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심심해! 심심해!” 따뜨라 따뜨라 아빈난디니( 여기저기서 즐길거리를 찾는)

담마다사 이병욱 2012. 9. 3. 22:26

 

심심해! 심심해!” 따뜨라 따뜨라 아빈난디니( 여기저기서 즐길거리를 찾는)

 

 

 

 

가장 강력한 삶의 방식

 

좌선할 때 5분 이상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눈을 감고 대상에 대하여 마음을 집중할 때 온 갖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꼼짝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좌선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삶의 방식이라 말한다.

 

일반적인 삶의 방식

 

사람들은 조금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다. 늘 좋은 것, 즐거운 것을 찾아 눈을 두리번 거린다. 그리고 거기에 몰두 한다. 몰두 하다 보면 재미가 있고, 재미가 있다 보면 자꾸 하고 싶어 진다. 그래서 심심한 것을 참지 못한다. 무료 하고 권태로운 것을 못 참는 것이다.

 

무의식으로 라디오를 틀고 TV리모콘을 손에 잡는다. 그것도 재미가 없으면 책을 떠 들어 본다. 또 항상 좋아 하는 음악을 듣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아는 사람을 불러 내어 잡담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끊임 없이 무언가 재미 있는 것을 찾아 다닌다. 이쯤 되면 참을 수 없는 무료함이나 권태는 거의 공포에 가깝다. 그런 공포를 잊어 버리기 위해서일까 끊임 없이 흥미를 찾아 대상에 몰두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삶의 방식이다.

 

 

 

boring

 

 

 

초전법륜경 집성제에서

 

이와 같이 권태를 이기지 못하여 끊임 없이 즐길 것을 찾아 가는 행위를 무엇이라 할까. 초전법륜경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Idam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dukkha-samudayo ariya saccām:    둑카사무다얌 아리야삿짬

Yayam tahā ponobhavika          야얌 딴하 포노바위까

nandiragasahagata                난디라가사하가따

tatra tatrabhinandini . . .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seyathidam,                      세이야티담

kamatahā,                       까마딴하

bhavatahā,                      바와딴하

vibhavatahā.                    위바와딴하

 

“비구들이여,

집성제(集聖諦)란 무엇인가?

그것은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고 만족을 찾는 것이다.

무엇이 갈애인가?

 

그것은 세 가지가 있는데,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

 

(집성제, 초전법륜경,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

 

 

 

 

 

초전법륜경의 집성제의 내용이다. 사성제 중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것이다. 괴로움이 일어 나는 원인에 대하여 명확히 규정하여 놓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따뜨라 따뜨라 아빈난디니(Tatra tatrā-abhinandini)

 

집성제에서 눈에 띄는 용어가 여기저기서 즐기고 만족을 찾는 것이라는 말이다. 집성제에 대한 설명에서 핵심어는 바로 여기저기서 즐기고 만족을 찾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는 따뜨라 따뜨라 아빈난디니(Tatra tatrā-abhinandini)“이다. “여기 저기서 즐긴다는 뜻이다. 여기 저기서 즐길 것을 찾는 갈애 때문에 괴로움의 원인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기 저기서 즐길 거리를 찾는 갈애가 일어 나면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온다고 하였다. 갈애로 인하여 윤회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오게 한다는 뜻이 빠알리어로 뽀노바위까 (ponobhavikā)’라 한.

 

마하시사야도의 주석에 따르면 뽀노바위까(ponobhavikā) pono(다시)+bhavikā(존재하게 하는 것)의 합성어로, '다시 존재하게 하는 것', 또는 ‘재생을 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술어는 갈애(taha)가 있는 한 윤회는 다시 태어남(jāti)을 일으킨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오게 하는 갈애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경에 따르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 비존재에 대한 갈애 이렇게 세 가지이다. 이중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가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오는 (ponobhavikā, 뽀노바위까)’ 것이다. 여기 저기서 즐길거리를 찾기 때문이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이와 같은 갈애는 목이 마르고 배고픈 것과 같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을 일으키는 것 같고, 배가 고프면 참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형상, 소리, 냄새, 맛 등 감각대상에서 즐거움을 찾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저기 이리 저리 즐길거리를 찾아 나서는데, 절대로 지치거나 지겨워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즐길거리를 찾는 것은 상류층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아도 즐기면서 살아 가기 때문이다. 부자는 부자나름대로 즐길거리를 찾아서 살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 나름대로 즐길거리를 찾아 살기 때문이다.

