무엇이 도둑이 빼앗지 못하는 것입니까?"
[세존]
"계율이 늙지 않음으로 좋고 믿음이 좋은 의지처이며
지혜가 인간의 보물이고 도둑이 빼앗기 어려운 것은 공덕이네."
3) 벗(Mittasuttaṃ)
[하늘사람]
"무엇이 나그네의 벗이며 무엇이 자기 집의 벗입니까?
무엇이 일이 생길 때의 벗이고 도데체 무엇이 앞날의 벗입니까?"
[세존]
"대상(隊商)이 나그네의 벗이며 어머니가 자기 집의 벗이네.
친구가 일이 생길 때 언제라도 자신의 벗이고
스스로 지은 공덕이 다가올 앞날의 벗이네."
4) 의지처(Vatthusuttaṃ)
[하늘사람]
"무엇이 인간의 의지처이고 이 세상에서 최상의 벗은 누구입니까?
땅에 의존하는 뭇삶들은 도데체 어떤 존재들이 키웁니까?"
[세존]
"아들이 인간의 의지처이고 최상의 벗은 아내이네.
땅에 의존하는 뭇삶들은 비의 신들이 그들을 키운다네."
5) 사람 (Paṭhamajanetisuttaṃ)
[하늘사람]
"무엇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 무엇이 사람을 방황하게 하며
무엇이 윤회에 떨어지고 무엇이 사람의 큰 두려움입니까?"
[세존]
"애욕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 마음이 사람을 방황하게 하며
생명이 윤회에 떨어지고 괴로움이 사람의 큰 두려움이네."
6) 사람 2( Dutiyajanetisuttaṃ)
[하늘사람]
"무엇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 무엇이 사람에게서 방황하며
무엇이 윤회에 떨어지고 무엇에서 해탈하지 못합니까?"
[세존]
"애욕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 마음이 사람에게서 방황하며
생명이 윤회에 떨어지고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하네."
7) 사람 3( Tatiyajanetisuttaṃ)
[하늘사람]
"무엇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 무엇이 사람에게서 방황하며
무엇이 윤회에 떨어지고 무엇이 사람의 운명입니까?"
[세존]
"애욕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 마음이 사람에게서 방황하며
생명이 윤회에 떨어지고 업(業)이 사람의 운명이네."
8) 사도(邪道, Uppathasuttaṃ)
[하늘사람]
"무엇이 사도라고 불리고 무엇이 밤낮으로 사라지며
무엇이 청정한 삶의 티끌이고 무엇이 물이 필요 없는 목욕입니까?"
[세존]
"탐욕이 사도라고 불리고 젊음이 밤낮으로 사라지는 것이며
사람들이 애착하는 이성(異性)은 청정한 삶의 티끌이네.
고행과 청정한 삶이 물이 필요 없는 목욕이네."
9) 친구( Dutiyāsuttaṃ)
[하늘사람]
"무엇이 사람의 친구이고 무엇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며
무엇을 기뻐하여 사람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납니까?"
[세존]
"믿음이 사람의 친구이고 지혜가 사람을 가르치며
열반을 기뻐하여 사람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네."
10) 시인(Kavisuttaṃ)
[하늘사람]
"무엇이 시의 기초이고 무엇이 시의 기호이며
무엇이 시의 기댐이고 무엇이 시의 터전입니까?"
[세존]
"운율이 시의 기초이고 문자가 시의 기호이며
이름이 시의 기댐이고 시인이 시의 터전이네."
(자라왁고, Jarāvaggo-늙음의 품, 상윳따니까야 S 1.6, 전재성님역)
상윳따니까야에서 보는 늙음에 대한 이야기는 법구경과 달리 감상적인 내용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부지런히 공덕을 쌓을 것과 해탈 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숫따니빠따의 자라경 (Jarā suttaṃ, Sn4.6)
늙음에 대한 이야기는 숫따니빠따에서도 보인다. 자라경 (Jarā suttaṃ, Sn4.6) 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숫따니빠따에서 보는 늙음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자라경의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세존]
“참으로 사람의 목숨은 짧으니
백 살도 못되어 죽습니다.
