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빠알리원전과 주석적 번역

담마다사 이병욱 2012. 9. 4. 15:16

빠알리원전과 주석적 번역

 

 

 

 

윌폴라 라훌라의 번역어 중에

 

마성스님의 글 번역의 중요성과 어려움에 대하여 읽었다. 스님의 블로그에 실려 있는 가장 최근의 글이다.

 

글에서 스님은 오역의 사례를 소개 하였다. 윌폴라 라훌라 비구의   ‘What the Buddha Taught’에 실려 있는 글 중에 “ I have taught you, O bhikkhu, to see conditionality everywhere in all things.”에 대한 내용이다.

 

이 부분 번역과 관련하여 전재성박사가 이 모든 것 속에서 연기의 법칙을 보라고 가르쳤다라고 번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스님은 이 번역문을 답습하여 역시 같은 뜻으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위 영문 문구는 올바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빠알리어 ‘Paipucchāvinitā’에 대한 해석방법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복합어 Paipucchāvinitā 에서 Paipucchā에 대한 것을 윌폴라 라훌라비구는 Paiccha의 의미로 해석하여  영어 ‘conditionality’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전재성박사는 영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연기의 법칙으로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의 번역은 불가피해 보인다. 영어‘conditionality’에 대하여 연기의 법칙또는 조건부등 조건이나 연기라는 말이 들어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재성박사와 각묵 스님의 번역비교

 

그렇다면 ‘Paipucchāvinitā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전재성박사와 각묵스님의 번역을 비교 설명하였다.

 

스님이 예로 든 경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상윳따니까야의 뿐나마경(Puṇṇamāsutta-보름달, 상윳따니까야 S21.2.3.10)’이고 또 하나는 맛지마니까야의 마하뿐나마경(Mahāpuṇṇama sutta 보름날 밤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09)’이다.

 

스님은 특히 상윳따니까야의 뿐나마경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문제가 되는 문구는 다음과 같다.

 

 

Paipucchāvinitā kho me tumhe bhikkhave,      

빠띠뿟차위니따 코 메 빅카웨

tatra tatra tesu tesu dhammesu.

따뜨라 따뜨라 떼수 떼수 담메수

 

 

위 빠알리어 문장에 대하여 두 번역자의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빠알리원문

Paipucchāvinitā kho me tumhe bhikkhave,

tatra tatra tesu tesu dhammesu.

전재성박사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그 질문에 대해서는 내가 그대들에게 준 가르침 속에서 나는 이미 여러 가지로 대답했다.

각묵스님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법들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다음과 같은]질의응답으로 그대들을 훈련시켰다.

 

 

이 두 가지 번역문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였다.

 

 

위에 인용한 전재성 번역과 각묵 스님의 번역을 비교해 보라. 누구의 번역이 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인가를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전재성은 어떠한 각주나 설명도 덧 붙이지 않았다. 반면 각묵 스님은 다른 이본들과 일일이 대조하여 자신이 번역한 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질의응답을 통한 훈련이 바로 아래에 나오는 오온의 무상, , 무아에 대한 교리문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만일 이러한 각주가 없었다면 필자도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각묵 스님께 감사드린다.

 

(마성스님, 번역의 중요성과 어려움)

 

 

 

tipitaka

 

 

 

시정잡배들도 김씨” “이씨하는데

 

먼저 호칭문제에 대하여 지적하고자 한다. 마성스님은 두 분, 전재성박사와 각묵스님을 지칭하는 것에 대하여 전재성각묵 스님이라고 호칭하였다. 한분은 스님이기 때문에 당연히 스님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또 한분은 스님이 아니어서일까 그냥 이름만 호칭하였다.

 

하지만 이런 호칭법은 일반사회에서 좀처럼 통용되지 않는다. 하다 못해 저자거리에 있는 시정잡배들도 상대방을 부를 때 김씨” “이씨하며 존칭을 써 주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도 상사가 부하를 부를 때 이름 뒤에 직함을 불러 주는 것이 원칙이다. 직함이 없다면 아무개씨하고 존칭을 써 준다. 이렇게 일반사회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존칭을 써 주는 것이 기본 예의이다.

 

그런데 스님의 글을 보면 일반인의 경우 존칭이 모두 생략 되어 있다. 그 사람이 교수이건, 박사이건 누구이건 간에 이름만 호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차별적 행위라 본다. 스님이건 일반인이건 간에 모두 이름 또는 법명만 불러 주든가 아니면 모두 다 존칭을 써 주어야 할 것이다.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았더니

 

다음으로 번역 비교를 해 보았다. 빠알리어를 모르기 때문에 빠알리 사전을 활용하였다. 전재성박사가 편저한 빠알리-한글사전(개정증보판)’빠알리 사전 사이트를 이용하였다. 

