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하늘에서 금비가 내려도, 진짜 행복이란?

담마다사 이병욱 2012. 9. 24. 14:36

 

하늘에서 금비가 내려도, 진짜 행복이란?

 

 

 

 

담마에 대한 갈증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갈증을 채워 주지 못하는 것 같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바라지만 그런 가르침을 전해 줄 수 있는 곳이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불교를 접하기 매우 어렵다. 농촌이건 도시이건 사람이 사는 곳에 사찰구경하기가 힘들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절이 있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의 정법과 거리가 먼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뜻 있는 불자들의 담마에 대한 갈증을 채워 주기 어렵다. 이런 현실에서 그래도 불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이 방송이다.

 

손바닥안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불교방송불교TV’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곳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이동통신기기의 확산에 따라 손바닥안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모바일로 종종 불교TV를 본다. 수 많은 매우 다양한 프로가 있는데 크게 법문과 교양으로 나누어져 있다. 법문의 경우 현재 방영되고 있는 것부터 시작 하여 종영된 프로까지 합하면 수십개에 달한다. 그러나 볼 만한 것이 별로 없다. 100% 대승불교와 대승경전에 대한 것이고, 100% 스님들 법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복된 프로도 많아서 천수경과 금강경, 반야심경 위주이다. 늘 듣던 말을 또 듣고 반복하여 재탕, 삼탕식 법문이 주류를 이룬다.

 

한편 교양에 대한 것을 보면 프로가 매우 다양하다. 부자만들기, 사찰여행, 감성식객, 웃음 건강학, 한의학 특강, 과학과 불교의 만남 등 온갖 교양프로에 대한 것이 있다. 이렇게 다양하고 잡다한 프로를 선보이고 있는데, 진행자 역시 매우 다양하다. 스님이 아니라 주로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진행하는 형식이다.

 

‘21세기 행복한 노후특강

 

이렇게 스님이 진행하는 법문과 전문가들이 진행하는 수 많은 교양프로를 모바일로 볼 수 있는데, 감동을 줄 만한 프로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리저리 보아도 마땅한 프로가 없는데, 그 중에 한 프로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21세기 행복한 노후특강이라는 프로이다. 강사는 김송호 박사이다. 특이하게도 공학박사 학위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법문은 스님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법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기 보다 개인적인 견해신변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불자들이 듣고 싶은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인데, 자신의 견해나 신변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다지 남는 것이 없다. 법문이라고 말하지만 법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것이다.

 

법문은 반드시 스님들만이 하는 것일까. 부처님의 담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사실 모두 법문이 될 수 있다. 설령 경전적 근거를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취지가 불교가 추구하는 목적과 같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면 훌륭한 법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법문이 김송호 박사의 강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행복지수 공식

 

마치 숨은 보석을 찾아 낸듯, 진흙속에서 진주를 건져 낸 듯한 김송호 박사의 강의는 매우 설득력 있다. 그런 강좌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이 안(도시)에서 행복을 찾아 볼까 하는데, 사실은 굉장히 힘들다는 겁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정도입니다.

 

(김송호박사, 21세기 행복한 노후특강, 제17 세계의 공동체, 불교TV 2012-02-13)

 

 

생태공동체, 노후공동체 등 공동체 이야기를 하면서 도시의 삶과 수도자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도시의 삶이라는 것이 소유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이라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누리는 경우는 극소수라 한다. 대부분은 원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이는 소유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행복을 소유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고, 적게 소유하면 행복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이는 다음과 같은 행복지수로 설명 될 수 있다.

 

 

행복지수 = 소유/욕구

 

 

이것이 행복지수 공식이다. 이 공식에서 분자에 해당되는 소유를 많이 늘리면 행복해 질 것이라 한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라 한다. 또 이것이 도시의 삶이라 한다.

 

그렇다면 수도(修道)의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분자를 내 버려 두고 그 대신 분모에 해당되는 욕구를 줄이는 것이라 한다.

 

, 뭐야 나는!”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행복한 삶일까. 이에 대하여 김송호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소유를 더 많이 하면 더 많이 가지니까 더 행복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  욕구라는 것은 소유에 의하여 다시 높아집니다. 소유가 높아지면 욕구도 다시 높아 지는데, 이는 목마르다고 해서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소나타를 샀는데, 오늘 참 기분이 좋아요. 그런데 옆에 에쿠스가 가고 있어요. 이럴 때 , 뭐야 나는!”라고 하는 거죠. 집이 없다가 30평 아파트를 사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옆집에 50평 아파트에 가보면 , 우리집은 집도 아니야!” 그렇게 된다는 거죠.

