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제관(祭官, Brahmin)으로서의 성직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2. 8. 31. 18:15

 

제관(祭官, Brahmin)으로서의 성직자

 

 

 

 

브라흐마나담미까경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Brahmanadhammikasutta](*1)

 

 

주해(*1)

이 경은 참다운 바라문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설하는 법문이다.

그것을 설하게 된 인연담이 이 경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 경은 옛날 바라문들이 행했던 바라문의 삶을 비교하여 당대의 바라문의 타락한 삶의 원인을 규명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서 부처님의 탁월한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부처님 이전에 인도는 이미 철기문명시대에 접어들었다. 국가는 정복전쟁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은 제사의식을 통해 그 부를 공유하면서 타락해왔다.

부처님은 이러한 역사적인 과정을 냉철한 이성으로 비판하고 있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사왓티 시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다까 승원에 계셨다.

 

2.

마침 그때 많은 늙고 연로하고 나이가 들고 만년에 이르러 노령에 달한, 꼬쌀라 국의 큰 부호들인 바라문들이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았다.

 

3.

그들은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드리고 서로 안부를 주고받은 뒤에 한쪽으로 물러 앉았다. 한쪽으로 물러 앉아 그들 큰 부호들인 바라문들은 세존께 여쭈었다.

 

[바라문들]

“고따마여, 대체 현재의 바라문들은 옛날 바라문들이 행하던 바라문의 삶을 따라 살고 있다고 봅니까?

 

[세존]

“바라문이여, 지금의 바라문들은 예전 바라문들이 행하던 바라문의 삶을 따라 살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4.

[바라문들]

“그러면 고따마여,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옛날 바라문들이 행하던 바라문의 삶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세존]

“그러면 바라문들이여, 잘 듣고 새기십시오. 내가 말하겠습니다.

 

[바라문들]

“세존이시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들 바라문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5.

 [세존]

“옛날에 살던 선인들은 자신을 다스리는(*1) 고행자(*2)였습니다.

그들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버리고,

자기의 참된 이익을 위해 유행하였습니다.

 

6.

그들 바라문들은 가축도 갖지 않고, 황금도 곡식도 갖지 않고,

그러나 베다의 독송을 재보와 곡식으로 삼아,

하느님의 보물을(*3) 지켰던 것입니다.

 

7.

갖가지 채색으로 물들인 의복과 잘 만들어진 침상과

주거를 갖춘 풍요로운 지방과 왕국의 사람들은

모두들 바라문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8.

바라문들은 처형을 면하고 재산의 압류를 면하였으며,

정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4)

또한 그들이 집집마다 방문하더라도,

아무도 그들을 결코 방해하지 않았습니다.(*5)

 

 

주해(*1)

‘계행의 제어를 통해서 마음을 다스리는’의 뜻이다.

 

주해(*2)

 ‘감각능력의 수호를 통해 고행을 닦는 자’를 말한다.

 

주해(*3)

 하느님의 보물 즉, 하느님의 삶 또는 청정한 삶을 말한다.

 

주해(*4)

 원래는 ‘바라문들은 살해될 수 없고 정복될 수 없고 그들은 법의 보호를 받았다’는 뜻이다.

 

주해(*5)

‘사랑스런 자로서 인정받고 탁월한 계행을 갖춘 그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것처럼 깊은 신뢰를 보여주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라고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9.

그 옛날 바라문들은 48년 동안이나 동정을 지키며 청정한 삶을 살았고(*1),

명지와 덕행을 구했습니다.

 

10.

그 후에 바라문들은 다른 계층으로 가서 아내를 구하지 않았고,

아내를 사지도 않았습니다.(*2)

그들은 오로지 사랑하면서 함께 살고 화목하여 즐거웠습니다.

 

11. 월경기간이 끝난 후에, 바른 시기를 제쳐두고,

그 사이에 바라문들은 결코 성적 교섭을 갖지 않았습니다.

 

12. 청정한 삶과 계행을 지키는 것,(*3)

정직하고, 친절하고, 절제하고, 온화하고 남을 해치지 않는 것,

그리고 또한 인내하는 것을 칭찬했습니다.