 

빠알리어 Paipucchā를 찾아 보니  전재성박사의 사전에는 ‘1. 반대질문, 반문  2. 힐문’으로 되어 있다. 빠알리사전사이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Paipucchā (f.) [pai+pucchā] a question in return, inquiry; only ˚-- (as abl.) by question, by inquiry, by means of question & answer in foll. cpds.: ˚karaīya Vin i.325; ˚vinīta A i.72;

 

(빠알리 사전 사이트)

 

 

빠알리 사전 사이트에 따르면 Paipucchā 에 대한 설명으로서 by question, by inquiry, by means of question & answer in foll. Cpds”로 되어 있어서 질문과 답변을 수단으로 하여 알아 본다는 의미로 되어 있다. ‘묻고 답하기라 볼 수 있다.

 

Paipucchā와 결합어로 쓰이는 Vinitā를 찾아 보았다. 전박사의 사전에 따르면 Vineti의 과거분사(pp)로서 ‘1. 이끌린 2. 훈련된, 교육된’의 뜻이다. 그래서PaipucchāVinitā가 결합된 Paipucchāvinitā는 ‘묻고 답하기로 잘 교육된’ 의미라 보여 진다.

 

Tumhe의 경우 tvam의 복수형이라 한다. 여기서 tvam은 ‘너, 그대, 자네’로 해석되기 때문에 Tumhe는 ‘자네들, 너희들’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Paipucchāvinitā kho me tumhe bhikkhave”라는 문구에 대하여 초보자가 단순히 번역하였을 때 “너희들 비구들이여, 이제까지 묻고 답하기로 잘 교육되어 왔다”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초보 번역자가 보았을 때

 

그렇다면 전재성박사의 번역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그 질문에 대해서는 내가 그대들에게 준 가르침 속에서 나는 이미 여러 가지로 대답했다.”라는 번역은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경우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법들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으로 그대들을 훈련시켰다.”라고 번역하였다. 이 번역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하여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를 마성스님의 글에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법들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으로 그대들을 훈련시켰다.’ Be, Se: Paipucchāvinitā kho me tumhe bhikkhave, tatra tatra tesu tesu dhammesu.를 옮긴 것이다. Ee는 이렇게 고쳐서 읽어야 한다. 주석서는 ‘질의응답을 통한 훈련(Paipucchā-vinit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바로 아래에 나타나는 오온의 무상, , 무아에 대한 교리문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각묵스님의 주석, 마성스님, 번역의 중요성과 어려움에서)

 

 

이와 같은 주석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매우 고마워 하고 있다. 이런 주석이 없었다면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주석하나 달아 놓지 않은 전재성박사의 번역 스타일을 비판 하고 있다.

 

Vinitā가 과거분사형임도 불구하고

 

초보자가 보았을 때 전재성박사의 번역이나 각묵스님의 번역에 대한 내용에 있어서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묻고 답하기 형식으로 교육된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Vinitā가 과거분사형으로 ‘교육된’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부처님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는 수동의 의미이다. 그래서 전재성 박사는 “내가 그대들에게 준 가르침 속에서라고 번역한 것으로 보아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았다는 의미를 더 크게 부각하였다.

 

반면 각묵스님은 그대들을 훈련시켰다라고 하여 부처님이 제자를 직접 훈련시킨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Vinitā가 과거분사형이기 때문에 전재성박사의 번역이 더 원문에 가까운 것으로 보여진다.

 

뿐나마경(Puṇṇamāsuttaṃ-보름달, S21.2.3.10)

 

참고로 뿐나마경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뿐나마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뿝빠라마에 있는 미가라마뚜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보름달의 포살일에 수행승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한데에 앉아 계셨다. 그때 한 수행승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세존께서 계신 곳을 향해 합장하고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저의 질문을 허락하여 대답하여주신다면 제가 세존께 어떤 점에 관해 여쭙고자 합니다."

 

[세존]

"수행승이여,

그렇다면 그대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의심나는 점을 물어보라."

 

'세존이시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그 수행승은 대답하고 자기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세존께 여쭈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들은 이와 같습니다. 곧 집착된 물질의 다발, 집착된 감수의 다발, 집착된 지각의 다발, 집착된 형성의 다발, 집착된 의식의 다발입니다."

