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적멸이야말로 지복(至福)일세”이것 이상 없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2. 9. 29. 14:16

 

적멸이야말로 지복(至福)일세이것 이상 없다 

 

 

행복지수 공식

 

지금 행복한지 행복하지 행복하지 않지 알아 보는 공식이 있다. 행복지수라는 것이다. 불교tv에서 김송호 박사는 행복지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공식을 설명한다.

 

 

행복지수=가진 것(소유)/ 원하는 것(욕구)

 

 

행복지수는 가진 것나누기 원하는 것이라 한다. 분모가 원하는 것이고 분자가 가진 것을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소유(가진 것)와 욕구(원하는 것)라 한다.

 

왜 행복하지 않은가

 

이 공식에서 두 가지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첫번째는 원하는 것이 일정하다고 보고 가진 것이 많으면 행복지수가 높아 지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볼 수 있다. 두번째는 가진 것이 일정하고 원하는 것을 줄이면 역시 행복지수가 높아지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통 하는 방법은 이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진 것(소유)을 많이 하면 할수록 원하는 것(욕구) 또한 함께 높아져 간다는 것이다. 30평 아파트를 장만하였을 때 처음 한순간은 행복한 것 같은데, 옆집의 50평 아파트를 보고서 우리집은 왜 이리 좁지?”하며 욕구가 높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행복지수를 높게 하는 방법은

 

아무리 소유를 많이 하여도 그와 비례하여 욕구가 높아진다면 행복지수가 낮아 지기 때문에 현재 상태가 결코 행복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저건 행복지수를 높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행복지수 공식에서 원하는 것을 제로()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가진 것(소유)이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행복지수는 무한대가 될 것이라 한다.

 

이는 비움을 말한다. 수행을 통하여 마음을 비움으로서 원하는 것을 낮추었을 때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다.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세상의 무엇이든지 상관 없이 무조건 행복은 무한대가 된다는 것이다.

 

소유만 추구하다 보면

 

이와 같은 논리로 본다면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은 매우 쉬워 보인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생활인들에게 있어서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나만 마음을 비우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외부 환경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행복지수 공식에서 분자에 해당되는 가진 것(소유)을 많게 하는 것도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가능하지 않게 하는 요인이 상존 하고 있어서 행복지수가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승진을 해야 하는데 나 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을 경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식당을 차려서 돈을 좀 벌어 보려고 하였는데 외환위기로 인하여 망했다면 나만 잘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치킨점을 차렸는데 갑자기 조류독감이 유행하였을 경우 잘 안된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나만 열심히 노력해서 가진 것을 많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이외에 외부 환경에 크게 좌우 되기 때문이다.

 

왜 무소유가 행복인가

 

하지만 행복지수 공식에서 분모에 해당되는 원하는 것(욕구)은 외부 환경적인 요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나만 결정하면 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나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내가 마음을 비우기로 결정하면 되고, 내가 분모를 제로로 만들기로 하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주변 여건, 주위 환경과 관계 없이 내가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분모를 제로로 만든다는 것, 즉 원하는 것을 영으로 만든다는 것을 다른 말로 무소유라한다. 그렇다면 무소유란 무엇일까. 문자 그대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무소유일까.

 

그렇지는 않다.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갖지 않는 것이 무소유이다. 꼭 필요한 것만 갖는 것을 말한다. 이는 행복지수 공식에서 분자에 해당되는 가진 것(소유)이 최소화 되고, 또한 분모에 해당되는 원하는 것(욕구)를 최소화 하였을 때 무소유라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무소유를 실현하였을 때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행복이란 소욕지족의 무소유적 삶의 방식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불교수행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명상을 통해 얻는 행복

 

초기경전에서 행복이라는 말을 많이 볼 수 있다. 주로 선정삼매의 경지에서이다.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대표적이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집중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인 쾌락을 버리고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고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홀로 명상하며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이 있는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하고,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과 무사유와 무숙고와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하고,

 

희열이 사라진 뒤 평정하고 주의 깊고 세삼하게 육체적으로 즐거움을 느끼며 고귀한 이들이 '평정하고 주의 깊고 행복하다' 고 표현하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하고,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려서 이전의 쾌락과 불쾌를 없애고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주의 깊은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집중이라고 한다."

 

(위방가경-Vibhagasutta- Explanation-분별경, 상윳따니까야 S44.1.1.8, 전재성님역)

 

 

팔정도에 있어서 정정에 대한 내용이다. 선정삼매에 대하여 네 가지 단계로 설명하고 있는데, 세 번째 단계인 삼선정의 상태가 행복이라 한다. 이런 행복은 시각, 청각 등 다섯가지 감각기관으로 느끼는 행복과 비할 바가 아니라 한다.

 

그렇다면 왜 선정삼매 상태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 평온을 느끼는 것일까. 이는 한 가지 대상에 몰입함으로 인하여 버려지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오장애라 하여 감각적 욕망(탐욕), 악의(성냄), 해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회의적 의심이 일시적으로억눌리기 때문이다.