 

(김송호박사, 21세기 행복한 노후특강, 제17 세계의 공동체, 불교TV 2012-02-13)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배웅해 주기 위해서 주차장으로 갔는데 깜짝 놀랐다. 그가 타고 있는 차는 대형차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와 완전히 딴판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모든 면에서 동등하거나 심지어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검은 대형차를 몰고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소형차를 가진 자신과 비교가 되었다. 그 감정은 김송호 박사가 예를 들어 한말인 , 뭐야 나는!”라고 말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차로 아파트 평수 등으로 비교되고 우월감과 동등감,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보통사람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다.

 

진짜 행복이란?

 

소유함으로서 행복의 지수로 삼는다면 그 욕구는 끝이 없을 것이다. 특히 도시에서 삶이 그렇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김송호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도시에서 행복을 찾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수도자들이 하는 일은 소유를 없애면서 욕구를 낮추는 것, 욕구를 낮추되 영(제로)이 되면 제일 좋겠죠. 그러나 영이 될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죠. 필요한 것을 얼마나 낮추느냐 하는 것이 수도자의 삶이죠. 이게 진짜 행복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나요. 너무 힘들죠. 그래서 중간 단계의 어딘가를 할려고 사람들이 노력 하는 거에요. 그것이 생태공동체입니다.

 

(김송호박사, 21세기 행복한 노후특강, 제17 세계의 공동체, 불교TV 2012-02-13)

 

 

김송호박사는 수도자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스님들의 삶 같은 것이다. 무소유와 청정을 근본으로 하는 출가자의 삶이라는 것은 소유를 극소화하고 욕구 역시 극소화 하는 삶을 말한다. 이른바 소욕지족의 삶을 말한다. 그런 소욕지족의 삶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다. 이는 갈애의 극복을 말한다.

 

하늘에서 금비가 내려도

 

갈증이 나면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가라 않지 않는다. 마시면 마실수록 오히려 더 갈증을 일으키는데 이는 소유와 욕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런 갈애에 대하여 아흔아홉을 가진 자가 백을 채우기 위하여 나머지 한 개를 빼앗아 간다는 등 여려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법구경 게송만 못할 것이다.

 

 

Na kahāpaavassena ~             나 까하빠나왓세나

titti kāmesu vijjati,            띳띠 까메수 윗자띠
Appass
ādā dukhā kāmā ~       압빳사다 두카 까마

 iti viññāya paṇḍito.            이띠 윈냐야 빤디또

 

참으로 금화의 비가 내려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만족은 없다.

욕망에는 쾌락은 적고 고통뿐이라.

현명한 님은 이와 같이 안다.

(Dhp186)

 

 

 

 

 

rain of golden coins

 

 

 

사람들은 하늘에서 금이 쏟아진다고 해도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을 만족시키는 감각적 욕망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고,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가라 않지 않는 것이 감각적 욕망이라 하는데, 이를 금비가 내리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주석에 따르면 금화의 비라고 하는 것은 박수소리에 야기된 칠보의 비(BL.III.61-62)’를 말한다고 한다. 물질적 욕망(vatthukama)과 정신적 쾌락의 욕망(kilesakama)에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욕망은 그렇게 충족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쭐라둑카칸다경(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작은 경, M14)에서

 

 이렇게 충족하기 어려운 소유와 욕망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게송에서는 욕망에는 쾌락은 적고 고통뿐이라. (Appassādā dukhā kāmā)”라고 하였다. 결국 남는 것은 고통 뿐이라 한다. 그래서 현자들은 이와 같이 알고 있다( iti viññāya paṇḍito)’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하여 주석에 따르면 맛지마니까야의 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경을 참고하라고 하였다.

 

게송과 관련된 맛지마니까야의 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경을 찾아 보았다. 두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큰 경(M13)’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작은 경(M14)’으로 되어 있다.  작은 경(M14)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마하나마여,

만약에 고귀한 제자가 이와 같이‘감각적 쾌락에는 만족은 적고 고통이 많고 고뇌가 많아서, 재난이 더욱 많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잘 살펴보아, 감각적 쾌락을 떠난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아닌 기쁨과 행복에 도달하지 않고, 또는 그 보다 더 평정한 다른 것에 도달하지 않는 한, 그는 오직 감각적 쾌락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쭐라둑카칸다경-Cūadukkhakkhandha sutta -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14, 전재성님역)

 

 

 

경에서 감각적 쾌락에는 만족은 적고 고통이 많고 고뇌가 많아서, 재난이 더욱 많다.”라는 구절이 법구경 게송 욕망에는 쾌락은 적고 고통뿐이라. (Appassādā dukhā kāmā)”라는 구절과 같은 뜻이라 볼 수 있다. 모두 감각적 쾌락의 추구에 대한 경계의 말이다.

