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들의 불이(不二)법문 , 왜 불일(不一)은 말하지 않는가
김성철 교수의 글에서
불교닷컴에 김성철 교수에 관한 글이 실렸다. 성철스님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학술포럼에서 발표할 김성철 교수의 글에 대한 것이다.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았다.
김 교수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고행의 자기학대’와 ‘감각적 즐거움’을 배격한 고락중도(苦樂中道)의 선수행을 통해 단상중도(斷常中道)의 12연기법을 발견했다. 성철 스님은 철두철미한 지계청정의 삶과 역설적인 중도 언행을 통해 불교의 본질을 회복했다”고 말했다.
(김성철 교수, 21일 ‘퇴옹성철의 중도론’ 학술포럼서 기조강연, 불교닷컴 2012-09-18)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인 김성철 교수의 글에 따르면 부처님이 “고락중도(苦樂中道)의 선수행을 통해 단상중도(斷常中道)의 12연기법을 발견했다”라고 하였다. 성철스님의 탄신 100주년과 관련된 학술포럼이기 때문에 성철스님의 중도사상을 강조하기 위하여 한 말이라 보여진다.
성철스님의 중도사상
하지만 이는 대승적 시각에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은 성철스님의 중도사상은 대승불교적 시각에서 본 것으로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처럼 성철스님은 부처님이 깨치신 진리가 ‘중도’이며, 그 중도의 내용이 팔정도이고, 팔정도는 방법론이 아닌 목적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대승불교적 시각인데, 자칫 잘못하면 초기불교의 실천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견해라고 오해받을 소지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성스님, <百日法門>에 나타난 中道思想)
마성스님의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글 ‘<百日法門>에 나타난 中道思想’에 따르면 성철스님이 이해하는 중도사상은 ‘목적론’이라 한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중도가 곧 팔정도라 하였는데, 성철스님의 중도론에 따르면 팔정도는 방법론이 아닌 목적론이 되어 버린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팔정도의 실천적 특성을 간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성제에서 팔정도는 괴로움을 소멸하기 우한 방법에 대한 것으로서 이미 완성된 도라기 보다 실천하는 도에 가깝다. 정견을 이룬 다음 실천하는 것으로서 돈오점수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돈오돈수를 주장하였던 성철스님의 입장에서 중도라고 불리우는 팔정도는 이미 완성된 도로서 목적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문제이기도 하다.
성철스님의 중도론과 돈오돈수
하지만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Nāhaṃ bhikkhave ādikeneva aññārādhanaṃ vadāmi.
Api ca bhikkhave anupubbasikkhā anupubbakiriyā anupubbapaṭipadā aññārādhanā hoti.
수행승들이여,
나는 최상의 지혜가 단번에 성취된다고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그와 반대로 오로지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닦고
점차적으로 발전한 다음에 지혜의 성취가 이루어진다.
(끼따기리경-Kīṭāgiri suttaṃ -Advice given at Kitagiri -끼따기리 설법의 경, 맛지마니까야 M7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최상의 지혜는 단번에 성취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닦는 과정’ 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여기서 점차적으로 닦는 과정이 ‘아누뿝바빠띠빠다(anupubbapaṭipadā)’이다. ‘아눕뿝바’는 ‘점차적인’ 이라는 뜻이고, ‘빠띠빠다’는 ‘도’라는 뜻이다. 빠띠빠다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Paṭipadā
Paṭipadā (f.) [fr. paṭi+pad] means of reaching a goal or destination, path, way, means, method, mode of progress (cp. Dhs. trsln 53, 82, 92, 143), course, practice (cp. BSk. pratipad in meaning of pratipatti "line of conduct"
빠알리 사전을 보면 “means of reaching a goal or destination”으로 되어 있어서, 목적 또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되어 있다. 실천의 도, 과정의 도의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중도라고 하였을 때 이에 대한 빠알리가 맛지마빠띠빠다(Majima Paṭipadā) 이므로, 중도는 목적의 도라기 보다 실천의 도에 가깝다. 그래서 마성스님은 자신의 논문에서 “성철스님이 말하는 중도사상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실천행으로서의 중도, 즉 팔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중국의 천태-화엄과 같은 일승원교에서 말하는 중도실상을 가리키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성철스님이 말하는 중도는 방법론으로서의 도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목적론으로서의 도에 가깝다. 그것은 성철스님이 돈오돈수를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보여진다.
