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열등감과 죄의식을 심어 주는 법문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0. 2. 12:17

 

열등감과 죄의식을 심어 주는 법문

 

 

 

불교방송에서

 

2004년 이래 거의 매일 아침 불교방송을 듣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방송을 듣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들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런 방송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화엄경을 보면 야마천 같은데 나오죠. 허공을 몸으로 하는 부처님이시다 그러잖아요. 허공을 몸으로 하고 허공을 마음으로 하시는 부처님 이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허공이 부처님의 몸과 마음이래요. 그러면 하나잖아요. 하나. 하나는 사랑이다 그랬잖아요. 사실은 갈라져 있지만 본질은 허공에서 왔으니까 허공을 마시고 살잖아요.

 

(ㅈ스님, ㅈ스님의 지혜의 길, 불교방송 2012-10-02일자)

 

 

불교방송에서 매일 아침 6 50분에 10분간 진행하는 ㅈ스님의 법문내용이다. 법문에서 스님은 부처님이 허공속에 계신다고 하였다. 허공이 부처님의 몸이기 때문에 공기를 마시듯이 우리들은 매일 부처님과 함께 하고 있다고 한다.

 

부처님은 허공과 같다는데

 

이와 같이 허공이 부처님이라는 것은 화엄경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지고 있는 화엄경에서 허공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었다.

 

 

보현보살이 말하였다.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은 여래-응공-정등각의 몸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량없는 곳에서 여래의 몸을 보아야 한다. 보살 마하살은 한 법이나 한 가지 일이나 한 몸이나 한 국토나 한 중생에서 여래를 볼 것이 아니고 모든 곳에서 두루 여래를 보아야 한다.

 

마치 허공이 모든 물질과 물질 아닌 곳에 두루 이르지만, 이르는 것도 아니고 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허공은 몸이 없기 때문이다.

 

여래의 몸도 그와 같아서 모든 곳에 두루하고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고 모든 법에 두루하고 모든 국토에 두루하지만, 이르는 것도 아니고 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여래의 몸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을 위해 그 몸을 나타낸다.

 

(화엄경 여래수량품, 신역화엄경 동국역경원 법정스님역)

 

 

 

 

법정스님이 번역하고 동국역경원에서 발행한 신역화엄경에 따르면 허공은 부처님의 몸과 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곳에 편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중생에게도 두루하고 있다고 설명되고 있다. 이와 같은 문구가 아마도 부처님을 허공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대승불교의 최고봉 화엄교학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한결같이 허공속의 부처님을 이야기한다. 이는 화엄교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 본다.

 

강원에서 배우는 교과과정에서 4학년에 배운다는 대교과정이 화엄교학이라 한다. 그래서 화엄교학이 대승불교에 있어서 최고로 높은 위치를  차지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화엄경을 근거로 한 법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허공이 부처님 몸이라는 논리 역시 화엄경에 근거를 둔 법문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다 지켜 보고 있다고?

 

부처님이 몸이 허공이고, 허공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논리를 적용하였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 ㅈ 스님의 법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항상 우리가 이야기 하잖아요. 부처님은 내 마음 가운데 계시다. 그리고 부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부처님은 무소부재요, 무소불능의 존재 아닙니까?

 

부처님이 무얼 모르겠어요. 다~ 지켜 보고 계시고, 다~ 듣고 계시고, 다~ 무언가 우리를 자비로운 눈으로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 보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이 지켜 보고 계시고 다 듣고 계시는데 함부로 말을 하고 함부로 행동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부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시니 나의 말과 행동, 생각을 다 지켜 보고 계실 것 아닙니까.

 

(ㅈ스님, ㅈ스님의 지혜의 길, 불교방송 2012-10-01일자)

 

 

스님은 지켜 보고 계시는 부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허공속에 있는 부처님은 결국 우리 몸과 마음속에도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 심지어 생각까지 지켜 보고 있다고 한다.