 

치명적인 유혹

 

그런데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재난과 같다고 하였다. 법구경에서 말하는 고통 보다 더 강력한 표현이다. 그런 감각적 쾌락은 어떻게 생겨 나는 것일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하나마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유혹이란 어떠한 것인가?

 

마하나마여,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가 있다.

다섯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기분 좋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아름답고 감각적 쾌락을 유발하고 흥분을 야기하는,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이 있다.

 

.

.

 

마하나마여,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는 이와 같다.

 

마하나마여,

이러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조건으로 즐거움과 기분 좋음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유혹이다.

 

(쭐라둑카칸다경-Cūadukkhakkhandha sutta -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14, 전재성님역)

 

 

감각적 쾌락에 대한 치명적인 유혹이 생겨 나는 원인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대상이 사랑스럽기 때문이라 한다. 마음에 들고 아름답고 흥분을 야기하기 때문이라 한다.

 

왜 재난이라 하였을까?

 

이런 이유로 해서 즐거움과 기분 좋음이 생겨나는데 부처님은 이를 고통을 넘어 재난이라고 하였다. 어떤 재난일까. 경에서 여러가지 재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마하나마여,

또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원인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조건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바탕으로 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속하는 원인에 의해서 왕들이 왕들과 싸우고, 귀족이 귀족들과 싸우고, 사제가 사제와 싸우고, 주인이 주인과 싸우고, 어머니가 아들과 싸우고, 아들이 어머니와 싸우고, 아버지가 아들과 싸우고, 아들이 아버지와 싸우고, 형제가 형제와 싸우고, 형제가 자매와 싸우고, 자매가 형제와 싸우고, 동료와 동료가 싸운다.

 

그 때에 그들은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며 서로 두 손으로 치고 박고 흙덩이를 던지고 몽둥이로 때리고 칼로 찌른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음에 이르거나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맛본다.

 

마하나마여,

이것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현실적 재난인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원인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조건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바탕으로 하는 그 원인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속하는 괴로움의 다발이다.

 

(쭐라둑카칸다경-Cūadukkhakkhandha sutta -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14, 전재성님역)

 

 

골육상쟁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킬 재물을 차지 하기 위하여 부모자식간에도 피 튀기는 전쟁아닌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좀 더 큰 차, 좀 더 큰 아파트 평수를 늘리기 위하여 부모자식간에, 형제간에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매번 뉴스에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과 갈등이 개인적은 괴로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법륜스님은 약 60-70%가 고부간, 부부간, 부모자식간의 갈등이라 한다.

 

이와 같은 갈등을 겪고 나면 살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맛본다.”라고 하였다.

 

니간타 나따뿟따는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소유와 욕구를 추구하는 삶의 종착지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고통이라 하였고,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재난이라 하였다. 그리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맛 볼 것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고 즐겁게 즐기며 살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해진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렇다고 해서 괴롭게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경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니간타들)

‘벗이여,

니간타 나따뿟따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 자로서 완전한 앎과 봄을 선언하며, ‘나에게는 걸을 때에도 서있을 때에도 잠잘 때에도 깨어 있을 때에도 항상 계속해서 앎과 봄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니간타들이여,

예전에 그대들이 악업을 지었더라도, 그것을 이 혹독한 고행으로 제거하여야한다. 그리고 또한 지금 여기서 신체적으로 수호하고 언어적으로 수호하고 정신적으로 수호하여 미래에 악업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고행으로써 과거의 업을 파괴하고 새로운 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음으로써 업이 소멸되고, 업이 소멸되면 고통이 소멸되고, 고통이 소멸되면 느낌이 소멸되고, 느낌이 소멸되면 모든 괴로움이 소멸될 것이다.