 

이런 즐길거리를 찾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축생에서도 볼 수 있고 미물에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은 이리 저리 즐길거리를 찾아 즐기기 때문에 재생을 가져와 윤회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남(ponobhavikā, 뽀노바위까, 再生)’을 가져올까

 

이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있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실려 있는 은 짬뻬야 용왕우빨리 왕비의 이야기이다.

 

 

짬뻬야 용왕 이야기

 

보살은 전생의 어느 때 쌈빠 강 부근의 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짬뻬야라는 용왕이 누리고 있는 즐거운 삶을 부러워하게 된 보살은 보시와 지계의 선업을 쌓는데 매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죽은 뒤에 용의 세계에 화생化生하게 되었고 이어서 완전한 형체와 모양새를 갖춘 용으로 짬뻬야 용왕의 왕좌에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 nāga)은 뱀의 일종입니다. 사람에서 뱀으로 재생한다는 것은 정말로 무섭고도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보살은 자신의 혐오스럽고 끔찍스런 새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보시와 지계라는 선업의 과보로 나는 육욕천六欲天4 중 어느 한 곳에 날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용왕의 즐거움을 바랐기 때문에 이 파충류의 세계에 재생하였다. ! 뱀으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으리라.”보살은 심지어 자살할 궁리까지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수마나라는 젊은 용녀龍女 다른 젊은 용녀들에게 새 왕을 환대하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젊은 용녀들은 아름다운 천녀와 여신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갖가지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래, , 음악으로 자신을 환대하는 아름다운 여신들을 보고 짬뻬야 용왕은 자신의 용궁이 마치 천인의 궁전인 것처럼 생각되어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는 자기도 천인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용녀들과 함께 환락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보살이었기 때문에, 현실감각을 쉽게 되찾아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바라밀, 즉 보시와 지계 같은 덕성을 더 닦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결심을 잘 실천하여 짬뻬야 용왕은 인간세계에 다시 태어나서 숲의 은둔처를 찾아가 계율을 잘 지켰습니다.

 

(집성제, 초전법륜경,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

 

 

이 짬뻬야 용왕이야기에서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사람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파충류의 몸은 혐오스런 것이다. 그래서 파충류의 몸이 된 자신의 몸을 혐오 하였지만 매력적인 용녀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용왕으로 모습을 바꾸었을 때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용왕으로서 삶을 즐긴 것이다.

 

이는 여기 저기서 즐길 것을 찾는 갈애 때문이다. 가난뱅이도 마찬가지이다. 가난하다고 하여 즐길 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가난하여도 즐길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든 중생들이 여기 저기서 즐길 거리를 찾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ponobhavikā, 뽀노바위까, 再生)’을 가져 온다고 하였다.

 

누구든지 나름대로 즐길거리가 있다!

 

다음으로 우빨리 왕비 이야기이다.

 

우빨리 왕비 이야기

 

우빨리 왕비는 빠딸리를 수도로 둔 까시국 아싸카왕의 정실왕비였고 빼어나게 아름다운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고대의 왕들은 왕국에서 제일 매력적인 처녀들을 골라서 왕비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왕비들은 매력과 아름다움을 자랑하였습니다. 우빨리 왕비는 그 미모와 매력으로는 여러 다른 왕비들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아싸카 왕은 왕비의 매혹적인 미모에 반하여 완전히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왕에게 총애를 받으며 아름다움과 매력이 아직 절정기에 있을 때 우빨리 왕비는 천상 세계로 갔습니다. ‘천상 세계로 가다’라는 말은 왕족의 죽음을 나타내는 미얀마의 문화적인 관례어 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상으로 돌아가다’