사향사과와 돈오점수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돈오점수’라 볼 수 있다. 참고로 돈오점수에 따른 번뇌의 소멸과정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꽃이 피면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도를 이루어야 열매를 이룰 수 있다. 이 때 도를 ‘막가(magga, 道)’라 하고 열매를 ‘팔라(phala, 果)’라 한다. 이렇게 도와 과를 이루신 성인들을 사쌍팔배의 성자라 한다. 즉 수다원(須陀洹, sotāpanna), 사다함(斯陀含, sakadāgāmi), 아나함(阿那含, anāgāmi), 아라한(阿羅漢, arahatta)의 네 가지의 성인과 여기에 도(道, magga)와 과(果, phala)를 각각 곱하면 8가지가 되는데 이를 사향사과(四向四果) 또는 사쌍팔배(四雙八輩)라고 한다.
주석에 따르면 도(道)란 그에 상응하는 과(果)에 들어서기 직전의 한 순간의 체험을 말한다. 과는 도의 결과 즉시 뒤따르는 의식의 순간을 의미한다. 즉 도를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체험이라 한다면, 과는 그 순간적인 체험의 다음 순간에 얻어지는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여덟 가지를 출세간의 도과라 하고 이들의 마음을 ‘출세간의 마음(lokuttara-citta)’이라 한다.
이와 같은 출세간의 마음은 수다원이나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모두 같다고 한다. 즉 열반의 체험은 동일한 것이다. 이는 화엄경에서 말하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라 한다. 처음 깨달음의 마음을 내는 그 안에 이미 깨달음이 성취되어 있다는 뜻이다. 수다원의 깨달음과 아라한의 깨달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다만 남아 있는 번뇌가 다를 뿐이다. 그래서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해 가는 과정이 점수이다. 이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번뇌 |
수다원 sotāpanna |
사다함 sakadāgāmi |
아나함 anāgāmi |
아라한 arahatta |
견도(見道) |
수도(修道) |
수도(修道) |
무학도(無學道) | |
1.유신견 sakkāya-diṭṭhi |
소멸 |
소멸 |
소멸 |
소멸 |
2. 회의적 의심 vicikicchā |
소멸 |
소멸 |
소멸 |
소멸 |
3. 계금취견 Sīlabbataparāmāsa |
소멸 |
소멸 |
소멸 |
소멸 |
4. 감각적 욕망 kāma-rāga(탐) |
남아 있음 |
옅어짐 |
소멸 |
소멸 |
5. 적의 paṭigha(진) |
남아 있음 |
옅어짐 |
소멸 |
소멸 |
6. 색계 집착 rūpa-rāga |
남아 있음 |
남아 있음 |
남아 있음 |
소멸 |
7. 무색계 집착 arūpa-rāga |
남아 있음 |
남아 있음 |
남아 있음 |
소멸 |
8. 자만 māna |
남아 있음 |
남아 있음 |
남아 있음 |
소멸 |
9. 들뜸 uddhacca |
남아 있음 |
남아 있음 |
남아 있음 |
소멸 |
10. 무명 avijjā(치) |
남아 있음 |
남아 있음 |
남아 있음 |
소멸 |
표를 보면 점수과정이라는 것이 번뇌를 소멸하는 과정과 같은 것임일 알 수 있다. 공통적으로 개체에 실체가 있다는 ‘유신견’과 부처님의 법에 대한 ‘회의적 의심’과 잘못된 수행방법인 ‘계금취견’이 소멸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가지 번뇌가 소멸되면 흐름에 드는자가 되는데 수다원이라 한다.
수다원만 되도 어지간한 번뇌가 모두 소멸되어 앞으로 일곱생 이내에 열반에 드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 그런 수다원을 ‘견도’단계라 한다. 그 다음 사다함과 아나함의 과정은 남아 있는 번뇌가 소멸되는 과정이라 하여 ‘수도’라 한다. 아라한이 되면 모든 번뇌가 소멸되므로 ‘무학도’라 한다.
