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탈출을 꿈꾸는 도시인의 귀의처는? 깨달은 님의 품
깨달은 님의 품
1.
깨달은 님의 승리는 패배로 돌아가지 않으니,
아무도 세상에서 그의 승리에 이르지 못한다.
그의 행경은 무한하고 그의 자취는 없다.
그 님을 어떤 자취를 따라 이끌 수 있으랴?(179)
2.
깨달은 님에게는 자신을 어딘 가로 이끄는
그물처럼 달라붙는 갈애가 없다.
그의 행경은 무한하고 그의 자취는 없다.
그 님을 어떤 자취를 따라 이끌 수 있으랴?(180)
3.
현자로서 선정에 열중하고
멀리 떠남의 고요에 기뻐하는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새김을 확립한 님을 신들도 부러워한다.(181)
4.
인간의 몸을 얻는 것도 어렵고
죽어야 하는 자가 사는 것도 어렵고
올바른 가르침을 듣는 것도 어렵고
깨달은 님이 출현하는 것도 어렵다.(182)
5.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183)
6.
참고 인내하는 것이 최상의 고행이며
열반은 궁극이다. 깨달은 님들은 말한다.
출가자는 남을 해치지 않는 님이고
수행자는 남을 괴롭히지 않는 님이다.(184)
7.
비방을 삼가고 해치지 않고
제행의 덕목을 지키고
식사에서 알맞은 분량을 알고
홀로 떨어져 앉거나 눕고
보다 높은 마음에 전념하는 것,
이것이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185)
8.
참으로 금화의 비가 내려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만족은 없다.
욕망에는 쾌락은 적고 고통뿐이라.
현명한 님은 이와 같이 안다.(186)
9.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제자는
천상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조차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단지 갈애의 부숨을 기뻐한다.(187)
10.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두려워하여
산과 숲에 귀의처를 찾거나
동산이나 나무가 있는 성소에 귀의한다.(188)
11.
그러나 그것은 안온한 귀의처가 아니고
그것은 실로 최상의 귀의처가 아니다.
그것에 귀의한다고 해서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189)
12.
깨달은 님의 가르침과
참모임에 귀의한 님은
올바른 지혜로써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본다.(190)
13.
괴로움,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초월,
괴로움의 지멸로 이끄는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이 있다.(191)
14.
바로 이것이 안온한 귀의처이고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귀의처이다.
이것에 귀의하여서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난다.(192)
15.
고귀한 님은 얻기 어렵고
아무 곳에서나 태어나지 않는다.
그 현자가 태어나는 곳마다
그 가문은 행복하게 번영한다.(193)
16.
깨달은 님의 출현도 행복이고
올바른 가르침의 베품도 행복이고
참모임의 화합도 행복이고
화합한 님들의 수행도 행복이다.(194)
17.
공양할 가치 있는 님들,
희론을 여의고
슬픔과 비탄을 건넌
깨달은 님들이나 그 제자들을 공양하는 자가 있으니.(195)
18.
열반에 드신 님들, 두려움을 여윈 님들
그러한 님들을 공양하는 자의
공덕을 두고 누군가가 ‘이만하다’라고
조금이라도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196)
(법구경, 전재성님역)
활력넘치는 출근길
덥지도 춥지도 않은 좋은 계절이 돌아 왔다. 아침 출근길 공단길은 활기가 넘친다. 크고 작은 일터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모습에서 삶의 활력을 본다. 남성 보다 여성 노동자가 더 많아 보이고, 젊은 층 보다 나이 든 세대가 더 많아 보이는 것이 공단의 아침 출근 풍경이다.
이렇게 출근길이 활기가 넘쳐 보이는 것은 일터라는 ‘의지처’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단기간 계약에 따른 비정규직일지라도 일터가 있다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직장일지라도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소중한 삶의 터전인 것이다.
일터가 있다는 것은 수입이 있다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며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바치는 것이다. 특히 시간제의 경우 노동시간이 끝나면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다. 컨베이어 벨트가 멈추면 하던 일이 올스톱 되고 하루 일과가 끝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
이처럼 일터가 있다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지만 그런 일터가 자신의 안전을 담보 해주 못한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늘 불안하다.