 

13. 그들 중에서 으뜸가는 용맹스런 바라문들은 성적 교섭에 빠지는 일을

꿈속에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주해(*1)

 바라문의 삶은

1) 범행의 삶 - 베다를 학습하는 청년기를 말한다.

2) 재가의 삶 - 집에서 세속적인 삶을 사는 가장의 삶을 말한다.

3) 숲 속의 삶 - 세속을 떠나 숲 속에 사는 삶.

4) 유행의 삶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해(*2)

동정의 청정한 삶을 산 뒤에는 그 후에 가정생활을 도모하면서 다른 계층 즉, 왕족이나 평민 등의 다른 계층으로 가지 않았고, 그들은 백이나 천 냥을 주고 아내를 사지 않았고, 다른 바라문의 문전에서 ‘나는 48년간이나 동정을 지키는 청정한 삶을 살았으니 적령기의 딸이 있다면 나에게 주십시오’라고 청원했고, 적령기의 딸이 있는 경우에 그녀를 치장하여 데리고 나와 문밖에 서있는 바라문의 손에 물을 뿌리고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 아내를 잘 보살펴 주길 바란다’라고 건네주었다. 이러한 주석서의 기록은 계급의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계급끼리의 결혼인 내혼제도에 대한 언급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이러한 계급제도가 사회 경제적인 이유로 흔들리고 있었다.

 

주해(*3)

청정한 삶은 ‘성적 교섭을 삼가는 삶’을 의미한다. 그런데 계행을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불교 이전에는 5계가 함께 모아져있지 않았던 것을 의미한다.

 

 

14.

그 행동을 본받아 이 세상에 일부 양식있는 사람들은

청정한 삶을 사는 것과 계율을 지키는 것과

인내하는 것을 찬탄했습니다.

 

15.

그들은 쌀과 침구와 의복과 버터와 기름을

정의롭게 모아 그것으로 제사를 지냈고,

제사를 지낼 때 결코 소를 잡지 않았습니다.

 

16.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 또는 다른 친척들과 마찬가지로

소들은 우리들의 최상의 벗입니다.

그리고 소들한테서는 약들이(*1) 생깁니다.

 

17,

소들은 음식을 제공하고, 근력을 제공하고, 훌륭한 용모를 제공하고,(*2)

또 좋은 건강을 제공합니다. 소에게 이러한 이익이 있음을 알아,

그들은 소들을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18.

바라문들은 손발이 부드럽고 몸이 크며 용모가 단정하고 명성이 있으며,

몸소 실천하며 할 일은 하고 해서 안 될 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 세상 사람들은 안락하고 번영했습니다.

 

 

주해(*1)

다섯 가지 유제품 즉, 우유, 크림, 신선한 버터, 버터기름, 버터기름의 크림을 말한다.

 

주해(2)

 이것에 대해 주석서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소가 제공하는 비타민이 함유된 다섯 가지 유제품을 우리가 먹으면 우리의 피부도 건강해지고 광택이 난다는 의미이다.

 

 

19.

그런데 하잘 것 없는 것에서 하잘 것 없는 것,(*1)

왕자의 영화로운 삶과 화려하게 단장한 부인들을 보고나서,

그들에게 전도된 견해가(*2) 생겨났습니다.

 

20.

잘 만들어지고 아름답게 수놓아진 준마가 이끄는 수레,

여러 방으로 나눠지고 잘 배치된 주택과 거처를 보고 나서입니다.

 

21.

소들의 무리에 둘러싸이고 아름다운 미녀들이 뒤따르는

인간의 막대한 부를 누리고 싶은 열망에

바라문들은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22.

그래서 그들은 베다의 진언들을 편찬하고, 저 옥까까(*3)왕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바라문들]

‘당신은 재산도 곡식도 풍성합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보(*4)가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물이(*5) 많습니다.

 

23.

그래서 수레위의 정복자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말의 희생제,

인간의 희생제, 핀을 던지는 제사, 쏘마를 마시는 제사,

아무에게나 공양하는 제사, 이러한 제사를 지내고,

바라문들에게 재물을 주었습니다.

 

 

주해(*1)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오는 하잘 것 없는 쾌락을 말한다. 그러한 즐거움은 선정이나 천정한 삶이나 열반에서 오는 즐거움에 비하면 열악하고 소량이고 부정한 것이다.