아무리 더 산다 해도
결국은 늙어 죽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은 내 것이라고 여겨 슬퍼합니다.
참으로 소유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알고,
재가의 생활에 머물지 마십시오.
3.
사람은 ‘이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죽음으로 그것을 잃게 됩니다.
현명한 나의 벗은 이와 같이 알고
내 것이라는 것에 경도되지 말아야 합니다.
4.
꿈속에서 만난 사람을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다시 볼 수 없듯,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습니다.
5.
살아서 이름이 불리던 사람들은
눈으로 보여지기도 하고
목소리로 들려지기도 하지만,
그들이 죽어버린다면,
이름만이 남아 불려질 뿐입니다
(자라경-Jarā suttaṃ, 숫따니빠따 Sn4.6, 전재성님역)
숫따니빠따에서 본 늙음에 대한 이야기는 법구경 못지 않게 감상적이다. 백년도 살기 힘든 몸에 대하여 ‘내 것’이라는 애착을 가지지만 죽음으로서 잃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나면 꿈속의 사람을 볼 수 없듯이 죽은 자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한다. 죽은 자는 단지 이름만 남길 뿐이라 한다.
이렇게 숫따니빠따에서는 늙음과 죽음을 연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에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6.
내 것이라는 것에 탐욕을 부리면,
걱정과 슬픔과 인색함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안온을 보는 성자는 소유를 버리고 유행하는 것입니다.
7.
홀로 명상하며 유행하는 수행승이
정신적으로 멀리 떠남을 좋아하고
처소에서 자기를 들어내지 않는다면,
그에게 어울리는 일(*1)이라 말합니다.
주해(*1) 세 가지 어울리는 일(三和合)이 있는데,
거기에는 ‘무리에 의한 화합, 가르침에 의한 화합, 다시 태어나지 않음에 의한 화합’이 있다.
8.
성자의 삶을 사는 자는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1),
결코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슬픔도 인색함도,
연꽃잎 위의 물이 더럽혀지지 못하듯,
그를 더럽히지 못합니다.
9.
연꽃잎 위에 물방울이 묻지 않듯,
연꽃 위에 물방울이 더럽혀지지 않듯,
보여진 것과 들려진 것과 인식된 것에
성자는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10.
보여진 것과 들려진 것과 인식된 것을
청정한 님은 그것과 함께 생각하지 않으며,
다른 것에 의해서 청정을 원하지 않으니,
그것들에 탐착하지 않고,
따라서 탐착을 떠나려 하지도 않습니다.
주해(*1) ‘열두 가지 감각의 장(十二處)’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라경-Jarā suttaṃ, 숫따니빠따 Sn4.6,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로지 고통에 대한 것이라면, 세상사람들은 염세주의자로 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고통에 대한 이야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해결방법까지 제시 하였으므로 오늘날 까지 법의 바퀴가 굴러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숫따니빠따에서 늙음의 허무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였다면 오늘날 까지 전승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라경의 후반부에서 늙음과 죽음을 극복한 성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같은 경이지만 전반부의 감상적인 이야기와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마지막 게송에서 부처님은 “보여진 것과 들려진 것과 인식된 것을 청정한 님은 그것과 함께 생각하지 않으며”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보여지는 대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다름 아닌 ‘알아차림’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탐착에서 떠날 것이라 한다.
“세상은 불타고 있고”
이렇게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늙음과 죽음 등 우리들이 만나기 싫은 것에 대하여 감상적으로 이야기 하였지만 이를 극복 하는 방법까지 제시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법구경에서는 어떤 식으로 제시하였을까. 법구경 늙음의 품 중 일부 게송에 대하여 주석과 타경전을 인용하여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번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오, 어찌 웃고, 어찌 즐기는가?
언제나 세상은 불타고 있고,
그대들은 어둠에 덮여 있는데,
등불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Dhp146)
게송에서 “세상은 불타고 있고”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상윳따니까야 “일체가 불타고 있다”라는 구절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아딧땅경- Ādittaṃ -Burning-연소경, 상윳따니까야 S34.3. 6, 전재성님역)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일체’가 불타고 있다고 하였다. 법구경에서는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일체’와 ‘세상’은 같은 의미이다. 이러한 일체와 세상은 다름 아닌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그런 ‘불’은 어떤 것일까.