 

[세존]

"수행승이여,

이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들은 이와 같다. 곧 집착된 물질의 다발, 집착된 감수의 다발, 집착된 지각의 다발, 집착된 형성의 다발, 집착된 의식의 다발이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라고 그 수행승은 세존께서 응답하신 것에 기뻐하고 환희하여 거듭 질문했다.

 

[수행승]

 "그런데 세존이시여,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은 무엇을 뿌리로 합니까?"

 

[세존]

"수행승이여,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은 욕망을 뿌리로 한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라고 그 수행승은 세존께서 응답하신 것에 기뻐하고 환희하여 거듭 질문했다.

 

[수행승]

"그런데 세존이시여,

그들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이 바로 집착입니까, 혹은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을 제외하고 집착이 따로 있습니까?"

 

[세존]

 "수행승이여,

 그들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이 바로 집착이 아니고 혹은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을 제외하고 집착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욕망이나 탐욕이 있다면 그것이 그에게 집착이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라고 그 수행승은 세존께서 응답하신 것에 기뻐하고 환희하여 거듭 질문했다.

 

[수행승]

 "그런데 세존이시여,

그들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 가운데 욕망과 탐욕의 차별이 존재합니까?"

 

'수행승이여, 그럴 수 있다' 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

"이 세상에 수행승이여,

어떤 사람이 '미래세에 이와 같은 물질을 얻을 것이고, 미래세에 이와 같은 감수를 얻을 것이고, 미래세에 이와 같은 지각을 얻을 것이고, 미래세에 이와 같은 형성을 얻을 것이고, 미래세에 이와 같은 의식을 얻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수행승이여, 이와 같이 그에게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에 대한 욕망과 탐욕의 차별이 생겨난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라고 그 수행승은 세존께서 응답하신 것에 기뻐하고 환희하여 거듭 질문했다.

 

[수행승]

"그런데 세존이시여,

어떻게 그들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에 대한 다발의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까?"

 

[세존]

"수행승이여,

어떠한 물질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번뇌를 속성으로 하고 집착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집착된 물질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어떠한 감수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번뇌를 속성으로 하고 집착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집착된 감수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어떠한 지각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번뇌를 속성으로 하고 집착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집착된 지각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어떠한 형성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번뇌를 속성으로 하고 집착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집착된 형성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어떠한 의식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번뇌를 속성으로 하고 집착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집착된 의식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것을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라고 그 수행승은 세존께서 응답하신 것에 기뻐하고 환희하여 거듭 질문했다.

 

[수행승]

 "그런데 세존이시여,

물질의 다발을 시설하는데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조건이 되고, 감수의 다발을 시설하는데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조건이 되고, 지각의 다발을 시설하는데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조건이 되고, 형성의 다발을 시설하는데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조건이 되고, 의식의 다발을 시설하는데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조건이 됩니까?"

 

[세존]

"수행승이여,

 물질의 다발을 시설하는데 네가지 위대한 요소가 원인이고 네가지 위대한 요소가 조건이 되고, 감수의 다발을 시설하는데 접촉이 원인이고 접촉이 조건이 되고, 지각의 다발을 시설하는데도 접촉이 원인이고 접촉이 조건이 되고, 형성의 다발을 시설하는데도 접촉이 원인이고 접촉이 조건이 되고, 의식의 다발을 시설하는데는 명색이 원인이고 명색이 조건이 된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라고 그 수행승은 세존께서 응답하신 것에 기뻐하고 환희하며 거듭 질문했다.

 

[수행승]

"그런데 세존이시여, 어떻게 실체가 있다는 견해가 생겨납니까?"

 

[세존]

 "수행승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이 나이고 나의 것이 물질이고 나 가운데 물질이 있고 물질 가운데 내가 있으며, 감수가 나이고 나의 것이 감수이고 나 가운데 감수가 있고 감수 가운데 내가 있으며, 지각이 나이고 나의 것이 지각이고 나 가운데 지각이 있고 지각 가운데 내가 있으며, 형성이 나이고 나의 것이 형성이고 나 가운데 형성이 있고 형성 가운데 내가 있으며, 의식이 나이고 나의 것이 의식이고 나 가운데 의식이 있고 의식 가운데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수행승이여, 이와 같이 실체가 있다는 견해가 생겨난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라고 그 수행승은 세존께서 응답하신 것에 기뻐하고 환희하여 거듭 질문했다.