 

주해(*2)

전도된 견해를 말한다. ‘무상을 무상이라고 하는 것,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지각의 전도가 아니고 마음의 전도가 아니며 견해의 전도가 아니다’ 따라서 전도된 견해란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알고,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이라고 알고,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다고 아는 것이다.

 

주해(*3)

왕으로 싸끼야 족과 꼴리야 족의 조상이다. 한역에서는 감자왕(甘蔗王)으로 불린다. 부인을 총애하는 옥까까 왕은 그 부인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다른 아내의 나이든 왕자들을 쫓아냈다. 이 왕자들의 이름이 옥까무카, 까라깐다, 핫티나까, 씨나뿌라였다. 그들은 히말라야 산 기슭에서 살면서 싸끼야 족을 이루었다.

 

주해(*4)

만족을 주는 금이나 은 같은 재보를 말한다.

 

주해(*5)

번영을 가져오는 부()를 말한다.

 

 

24.

소들과 침구와 의복, 잘 치장한 여인들,

잘 만들어지고 아름답게 수놓아진 준마가 이끄는 수레,

 

25.

여러 방으로 나뉘어 있고 잘 배치된,

즐길 수 있는 주택을 여러 가지 식량을 가득 채워

바라문들에게 재물로 주었습니다.

 

26. 이리하여 그들은 재물을 얻어 축적하는데 재미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욕망에 깊이 빠져들었고, 그들의 갈애는 더욱더 늘어만 갔습니다.

그래서 베다의 진언들을 편찬하여 다시 옥까까 왕을 찾아갔습니다.

 

27.

[바라문들]

‘물과 토지와 황금과 재물과 곡식이 살아있는 자들의 필수품인 것과 같이,

소도 사람들의 필수품입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물이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보가 많습니다.

 

28.

그래서 수레위의 정복자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수백 수천 마리의 소를 제물로 잡게 되었습니다.

 

29.

두 발이나 양 뿔, 어떤 것으로든지 해를 끼치지 않는 소들은

양처럼 유순하고, 항아리가 넘치도록 젖을 짤 수 있었는데,

왕은 뿔을 잡고 소를 죽이게 했던 것입니다.

 

30. 칼로 소들이 베어지자 신들과 조상의 신령과 제석천(*1)

아수라(*2) 나찰(*3)들은 ‘불법적인 일이다’고 소리쳤습니다.

 

 

주해(*1) inda :

 인드라신을 말한다. 인드라 신은 번개의 신으로 부처님 당시에 인도인들이 가장 섬기던 신이었다. 유목민이었던 인도 아리아인들은 우기에 풍요로운 비로 농사를 지으며 정착할 수 있어서 비를 오게 하는 번개를 최고의 신으로 숭배했다.

 

주해(*2) asura :

한역에서는 아수라(阿修羅)라고 하는데, 아수라는 불교에서 아귀 축생 지옥과 함께 네 가지 나쁜 곳(惡處)에 속하는 존재이다. 상윳타니까야 등의 경전에서 신들과 아수라들의 전쟁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신들에게 도전하는 무리들이다.

아수라의 왕은 아쑤린다(Asurinda)라고 불린다. 그들도 원래 도리천에서 신들과 함께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역사적으로 인도유럽인들의 민족이동과 관계된 신이다.

아수라는 원래 태양신을 말한다. 원래 인도유럽인들의 신이었으나 기원전 3000년경부터 우랄산맥의 남쪽에서 민족이동을 시작하면서 인도페르시아 쪽으로 들어가던 민족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일부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지 못하고 페르시아로 들어가고 일부는 그것을 넘어 인도로 들어가 인더스강의 모헨조다로 하랍빠 문화를 쳐부수고 인도에 정착하였다.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 민족의 태양신인 아후라(ahura <->asura)가 인도에 와서는 당연히 원수나 적으로서의 아수라가 된 것이다.

 

주해(*3) rakkhasa :

악마의 종족들인데, 야간에 활동하는 해로운 귀신들이다. 그들은 물속에 살면서 목욕하는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바다에 산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이 칼로 소들을 잡아먹자 ‘불법적이다’라고 소리 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악마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다른 야만족의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31.

예전에는 탐욕과 굶주림과 늙음의 세 가지 병밖에 없었소.