김성철교수의 불이(不二)중도론
김성철 교수에 관한 글을 보면 또 다음과 같이 중도를 설명하고 있다.
김성철 교수는 “부처님이 발견하고 성철 스님에게 계승된 불교의 본질, 불이중도는 사회적으로 실천돼야 한다. 이는 나와 남의 이분법을 타파하는 자비실천이며, 부자ㆍ빈자 이분법을 타파하는 정의구현이며, 종교간 구분을 타파하는 종교화해이고 남ㆍ북한 대립을 타파하는 통일운동”이라고 말했다.
(김성철 교수, 21일 ‘퇴옹성철의 중도론’ 학술포럼서 기조강연, 불교닷컴 2012-09-18)
부처님 발견하고 성철스님에게 계승된 불교의 본질에 대하여 ‘불이중도’라 하였다. 여러가지 중도가 있지만 특히 불이중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용수의 팔불중도에 근거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 불생불멸(不生不滅) : 개별존재의 생겨남과 사라짐에 대한 부정.
- 불상부단(不常不斷) : 존재의 영원함과 단절됨에 대한 부정.
- 불일불이(不一不異) : 존재의 같음과 다름에 대한 부정.
- 불래불거(不來不去) : 존재의 개별 원인과 개별 결과에 대한 부정.
모두 8개의 불(不)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중 세 번째의 불일불이(不一不異)를 보면 이는 “동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는 김성철교수가 말하는 불이와 다른 것이다.
선정삼매상태에서나 가능한 불이(不二)
김성철 교수는 불이만을 말하고 있다. 이런 논리를 현실에 적용하였을 때 어떻게 될까. 아마도 현실과 괴리감을 피 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선정삼매상태에서나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정상태에서는 나와 남이 구별될 수 없다. 오로지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별이 일어나면 안되는 것이다. 이렇게 선정삼매나 공의 논리에서나 가능한 불이법문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주(主)와 객(客)이 바뀐 듯한
그렇다면 성철스님이 주장한 중도사상이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의 본질일까.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의 논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가전연경>의 내용울 설명하면서 “이렇게 십이연기를 순관과 역관으로 관찰하여 중도를 설명하는 것을 증명중도라고 합니다.
이상의 설명에서 보듯이 가전연경에서 말하는 의미를 결론적으로 말하면, 연기의 내용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또한 있고 없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중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백일법문>상권, p.112)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처님이 중도를 깨달아서 정각자가 되었듯이,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설, 또는 십이연기설 역시 중도의 궤도를 이탈할 수 없습니다.” (<백일법문>상권, p.95)라고 했다.
이와 같이 성철스님은 연기설을 중도가 진리임을 증명하는 도구로 이해 하고 있다. 이것은 주(主)와 객(客)이 바뀐 듯한 느낌이다. 이것은 성철스님이 중도를 목적론 혹은 구경론으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성스님, <百日法門>에 나타난 中道思想)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 따르면 여러가지 경전적 근거를 들어 중도를 설명하고 있는데, 가장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것이 ‘가전연경’이라 한다. 빠알리 니까야에서는 ‘깟짜나곳따경 (Kaccānagottasuttaṃ, S12.2.5)’이라 한다.
글에서 마성스님에 따르면 주(主)와 객(客)이 바뀐 듯 하다고 하였다. 깟짜나곳따경에서 말하는 주인은 연기법이고 손님은 중도이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이를 반대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철스님이 중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연기법을 보조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깟짜나곳따경(S12.2.5)에서
그러나 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그렇지 않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며,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며,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ṃ, 상윳따니까야 S12.2.5,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먼저 양극단에 대하여 설명한다. 유무에 대한 극단을 말한다. 그래서 양극단을 떠난 중도에 대한 가르침을 설한다고 하면서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에 대하여 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견과 단견을 연기법으로 논파한 문구
이루 미루어 보았을 때 부처님은 연기법을 이용하여 ‘절대유’와 ‘절대무’가 있을 수 없음을 설하고 있다. 왜 절대유와 절대유가 절대로 있을 수 없을까. 이는 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기 때문이다.
