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현세에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성취한다”칠각지와 현법열반론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0. 6. 11:14

 

현세에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성취한다칠각지와 현법열반론

 

 

 

마음이 심란할 때

 

마음이 심란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초기경을 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법구경이 있다. 

 

법구경에 실려 있는 게송은 모두 짤막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읽기에도 쉬울 뿐만 아니라 매우 교훈적이다. 그런데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듯이 법구경 게송을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그 의미가 더욱 더 다가 온다.

 

법구경 현명한자의 품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esa sambodhi-agesu           예상 삼보디양게수

~ sammā citta subhāvita    삼마 찟땅 수바위땅
Ādānapainissagge                 아나다빠띠니삭게

~ anupādāya ye ratā,             아누빠다야 예 라따

Khīāsavā jutimanto              킨아사와 주띠만또

~ te loke parinibbutā.           떼 록께 빠리닙부따

 

깨달음의 고리로

마음이 잘 닦여지고

집착을 놓아 버리고

집착의 여윔을 즐기는

번뇌를 부순 빛나는 님들,

그들이 세상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

(법구경, Dhp89)

 

 

 

 

Oil lamp

 

 

법구경 현명한 님의 품(Paṇḍitavagga)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서 완전한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빠알리어로 완전한 열반을 빠리닙바나나(parinibbāna)’라 한다. 한자어로 반열반(般涅槃)이라 하는데, 이는 빠리닙바나를 음역한 것이다.

 

칠각지(satta bojjhanga)

 

열반을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게송에서는 깨달음의 고리(sambodhi-agesu )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칠각지(satta bojjhanga)를 말한다. 일곱가지로 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일곱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새김의 깨달음 고리(念覺支, satisambojjhanga)

2) 탐구의 깨달음 고리(擇法覺支, dhammavicayasambojjhanga)

3) 정진의 깨달음 고리(精進覺支, viriyasambojjhanga)

4) 희열의 깨달음 고리(喜覺支, pitisambojjhanga)

5) 안온의 깨달음 고리(輕安覺支, passaddhisambojjhanga)

6) 집중의 깨달음 고리(定覺支, samadhisambojjhanga)

7) 평정의 깨달음 고리(捨覺支, upekhasambojjhanga)

 

 

이와 같이 일곱가지 요소가 있는데 이들 일곱가지 요소는 37조도품에 속해 있다. 칠각지와 37조도품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37조도품과 칠각지와의 관계

정신적요소

1

정진

(viriya)

4

1

1

1

1

1

9

2

새김

(sati)

4

1

1

1

1

8

3

지혜

(pañña)

1

1

1

1

1

5

4

집중

(samādhi)

1

1

1

1

4

5

믿음

(saddhā)

1

1

2

6

사유

(vitakka)

1

1

7

안온

(passaddhi)

1

1

8

희열

(piti)

1

1

9

평정

(upekkha)

1

1

10

의욕

(chanda)

1

1

11

마음

(citta)

1

1

12

정어

(sammā-vācā)

1

1

13

정행

(sammā-kammanta)

1

1

14

정명

(sammā-ajiva)

1

1

합계

4

4

4

5

5

7

8

37

  

 

도표를 보면 좌측에 정진 등14가지 정신적 요소가 있고, 상단에 네 가지 새김의 토대(사념처) 7개의 방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칠각지)의 경우 팔정도 다음으로 요소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칠각지를 구성하고 있는 정신적 요소

 

칠각지를 구성하고 있는 정신적 요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다음표와 같다.

 

 

칠각지

  

 

새김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

(念覺支 satisambojjhanga)

 

법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숙고하고 익히는 것

 

1) 깊이 새김과 분명한 이해(sati sampajannam).

2) 주의깊지 못한 사람을 기피함.

3) 주의깊은 사람과 사귐.

4) 그러한 결단.

탐구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

(擇法覺支 dhammavicayasambojjhanga)

 

건전한 법과 건전하지 못한 법이 있고, 비난받아야 할 법과 비난받을 것이 없는 법이 있고 열등한 법과 수승한 법이 있고 어둡고 밝은 법의 대조가 있는데 그것에 대해 이치에 맞게 숙고하고 익히는 것

1) 존재의 다발, 세계, 감역 등에 대한 질문.

2) 바탕의 청정함.