 

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찬성하고 받아들이고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쭐라둑카칸다경-Cūadukkhakkhandha sutta -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14,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 이었던 니간타 나따뿟따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행주의자로 알려져 있던 니간타는 즐거운 것을 괴롭다라고 말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고통스런 삶을 살아 갈 것을 말하였다. 자신의 몸을 학대함으로 인하여 모든 죄업이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간타의 제자들은 벗이여 고따마여, 즐거움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가 없지만 괴로움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스승에 대한 맹목적 믿음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벗들이여 니간타들이여,

그대들은 우리들이 예전에 존재했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모릅니다. 그대들은 우리들이 예전에 악업을 지었는가 악업을 짓지 않았는가에 대해 모릅니다. 그대들은 우리들이 이러저러한 악한 행위를 짓는지에 대해 모릅니다. 그대들은 얼마만큼 괴로움이 벌써 끝났는지, 얼마만큼 괴로움이 아직 소멸되지 않았는지, 얼마만큼 괴로움이 소멸되어야 모든 괴로움이 소멸될 것인지에 대해 모릅니다. 그대들은 지금 여기에서,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버린 것과 선하고 건전한 상태를 성취한 것에 대해 모릅니다.

 

그렇다면 벗들이여, 니간타들이여,

이 세상에서 살인자, 손에 피를 묻히고 잔인한 직업에 종사하는 자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니간타들로 출가한 것이 됩니다.

 

(쭐라둑카칸다경-Cūadukkhakkhandha sutta -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14, 전재성님역)

 

 

이는 스승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대한 비판이라 볼 수 있다. 깔라마경(A3-65)에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아 들이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스승의 이야기를 맹목적으로 받아 들이지 말하는 이야기이다.

 

만약 스승이 이와 같이 말하였다면 그것은 니간타들이 과거 전생에 살인자 이었거나 손에 피를 묻히고 살았던 잔인한 직업에 종사하였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스스로 폭로 하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 한다.

 

계금취견((戒禁取見, sīlabbata-parāmāsa, 실라밧따빠라마사)

 

이와 같은 니간타 고행주의는 잘못된 수행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를 계금취견((戒禁取見, sīlabbata-parāmāsa, 실라밧따빠라마사)라 한다.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을 말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금계와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고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식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중생을 삼계에 붙들어 매놓고 있는 10가지 족쇄(, sayojana) 가운데 세 번째 족쇄이며, 네 가지 집착(, upādāna)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성자의 초보 단계인 수다원도(sotāpatti-magga)에 들면 유신견(sakkāya-diṭṭhi), 의심(vicikicchā)과 같은 족쇄와 함께 모두 뿌리 뽑히게 된다.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제자(삼마삼붓다사와꼬)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세상은 잘못된 견해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극단을 보게 된다. 단지 감각적 쾌락을 위하여 한 평생 소유하고 욕망을 충족 시키는 삶을 살아가는 쾌락주의자가 있는 가 하면, 스스로 괴로운 상태를 맛 보며 살아가는 극단적인 고행주의자에 이르기 까지 갖가지 견해가 판을 치지만 부처님은 이들 모두 잘못된 견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Api dibbesu kāmesu ~             아삐 딥베수 까메수

rati so nādhigacchati.         라띵 소 나디갓차띠            

Tahakkhayarato hoti ~           딴학카야라또 호띠

Sammāsambuddhasāvako.            삼마삼붓다사와꼬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제자는

천상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조차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단지 갈애의 부숨을 기뻐한다.

(Dhp 187)

 

 

이 게송은 앞서 언급된 186번 게송인 참으로 금화의 비가 내려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만족은 없다. 욕망에는 쾌락은 적고 고통뿐이라. 현명한 님은 이와 같이 안다.”와 연동 되어 있다. 그래서 인연담도 공유하고 있다.

 

게송에서 부처님의 제자는 천상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조차 즐거움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갈애가 부수어짐을 기뻐한다고 하였다.

 

나는 다가오는 시간을 버리고 현재를 쫓습니다

 

이 게송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사밋디경의 대화를 소개하고 있다.

 

 

[하늘사람]

 "수행승이여,

당신은 젊고 머리가 검은데 즐거운 청춘을 갖고도 최상의 세월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에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수행승이여,

사람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십시오. 현재를 버리고서 다가오는 시간을 쫓지는 마십시오."

 

[싸밋디]

"벗이여,

나는 다가오는 시간을 버리고 현재를 쫓습니다.