그런데 많은 가축들을 살해한 까닭에 아흔여덟 가지나 되는 병이 생긴 것입니다.

 

32.

이와 같은 불의의 폭력으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것을 죽인다는 것은 그 옛날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지내는 자들은 정의를 파괴하였던 것입니다.

 

33.

이와 같이 옛날부터 내려온 풍습은 지혜로운 이의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볼 때마다 제사지내는 자를 비난하게 되었습니다.

 

34.

이렇게 해서 법이 무너질 때,

노예와 평민이 나누어지고,

여러 갈래로 왕족들이 분열하고,

아내는 지아비를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35.

왕족들이나 하느님의 친족들

또는 종족에 의해 수호되고 있던 다른 자들도

태생에 대한 윤리를 버리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36.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그들 대 부호인 바라문들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바라문들]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보이듯이,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이,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존이신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재가신자로서 저를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

 

 

*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이 끝났다. *

 

 

(브라흐마나담미까경-Brāhmaadhammikasutta -The Brahmin Dhammika-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2.7, 전재성님역)

 

  브라흐마나담미까경(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docx

 

 

 

 

Tamil Brahmin Hindu Marraige

 

 

 

 

“스님들이 너무 럭셔리해요.

 

“스님들이 너무 럭셔리해요.” 휴심정에 실린 법안스님의 글(중생 아픔 무관심해야 훌륭한 스님?)중 일부이다. 외국인들이 내소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였는데, 템플스테이를 마치고 난 후 소감문이라 한다. 절의 사무실 방마다 컴퓨터가 있고 스님들 대부분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가 하면 승용차까지 보였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이는 겉모습만 가지고 평가 한 것이다. 천도재와 관련하여 어느 법우님은 다음과 같은 댓글을 주셨다.

 

 