 

[수행승]

"그런데 세존이시여, 어떻게 실체가 있다는 견해가 생겨나지 않습니까?"

 

[세존]

 "수행승이여,

이 세상에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들은 거룩한 이를 보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 참사람을 보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서, 물질이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물질이 아니고 나 가운데 물질이 있지 않고 물질 가운데 내가 있지 않으며, 감수가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감수가 아니고 나 가운데 감수가 있지 않고 감수 가운데 내가 있지 않으며, 지각이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지각이 아니고 나 가운데 지각이 있지 않고 지각 가운데 내가 있지 않으며, 형성이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형성이 아니고 나 가운데 형성이 있지 않고 형성 가운데 내가 있지 않으며, 의식이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의식이 아니고 나 가운데 의식이 있지 않고 의식 가운데 내가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수행승이여, 이와 같이 실체가 있다는 견해가 생겨나지 않는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라고 그 수행승은 세존께서 응답하신 것에 기뻐하고 환희하여 거듭 질문했다.

 

[수행승]

"그런데 세존이시여,

물질의 유혹은 어떠한 것이고 위험은 어떠한 것이고 그것에서 벗어남은 어떠한 것이고, 감수의 유혹은 어떠한 것이고 위험은 어떠한 것이고 그것에서 벗어남은 어떠한 것이고, 지각의 유혹은 어떠한 것이고 위험은 어떠한 것이고 그것에서 벗어남은 어떠한 것이고, 형성의 유혹은 어떠한 것이고 위험은 어떠한 것이고 그것에서 벗어남은 어떠한 것이고, 의식의 유혹은 어떠한 것이고 위험은 어떠한 것이고 그것에서 벗어남은 어떠한 것입니까?"

 

[세존]

 "수행승이여,

물질을 조건으로 즐거움과 만족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물질의 유혹이고 물질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괴하는 것인데 이것이 물질의 위험이고 물질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을 제어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리는 것이 그것에서 벗어남이다.

 

감수를 조건으로 즐거움과 만족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감수의 유혹이고 감수는 무상하고 괴롭고 변괴하는 것인데 이것이 감수의 위험이고 감수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을 제어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리는 것이 그것에서 벗어남이다.

 

지각을 조건으로 즐거움과 만족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지각의 유혹이고 지각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괴하는 것인데 이것이 지각의 위험이고 지각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을 제어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리는 것이 그것에서 벗어남이다.

 

형성을 조건으로 즐거움과 만족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형성의 유혹이고 형성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괴하는 것인데 이것이 형성의 위험이고 형성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을 제어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리는 것이 그것에서 벗어남이다.

 

의식을 조건으로 즐거움과 만족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의식의 유혹이고 의식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괴하는 것인데 이것이 의식의 위험이고 의식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을 제어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리는 것이 그것에서 벗어남이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라고 그 수행승은 세존께서 응답하신 것에 기뻐하고 환희하여 거듭 질문했다.

 

[수행승]

 "그런데 세존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면 이 의식을 수반하는 몸과 그 밖의 모든 대상에게 나라는 고집, 내 것이라는 고집의 교만스런 번뇌를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세존]

"수행승이여,

어떠한 물질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어떠한 감수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어떠한 지각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어떠한 형성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어떠한 의식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이여,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 이 의식을 수반하는 몸과 그 밖의 모든 대상에게 나라는 고집, 내 것이라는 고집의 교만스런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이 때에 다른 한 수행승이 마음속으로 이와 같은 생각을 일으켰다.

 

[수행승]

"이와 같이 물체도 실체가 없고 감수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이 만들어진 업을 내가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 수행승이 마음속으로 그와 같은 생각을 일으킨 것을 알아채고 수행승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이러석은 사람은 알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해 갈애가 사로잡힌 마음으로 '이와 같이 물체도 실체가 없고 감수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이 만들어진 업을 내가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 라고 스승의 가르침을 넘어서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그 질문에 대해서는 내가 그대들에게 준 가르침 속에서 나는 이미 여러 가지로 대답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감수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각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형성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의식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므로 잘 배운 거룩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아서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감수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지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 는 지혜가 생겨나서 '다시 태어남은 파괴되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다시는 윤회하는 일이 없다' 고 그는 분명히 안다."

