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차라리 그 자리에서 눈을 감자”감각적 욕망과 선정삼매의 즐거움

담마다사 이병욱 2012. 9. 22. 13:38

 

차라리 그 자리에서 눈을 감자감각적 욕망과 선정삼매의 즐거움

 

 

 

시간을 사기치는 자

 

몇 일전 법회모임이 있었다. 스님을 모셔 놓고 법문을 듣는 거창한 모임이 아니라 불교교양대학에서 같이 공부하였던 법우님들끼리 우의를 다지는 일종의 친목성격의 모임이다. 법회형식을 빌어 진행하지만 다음 행사를 위한 주요 안건을 결정하는 위주의 모임이다.

 

그런데 모임을 이끌고 있는 총무팀장께서 매우 의미 있는 발언을 하였다. “이제 우리 나이쯤 되니까 돈을 떼먹어 사기치는 사람보다 시간을 사기치는 놈이 가장 밉다라고 발언한 것이다. 돈 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은 시간이라는 말이다.

 

돈이라는 것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 돈이지만, 시간은 한번 가 버리면 다시는 돌아 오지 않기 때문에 시간낭비하는 모임을 경계하자는 취지의 말이었다.

 

현대인들은 매우 바쁘다. 그래서 시간내기가 쉽지 않다. 법회모임이라든가 강좌가 있을 때 참가 하려면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할애 하여야 한다. 특히 서울과 수도권의 경우 교통이 혼잡하기 때문에 법회나 강좌에 참석하려면 큰 결심을 해야 한다.

 

이렇게 귀중한 시간을 투자하여 법회 또는 강좌에 참석하였는데, 법사나 강사가 성의 없이 법문이나 강의에 임하였다면 이는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참석자가 무언가 한가지라도 건질 것이 없을까하고 그 먼길을 달려 왔건만 법사나 강사가 자신의 개인적인이야기나 신변이야기등으로 때운다면 이는 시간을 도둑질 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돈을 사기치는 것 보다 시간을 사기치는 자가 더 밉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 두 가지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부자나 가난한자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똑 같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하루 24시간을 사는 것은 모두 동일하다. 또 늙은이나 젊은이나 어린아이에게나 주어진 시간 역시 하루 24시간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체감하는 시간은 달라진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이 시간은 나이와 비례하여 흐른다고 한다.

 

지금 30대라면 시간이 시속 30키로미터의 속도로 느끼고, 70대의 경우 시속 70키로미터로 시간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 다고 한다. 따라서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시간은 점점 가속하여 빨리 흘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쉬운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라 한다.

 

이렇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다. 그런데 공평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잠이다.

 

누구나 밤이 되면 잠을 자는데, 잠자는 것이야말로 시간 못지 않게 공평한 것이다. 잘난사람이나 못난자 역시 일정시간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잠자는 시간 동안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다.

 

잠에서 깨어 났을 때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잠에서 깨는 순간 빈부귀천, 행복과 불행, 좋고 싫음이 확연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잠에서 깨어 났을 때부터 불평등이 시작 된다고 볼 수 있다.

 

잠을 잘 자고 나면 기분이 좋다. 특히 세상모르고 잠을 잤을 때이다. 그런 잠은 일년에 몇 차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을 자고 나면 개운해진다. 이는 마치 정화된 물과도 같다. 개울물에서 흙탕이 일어났을 때 일정시간이 지나면 정화 되듯이 잠을 통하여 마음의 찌꺼기가 아래로 가라 앉아 마음이 맑아지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마음이 정화 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떠 오르는 것은 전날의 행적에 대한 것이다.

 

잠에서 깨어 났을 때 거의 대부분 전날의 행적이 떠오른다. 대부분 부끄럽고 창피한 사건들이다. 그때 당시에는 몰랐으나 잠에서 깨고 나서 생각해 보니 참으로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주로 오버함으로 인하여 발생된 것들이다.

 

어리석은 자의 품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어리석은 자의 품

 

1.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60)

 

2.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하리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61)

 

3.

내 자식, 내 재산이라고

어리석은 자는 괴로워한다.

자기도 자기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자식, 하물며 재산이랴.(62)

 

4.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린다.(63)

 

5.

어리석은 자는 평생을

현명한 님을 섬겨도

국자가 국 맛을 모르듯,

진리를 알지 못한다.(64)

 

6.

양식있는 자는 잠깐만

현명한 이를 섬겨도

혀가 국 맛을 알 듯,

진리를 재빨리 인식한다.(65)

 

7.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을 적으로 삼아 방황한다.

악한 행위를 일삼으며

고통의 열매를 거둔다.(66)

 

8.

행한 뒤에 후회하고

얼굴에 눈물 흘리며 비탄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67)

 

9.

행한 뒤에 후회하지 않고

만족스럽고 유쾌한

결과를 초래하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이 좋다. (68)

 

10.

악행이 여물기 전까지는

어리석은 자는 꿀과 같다고 여긴다.

그러나 악행이 여물면,

어리석은 자는 고통을 경험한다. (69)

 

11.