경에서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 이라고 하였다. 모두 11가지이다. 그런데 법구경 주석에 따르면 약간 다르다. 탐욕, 성냄, 환상, 질병,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절망, 과도한 노력 이렇게 11가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중 눈의 띄는 것은 ‘과도한 노력’이다. 과도한 노력도 불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삶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라”
3번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3.
이 영상은 마침내 노쇠하고
질병의 소굴로 쉽게 부서진다.
이 부패한 축적물은 파괴된다.
삶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라.( Dhp 148)
게송에서 “삶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라”이라 하였다. 사람이 늙어서 결국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특히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이 더 그렇다.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대왕은 어떠할까.
상윳따니까야에서 대왕과 부처님의 대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존]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뭇삶은 죽어야 하는 것이고 죽음을 끝으로 하는 것이며 죽음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마치 옹기장이가 만든 옹기는 구워지지 않은 것이든 구워진 것이든 어떤 것일지라도 그 모두가 부서져야 하는 것이고 부서짐을 끝으로 하는 것이며 부서짐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뭇삶은 죽어야 하는 것이고 죽음을 끝으로 하는 것이며 죽음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삶은 죽음에 이르네.
삶은 그 끝을 죽음으로 삼으니
행위를 하는 그대로 좋고 나쁜 과보를 받네.
나쁜 일을 한 사람은 지옥으로 좋은 일을 한 사람은 하늘나라로 간다.
오로지 좋은 일을 해서 내세를 위해 공덕을 쌓아라.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의 의지처가 되리.”
(아야까경-Ayyakāsuttaṃ-할머니경, 상윳따니까야 S3.3.2, 전재성님역)
빠세나디왕이 자신을 키워준 120세가 되는 할머니가 임종에 이르자 부처님에게 묻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누구든지 죽음은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공덕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만약 부처님이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하였다면 ‘단멸론자’로 몰렸음에 틀림 없다. 그리고 가르침이 오늘 날까지 전승되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죽기 전에 많은 공덕을 지어 놓을 것을 강조 하였다. 내세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잘 꾸며진 왕의 수레도 낡아 가듯”
6번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6.
잘 꾸며진 왕의 수레도 낡아 가듯,
마찬가지로 몸도 또한 늙어 간다.
그러나 참사람의 가르침은 부패하지 않는다.
참사람이 참사람에게 전하기 때문이다.(151)
화려하게 치장된 왕의 수레도 낡아 가듯이 사람의 몸 또한 늙어 갈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게송과 똑 같은 내용이 상윳따니까야에 보인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대왕이여,
늙음과 죽음을 면하는 자는 없습니다."
대왕이여,
부유하고 돈이 많고 호화롭고 금과 은이 많고 재산이 많고 재물과 곡식이 풍부한 권세있는 귀족이라도 그들 태어나는 자들 가운데 늙음과 죽음을 면하는 자는 없습니다.
대왕이여,
부유하고 돈이 많고 호화롭고 금과 은이 많고 재산이 많고 재물과 곡식이 풍부한 권세 있는 성직자라도 그들 태어나는 자들 가운데 늙음과 죽음을 면하는 자는 없습니다.
대왕이여,
번뇌를 다한 아라한이고 수행이 원만하며 해야 할 일을 다 했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다운 이익에 도달했고 생존의 속박을 끊었으며 올바른 지혜를 지니고 해탈한 수행승들이라도 그들에게도 이 몸은 부서져야 하고 버려져야 합니다.
아름다운 대왕의 수레도 낡아가고
신체도 점점 늙어가지만
참다운 법은 노쇠함에 이르지 않으니
참 사람들은 참 사람과 함께 말하네.”