사업자들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일이 있으면 활기가 넘치지만 일이 없으면 걱정된다. 일이 없으면 수입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 많이 모으려고 노력한다. 일이 없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잔고는 좀처럼 늘어 나지 않는다. 오히려 가면 갈수록 줄어 들 때 위기감을 느낀다.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이루어 내야 할일이 많은데 일이 없어 잔고가 갈수록 줄어 들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잠이 제대로 오지 않는다. 이럴 경우 미래가 보장된 인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상상도 해본다. 늙어 죽을 때 까지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삶을 말한다.
처자식을 부양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근심걱정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일터가 있어서 생계가 보장되고 일거리가 많아 수입이 늘어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였을 경우 미래가 암울하기 그지 없다. 이럴 경우 현실도피적 생각을 하게 된다. 멀리 떠나서 혼자 사는 것을 말한다.
현실탈출을 꿈꾸는 도시인
일로 인하여 만나는 사회친구가 있다. 그는 한 때 벤처회사 사장을 하였으나 사업이 망해서 현재는 ‘신불자’가 된 상태이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는 그는 종종 ‘귀농’이야기를 꺼낸다. 도시에서 빈민으로 비참하게 사느니 차라리 산속에 들어가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래서 몇 년 안에 반드시 실행에 옮기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감당할 수 없는 빚도 있지만 사회에서 먹고 살기가 힘들기 때문이라 한다. 일자리도 별로 없고 설령 일자리가 생겼더라도 오래 다닐 수 없는 형편이 되어서 그만 두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받을 수 있는 것도 못 받는 경우 역시 허다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혼자 힘으로 살 수 없어서 아내도 일을 한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은행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는데 무척 힘들다고 한다. 화장실서부터 벽 등 구석구석 닦는 것이 매우 고된 노동이라 한다. 그럴 때 마다 “당신이 좀 더 회사를 잘 운영하였더라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라며 불평을 털어 놓는다고 한다. 그런 그의 아내는 최고학부를 나왔고 아직도 문학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한 때 중산층이상의 삶을 살았던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도시빈민으로 전락하여 마치 형벌과 같은 삶을 살아 가고 있는데, 이런 현실을 탈출하기 위하여 내린 결론은 귀농인 것이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자급자족 하면서 자연의 흐름대로 사는 것이 꿈아닌 꿈이라 한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현실도피라 볼 수 있다. 현실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으니 현실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깊은 산중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피난처’와 같은 것이다.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면”
누구나 위기에 처했을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찾게 된다. 현실적으로 가장 의지 할 수 있는 것은 직장이다. 사업자라면 일거리이다. 직장과 일거리가 있어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의지처는 아마도 ‘돈’일 것이다. 평생 먹고 살 정도의 돈이 있다면 누구나 안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미래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늘 두려워 하고 근심걱정한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하늘아들 쑤브라흐만이 한쪽으로 물러서서 세존께 시로 말했다.
[쑤브라흐만]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또는 일어난 일에도
이 마음이 늘 두려워하고 이 정신이 늘 근심 걱정하는데
만약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면 여쭙건대 가르쳐주십시오."
[세존]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은 감관을 잘 다스리는 것
모든 것을 버리는 것 이외에는 뭇삶의 안녕을 나는 보지 못하네."
그러자 그 하늘아들이 거기서 사라졌다.
(수브라흐마경-Subrahmasuttaṃ-- Sudatta the son of Gods, 상윳따니까야 S2.2.6, 전재성님역)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근심 걱정과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는 방법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두 가지를 말한다. ‘감각기관을 잘 다스리는 것’과 ‘버리는 것’이라 한다. 이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결국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지 말라는 것이다. 마음을 항상 현재에 고정시켜 놓으면 두려움, 근심 걱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왜 산중으로 들어가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미래가 불확실 하기 때문에 현실로부터 자꾸 도피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불확실한 미래가 해소될까. 법구경 189번 게송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0.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두려워하여
산과 숲에 귀의처를 찾거나
동산이나 나무가 있는 성소에 귀의한다.(Dhp189)
게송의 주석에 따르면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종류의 두려움에 위협을 받아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산이나 성소를 찾는다고 한다. 마치 현대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은 말이다.