어리석은 자는 달마다

꾸싸 풀의 끝으로 음식을 먹어도

진리를 이해하는 님에 비하면,

그 십육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70)

 

12.

새로 짠 우유가 굳지 않듯,

악한 행위는 드러나지 않는다.

재속에 숨어있는 불처럼,

작열하여 어리석은 자를 쫒는다.(71)

 

13.

어리석은 자에게 지식이 생겨난다.

오직 그의 불익을 위해서,

그것이 그 어리석은 자의 행운을 부수고

그의 머리를 떨어 뜨린다. (72)

 

14.

그는 헛된 특권을 바란다.

수행승 가운데 존경을,

처소에서는 권위를,

다른 사람의 가정에서는 공양을 바란다.(73)

 

15.

재가자나 출가자 모두

오로지 내가 행한 것이다라고 여기고

어떤 일이든 해야 할 일이나 하면 안 될 일도

오로지 나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자는 이렇게 생각하니

그에게 욕망과 자만이 늘어만 간다. (74)

 

16.

하나는 이득을 위한 수단이고

다른 하나는 열반의 길이다.

이와 같이 곧바로 알아

수행승은 깨달은 님의 제자로서

명성을 즐기지 말고

멀리 여읨을 닦아야 하리.(75)

 

(법구경 어리석은자의 품’, 전재성님역)

 

  5.어리석은 자의 품(법구경).docx

 

 

 

법구경 어리석은 자의 품(Bālavaggo)을 보면 모두 현실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것이다. 2600년전 부처님 당시나 현대나 어리석은 행위에 대한 것은 거의 다름 없어 보인다. 아마도 천년이나 이천년 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행한 뒤에 후회한다면

 

게송 중에 여덟번째 게송이 있다. 빠알리원어와 함께 다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Na ta kamma kata sādhu ~    나 땅 깜망 까땅 사두

ya katvā anutappati,           양 까뜨와 아누땁빠띠

Yassa assumukho roda ~         얏사 앗수무코 로당

vipāka paisevati.              위빠깡 빠띠세와띠

 

행한 뒤에 후회하고

얼굴에 눈물 흘리며 비탄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

(Dhp67)

 

 

이 게송과 관련하여 행한 뒤에 후회하고라는 문구가 있다. 이 문구에 대한 주석을 보면 현세에서 회상하는 순간에 후회스럽고 비탄스러울 뿐만 아니라 미래에 비참한 운명의 상태의 태어남을 가져오므로, 그 결과가 고통스런 행위는 훌륭한 것이 아니고 칭찬할 만한 것도 아니고 유익한 것도 아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무언가 일을 하고 난뒤에 후회의 마음이 일어나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잠에서 깨어 났을 때 확실히 알 수 있다.

 

잠에서 깨면 고요하다. 특히 새벽에 깨었을 때이다. 주변은 어둑하고 소리도 들리지 않아 오감이 방해 받지 않는다. 이때 마음의 문만 열려 있을 뿐이어서 전날 행위한 것이 마음에 떠 오른다.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이 떠 오르는데 이는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몸과 마음이 불편하다면 전날 오버액션한 것이라 보면 틀림 없다. 그 경우 오계를 어긴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음주와 관련된 행위가 그렇다. 이럴 경우 잠에서 깨어 났을 때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니지만 알아차림을 놓친 것에 대한 자학이다. 주로 성냄과 관련된 행위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잠에서 깨어났을 때 후회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후회할 짓을 하였을까.

 

같은 어둠일지라도

 

어둠이 있다. 어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저녁에 보는 어둠이고 또 하나는 새벽의 어둠이다. 이는 잠을 자기 전과 후로 갈린다. 잠을 자기 전 어둠은 카오스라 볼 수 있고, 잠을 자고 난 후 어둠은 평온이라 볼 수 있다.

 

같은 어둠일지라도 저녁의 어둠과 새벽의 어둠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저녁어둠의 경우 감각적 욕망에 휘둘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네온싸인이 하나 둘 불을 밝히기 시작할 때 어둠은 새벽의 어둠과 극과 극의 양상을 보여준다.  

 

다섯가지의 감각적 쾌락이 있는데

 

이와 같은 어둠을 느끼는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다섯가지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이는 즐거움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섯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아난다여,

다섯가지의 감각적 쾌락이 있다. 다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시각에 의하여 인식되는 형상도 훌륭하고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다.

 

청각에 의하여 인식되는 소리도 훌륭하고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다.

 

후각에 의하여 인식되는 냄새도 훌륭하고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다.

 

미각에 의하여 인식되는 맛도 훌륭하고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다.

 

촉각에 의하여 인식되는 감촉도 훌륭하고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다.

 

아난다여,

이 다섯가지 감각적 쾌락을 조건으로 즐거움과 만족이 생겨나는데 이것을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이라고 한다.