Dvayaṃnissito kho'yaṃ kaccāna loko yebhuyyena atthitañceva natthitañca.
Lokasamudayañca kho kaccāna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Lokanirodhaṃ kho kaccāna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나 비존재의 두 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ṃ, 상윳따니까야 S12.2.5, 전재성님역)
바로 이 구절이 상견과 단견을 연기법으로 논파한 유명한 말이다. 존재라는 것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믿는 영원주의를 말하는데 이 세상 거의 대부분의 종교가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죽으면 천국에 태어나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영원주의는 지옥 역시 영원한 지옥이다. 지옥에 한번 떨어지면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한편 비존재에 위존한다는 것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더 이상 내세는 없다”라고 단멸에 대한 것이다.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이와 같은 상견과 단견은 모두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바로 연기법을 말한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원인과 조건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에 조건이 소멸하지 않는 한 또 다시 형성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멸론이 논파 된 것이다.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또 경에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라고 하였다. 이는 영원히 존재한다고 보는 영원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있는 그대로를 관찰한다는 것은 연기의 현상을 말한다. 원인과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연기를 말한다. 이런 연기는 조건이 소멸되지 않는한 계속 일어 날 수 밖에 없는데, 영원주의자들은 한번 일어난 것이 영원하다고 본다. 한번 천국이면 영원한 천국이고 한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을 말한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조건이 소멸되지 않는 한 연기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영원주의는 논파된다.
핵심은 중도가 아니라 연기
이와 같이 부처님은 절대유와 절대무를 연기법으로 논파하기 위하여 깟짜나곳따경을 설하였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경에서 말씀 하시고자 하는 핵심내용은 연기법이지 중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도는 양극단을 떠난 것으로 설명되는 하나의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깟짜나곳따경에서 핵심은 연기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연기법의 정형구 중에 순관을 보면
그런 연기법의 정형구 중에 순관을 보면 다음과 같다.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Nāmarūpapaccayā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ṃ, 상윳따니까야 S12.2.5, 전재성님역)
순관에서 마지막 정형구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12연기 하면 무명에서 시작 하여 노사까지만 있는 줄 알았다. 그것은 반야심경에서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늙고 죽음 이후에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라는 용어가 더 있는 것이다!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
대승불교부터 접하는 불자들은 십이연기에 대하여 잘 모른다. 더구나 반야심경에서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라 하여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 도 없고, 고 집 멸 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로 설명하고 있다.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십이연기의 가르침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십이연기가 무엇인지 모르고 십이연기를 부정하는 듯한 가르침 먼저 접하는 것이 한국의 불자들이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몰라 오로지 공의 논리에 따른 불이법문이 최고의 가르침인 줄 안다.
그러나 빠알리 니까야를 접하면서 십이연기 정형구를 보았을 때 가장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온 것이 십인연기 정형구에서 마지막 문장이다. 그것은 누구나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매우 실감나게 적나라하게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라는 긴 복합어가 그렇다.
이 복합어를 우리말로 풀면 전재성박사는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라 하였고, 초불연에서는 ‘근심ㆍ탄식ㆍ육체적 고통ㆍ정신적 고통ㆍ절망’이라 하였다. 둑카(dukkha)에 대하여 ‘육체적 고통’, 도마낫사(domanassa)에 대하여 ‘정신적 고통’ 이라고 주석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면 영문으로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 sorrow, lamentation, pain, distress)로 표시 된다.
연기의 순관 뒤에는 반드시 역관이
부처님이 고통과 절망에 대하여만 말하였다면 염세주의자로 몰렸을 것이다. 그리고 담마가 오늘날까지 굴러 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연기의 순관 뒤에는 반드시 역관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고통과 절망 등으로 대표 되는 번뇌에 대한 해결방법인 것이다.
Avijjāyatveva asesavirāganirodhā saṅkhāranirodho.
Saṅkhāranirodhā viññāṇanirodho.
Viññāṇanirodhā nāmarūpanirodho.
Nāmarūpanirodhā saḷāyatananirodho.
Saḷāyatananirodhā phassanirodho.
Phassanirodhā vedanānirodho.
Vedanānirodhā taṇhānirodho.
Taṇhānirodhā upādānanirodho.