 라는 말도 불교승려의 죽음을 뜻하는 단순한 문화적인 관례어 입니다. 죽은 사람은 과거 업의 행위(kamma)가 조건 지은 대로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보통 그렇듯이, 우빨리 왕비는 ‘왕비는 천상 세계로 갔다’라는 문화적 용례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낮은 딱정벌레의 세계에 재생하였습니다. 총애하는 왕비가 죽자, 아싸카왕은 맹렬히 타오르는 슬픔과 비탄에 사로잡혀 왕비의 시신을 기름으로 방부처리하고 유리관 속에 넣어 자신의 침대 밑에 두었습니다. 비탄에 잠긴 왕은 음식을 들거나 자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워서 사랑하는 왕비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왕실친척들과 현명한 대신들이 존재의 무상함과 조건 지어짐의 본성을 일깨워주면서 왕을 위로했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관속의 시신은 기름으로 방부 처리되어 현대의 화학 방부제로 처리한 것처럼 잘 보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에게는 왕비가 마치 관속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한 시신의 모습은 왕의 타오르는 슬픔과 비탄에 기름을 끼얹는 것 같았고, 그 슬픔은 7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보살은 히말라야의 숲속에 사는 신통지(神通智, 아빈냐. abhiññā)7를 지닌 선인仙人이었습니다. 신통지로 세상을 두루 둘러보던 보살은 극도의 슬픔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아싸카왕을 보았습니다. 또한 왕을 불행으로부터 구해줄 사람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보살은 선정의 힘으로 아싸카왕 궁전의 정원으로 갔습니다.

 

한 젊은 바라문이 보살을 만나러 오자 보살은 그에게 아싸카왕에 대해 물었습니다. 젊은 바라문은 왕이 얼마나 비탄에 잠겨 있는지를 설명하고 왕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보살은,

 

“나는 왕을 모르지만 만약 왕이 와서 요청한다면 왕에게 왕비의 현생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젊은 바라문은 왕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대왕님,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가진 선인이 지금 왕궁정원에 와 있습니다. 선인은 돌아가신 왕비님의 현생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하시는데, 가서 그 선인을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 왕은 즉시 마차를 타고 왕궁정원으로 떠났습니다. 도착한 후 왕은 선인에게 정중한 예를 표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님, 존자님께서 우빨리 왕비의 현생을 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선인이 그렇다고 하자 왕은 왕비가 지금 어디에 재생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대왕님, 우빨리 왕비는 자신의 아름다운 용모를 좋아하였고 또 미모에 대한 자만심이 강하였습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을 예쁘게 꾸미고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에만 몰두하였고, 보시와 지계 같은 공덕행을 쌓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왕비는 낮은 생으로 떨어졌습니다. 왕비는 지금 바로 이 정원의 딱정벌레로 재생하였습니다.

 

선인은 모든 이야기를 숨김없이 다 이야기 하였습니다.

 

, 가문, 교육, 지위, 신체적 아름다움 따위의 특권을 누리는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은 대인관계에서 오만함을 드러내기가 쉽습니다. 스스로의 자만과 자존심에 둘러싸여 공덕행을 짓는데 소홀해집니다. 그들의 사람 됨됨이에서 겸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찌마니까야(中部), 소업분별경小業分別經에서, 그렇게 오만하고 이름 높고 거만한 사람은 악처에 태어나기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공경할 만한 분들께 공경을 표하고 겸손함을 보이는 겸허한 사람은 고귀한 가문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통치 국왕의 정실왕비로써 아주 높은 지위를 누렸으며 매우 아름다웠던 우빨리 왕비의 이야기입니다. 왕비는 자신의 빼어난 자질에 우쭐해서 마땅히 공경해야 할 분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깔보았습니다. 그러한 불선한 태도와 행동으로 그녀는 소똥이 사는 암 딱정벌레로 재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하는 왕비의 이러한 재생의 이야기를 들은 아싸카왕은 곧바로,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라며 이를 부인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인은 “그럼 제가 암딱정벌레를 대왕님께 보여드리고 그녀로 하여금 말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대답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또 그녀가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선인은 신통지의 초능력으로 서원을 한 후 숫딱정벌레와 암딱정벌레가 왕 앞에 모습을 드러내도록 했습니다. 소똥더미에서 숫딱정벌레가 왕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선인은 말했습니다.