 

(빤짜깡가경-Pañcakagasutta, 상윳따니까야S36.19, 전재성님역)

 

  빤짜깡가경(S35.2.2.9).docx

 

 

 

이렇게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따른 감각적 즐거움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 간다. 그래서 대상이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애착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저거들은 맨날 고기묵고

 

그런데 이런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빈부와 귀천에 따라 다르고 잘난자와 못난자가 즐기는 대상이 다른 것이다. 어떤 이는 마음껏 감각적 쾌락을 즐겨도 전혀 문제가 없지만, 또 어떤 이는 문제가 되어 범죄자가 되는 경우를 뉴스를 통하여 본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아동성추행범이 있다. 이는 성욕에 굶주린 자들이다. 성욕도 식욕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인데 많이 가진자들의 경우 성적인 욕구가 충족 되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으나, 가진 것이 없는 자의 경우 성적욕구를 해소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르는데, 이는 엄밀히 알고 보면 사회의 불평등에 기인한다.

 

 저거들은 맨날 고기묵고라는 책이름이 있듯이 욕구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자들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그런 자들에 대하여 기득권층에서는 심지어 거세해 버리자는 말까지 나온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잠을 깬 상태에서 삶이라는 것은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관점으로 보았을 때 매우 불평등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많이 가진자, 부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누리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따른 감각적 욕망에 따른 쾌락은 즐거운 것임에 틀림 없다. 반면 가지지 못한자, 가난한 자, 바닥에 있는 자들이 누리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추구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 감각적 쾌락을 마음껏 누리지 못할지라도 기회만 되면 욕망을 누리려 하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가 잠재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선정삼매의 즐거움

 

이와 같이 많이 가진자나 못 가진 자나 틈만 나면 누리려 하는 것이 감각적 욕망이다. 그래서 즐거움과 만족을 누리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중생이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누린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빤짜깡가경-Pañcakagasutta, 상윳따니까야S36.19, 전재성님역)

 

 

 

 

 

 

Meditation

 

 

 

부처님은 세속에서 중생들이 오감으로 느끼는 즐거움과 만족 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은 어떠한 것인가?

 

아난다여,

이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인 쾌락을 버리고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고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홀로 명상하며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이 있는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은 이러한 것이다.

 

(빤짜깡가경-Pañcakagasutta, 상윳따니까야S365.2.2.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선정삼매의 즐거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선정삼매의 즐거움이야말로 세속에서 중생들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따른 감각적 쾌락과 비할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즐거움은 탁월하고 미묘한 것이라 한다.

 

얻어지는 것과 버려지는 것

 

선정삼매에 들면 얻어지는 것과 버려지는 것이 있다. 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얻어 지는 것 버려 지는 것
일으킨 생각(, vitaka)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지속적 고찰(, vicāra) 악의(vyāpāda)
희열(, pīty),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행복(, sukha)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평온(, upekkhā) 회의적 의심(vicikichā)

 

 

마음을 한 가지 대상에 고착시킴으로써 집중이 강화 됨에 따라 얻어지는 것과 버려지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얻어지는 것으로서 희열, 행복, 평온 등이 있고, 버려지는 것으로서 감각적욕망(), 악의(), 게으름, 게으름과 흐리멍덩한 상태, 들뜸과 후회, 법에 대한 의심 등 정신적 혼란이 제거 된다. 마치 흙탕물이 정화되는 것 같과 같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눈을 감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즐거움이라는 것이 반드시 감각기관을 만족시키는 것만이 즐거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감각적 욕망에 따른 쾌락 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는데, 그런 즐거움은 오욕락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런 즐거움은 누구나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빈부귀천, 잘나고 못나고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누구나 지금 여기서 눈을 감고 마음을 대상에 집중하면 오욕락과 비교 할 수 없는 미묘하고 탁월한 희열, 행복, 평온을 맛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노예가 되기 쉽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관성때문이다. 그래서 순간적인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접촉 하는 등 감각적 욕망을 추구 한다.   결과는 어떨까. 잠에서 깨어 났을 때 후회로 나타난다면 이는 잘 못된 것이다. 짧은 행복, 긴 고통이 되기 쉬운 것이다.

 

그렇다면 감각적 욕망이 일어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그 자리에서 눈을 감자는 것이다. 눈을 감게 되면 일단 시각적 대상이 차단되어 보이지 않게 된다. 그 상태에서  호흡을 보면 된다.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것이 호흡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들숨 날숨에 마음을 집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감각적 욕망은 사라진다. 마음은 한 순간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집중하게 되면 경에서 설명된대로 희열, 행복, 평온을 느끼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런 즐거움은 감각적 쾌락에 따른 즐거움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고, 더구나 탁월하고 미묘한 즐거움이라 하였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다섯가지 장애는 극복 되고 더 이상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Tañ-ca kamma kata sādhu ~     딴 짜 깜망 까땅 사두

ya katvā nānutappati,           양 까뜨와 나누땁빠띠
Yassa pat
īto sumano ~            얏사 빠띠또 수마노

vipāka paisevati.              위빠깡 빠띠세와띠

 

행한 뒤에 후회하지 않고

만족스럽고 유쾌한

결과를 초래하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이 좋다.

(Dhp68)

 

 

 

 

2012-09-22

진흙속의연꽃

 

5.어리석은 자의 품(법구경).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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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짜깡가경(S35.2.2.9).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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