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인터넷폐인과 결정론자, 왜 빠알리 니까야를 보아야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2. 9. 15. 11:59

 

인터넷폐인과 결정론자, 왜 빠알리 니까야를 보아야 하는가

 

 

 

사이버 신인류족

 

폐인(廢人)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망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나, 오늘날에는 컴퓨터와 인터넷과 관련된 취미, 커뮤니티, 온라인 게임, , 기타 등등에 대해 극단적으로 심취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 한다. 이를 일러 인터넷폐인이라 한다.

 

어느 때인가 인터넷상에 흥미로운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그것은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밥을 먹는 장면이었다.

 

 

 

 

 

 

사진 : 주간동아

 

 

인터넷보급이 본격화 되고 온라인 게임이 확산됨에 따라 거의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만 붙어 사는 네티즌이 늘어 났다. 이는 인터넷이 일상화 되었기 때문이다. 현실공간과 사이버 공간을 넘나 드는 인터넷시대에 새로운 인류가 탄생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매스컴에서는 ‘사이버 신인류’라는 명칭을 부여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인류에 대하여 여러가지 별칭이 있는데, 주간동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이버 신인류의 출현은 인터넷이 가져온 사회·문화적 변화에서 비롯됐다. 자기표현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와 합리성, 능동성이 신인류에게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디지털 레밍스족, 코쿤(혹은 디지털 히키코모리)족, 디지털 폐인(룸펜), 디지털 노마드족, 디지털 프로슈머족, 디지털 유니섹스족, 블로그족 등 각각의 사이버 신인류는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종족의 보편적 삶의 양식을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디지털이 키웠다 ‘사이버 신인류’, 주간동아)

 

 

인터넷으로 인한 새로운 인간 유형이 출현하였는데, 이를 디지털 레밍스족, 코쿤(혹은 디지털 히키코모리), 디지털 폐인(룸펜), 디지털 노마드족, 디지털 프로슈머족, 디지털 유니섹스족, 블로그족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운다고 한다.

 

폐인들은 애인보다 온라인 컴퓨터를 더 좋아 한다

 

이 중 디지털폐인이 가장 눈길을 끈다. 그것은 인터넷에 중독된 폐인이기 때문이다. 그 중 온라인 게임에 대한 중독은 매우 심각하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우스개 소리로 폐인들은 애인보다 온라인 컴퓨터를 좋아 한다라고 말을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인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온라인 게임에서만큼은 자신이 마음 먹은 대로 되기 때문에 애인 보다 온라인 게임이 더 좋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이와 같은 폐인의 특징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현실과는 다른 세상에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인터넷 상 자신은 현실 속 자신의 모습과는 달랐다. 어느 누구도 자기를 모른다는 익명성에 힘입어 평소 모습과는 달리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게시판에 원색적 비난이나 욕하는 글을 자주 올리게 됐고, 인터넷 게임을 통해서는 자신에 대한 성취감과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20~30대 인터넷 폐인이 늘고 있다 , 구본훈 교수)

 

 

폐인들은 오로지 사이버세상에서만 산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 현실세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원색적인 욕이나 비방을 하는 것도 인터넷 세상에서 가능한데, 이는 철저하게 익명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경전을 무시하는 회의론자들

 

이처럼 익명성을 바탕으로 인터넷 공간에서 불자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개인적인 견해를 표출하는 것이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똑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말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들이 경전을 근거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을 통틀어 ‘회의론자’들이라 볼 수 있다.

 

인터넷토론 카페 등에서 볼 수 있는 회의론자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경전무시이다. 경전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경전에 쓰여 있는 내용이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회의 하다 보니 경전이 후대에 편집되거나 조작 되었다고 본다. 특히 자신들의 깜냥으로는 알 수 없는 신통, 윤회 등에 대한 내용이 나오면 모두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을 펼치셨지 내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경전적 근거를 요구하면 아무런 증거도 내놓지 못한다.

 

회의론자들이 근거로 삼는 구절

 

그럴 때 마다 또 하는 말은 ‘초기경전은 문자에 얽매여 보면 안된다’든가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듯이 경전을 보라’든가 ‘행간을 읽어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비구들아, 내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지 말고 너희들이 곰곰히 생각해서 합리적이라고 판단될때
완전히 이해가 될때 내 말을 받아 들여야 한다, 너희들이 이해가 안될때는 내말이라도 이해가 될때까지 의심해서 궁극적으로 알아야 한다"

 

 

이 문구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함부로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도 자신이 이해 될 때 까지 의심해서 알게 될 때 까지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회의론자들은 이와 같은 문구를 이용하여 경전을 함부로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하고 문자에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근거를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구를 초기경전에서 찾을 수 없다.