3 )감각능력(indriya)의 완전한 실현.

4) 지혜롭지 못한 사람을 기피함.

5 )지혜로운 사람과 사귐.

6) 깊은 지혜의 세계에 대한 숙고.

7) 그러한 결단.

정진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

(精進覺支 viriyasambojjhanga)

 

시도의 세계, 노력의 세계, 용맹의 세계가 있는데 그것에 대해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익히는 것

1) 괴로운 곳에 대한 두려움을 관찰하는 것.

2) 공덕을 살피는 것.

3) 모든 부처님등이 따른 길과 방도에 대한 관찰.

4) 탁발식(托鉢食)을 존경하는 것(pinda-patapacayanata).

5) 계승(繼承)의 위대성에 대한 관찰.

6) 스승의 위대성에 대한 관찰.

7) 가문의 위대성에 대한 관찰.

8) 도반의 위대성에 대한 관찰.

9) 게으른 사람을 피하는 것.

10) 정진력 있는 사람과 사귐.

11) 그러한 결단.

희열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

(喜覺支 pitisambojjhanga)

희열의 깨달음 고리의 토대가 되는 법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익히는 것

1 )부처님에 대한 기억(buddhaanussati).

2 )가르침에 대한 기억(dhammanussati).

3) 참모임에 대한 기억(sanghanussati).

4 )계행(戒行)에 대한 기억.

5 )버림에 대한 기억.

6 )신들에 대한 기억.

7 )고요함에 대한 기억.

8 )거치른 사람을 피하는 것.

9 )섬세한 사람과 사귀는 것.

10 )감동을 주는 경전에 대한 숙고.

11 )그러한 결단.

안온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

 

(輕安覺支 passaddhisambojjhanga)

몸의 안온과 마음의 안온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익히는 것

 

1) 탁월한 음식의 사용.

2) 알맞은 기후의 선택.

3 )알맞은 자세를 취함.

4 )자신과 남의 업을 모두 관찰하는 중립적 노력(majjhattapayogata).

5)격렬한 사람을 피하는 것.

6) 고요한 사람과 사귀는 것.

7) 그것에 대한 결단.

집중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

(定覺支 samadhisambojjhanga)

멈춤의 특징(samatha nimittam)과 부동의 특징(avyagga-)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익히는 것

1 )바탕의 청정.

2 )감각능력의 완전한 실현.

3 )명상대상에 능숙함.

4 )바른 시간에 마음을 책려하는 것.

5 )바른 시간에 마음을 제어하는 것.

6 )바른 시간에 기뻐하는 것.

7 )바른 시간에 관찰하는 것.

8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을 피하는 것.

9 )집중하는 사람과 사귐.

10) 선정과 해탈에 대한 관찰.

11 )그러한 결단.

평정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

(捨覺支 upekhasambojjhanga)

평정의 깨달음 고리의 토대가 되는 법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익히는 것

1) 존재에 대하여 중간인 것.

2) 형성에 대하여 중간인 것.

3 )존재와 형성에서 탐욕적인 인간을 피하는 것.

4) 존재와 형성에서 평등한 인간을 사귀는 것.

5 )그러한 결단.

출처: 상윳따니까야 해제(전재성박사)

 

 

택법각지(擇法覺支)와 정진은 어떻게 다른가

 

새김(sati) 등 모두 일곱가지 요소에 대한 설명이다. 이 중 두 번째의 탐구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이란 무엇일까. 한자어로 택법각지(擇法覺支)’로 되어 있다. 법을 선택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경전적 근거를 찾아 보았다. 상윳따니까야 봇장가상윳따 (Bojjhagasayutta)’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자양분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탐구의 깨달음 고리를 생겨나게 하고 이미 생겨난 탐구의 깨달음 고리를 더욱 많게 하고 증대시키는가?

 

수행승들이여,

건전하거나 건전하지 못한 법, 비난받을 만하거나 비난받지 않는 법, 열등하거나 수승한 법, 검은 법이나 밝은 법이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익히면 그러한 자양분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탐구의 깨달음 고리를 생겨나게 하고 이미 생겨난 탐구의 깨달음 고리를 더욱 많게 하고 증대시킨다.