 

“오, 대왕님. 뒤따라오는 암딱정벌레가 대왕님의 정실왕비였던 우빨리 입니다. 대왕님을 저버리고 지금은 숫딱정벌레가 어딜 가든 그 녀석만 쫒따라 다니는군요. 대왕님, 바로 얼마 전까지 대왕님의 정실왕비 우빨리였던 암 딱정벌레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왕은 선인의 말을 믿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내 왕비 우빨리 같이 그런 지적인 존재가 이런 암딱정벌레로 태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업과 그 과보의 법칙을 완전히 믿지 않고 연기법에 설명된 대로 조건성, 즉 인과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람이란 존재가 한갓 딱정벌레에 불과한 낮은 존재로 추락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어 있는 이 정법시대正法時代에도 ‘사람이 죽으면 그보다 더 낮은 존재로는 재생할 수는 없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교법을 아직 듣지 못하던 암흑시기에, 그러한 재생의 이야기를 회의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자의 지위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인간세계나 천상계에 갈 수도 있고 사악도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악업의 조건과 죽음 직전의 정신적 반응상태를 조건으로 해서, 낮은 존재로 재생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선업의 조건과 죽음의 문턱에서 가졌던 선한 정신적 상태를 조건으로 낮은 중생계에 날 수도 있고 더 높은 인간과 천신의 세계에 재생할 수도 있습니다.

 

죽기 바로 직전 자신의 주황색 가사에 집착을 했던 띠싸 비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결과 바로 그 가사에 집을 짓고 사는 이로 재생하였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있을 때 죽은 개구리 이야기도 있습니다. 개구리는 죽어서 삼십삼천의 천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죽음의 순간 여러 가지 형태로 바뀌어 나게 된 증거로 제시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아싸카왕은 그러한 법문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왕비가 암딱정벌레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왕은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선인은 암딱정벌레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만들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왕은 그 제안을 승낙했습니다. 그러자 선인은 서원을 한 후 신통력으로 왕과 암딱정벌레가 대화를 하고 왕과 시종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선인은 암 딱정벌레에게, “너는 전생에 누구였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암딱정벌레는, “저는 아싸카왕의 왕비 우빨리였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암딱정벌레야, 그럼 이제 너는 아싸카왕을 여전히 사랑하느냐? 아니면 이 숫딱정벌레만을 사랑하느냐?

 

이 물음에 암 딱정벌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아싸카왕은 전생에 저의 남편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아싸카왕과 함께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즐기면서 자주 이 정원을 거닐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새로운 생을 살고 있고 아싸카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본생경 주석서에 나온 암 딱정벌레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나는 현생에서 아싸카왕을 죽여서 그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사랑하는 현 남편인 숫딱정벌레의 발을 씻어주면 좋겠습니다.

 

이 주석서의 설명으로는 암 딱정벌레의 대답이 매우 모질고 매정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남편인 숫 딱정벌레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남편을 기쁘게 해주려 했음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통해서, 사별이 아니라 성격의 차이로 헤어진 전 남편과 아내간의 불화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새로운 삶의 반려자를 만나 사랑하면서 사는 수많은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석서에 말하고 있는 소견은 매우 타당한 것입니다.

 

빨리경전인 본생경本生經, 아싸카 자따까Assaka-Jātaka에서는 암딱정벌레의 답변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존자님, 저는 아싸카왕을 사랑했고, 저를 총애하던 사랑하는 남편 아싸카왕과 함께 한 쌍이 된 것을 즐기며 자주 이 정원을 거닐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삶의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지난 생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희미하게 덮어졌습니다. 저는 지금의 남편인 숫딱정벌레를 아싸카왕을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사랑합니다.