Upādānanirodhā bhavanirodho.
Bhavanirodhā jātinirodho.
Jātinirodh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 nirujjh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며,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며,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ṃ, 상윳따니까야 S12.2.5, 전재성님역)
이렇게 부처님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설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의 발생에서부터 소멸에 이르기 까지 조건 발생적으로 설하였는데, 이것이 십이연기 정형구이다.
십이연기 정형구에 대한 노래, 빠띳짜 사뭅빠다(Paticca-samuppada)
십이연기 정형구에 대한 노래가 있다. 빠띳짜 사뭅빠다(Paticca-samuppada - Reflection on the Wheel of Life, 십이연기)로서 스리랑카의 챈팅가 위사라드 스리마 라뜨나야까( Visarad Srima Ratnayaka)이다.
음성: 04-hymn-04.mp3
선사들의 불이(不 二)법문
흔히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둘이 아니라는 불이법문을 주로 한다. 생사즉열반이라거나 번뇌즉보리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 같은 것이고, 번뇌와 지혜가 둘이 아니라 역시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법문을 들을 때 마다 불자들은 어떻게 해야 될지 햇갈린다. ‘번뇌즉보리’라고 하였을 때 과연 수행을 해야 되는지 안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번뇌와 지혜가 같은 것이라면 굳이 지혜를 개발하기 위한 수행을 해야 되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사들은 왜 이와 같은 불이법문을 활용하는 것일까. 이는 용수의 중도사상에 기인한 것이라 본다. 팔불중도 중에 특히 불일불이(不一不異)중도가 그렇다. 그렇다면 불일불이와 불이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왜 불일(不 一)은 말하지 않는가
불일불이(不一不異( 또는 二))중도는 “동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는 뜻이 된다. 둘 다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사들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뜻의 ‘불이(不異)’또는 ‘둘이 아니다’라는 뜻의 ‘불이(不二)’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 동일하지 않다라는 뜻의 불일(不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론을 전공하였다는 김성철 교수는 불이(不二)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다. 더구나 불이의 가르침이 부처님이 발견하고 성철스님이 계승한 것이라 설명하고, 이 불이의 가르침으로서 사회의 양극단을 해결하자고 한다. 또 나와 남을 구분하는 이분법을 타파하여 종교간의 화해와 남북통일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김성철 교수는 용수가 말한 불일불이에서 불일은 왜 말하지 않는 것일까. 불이를 말한다면 불일도 함께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럴경우 종교간의 화해 보다 종교간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남북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라고 말하기 보다 ‘남과 북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생사즉열반, 번뇌즉보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생사가 다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다’라고 설명해야 하고, ‘번뇌와 보리가 다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다’라고 설명해야 맞지 않을까. 즉 불일불이(不一不異( 또는 二))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기=공=무자성=무아
이와 같이 불이 한가지만 말하는 김성철 교수의 말은 연기법을 왜곡할 수 있다. 깟짜나곳따경에서 유무 양극단을 배제하여 중도의 가르침을 설한 것이 연기법인데, 불이 하나만 이야기한다면 연기법이 성립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마성스님은 자신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러한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연기=공=무자성=무아인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백일법문.은 ‘중도’라는 말로 불교의 핵심인 연기=공=무아=무자성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성철스님의 <벡일법문>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마성스님, <百日法門>에 나타난 中道思想)
성철스님이 중도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불교의 핵심인 연기=공=무아=무자성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벗어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오로지 불이만을 주장하는 법문이라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벗어난 것으로 보여진다. 중도를 주장하려면 불이만 말할 것이 아니라 불일불이를 함께 말하여야 한다. 그렇게 해야 연기=공=무아=무자성이 될 것이다.
“그가 연기적으로 말하는지 보라”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연기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누구나 알아 듣기 쉬운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관한 법을 말하는 것이다. 공사상에 입각하여 불일불이를 말하면 불교가 한 없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연기로 말한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라는 말은 매우 실감난다.
중도와 연기가 같은 의미라면 불이법문 보다 연기적으로 말하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그래서 그가 깨달았는지 알아 보려면 “그가 연기적으로 말하는지 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모든 현상을 연기적으로 보지 않는다면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2012-09-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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