 

(아하로 봇장가낭경-aharo bojjhanganam- 깨달음 고리의 자양분경, 상윳따니까야 S45.6.2, 전재성님역)

 

  아하로 봇장가낭경(깨달음 고리의 자양분경-S45.6.2).docx

 

 

 

경에 따르면 선법과 불선법을 잘 선택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가? 경에서는 ‘이치에 맞게 숙고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탐구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擇法覺支, 택법각지)를 보면 마치 팔정도의 정진을 떠 올리게 한다. 팔정도의 정진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정진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악한 상태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생겨나게 하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정진하고, 이미 생겨난 악한 불건전한 상태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진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정근하고,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성만하게 하여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정진하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정진이라고 한다.

 

(위방가경-Vibhagasutta- Explanation-분별경, 상윳따니까야 S44.1.1.8, 전재성님역)

 

 

팔정도에서 정진과 칠각지의 택법각지가 유사한 구조로 되어 있지만, 탐구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擇法覺支 택법각지)은 선법과 불선법을 이치에 맞게 선택하는 것으로서 '선택'이 키워드이고, 정진의 경우 노력하고 정근하고 책려하는 점이 키워드로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진각지(精進覺支)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칠각지에서 정진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精進覺支, 정진각지)이란 어떤 것일까. 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자양분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정진의 깨달음 고리를 생겨나게 하고 이미 생겨난 정진의 깨달음 고리를 더욱 많게 하고 증대시키는가?

 

수행승들이여,

시작의 세계가 있고 노력의 세계가 있고 용맹의 세계가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숙고하여 익히면 그러한 자양분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정진의 깨달음 고리를 생겨나게 하고 이미 생겨난 정진의 깨달음 고리를 더욱 많게 하고 증대시킨다.

 

(아하로 봇장가낭경-aharo bojjhanganam- 깨달음 고리의 자양분경, 상윳따니까야 S45.6.2, 전재성님역)

 

 

택법각지에서 선법과 불선법을 선택하였으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선법은 증대시키고, 불선법은 쳐내야 할 작업일 것이다. 그것이 경에서 말하는 정진의 깨달음 고리의 조건(精進覺支)이다.  그래서 시작이 중요하고,  그 다음에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노력하되 용맹스럽게 해야 된다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용맹정진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네 가지 집착(四取: cattarimāni upādānāni)이 있는데

 

법구경 89게송에 있는 깨달음의 고리 (sambodhi-agesu)’라는 말을 근거로 하여 위와 같이 칠각지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다음으로 집착을 놓아 버리고 집착의 여윔을 즐기는(Ādānapainissagge anupādāya ye ratā)’ 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Ādānapainissagge anupādāya ye ratā : DhpA.II.163에 따르면 집착의 여윔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집착에는 네 가지 집착(四取: cattarimāni upādānāni: Dhp20의 주석참조)이 있다. 여기에는

 

1)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대한 집착(kamapadana,欲取)

2)견해에 대한 집착(ditthupadana, 見取)

3)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silabatupādāna, 戒禁取) 

4) 실체의 이론에 대한 집착(attavadupadana,  我語取)

 

이 있다.

 

이 가운데 세 번째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이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Nst.45에서는 외면적인 계율과 서원이라고 번역했고, God.26에서는 도덕적인 행위의 계행과 맹세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번역했다. 한역에서는 계금(戒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종종 계율과 금계라고 잘못 해석되어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법구경 89번 게송에 대한 주석, 전재성박사)

 

 

집착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세 번째의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silabatupādāna)’계금취견이라 한다. 그런데 계금취견이라는 한자어에 대하여 잘못된 이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계행에 대한 것을 집착으로 오판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계금취견(戒禁取見)에 대하여

 

부처님은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난다고 초기경전 도처에서 강조 하였다. 이때 지계는 올바른 계행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잘못된 계행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고대인도에서는 사람들이 개나 소 따위가 죽은 뒤에 천상에 태어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개나 소처럼 똥을 먹고 풀을 먹으면서 천상에 태어나겠다고 집착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미신과 터부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따라서 계금취견이라는 것은 미신과 터부에 대한 집착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석에 따르면 이는 좁은 의미로 해석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넓은 의미의 계금취견은 무엇일까. 주석(Stn.782)에 따르면 자신의 교리나 종교적 수행 때문에 오만해지는 것이나 다른 교리를 비난함으로써 불필요하게 과시하려는 일반적 경향으로서 규범과 근기에 대한 것이라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묻지도 않았는데 남에게 자신의 규범과 근기를 말하고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에 대하여 선한 사람들은 천한 사람들이다.’라고 언급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계금취견은 한 마디로 잘못된 수행방법에 대한 것이다.