 

일관성 있는 부처님 말씀

 

다만 깔라마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깔라마들이여,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깔라마 경- Kālāma Sutta , 앙굿따라니까야-A3:65, 대림스님역)

 

  깔라마 경(A3-65).docx

 

 

 

깔라마경에 따르면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믿는다’거나 ‘우리의 스승이 말해서 믿는다’라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브라만의 성전과 브라만의 스승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만일 부처님이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의심하라고 말했다면 이는 일관성이 없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S21. 1. 5. 1)”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은 부처님이 말씀 히신 법에 의지할 것을 말하는 대목을 도처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초기경들이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말씀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단멸론자들의 분탕질에 폐쇄된 초기불교 카페

 

현실공간과 사이버공간을 넘나들며 사는 인터넷 시대에 있어서 자칭 불자라고 하는 자들 중에 단멸론자와 결정론자 등 외도의 사상을 가진 자들을 본다. 그런 자들의 특징은 철저하게 경전을 불신한다는 것이다. 경전 중에서도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을 뿐 나머지는 철저하게 불신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기 일쑤이고 왜곡된 자신의 결해가 마치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인양 인터넷 공간에 퍼뜨려 ‘분탕질’을 치고 있다.

 

그래서일까 최근 인터넷 불교 카페 하나가 폐쇄 되었다. 초기불교사이트로 잘 알려져 있는 ‘홍사성의 불교사랑’이 그것이다. 주인장이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를 존중한 결과 ‘단멸론자들의 놀이터’로 변하여 정법을 왜곡하는 사례가 빈번하자 카페폐쇄라는 극약처방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정법을 부정하는 자들은 틈만 나면 삿된 견해를 퍼뜨려 불자들을 커다란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이교적인 이론 가운데 가장 혐오스런 것

 

단멸론, 결정론 등 삿된 견해를 가진 자들은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 그리고 초기경전에 그들의 행태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 중 결정론자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그런데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에 집착하지 않고 이와 같이 '뭇삶이 오염되는 데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뭇삶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오염된다. 뭇삶이 청정해지는데도 원인도 조건도 없다. 뭇삶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청정해진다.

 

거기에는 힘도 없고 애씀도 없고 사람의 노력도 없고 사람의 열성도 없다. 모든 뭇삶, 모든 생명, 모든 존재, 모든 영혼은 자유가 없이 힘도 없이 노력도 없이 결정과 종과 자연의 본성에 의하여 서로 변이하며 여섯가지 종에 따라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받는다' 는 견해를 일으킬 수 있는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헤뚜경-hetu -원인,  상윳따니까야 S23.3.1.7, 전재성님역)

 

  헤뚜경(S23.3.1.7).docx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중 결정론자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결정론자들은 모든 존재들은 ‘결정과 종과 자연의 본성에 의하여 서로 변이’한다고 하였다. 이는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정론을 주장한 자는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이었다.  그는 모든 것은 자연의 불변의 법칙으로 생겨 난다고 주장하고, 인간의 모든 체험에서 우연적 요소를 추방하였다. 그런 막칼리 고살라는 고행주의자로 분류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극단적이고 자연적 결정론자인 막칼리 고살라에 대하여 부처님은 모든 이교적인 이론 가운데 가장 혐오스런 것이라 하였다.

 

모든 사건들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결정과 종과 자연의 본성에 의하여 서로 변이하며”라는 말이다. 이 말뜻은 무엇일까. 이 말은 빠알리로 ‘niyatisangatibhavaparinata’이다.  이말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전통적으로 붓다고싸는 이 말을 병렬복합어로 해석해서 모든 존재는 운명(niyati)과 기회(sangati)와 본성(bhava)에 의해 전개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인 바샴은 격한정복합어로 해석하여 모든 존재는 '운명(niyati)의 몫(sangati)의 본성(bhava)에 의해 성숙된(parinata)' 것, 또는 '운명(niyati)과의 결합(sangati)의 존재(bhava)에 의해 초래된(parinata)'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고래로 자이나교의 유명한 주석가들인 시랑까나 냐나비말라는 사명외도(邪命外道)를 결정론자(niyativadin)라고 불렀으며, 결정은 사물의 본성에 내재적인 인과적 요소로 보았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결정의 원리를 유물론자들의 자성론과 일치시켰다. 특히 씨랑까는 이러한 결정론과 자성론을 모두 외부원인설로 보고 있다.