사람들은 무언가 하다 안되면 모든 것을 청산하고 산에나 들어가 살기를 바란다. 세상에 대하여 ‘넌더리’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해도 해도 되지 않을 경우 또 하나의 방법은 ‘신’에게 의지 하는 것이다. 이렇게 깊은 산속으로 도피하듯이 들어가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모든 것을 신에게 떠 넘겨 버리는 방법이다.
산으로 들어가 보았자
하지만 이는 현실도피와 다름 없다. 산이나 성소를 도피처로 삼아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부정하였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 준다.
11.
그러나 그것은 안온한 귀의처가 아니고
그것은 실로 최상의 귀의처가 아니다.
그것에 귀의한다고 해서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Dhp189)
산으로 도피하거나 신에게 모든 것을 떠 넘기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산이나 성소는 귀의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설령 그런 곳에 의지한다고 해서 당면한 고통이 해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혼자서 커다란 거센 물결을 건널 수 없습니다.”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존자우빠씨바]
“싸끼야여,
저는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커다란 거센 물결을 건널 수 없습니다.
제가 의지해 이 거센 물결을 건널 수 있도록
의지처를 가르쳐 주십시오.
널리 보는 눈을 지닌 님이여.”
[세존]
“우빠씨바여,
새김을 확립하여 아무 것도 없는 경지를 지각하면서,
나아가 ‘없다’에 의존하여 거센 물결을 건너십시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의혹에서 벗어나
갈애의 소멸을 밤낮으로 살펴보십시오.”
(우빠시와경-Upasiva suttam-학인 우빠씨바의 질문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Sn5.6, 전재성님역)
제자는 ‘이 거센 물결을 건널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건널 수 있는 의지처를 알려 달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거센물결을 건너는 방법을 알려 준다. 가장 먼저 자아가 없음을 알아야 하고 그다음에 갈애의 소멸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진정한 귀의처는?
이는 다름아닌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12.
깨달은 님의 가르침과
참모임에 귀의한 님은
올바른 지혜로써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본다.(Dhp190)
13.
괴로움,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초월,
괴로움의 지멸로 이끄는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이 있다.(Dhp191)
14.
바로 이것이 안온한 귀의처이고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귀의처이다.
이것에 귀의하여서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난다.(Dhp192)
부처님은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하여 말씀 하신다. 사성제와 팔정도가 진정한 귀의처라 한다. 사성제와 팔정도에 의지하였을 때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 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미래가 불안하고 근심 걱정된다고 하여 산속으로 도피하거나 성소에 들어가 신에게 떠넘길 필요가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품안에서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세존]
"촌장이여,
예를 들어 그 상품의 밭은 다름아니라 나의 수행승, 수행녀들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고 의미있고 형식을 갖춘 법을 설하고 모든 것을 구비하고 완전히 깨끗한 청정한 삶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촌장이여,
그들은 나를 등불로 하고 나를 동굴로 하고 나를 피난처로 하고 나를 귀의처로 하기 때문입니다.
(켓뚜빠마경-Khettūpamasuttaṃ- Preaching- 가르침, 상윳따니까야 S41.8.1.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등불, 동굴, 피난처, 귀의처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이는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등불, 동굴, 피난처, 귀의처는 다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품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빠알리어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원문과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Ete hi gāmaṇi
maṃdīpā
maṃleṇā
maṃtāṇā
maṃsaraṇā viharanti.
촌장이여,
그들은 나를 등불로 하고
나를 동굴로 하고
나를 피난처로 하고
나를 귀의처로 하기 때문입니다.
Gāmaṇi, they live making me,
their light,
affection,
protection and refuge.
빠알리어로 등불은 디빠(dīpā), 동굴은 레나(leṇā), 피난처는 따나(tāṇā), 귀의처는 사라나(saraṇā)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귀의처와 위지처는 같은 뜻이다. 그렇다면 피난처와는 어떻게 다를까.