 

무소부재, 무소불능의 부처님

 

부처님이 우리를 지켜 보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마치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연상된다. 유일신교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지켜 보고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문에서 부처님 대신 하나님이라는 말로 치환하면 목사가 설교한 것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더구나 이어지는 법문에서 스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황제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함부로 행동을 하면 이건 그냥 그 자리에서 모가지죠 뭐. 근데 우리는 황제 보다 더 무서운 분, 더 엄청난 분을 내 마음 가운데 모시고 살면서도 함부로 말하죠. 천둥벌거숭이보다 더 하죠. 함부로 생각하고 함부로 행동하잖아요. 이 얼마나 웃기는 겁니까?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부처님 무시하며 사는 거든요. 부처님께 너무 관심이 없고, 부처님께 소홀해요. 정말 안타깝죠. 이 광활한 우주가 어떻게 굴러간다고 생각하세요. 무서운 법이 있잖아요. 겁나는 법이 있어요. 그런데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까맣게 모른다기 보다 오히려 무시한다고 봐야죠. 소홀한다고 봐야죠. 무관심하다고 할까요. 그럼 그게 다 죄로 작용하죠.

 

(ㅈ스님, ㅈ스님의 지혜의 길, 불교방송 2012-10-01일자)

 

 

부처님을 무서운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나의 일거수 일투족, 심지어 마음까지 지켜 보고 있는 부처님은 황제 보다 더 무서운 분이라 한다. 그런 무서운 분, 엄청난 분에게 우리는 너무 소홀히 하였고, 심지어 무시하며 살아 왔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법문을 듣다 보면 부처님이라는 존재는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우리 인간과 똑 같은 모습의 부처님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이다. 더구나 어느 곳에서나 있기 때문에 ‘무소부재’이고, 무엇이든지 볼 수 있기 때문에 ‘무소불능’의 존재이다. 마치 부처님이 유일신교의 창조주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열등감과 죄의식을 심어 주는 법문

 

스님의 법문을 듣다 보면 부처님이 마치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부처님을 제대로 모시지 않아 매일 죄를 짓는 것이라 하는데, 이는 듣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과 열등감, 죄의식을 불어 넣어 주기에 충분하다.

 

삶을 살아 가면서 누군가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나쁜 것임에 틀림 없다. 더구나 주체적인 삶을 살아 가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누군가 지켜 보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불쾌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유일신교와 같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또는 주종의 관계에서는 문제 없을지 모르지만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자각의 종교인 불교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기분 나쁜 일이다.

 

그렇다면 허공속의 부처님, 모든 것을 다 알고 지켜 보고 있다는 부처님의 근거가 되는 화엄교학은 어떻게 성립되었을까.

 

화엄교학의 뿌리 여래장 사상

 

중국에서 발전된 화엄교학의 뿌리는 여래장 사상이다. 여래장은 산스크리트어로  tathagatagarbha(따타가따가르바)’라 하는데, 한자로 ‘如來藏(여래장)’이라 표기 한다. 여기서 ‘장()’은 저장고, 보고라는 뜻이고, 자궁, 자궁 내부의 내용물을 뜻하기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가르바가 이 모든 뜻을 가진다. 따타가따는 부처님을 칭하는 또 다른 이름으로서 ‘진리에 이르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여래장은 깨달음의 자궁(Bhddhahood embryo), 태아라는 뜻이 된다.

 

이런 여래장은 마은은 본래 순수한 광명이나 후천적으로 번뇌에 물들어 본연의 순수함이 가려진 것이라는 사상이다. 하지만 여래장 사상은 주류 불교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대승불교, 특히 동아시아 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일원론으로 설명되는 여래장사상

 

여래장사상을 기반으로 한 동아시아 불교, 즉 대승불교 전통에서 화엄교학을 최고봉의 위치로 올려 놓았다. 그런데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라는 논문이 있다. 일본의 불교학자 마쓰모토 시로의 ‘여래장 사상과 본각사상’이 그것이다. 마쓰모토 시로는 여래장 사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에 대하여 내가 여래장 사상이 dha-tu-va-da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래장 사상의 본질적인 논리 구조를 dha-tu-va-da라고 간주한다는 의미로, dha-tu-va-da라는 말이 인도불교 문헌에 발견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dha-tu-va-da란 어디까지나 여래장 사상의 논리적 구조를 나타내기 위한 가설이지만, 이 가설을 나는 주로 《승만경》, 《법화경》<약초유품(藥草喩品)>, 그리고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의 내용에 근거하여 구상한 것이다