 

‘더 사랑한다’라는 말에 대한 주석서의 설명은 흥미롭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더 사랑한다’는 말은 새로운 남편을 위한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는 ‘백 번, 천번 더 사랑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싸카왕은 암딱정벌레의 그러한 모질고 매정한 말을 듣고는 크게 상심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나는 왕비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에 차마 그 시신을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왕비는 너무나도 혐오스럽고 불쾌한 존재로 변해 버렸다.

 

왕은 옛 왕비 우빨리가 너무 싫어져서, 앉은 자리에서 이렇게 명령을 하였습니다. “가서 그 여자의 시신을 치워버려라.” 그리고는 목욕을 하고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왕은 다른 궁녀를 왕비로 삼고 어질게 나라를 다스려 나갔습니다. 보살인 선인은 왕에게 좋은 조언을 해주고는 히말라야의 거처로 되돌아갔습니다.

 

(집성제, 초전법륜경,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

 

 

우빨리왕비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빨리왕비가 인간세계에 있을 때는 인간의 삶과 왕비로서의 즐거움을 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암딱정벌레로 재생하게 되자 곧 바로 그런 삶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암딱정벌레로서 삶을 살다 보니 현재의 배우자인 딱정벌레의 몸을 이전 생의 아싸까왕의 몸 보다 백배, 천배 더 중시하고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낮은 존재로 재생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 한 것은 다름아닌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초전법륜경에서 여기저기서 즐기는 따뜨라 따뜨라 아빈난디니(Tatra tatrā-abhinandini)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따라서 개로 재생하면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로 인하여 개의 삶을 즐기는 것이고, 소로 태어 나면 역시 갈애로 인하여 소의 삶을 살아는 것으로 본다.

 

부자로 살다가 망해서 하류층으로 전락하였다면 어떨까.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다 버스를 타고 다녀도 그 나름대로 즐길거리가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로 살아도 가난한 자 나름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농부로 살아도 농부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고, 산속에서 혼자 살아도 혼자 사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누구든지 나름대로 살아 가는 방식이 있고 즐길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즐거움을 보는 자에게는 갈애가 늘어난다

 

이와 같이 초전법륜경에서는 여기저기서 즐김으로 인하여 갈애가 일어나고 이는 곧 다시 태어남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집성제에 대한 내용을 좀 더 심도 있게 설명해 주는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 있다.

 

 

아난다여,

취착의 대상이 되는 사물에서 즐거움을 보는 자에게는 갈애가 늘어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고,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며,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니다나경-Nidāna (paiccasamuppāda) sutta- The Origin, 상윳따니까야 S12.1.6.10, 전재성님역)

 

  니다나경(S12.1.6.10).docx

 

 

 

경에서 부처님은 즐거움을 보는 자에게 갈애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런 갈애는 집착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 괴로운 것이라는 말이다. 즐거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나중에 모두 괴로운 것으로 바뀐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

 

갈애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경이 있다. 갈애가 어떻게 생겨 나는 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한 경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상에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마다 갈애가 언제나 거기에서 생겨나고 언제나 거기에 들어간다.

그런데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은 무엇인가?

 

본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언제나 여기에서 생겨나고 언제나 여기에 들어간다.

 

듣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언제나 여기에서 생겨나고 언제나 여기에 들어간다.

 

냄새맡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언제나 여기에서 생겨나고 언제나 여기에 들어간다.

 

맛본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언제나 여기에서 생겨나고 언제나 여기에 들어간다.

 

감촉을 느낀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언제나 여기에서 생겨나고 언제나 여기에 들어간다.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언제나 여기에서 생겨나고 언제나 여기에 들어간다.

 

(삼마사나경-Sammasanasutta- Mastering the Teaching-성찰경, 상윳따니까야 S12.7.6, 전재성님역)

 

삼마사나경(성찰경-S12.7.6).docx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등 여섯가지 감각대상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감각대상을 통하여 갈애가 발생하는 것이라 하였다.

 

전도된 인식 다섯가지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생각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과거의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영원하다고 보고 행복하다고 보고 자기라고 보고 건강하다고 보고 안온하다고 보았다면 그들은 갈애를 키운 것이다.