귀의처와 피난처
전재성박사의 상윳따니까야 해제에 따르면 귀의처와 피난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귀의처(歸依處 sarana) :
열반은 곧 윤회의 고통 속에 헤매는 모든 중생들의 귀의처가 된다.
피난처(避難處 tana) :
열반의 체험은 번뇌의 폭류나 마군으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발견한 것과 같다.
열반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긍정적 언표로 귀의처와 피난처에 대하여 구분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열반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같은 뜻이라 본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따낭경(피난처경)과 사라낭경(귀의처경)의 내용이 똑 같기 때문이다.
따낭경(피난처경)을 보면
따낭경(피난처경)에 묘사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너희들을 위해 피난처와 피난처로 이끄는 길을 설하겠다. 잘 들어라.
수행승들이여,
피난처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피난처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피난처로 이끄는 길이란 어떠한 것인가?
멈춤이나 관찰이나,
사유가 있고 숙고가 있는 삼매나 사유는 없지만 숙고가 있는 삼매나 사유도 없고 숙고도 없는 삼매나 있음을 뛰어넘는 공삼매나 특징을 뛰어넘는 무상삼매나 바램을 뛰어넘는 무원삼매나,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여 열심히 바로 알고 마음새겨 세상의 탐욕과 불쾌를 제거하는 것이나 감수에 대하여 감수를 관찰하여 열심히 바로 알고 마음새겨 세상의 탐욕과 불쾌를 제거하는 것이나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열심히 바로 알고 마음새겨 세상의 탐욕과 불쾌를 제거하는 것이나 법에 대하여 법을 관찰하여 열심히 바로 알고 마음새겨 세상의 탐욕과 불쾌를 제거하는 것이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하고 불건전한 법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을 도모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힘쓰는 것이나 이미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법을 버리기 위해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을 도모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힘쓰는 것이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하고 건전한 법을 일으키기 위해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을 도모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힘쓰는 것이나 이미 생겨난 선하고 건전한 법을 유지하기 위해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을 도모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힘쓰는 것이나, 의욕의 집중과 노력에 의해 형성되는 신통력을 닦는 것이나 정진의 집중과 노력에 의해 형성되는 신통력을 닦는 것이나 마음의 집중과 노력에 의해 형성되는 신통력을 닦는 것이나 사유의 집중과 노력에 의해 형성되는 신통력을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믿음의 능력을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정진의 능력을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새김의 능력을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집중의 능력을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지혜의 능력을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믿음의 힘을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정진의 힘을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새김의 힘을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집중의 힘을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지혜의 힘을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새김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법탐구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정진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기쁨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안온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집중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평정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 것이나,
38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올바른 견해를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올바른 사유를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올바른 언어를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올바른 행위를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올바른 생활을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올바른 정진을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올바른 새김을 닦는 것이나 멀리 떠남에 의존하고 사라짐에 의존하고 소멸에 의존하고 보내버림으로 향하는 올바른 집중을 닦는 것이다.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피난처로 이끄는 길이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피난처와 피난처로 이끄는 길에 관해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제자의 이익을 위하는 스승이 해야할 일이면 어떠한 것이든 자비롭게 자비를 느끼면서 나는 그대들에게 행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나무 밑에서 이러한 빈집에서 선정을 닦아라. 방일하지 말고 나중에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 이것이 너희들을 위한 가르침이다."
(따낭경-tanam-피난처경, 상윳따니까야 S42. Dutiya asaṅkhata vaggo, 전재성님역)
의존에 대하여 무려 45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설명은 사라낭경(귀의처경)에도 똑 같이 적용된다.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다른 것을 귀의처, 피난처, 동굴, 등불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사성제와 팔정도를 귀의처, 피난처, 의지처, 동굴, 등불로 삼으라는 것이다.
매번 패배를 맛보지만
현실을 살아 가면서 매번 패배를 맛 본다. 그렇다고 하여 도피하듯이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사는 것은 올바른 해결 방법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현실과 진검승부하듯이 사는 것이다. 비록 현실세계와 승부여 매번 패배할지라도 언젠가 이길 날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2-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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