 

특히 다양한 식물이 대지를 기체로 하여 생긴다고 설하는 <약초유품>의 비유는 이 가설을 구상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또 《대승장엄경론》은 유가행파 즉 유식파의 기본적 문헌이지만, 여래장사상도 유식사상도 모두 dha-tu-va-da로서, 중관파 계통의 su-nyata--va-da와는 대립한다고 하는 것이 나의 기본적 이해이다. 이 dha-tu-va-da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여기에서 ‘dha-tu’란 ‘놓는 장소’ 곧 기체(locus)[L]를 의미하며, ‘dharma’란, ‘유지되는 것’ 곧 초기체(super-locus)[S]를 의미한다. 따라서 일체의 존재는 그림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아래에 있는 기체[L]와 위에 있는 초기체[S]의 둘로 구분된다. 이 dha-tu-va-da 구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L은 S의 기체이다.
② 따라서 L은 S를 생기게 하는 [원인이다].
③ L은 단일이지만, S는 다수이다.
④ L은 실재이며, S는 비실재이다.
⑤ L은 S의 본질(atman)이다.
⑥ S는 비실재이지만, L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또 L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실재성을 가진다. 또는 실재성의 근거를 갖는다.

 

따라서 dha-tu-va-da란 “단일한 실재인 기체가 다수의 법을 생기게 한다.”라고 주장하는 설로서, 발생론적(發生論的) 일원론(一元論) 혹은 근원실재론(根源實在論)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래장 사상과 본각사상 / 마쓰모토 시로, 불교평론 2009 03 10 ())

 

  여래장_사상과_본각사상.docx

 

 

 

마쓰모토 시로의 설명에 따르면 여래장 사상은 실재론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기체(L)라는 궁극적 실재가 있어서, 이 궁극적 실재로부터 모든 것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를 일원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처님은 형성된 모든 것은 무상하다고 하였다. 이를 제행무상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재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또 제법무아라 하여 개체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하였으나 실재성을 갖는 본질, 즉 아뜨만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

 

여래장 사상은 하나의 근원에서 모든 것이 비롯돠었다고 보는데, 이는 하나의 원인을 상정하는 유일신교의 종교의 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신만이 제일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마쓰모토 시로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은 dha-tu-va-da가 먼저 아트만(a-tman)론 즉 아설(我說)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나는 여래장 사상이란 기본적으로는 힌두교 아트만론의 불교판(Buddhist version)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곧 힌두교의 아트만론이 특히 대승불교 성립 이래 불교 내부에 침입하여 불교적 표현으로 위장하여 성립한 것이 여래장 사상이라고 본다(따라서 남전불교에는 기본적으로 여래장 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장 사상과 본각사상 / 마쓰모토 시로, 불교평론 2009 03 10 ())

 

 

마쓰모토 시로교수는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힌두교의 아뜨만 사상이 대승불교에 침투하여 성립된 교리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빠알리 니까야에서는 여래장 사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일신교와 다를 바 없는 법문

 

아침 방송 시간에 모든 것을 지켜 보고 있다는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더구나 그런 부처님은 나에 대하여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다 보고 있어서 일거수 일투족에 대하여 감시 받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 좋을 리 없다. 더구나 허공의 부초님, 자신의 몸과 마음안에 있는 부처님을 제대로 알아 보지 않아 우리는 매일 죄를 짓고 살고 있다고 하는데, 왜 불자들이  왜 그와 같은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며 살아야 될 필요가 있을까.

 

들은 바에 따르면 유일신교도들은 가슴에 커다란 말못할 멍에를 안고 살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창조주가 자신을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 같고,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도둑질 하는 것 같은 죄의식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라 한다.

 

만일 불교에서 화엄경의 허공의 몸을 가진 부처님의 근거를 들어 부처님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지켜 보고 있다는 무서운 부처님으로 묘사한다면 이는 유일신교의 교리와 하등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2012-10-02

진흙속의연꽃

여래장_사상과_본각사상.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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