(라자경-Rājasuttaṃ.- The King-왕경, 상윳따니까야 S3.1.3, 전재성님역)
꼬살라상윳따에서 빠세나디왕과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왕이 “태어나는 자 가운데 늙음과 죽음을 면하는 자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은 “늙음과 죽음을 면하는 자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꼬살라국의 빠세나디 대왕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단 한가지 예외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참사람이다. 여기서 참사람은 불사의 흐름에 든자로서 특히 아라한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오도송
다음으로 8번과 9번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8.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 Dhp 153)
9.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Dhp 154)
이 두 개의 게송은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오도송’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두 개의 게송에 대하여 거해스님의 번역과 비교해 보았다.
빠알리어 |
전재성박사역 |
거해스님역 |
Anekajātisaṃsāraṃ ~ sandhāvissaṃ anibbisaṃ (Dhp153) |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 |
한량없는 세월의 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둑카였네.
|
Gahakāraka diṭṭhosi! ~ Puna gehaṃ na kāhasi: (Dhp154) |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
아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닙바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 |
빠알리어 게송 중에 ‘위상카라가땅 찌땅(Visaṅkhāragataṃ cittaṃ)’이 있다. 에 문구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라고 번역하였고, 거해스님은 “나의 마음은 닙바나에 이르렀고”라고 번역하였다. 이로 미루어 판단하였을 때 전재성박사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한 ‘직역’이라 볼 수 있고, 거해스님의 경우 원문에 없는 닙바나가 들어가 있어서 ‘의역’이라 볼 수 있다.
물웅덩이에 배를 깐 수메다존자
153번 게송에서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Gahakārakaṃ gavesanto)”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았다.
나는 개인이라고 하는 집을 지은 자인 갈애(愛, tanha)를 찾아서 오랜 세월 백천의 거듭 태어남으로 이루어진 윤회를 하는 동안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유행해 왔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인 디빵까라( Dipankara, 연등불)의 발아래 엎드렸다.
(전재성 박사, ‘법구경 담마파다’의 주석)
주석에 따르면 ‘연등불의 발아래 엎드렸다’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 장면은 부처님이 보살로 삶을 살아 갈 때인 ‘수메다(Sumeda)존자’의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북방불교에서는 ‘선혜동자’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수메다 존자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현자 수메다(Sumeda)는 부모가 돌아가시자 막대한 부를 물려 받았다. 그러나 그 재산이 결코 만족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아니라고 깨달은 그는 그 재산을 버렸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가서 수행자가 되었다. 그는 곧 명상수행으로 깊은 선정을 얻게 되었고,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디빤까라붓다(Dapankara Buddha)가 람마와띠 마을에 올 것이라는 소식을 수행자인 수메다가 들었을 때 붓다가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준비 하였다.
붓다가 도착할 때까지 그는 여전히 길 주변을 정리 하고 있었지만 움푹패인 더러운 물 웅덩이가 있어서 미래의 붓다가 되기를 맹세한 그는 거기에 엎드리기로 하였다.
그의 옆에는 수밋따(sumitta)라 불리우는 젊은 아가씨가 연꽃 여덟송이를 들고 있었는데, 이중 다섯송이를 수행자에 주고 그녀 자신은 3송이를 들고 있었다.
디빤까라붓다 가 도착 하고 이런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을 때 수메다는 미래의 붓다가 될 것을 수기 하였고, 젊은 아가씨 수밋따는 그의 동료이자 조언자가 될 것이라고 또한 말씀 하셨다.
( http://phramick.wordpress.com/2009/07/24/life-of-the-buddha/에서 번역함)
디빵까라 부처님은 과거불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따진다면 과거 25불에 속한다. 그런 디빵까라 부처님이 아득한 과거에 출현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수메다 존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움푹 패인 물웅덩이에 배를 까는 장면에 대한 것이다.
“세계는 갈애에 의하여 이끌어진다. (taṇhāya nīyati loko)”
게송에서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집짓는 자’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집짓는 자’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고통은 멈추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집짓는 자’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라고 하였다. 그 집을 짓는 자는 다름 아닌 ‘갈애’이다.
갈애는 무명과 더불어 윤회를 하게 하는 요인이다. 갈애는 미래의 결과에 대한 원인제공을 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본다. 그래서 갈애가 있는 한 윤회를 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갈애의 특징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하늘사람]
“무엇이 세상을 이끌고 무엇에 의해 끌려 다니며
어떠한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합니까?”