 

이 중 특히 감각적 욕망이 억눌리는데, 이는 행복지수 공식에서 원하는 것(욕구)이 제로가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가진 것(소유)과 상관없이 행복지수가 무한대가 되기 때문에 선정삼매 상태에서 느끼는 행복은 보통사람들의 감각적 쾌락에 따른 즐거움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선정삼매는 주석에 따르면 그가 자신 속에서 다섯 장애가 제거된 것을 보면 만족이 생겨난다. 만족할 때 희열이 생겨난다. 마음에 희열이 있으면 몸이 평화롭고 몸이 평화로우면 행복을 느낀다. 행복하면 마음이 집중된다.”라고 설명된다.

 

오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이와 같이 명상을 통하여 선정삼매 상태에서 감각족 욕망을 억눌러 무한한 행복을 느낄 수 도 있지만 소유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누리는 행복도 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열 네 마리의 황소가 없네.

오늘 엿새째 보이지 않으니 오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한 잎의 참깨나 두 잎의 참깨

밭에서 참깨가 썩어감이 없으니 오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텅 빈 창고 앞에서

열렬히 춤추는 쥐들이 없으니 오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일곱 달이 지나면 금이 가서

깨어지는 마루바닥이 없으니 오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한 아들이나 두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을 거느린 과부가 없으니 오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잠든 자를 발로 깨우는

붉은 종기들이 쏘지 않으니 오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이른 아침에 빚쟁이들이

여기 달라 저기 달라 조르지 않으니 오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바후디뚜경-Bahudhītusutta-The Brahmin with Many Daughters-많은 딸들의 경, 상윳따니까야 S7.1.10, 전재성님역)

 

  바후디뚜경(많은 딸들의 경-S7.1.10).docx

 

 

부처님이 많은 것을 소유한 바라문과의 대화를 하면서 답한 내용이다. 부처님은 소유하지 않음으로 인한 행복을 노래 하고 있다. 키우는 황소가 없기 때문에 황소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빚진 것이 없으니 빚쟁이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렇게 소유하지 않는 소욕 지족의 마음으로 살아 가기 때문에 어떤 외부적 환경요인과 관계 없이 행복지수는 무한대로 높아 질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행복하다고 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마음상태인 것을 알 수 있다. 소유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원하는 것을 최소화 시켰을 때 즉, 욕망을 줄여서 무소유를 실현하는 것이 행복지수를 극대화 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궁극적인 행복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살까.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일까. 아니면 죽지못해서 사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도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대표적으로 망갈라경을 들 수 있다. 망갈라경을우리말로 행복경또는 축복경이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한 행복의 조건은 어떤 것일까. 여러 행복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행복이 최상의 행복일 것이다.

 

 

Tapo ca brahmacariyañca          따뽀 짜 브라흐마짜리얀짜

ariyasaccānadassana,           아리야삿짜나닷사낭
Nibb
ānasacchikiriyā ca           닙바나삿치끼리야 짜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망갈라경-Magalasutta-행복경-위대한 축복의 경, 숫타니파타Sn 2.4, 전재성님역)

 

  망갈라경(행복경-Sn2.4).docx

 

 

 

망갈라경(행복경) 음악 동영상

 

 

 

망갈라경에서 부처님은 열반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행복이라 하였다. 이런 행복은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는 것 등의 행복과 함께 동급의 행복이지만 궁극적으로 실현해야 될 것이다.

 

적멸이야말로 지복일세

 

이와 같은 궁극적인 행복은 또 다른 게송으로 표현된다.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고 대승불교 전통에서도 애송된다는 궁극적 행복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Aniccā sabbe sakhārā      아닛짜 삽베 싱카라

uppādavayadhammino,        웁빠다와야담미노

Uppajjitvā nirujjhanti     웁빳지뜨와 니룻잔띠

tesa vūpasamo sukho.     떼상 우빠사모 수코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야말로 지복일세.

 

諸行無常     제행무상

是生滅法     시생멸법

生滅滅爾     생멸멸이

寂滅爲樂     적멸위락

 

 

이 게송은 상윳따니까야의 난다띠경(Nandatisutta, 기뻐함의 경, S1.1.12)과 아누룻다경(Anuruddhasutta, S7.1.6)웨뿔라빱바따경-Vepullapabbatasutta, S14.2.10) 등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우주의 성주괴공이 아니라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를 말한다. 번뇌가 소멸되어 다시 태어남이 없을 때 이를 고요함, 열반, 적멸 등이라 볼 수 있는데, 바로 그런 상태가 지극히 행복한 것이라 한다.

 

 

 

 

2012-09-29

진흙속의연꽃

망갈라경(행복경-Sn2.4).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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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후디뚜경(많은 딸들의 경-S7.1.10).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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