 

(뿐나마경-Puṇṇamāsutta- on a Full Moon Day-보름달, 상윳따니까야 S21.2.3.10, 전재성님역)

 

  뿐나마경(보름달-S21.2.3.10).docx

 

 

이와 같은 스타일의 전재성박사의 번역은 맛지마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마하뿐나마경(Mahāpuṇṇama suttaṃ, 보름날 밤의 큰 경, M109)에서

 

마하뿐나마경(Mahāpuṇṇama sutta, 보름날 밤의 큰 경, M109)에서 전재성 박사는 다음과 같이 번역 하였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어떤 어리석은 사람은 무지하고 몽매해서 그의 마음이 갈애에 의해 지배되면서도, 이와 같이 ‘물질은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느낌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지각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형성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의식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어떤 자아가 자아가 아닌 것이 만들어낸 행위들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라고 스승의 가르침을 앞지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여러 가지 것에 대해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질문을 통해서 나에게서 수련을 받았다.

 

(마하뿐나마경-Mahāpuṇṇama sutta -The Longer Discourse on the Full Moon Night- 보름날 밤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09,전재성님역)

 

  마하뿐나마경(보름날 밤의 큰 경-M109).docx

 

 

 

경에서 그대들은 여러 가지 것에 대해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질문을 통해서 나에게서 수련을 받았다.”에 대한 것이 상윳따니까야와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문장을 보면 질문을 통해서 나에게서 수련을 받았다.”라고 하여 제자들이 교육을 받은 것으로 수동적 의미로 번역하였다. 이는 빠알리 Vinitā(교육된)가 과거분사형이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으로 그대들을 훈련시켰다.”라고 하여 과거분사형인 Vinitā의 의미를 못 살리고 부처님이 제자들을 훈련 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번역어에 [다음과 같은]’이라는  대괄호까지 등장하여 보충설명하듯이 번역하였다. 본문에 이런 대괄호가 들어 가도 되는 것일까.

 

각묵스님의 번역이 주석적 번역인 이유

 

‘[다음과 같은]’이라는 말은 빠알리 원어에 없는 말이다. 다만 본문을 읽기 좋게 하기 위하여 삽입된 말이라 볼 수 있다. 왜 이런 번역스타일을 고수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주석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주석의 내용을 번역에 활용하여 주석적 번역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주석적 번역이 초기불전연구원 번역물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팔정도 번역을 들 수 있다.

 

팔정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dukkhanirodhagāminī paipadā ariyasacca? Ayameva ariyo aṭṭhagiko maggo, seyyathida

 

이 빠알리어 대한 각묵스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이 번역어를 보면 대괄호안에 한자어를 집어 넣음으로서 이중으로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설명식으로 되어 있는 번역에 대하여 주석적 번역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으로 그대들을 훈련시켰다.”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이라는 말은 원전에도 없는 말로서 설명을 곁들인 주석적 번역의 대표적인 예라 볼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에 각주가 보인 이유

 

마성스님은 전재성박사의 번역에서 각주가 없는 것에 대하여 비판 하였다. 그러나 앞뒤 전후 문장에 따라 주석이나 각주가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각주가 필요한 경우라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맛지마니까야에서는 각주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전재성박사는 ‘Paipucchāvinitā’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를 달아 놓았다.

 

 

Paiccavinitā: ‘조건에 따라서 수련을 해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SN.III.104에서는 ‘Paipucchā vinitā’로 읽고 있어 역자는 후자를 취한다.

 

(마하뿐나마경-Mahāpuṇṇama sutta- 보름날 밤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09, 전재성박사 각주)

 

 

상윳따니까야에는 각주가 없지만 맛지마니까야에 주석을 달아 놓은 이유는 PaiccavinitāPaipucchāvinitā의 차이 때문이라 보여진다.

 

맛지마니까야에서는 Paiccavinitā가 쓰여졌고, 상윳따니까야에서는 Paipucchāvinitā라고 쓰여졌기 때문에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주석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꼭 필요한 부분은 주석을 해 놓음을 알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각주를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상황이기 때문에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묵스님은 과거분사형인 Vinitā를 능동으로 해석하는 가 하면 원문에도 없는 [다음과 같은]’이라는 말을 본문에 넣어 주석적 번역을 시도 하였는데, 그와 같은 목적으로 주석을 해 놓은 것으로 보여진다.

 

보통불자들이 초기경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

 

이상 빠알리어대하여 잘 모르는 보통불자가 과감하게 마성스님의 글에 반론을 제기 하여 보았다. 이런 시도에 대하여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불자들이 초기경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나라 불교는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 것임에 틀림없다.

 

 

 

 

2012-09-04

진흙속의연꽃

뿐나마경(보름달-S21.2.3.10).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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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뿐나마경(보름날 밤의 큰 경-M109).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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