 

갈애를 키운 사람은 취착을 키운 것이다. 취착을 키운 사람은 괴로움을 키운 것이다. 괴로움을 키운 사람은 태어남과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했다고 나는 말한다.

 

(삼마사나경-Sammasanasutta- Mastering the Teaching-성찰경, 상윳따니까야 S12.7.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갈애가 일어난 원인에 대하여 과거, 미래, 현재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리 저리 즐길 거리를 찾는 갈애가 생긴 이유는 한 마디로 전도된 인식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섯가지로 요약된다.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에 대하여

 

 

1)영원하다.

2)행복하다

3)나가 있다

4)건강하다

5)안온하다

 

 

라고 보는 것이라 한다. 이는 잘못된 사고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하고 있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부처님의 물의 예를 들고 있다. 갈증이 심한 자가 독약이 섞여 있는 물임에도 불구하고 빛깔과 냄새와 맛이 좋아서 마시는 것에 대한 비유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인식의 전환을 요청한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과거의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무상하다고 보고 불행하다고 보고 자기가 아니라고 보고 병든 것이라고 보고 위험하다고 보았다면 그들은 갈애를 버린 것이다.

 

갈애를 버린 사람은 취착을 버린 것이다. 취착을 버린 사람은 괴로움을 버린 것이다. 괴로움을 버린 사람은 태어남과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으로부터 해탈한 것이다. 그들은 괴로움에서 해탈했다고 나는 말한다.

 

(삼마사나경-Sammasanasutta- Mastering the Teaching-성찰경, 상윳따니까야 S12.7.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사랑스럽고 즐거운 대상에 대하여

 

 

1)무상한 것이다.

2)불행한 것이다.

3)자기가 아니다.

4)병든 것이다.

5)위험한 것이다.

 

 

라고 인식의 전환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을 때 태어남과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으로부터 해탈하여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된다고 말씀 하셨다.

 

심심해! 심심해!”

 

사람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무언가 재미 있는 것을 찾고 즐길거리를 찾아 두리번 거린다. 마치 원숭이가 두눈을 쉼없이 두리번 거리듯이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심심해! 심심해!” 하며 심심한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할 것이 없으면 컴퓨터 게임이라도 하며 시간을 때운다.

 

이런 시간 때우기는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장기나 바둑을 둔다든가, TV나 영화를 본다든가, 음악을 듣는다든가, 독서를 한다든가, 심지어는 잡담을 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될 수 있다. 또 군대에서 말년병들이 정교한 조각품을 만든다든가,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이 밥풀등으로 예술품에 준하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자유인이나 비자유인이나 모두 나름대로 즐길 거리를 찾아 소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혼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안절 부절하고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즐길거리를 찾는 것이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 저기 즐길거리를 찾는데 있어서 빈부귀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여건과 형편에 맞추어 즐거움을 찾기 때문에 살아 가는 것이다.

 

부자 이었다가 가난뱅이가 된 자 역시 가난한 생활에 맞추어 사는 즐거움을 찾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고, 불행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나름 대로 살아 가는 방식이 있기 때문에 버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감각대상에 갈애를 느끼는 것은 감각대상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하지만 이는 전도된 인식일 뿐이라고 부처님은 설명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그 행복한 느낌이 영원히 가지 않는다. 그래서 괴로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다음과 같이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Yepi hi ke ci bhikkhave,

etarahi samaā vā brāhmaā vā

ya loke piyaråpa sātaråpa,

ta aniccato passanti,

dukkhato passanti,

anattato passanti,

rogato passanti,

bhayato passanti.

Te taha pajahanti.

 

수행승들이여,

또한 현재의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무상하다고 보고

불행하다고 보고

자기가 아니라고 보고

병든 것이라고 보고

위험하다고 본다면

그들은 갈애를 버리는 것이다.

 

“Monks,

whoever recluses and brahmins at present,

do not welcome and see these things in the world, as agreeable,

permanent,

pleasant,

mine,

healthy

and appeasement,

dispel craving.

 

 

 

 

2012-09-03

진흙속의연꽃

 

삼마사나경(성찰경-S12.7.6).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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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나경(S12.1.6.10).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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