친지어른의 49재.....
돈통이 끝까지 따라다니더군요....
퍽 잘 사는 집안인지라 참석하신 분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따로 두둑이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참석하신 종교를 떠나서 모이신 분들....
한숨 섞인....
불교가 정말 이럴줄 몰랐다....
~~~~

 

(법우님 댓글)

 

 

49재와 관련하여 직접 경험한 법우님의 글이다. 만일 외국인들이 이런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어떤 말이 나오게 될까.

 

바라문은 어떻게 타락하였는가

 

브라흐마나담미까경은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이다. 경의 주석에 따르면 바라문의 타락한 삶의 원인을 규명한 경이라 한다. 예전의 바라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타락해 왔을까. 그것은 경에서 볼 수 있다.

 

경에 따르면 바라문이 타락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제사를 들고 있다. 제사의식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면서 타락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진언’을 만든 것이다. 베다경전을 독송하기 보다 알아 들을 수 없는 베다진언을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다음으로 대규모 동물희생제를 장려 하였다. 그래서 바라문들은 왕에게 당신은 재물이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라고 제사공덕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러자 왕은 소 희생제, 말 희생제 등 갖가지 명목의 제사를 치루었는데, 제사를 치루고 난 후 모든 재물을 바라문에게 주었다. 그 결과 바라문들은 매우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Brahmin)’이 된 바라문 들은 재물을 축적하는데 재미를 붙어 더욱더 많은 제사를 치루게 되었는데, 그 규모가 갈수록 커져 소 등의 동물을 수백 수천마리나 죽이는  대규모 동물희생제로 발전 되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본 동물희생제

 

이와 같은 대규모 동물희생제가 부처님 당시에도 대 유행하였는데,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런데 그때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이 큰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5백 마리의 큰 황소와 5백 마리의 숫소와 5백 마리의 암소와 5백 마리의 산양과 5백 마리의 양들이 제사를 위해서 기둥에 묶여 있었다.

 

또한 왕의 노예와 심부름꾼과 하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짐승을 도살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공포에 떨며 슬픈 얼굴로 울면서 제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많은 수행승들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싸밧티로 들어갔다. 싸밧티에서 탁발을 하고 식사를 마친 뒤 발우를 물리고 나서 세존께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예배를 올리고 한쪽으로 물러앉았다. 한쪽으로 물러앉아서 그들 수행승들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이 커다란 제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5백 마리의 큰 황소와 5백 마리의 숫소와 5백 마리의 암소와 5백 마리의 산양과 5백 마리의 양이 제사에 쓰이기 위해 기둥에 묶여 있습니다. 또한 왕의 노예와 심부름꾼과 일꾼들도 있었는데 그들도 짐승을 도살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공포에 떨며 슬픈 얼굴로 울면서 제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얀냐경-Yaññasutta- A Sacrifice –제사경, 상윳따니까야 S3.1.9, 전재성님역)

 

  얀냐경(제사경-S3.1.9).docx

 

 

 

꼬살라국의 빠세나디왕이 대규모 동물희생제를 준비하고 있는 장면이다. 황소와 양등 수천마리의 동물이 제사를 위하여 준비 중에 있었는데, 이를 탁발 나간 제자들이 본 것이다.

 

왜 희생제를 준비 하였을까

 

그렇다면 빠세나디왕은 왜 이와 같은 대규모 희생제를 준비 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빠쎄나디는 우연히 성에서 얼굴을 마주친 한 여인에게 사랑에 빠져 그녀를 차지할 욕심

으로 그녀의 남편을 제거하고자 했다.

 

죄많은 사랑 때문에 밤마다 왕은 꿈속에서 시달렸다. 왕은 한 바라문에게 해몽을 부탁했다. 그 바라문은 큰 희생제를 통해서만 위협적인 공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왕은 큰 희생제를 준비하도록 시켰고,그때 사람들도 희생시킬 계획이었다.

 

(얀냐경 주석)

 

 

붓다고사의 주석에 따르면 빠세나디 왕이 바라문의 꿈해몽에 따라 제사를 지내려 한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을 바쳐 큰 제사를 지내면 위협과 공포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수고만 있을 뿐 공덕은 크지 않네

 

이렇게 바라문의 말만 믿고 제사를 강행하려 하자 이를 알게 된 왕비 말리까가 부처님에게 찾아갔다. 부처님은 게송을 읊어 주었는데, 이 게송을 전해 들은  빠세나디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동물희생제와 같은 대규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게송은 다음과 같다.

 

 

[세존]

"말을 희생하고 사람을 희생하는 제사

나무봉을 던져 제단을 쌓는 제사

승리의 축배를 드는 제사, 무차(無遮)의 제사는

많은 수고만 있을 뿐 공덕은 크지 않네.

 

산양과 양과 소 등을 희생하는 그 곳

올바른 길을 가는 지혜로운 자는 그러한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네.

 

거창한 행사 없이 언제나 순조롭게 행하는

산양과 양과 소 등을 희생하지 않는 제사

올바른 길을 가는 지혜로운 사람은 그러한 제사에 참여하며

현자들은 살생이 없는 제사를 행하니 그 제사는 큰 공덕을 가져온다네.

 

훌륭한 제사를 행하는 자에게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일은 없네.

살생이 없는 제사는 위대한 것 하늘사람조차 기뻐한다네."

 

(얀냐경-Yaññasutta- A Sacrifice –제사경, 상윳따니까야 S3.1.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희생제 등과 같이 살생하여 벌이는 제사는 공덕이 크지 않다고 하였다. 널리 대중들에게 베푸는 무차의 제사가 공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생명을 희생하는 식의 제사를 부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이 제사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살생이 없는 제사는 큰 공덕을 가져 온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천도행위는 있을 수 없다

 