 

어떻든 간에 niyati의 원리는 구체적으로 sangati와 bhava로 드러난 것이며, sangati와 bhava는 niyati의 개체적인 양상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상이한 해석적인 양상을 보이는 sangati와 bhava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고쌀라를 결정론자로 볼 수도 있고 비결정론자로 볼 수도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모순을 최초로 지적한 사람은 바루아였다. 그는 고쌀라의 결정론적인 경향과 sangati와 bhava의 우연론적이거나 무인론적인 경향이 서로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한편 자야띨레께는 바루아의 견해를 받아들여 이 모순된 양자를 극복하기 위해 고쌀라는 극단적인 결정론자가 아니라 통합론자로서 결정(niyati)과 우연(sangati)과 자성(bhava)을 조화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

 

최종적으로 깔루빠하나는 붓다고싸의 해석을 재검토하여 sangati를 '여섯 가지 존재의 어느 하나에 따른 전개' 로 보아 자야띨레께를 비판하고 '종()' 이라고 해석했다. 그에 의하면 사명외도는 사물은 존재의 여섯 가지 범주에 투기되며 따라서 사물의 자성은 그 투기된 종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24쌍윳따 견해 (ditthi samyutta) 해제, 전재성님)

 

 

해제에 따르면 고쌀라는 모든 사건의 원인과 결과들이 강하게 결정되어 있는 것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모든 사건들이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운명지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런 운명은 신들의 힘과 권능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노력을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결정론은 무조건적인 결정론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무인론이라 본다.

 

결정론은 무인론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는 경에서 뭇삶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오염된다.”라는 구절이 잘 말해 준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해제에 따르면 막칼리 고살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고쌀라의 결정론이 유물론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고쌀라는 모든 사건의 원인과 결과들이 강하게 결정되어 있는 것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모든 사건들이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운명지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운명은 신들의 힘과 권능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노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너무 극단적인 결정론은 무조건적 결정론으로 무인론(無因論,ahetuvada)이며, 결과적으로 무인무연론(無因無緣論)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제24쌍윳따 견해 (ditthi samyutta) 해제, 전재성님)

 

 

결정론은 모든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강하게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건들은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뭇삶이 오염되는 데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뭇삶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오염된다. 뭇삶이 청정해지는데도 원인도 조건도 없다.”라고 한 것이다. 설령 결정론자가 원인과 조건을 강조할지라도 이미 결정된 것이라면 이는 원인과 조건이라 볼 수 없는 것이다.

 

결정론자의 궤변을 보면

 

이와 같은 결정론으로서의 막칼리 고살라의 주장은 ‘미래적 사건에 대한 선결정주의적 관념을 고취시키고 예언의 가능성을 용인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해제에서는 ‘미래의 사건이 일어날 운명이라면 전지자(全知者)가 미래를 확실성을 가지고 예언할 수 있을 것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결정론자들이 왜 예언을 중요시 여기는지에 대한 답이라 보여진다.

 

이처럼 결정론자들은 결정을 강조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예언을 용인한다. 그러면서 인과를 주장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이와 같은 결정론에 의존하는 인과적 설명을 비웃는다’고 해제에서 말한다. 이에 대한 예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지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빈집에 들어갔는데 개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물었다고 하자. 그들은 자신들의 당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떠한 예지라도 그 사건을 발생을 변경시키지 못했다고 암시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의 불가피성을 주장할 것이다.

 

(제24쌍윳따 견해 (ditthi samyutta) 해제, 전재성님)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가 빈집에 들어 가서 개에 물렸다고 하였을 때 이는 예상치 못한 것이다. 그 경우 ‘어떠한 예지라도 그 사건을 발생을 변경시키지 못했다’라고 불가피함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기 위한 궤변이다.

 

왜 빠알리 니까야를 보아야 하는가

 

결정론자가 미래에 대한 결정을 주장하면서 원인 또는 조건을 말한다는 것은 ‘궤변’이다. 초기경과 주석에서의 설명과 같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원인과 조건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자중에 왜 이와 같은 결정론자가 생겨 나는 것일까. 그것은 경전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특히 부처님의 원음이 담겨 있는 빠알리니까야를 말한다. 경전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에 의존하다 보니 삿된 견해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삿된견해는 결정론 뿐만 아니라 단멸론, 불가지론, 숙명론, 영원론 등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가 되기 쉽다. 왜 불자들이 빠알리니까야에 의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이유가 될 것이다.

 

 

 

2012-09-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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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뚜경(S23.3.1.7).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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