[세존]
“갈애가 세상을 이끌고 갈애에 의해서 끌려 다니며
갈애란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네.”
(딴하경-Taṇhāsuttaṃ- Craving-갈애경, 상윳따니까야 S1.7.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계는 갈애에 의하여 이끌어진다 (taṇhāya nīyati loko)’라고 하였다. 갈애 때문에 세상이 생겨 나고 세상에 끌려 다니고 윤회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집을 짓는 자는 갈애인 것이다.
갈애에 끌려 다니기만한 인생
이와 같이 한 생이 갈애에 끌려 다니기만 하였을 때 그 결과는 어떨까. 다음 게송이 이를 잘 말해 준다.
10.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고기 없는 연못에 사는
늙은 백로처럼, 죽어간다.( Dhp 155)
11.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누워서 옛날을 애도한다.( Dhp 156)
156번 게송에서 “청정한 삶(brahmacariyaṃ)”이란 좁은 의미로 ‘순결을 지키는 삶’을 말하고, 넓은 의미로는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사무량심을 실천하는 삶’을 말한다. 그러나 젊은 시절 청정한 삶도 살지 못하고 재산도 모으지 못 한 자에 대하여 ‘고기 없는 연못에 사는 늙은 백로’로 비유 하였다.
또 156번 게송에서는 ‘쏘아져 버린 화살’로 비유하였다. 화살이 활에서 쏘아지면 순간적으로 빠른 속도로 날아간 뒤에 바닥에 떨어진다. 그것을 주어 다시 활에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경우도 목숨이 다하면 죽음을 만나서 다시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 살아 날 수 없다고 한다.
“누워서 옛날을 애도한다.”
이와 같은 고기 없는 연못에 서 있는 ‘늙은 백로’와 쏘아져 ‘버려진 화살’과 같은 늙은이는 죽음에 이르러 “누워서 옛날을 애도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고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놀고 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이와 같이 먹었고, 이와 같이 마셨다.’라고 통곡하고 애통해 하며 회상하고 후회하며 누워 있게 된다.
(전재성 박사, ‘법구경 담마파다’의 주석)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되어 버린 늙은 이가 지난 날을 회상하는 장면에 대한 것이다. 한 평생 먹고 마시고 노는데 모든 시간을 허비한 것에 대한 후회이다.
늙어 가는 사람에게
초기경에서 부처님의 제자가 부처님에게 묻는 장면을 종종 보게 된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야 이 거센물결을 건널 수 있습니까?”와 같은 질문이 대표적이다.
이런 질문을 한 목적인 무엇일까. 그만큼 ‘다급하다’는 것이다. 그 제자에게 있어서 ‘생’과 ‘사’를 가를 정도로 시급한 것이기 때문에 질문한 것이다.
만일 이런 질문에 대하여 “차나 한잔 마시게”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더 심하게 ‘할’이나 ‘방’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그 제자는 나름대로 판단을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초기경을 보면 부처님은 제자들의 간절한 질문에 답을 해 준다. 그것도 그것도 핵심을 가로지르는 명쾌한 답변이다. 늙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라 본다.
법구경에 늙음, 분노, 갈애 등의 26가지 주제가 있다. 이런 주제가 설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늙어 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생과 사를 가를 정도로 심각한 것이라면 그에 대한 바른 답변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답변을 법구경 뿐만 아니라 상윳따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고, 숫따니빠따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늙음에 대한 처방은 사성제를 설명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사성제에서 고통에 대한 문제를 먼저 제기하고, 그 다음에 해결방법을 함께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반드시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2-08-29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팔정도 정형구에 대한 번역어 비교 (0) | 2012.09.01 |
---|---|
제관(祭官, Brahmin)으로서의 성직자 (0) | 2012.08.31 |
초기불교에 가장 가까운 수행법이 간화선이라고? (0) | 2012.08.28 |
“큰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성자의 삶, 날라까경( Sn3.11) (0) | 2012.08.27 |
법구경에서 본 삼법인, 아닛짜(무상) 둑카(고) 아낫따(무아) (1) | 2012.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