초기경전에 제사에 대한 내용은 많이 보인다. 그런 제사는 천도재와 다른 것이다. 우리나라 절에서 볼 수 있는 49재와 같은 영가천도재는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치루는 불교의식으로 국어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이로 보았을 때 한국불교에서는 영혼을 인정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  

 

하지만 자아나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천도행위는 있을 수 없다. 죽자 마자 재생하기 때문이다. 마치 마음이 새로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으로 표현 된다. 즉, 현재의 마음이 조건에 따라 다음 마음이 일어 나듯이 죽음과 재생 역시 그와 같은 과정으로 본다. 그래서 죽음과 재생은 ‘무간’이라 한다. 틈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아비담마 24가지 조건 중에 ‘틈 없이 따르는 조건(등무간연, samanatara-paccaya)’과 ‘서로 지탱하는 조건(상호연, aññamañña paccaya)’과 ‘함께 생긴 조건(구생연, sahajāta paccaya)’ 으로 설명된다.

 

왜 제사를 지내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제사를 지내는 것일까. 그것은 죽은 친척이나 조상을 위로 하기 위해서이다. 악처에 떨어진 사람들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일까. 불교방송 불교강좌(12연기와 위빠사나) 에서 묘원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악처 중에서 세 번째인 아귀의 세계가 있습니다.

아귀를 원래는 ‘뻬따’ 라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이것을 ‘귀신’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아귀는 원래 조령신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에서 후손들이 올리는 음식을 기다리는 자들이라는 뜻에서

불교에서는 굶주린 귀신으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아귀는 사는 여경이 따로 없이 숲이나 습지나 묘지 등 인간이 사는 세계에서 같이 산다고 전해집니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간혹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고 천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삐로꾸따경에 나오듯이 이들 가운데 빠라따뚜 빠지위노만이

살아있는 친척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공덕을 나누어 줄 때

그 공덕을 누릴 수가 있고 더 나은 선처로 나아갈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부의 아귀사는 악업으로 인해 이러한 아귀로 태어난 중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묘원법사, 불교방송 불교강좌  제 53회 12연기와 위빠사나)

 

 

죽은 조상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미덕인데, 특히 사악처 중 아귀계에 떨어진 조령신에게 공덕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아귀는 는 자신의 영역이 따로 없다고 한다. 그래서 숲이나 습지나 묘지 등 인간이 사는 세계에서 같이 산다고 한다. 인간으로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데, 그들 스스로 모습을 드러 낼 수도 있고 천안으로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이처럼 보시에 의하여 먹고 살아가는 아귀를 빠라다뚜 빠지위까 뻬따(Paradatu-Pajivika Peta)라 한다.

 

죽은 자를 위하여 할 일은 무엇인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아귀가 공덕을 받아 들이지 않는 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살아 생전에 좋지 못한 관계이었거나, 원한을 품고 죽었다면 아무리 공덕을 배풀어도 찾아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죽은 자를 위하여 할 일은 무엇인가. 죽은 자를 기념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그를 위해서 ‘선업(善業)’을 쌓는 일이라 한다. 선업공덕을 쌓는 것이 죽은 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제사공덕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잘못된 견해란 어떠한 것인가?

 

‘1)보시에는 공덕이 없다.

2)제사의 공덕도 없다.

3)공양의 공덕도 없다.

4)선악의 과보도 없다.

5)이 세상도 없고

6)저 세상도 없다.

7)어머니도 없고

8)아버지도 없다.

9)마음에서 홀연히 생겨나는 존재도 없다.

10)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해 곧바로 알아서 스스로 깨달아 가르치는 착하고 덕 있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세상에 없다.’

 

라고 한다면, 이것이 수행승들이여, 잘못된 견해이다.

 

(마하짜따리사까경- 커다란 마흔의 경, 맛지마니까야 M1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유물론 자들의 삿된 견해 열 가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모두 없다로 끝나는 것 중에 제사공덕도 포함 되어 있다. 제사공덕이 없다는 것은 삿된 견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제사공덕을 인정한 것이다.

 

‘제관(祭官, Brahmin)’으로서의 성직자

 

숫따니빠따 브라흐마나담미까경에 따르면 순수한 제사가 생명희생제로 변질 되면서 법도가 무너졌다고 하였다. 동물희생제 등 각종 명목의 제사가 대유행하게 되었는데, 제사를 주관한 브라만들은 재물이 늘어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욕망에 빠져 들어 갈수록 갈애만 늘어 났다고 한다. 예전에 베다를 독송하고 고행을 하고 4주기의 청정한 삶을 살아가던 그런 브라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대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고 희생제 등 각종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Brahmin)’으로 변질된 것이다.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으로서의 성직자의 모습을 한국불교에서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각종 명목의 기도와 제사가 끊이지 않는 한국불교에서 이를 주관하는 스님의 모습에서 부처님 당시 제관(祭官, Brahmin)’이나 가톨릭의 사제(司祭)’의 모습이 떠 올려 지는데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2012-08-31

진흙속의연꽃

 

브라흐마나담미까경(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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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냐경(제사경-S3.1.9).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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