 

벗이여,

왜냐하면 감각적 쾌락은 시간에 매이며 괴로움이 많고 아픔이 많고 재난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 성스러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밋디경-Samiddhisutta, 상윳따니까야 S1.2.10, 전재성님역)

 

 

 

감각적 쾌락을 즐기라고 말하는 하늘사람에게 부처님의 제자 사밋디는 감각적 쾌락은 시간에 매이며 괴로움이 많고 아픔이 많고 재난이 넘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항상 현재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라 본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 아니면 미래에 살고 있다. 이는 마음이 늘 과고 아니면 미래에 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에 대하여 늘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늘 불안해 한다. 항상 불건전한 대상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래의 경우 근심과 불안, 걱정을 특징으로 하는데 또 하나 좋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이다. 이에 대하여 정신과 전문의 전현수박사는 불교TV 강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래를 기대하고, 희망을 갖는 다는 것은 불안, 근심, 걱정, 초조와 같은 안 좋은 미래를 떠 올리는 것 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런 미래의 기대와 희망도 나름입니다.

 

학생이 수업이 빨리 끝나기를 기대하는 것, 방학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것, 적금을 기다리는 것, 연금으로 노후를 편하게 보내기를 기다리는 것, 좀 더 평수를 넓혀 고급아파트로 이사 가는 것등을 막연하게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지금 좋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안 좋은 것을 해야 하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현재가 안 좋기 때문에 현재를 탈피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기다리며 사는 삶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현수박사, 전현수박사의 마음테라피, 불교TV)

 

 

전현수박사의 말에 따르면 미래에 대하여 막연한 기대를 가지면서 기다리며 사는 삶은 좋지 않다고 한다. 몇 년후에 자동차를 대형으로 바꾼다든지, 몇 년 후에 좀 더 넓은 평수로 이사 가는 것 같은 막연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내일은 무엇을 하고, 또 모레는 무엇을 하고, 내년에 무엇을 이루고 하는 불투명하고 막연한 계획을 말한다.

 

이런 삶은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하여 불만이 있기 때문에 이를 충족하기 위하여 미래를 기대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소유와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말한다. 소유에 따라 삶의 질행복지수가 올라 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 본다. ‘행복지수 = 소유/욕구공식에서 소유와 욕구를 낮추어 사는 것이다. 이는 세상사람들의 흐름과 반대로 사는 것이다. 이를 소욕지족의 삶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소욕지족의 삶을 살아는 가는 것이 수행자 일 것이다. 그런 수행자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늘사람]

한적한 숲속에서 살면서

고요하고 청정한 수행자는

하루 한끼만 들면서도

어떻게 얼굴빛이 맑고 깨끗합니까?”

 

 

[세존]

 “Atīta nānusocanti,    아띠땅 나누소짠띠

nappajappanti nāgata;    납빠잡빠띠나가땅

paccuppannena yāpenti,     빳쭙빤네나 야뻰띠

tena vaṇṇo pasīdati.    떼나 완노 빠시다띠

 

 “Anāgatappajappāya,      아나가땁빠잡빠야

atītassānusocanā;          아띠땃사누소짜나

etena bālā sussanti,       에떼나 발라 숫산띠

naova harito luto”ti.    나로와 하리또 루또띠

 

 

[세존]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으며

현재의 삶을 지켜 나가면

얼굴빛은 맑고 깨끗하리.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며

지나간 일을 슬퍼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시든다네

낫에 잘린 푸른 갈대처럼.”

 

 (아란냐경-Araññasutta - In the Forest- 숲속에서, 상윳따니까야 S1.1.10, 전재성님역)

 

 

숲속에서 사는 수행자는 하루 한끼만 먹고 살아도 얼굴이 맑고 깨끗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는 사람들은 낫에 잘린 갈대와 같다고 하였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하여 후회하고 슬퍼 하기 때문이다. 또 아직 오래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하여 근심, 걱정, 불안, 초조하기 때문이다.

 

갈대가 낫에 잘리면 얼마 못 가 시들하듯이 이와 같이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늘 어둡다는 것이다. 설령 그가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 놓고 살아도, 높은 빌딩을 가지고 있어도, 세상에서 최고의 미녀를 차지 하고 있어도 마음이 현재를 떠나 있다면 낫에 잘린 갈대의 얼굴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소유에 따른 감각적 쾌락은 시간에 매이며 괴로움이 많고 아픔이 많고 재난이 넘치는 것입니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 한다.

 

그렇다면 지금 별로 가진 것이 없는 별 볼일 없는 존재일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 간다면 그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2012-09-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