 

나를 찾는 수행을 하는 한

 

위 네 가지 집착 가운데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데 있어서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먼저 라따나경(보배경, Sn2.1)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10.

Sahāvassa dassanasampadāya              사하-왓사 닷사나삼빠다-
Tayassu dhamm
ā jahitā bhavanti,         따얏수 담마- 자히따- 바완띠
Sakk
āyadiṭṭhi vicikicchitañca            삭까-야딧티 위찌낏치딴짜
S
īlabbata vāpi yadatthi kiñci,        -랍바땅 와-삐 야닷티 낀찌
Cat
ūhapāyehi ca vippamutto              짜뚜-하빠-예히 짜 윕빠뭇또
Cha c
ābhihānāni abhabbo kātu         차 짜-비타--니 아밥보 까-
Idampi sa
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개체에 실체라는 견해

매사의 의심,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라따나경-Ratanasutta- The three Jewels-보배경-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라따나경 10번 게송에 따르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개체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 (Sakkāyadiṭṭhi)’, ‘매사의 의심 (vicikicchitañca)’,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 (Sīlabbata)’ 이렇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이 중 개체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 (Sakkāyadiṭṭhi)’가 위 네가지 집착중 네 번째의 실체의 이론에 대한 집착(attavadupadana,  我語取)’에 해당된다. 이를 한자어로 유신견(有身見)이라 한다.

 

그리고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 (Sīlabbata)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silabatupādāna, 戒禁取)’을 말한다. 따라서 네 가지 집착 중에 두 가지가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감에 있어서 버려야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려면 가장 먼저 버려야 될 것은 개체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 즉 실체에 이론에 대한 집착(attavadupadana,  我語取), 또 다른 말로 유신견((Sakkāyadiṭṭhi)이다. 유신견에 남아 있는 한 결코 성자에 흐름에 들어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깨달음도 성취할 수 없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를 찾는 수행이라는 것은 결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함을 알 수 있다.

 

현법열반이라 무엇인가

 

이렇게 집착을 버려 버렸을 때 법구경 게송 89번에서는 번뇌를 부순 빛나는 님들(Khīāsavā jutimanto)’이라 하였다. 이는 집착이라는 번뇌가 소멸된 것을 말한다. 번뇌의 소멸은 열반을 뜻한다. 그런 열반은 어떤 것일까.

 

법구경 주석에 따르면 두 가지의 열반상태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하나는 유여의열반(saupadisesanibbana)이고, 또하나는 무여의열반(anupadisesanibbana)이다.

 

유여의열반은 번뇌가 종식되어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로서 잔여가 있는 열반을 말한다. 무여의열반은 최종 의식이 소멸되어 잔여가 없는 열반을 말한다.

 

이렇게 유여열반과 무여열반 두 가지가 있는데, 모두 번뇌가 다한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열반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현법열반이다.

 

현법열반이라 무엇일까.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의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디따담마(diṭṭha-dhamma)

  

 디따담마(diṭṭha-dhamma)는 빨리 삼장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1) diṭṭha-dhamma 혹은 diṭṭheva dhamme(이 표현을 많이 쓴다)는 ‘현재’나 ‘금생 ’ 등의 의미가 있다. 이 경우 중국에서 현법(現法)으로 옮겼는데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보여진 법’이고 이것은 대부분 처소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보여진 법에서’가 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현재’나 ‘지금 여기’나 ‘금생’으로 해석이 된다. 과거생과 미래 생에 대()가 될 때는 ‘금생’의 의미가 되고 과거와 미래에 대가 되어서 나타날 때는 ‘현재’의 의미가 되고 바로 지금 여기(here and now)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자금 여기에서’ 등의 의미가 된다.

 

이런 예는 본서 제 2장에서 볼 수 있는데, 62가지 사견중의 하나로, 천상의 지복을 지금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다고 보는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 diṭṭhidhammanibbāna-vada)이 그것이다.

 

(2) diṭṭha-dhamma는 문자 그대로 ‘법을 보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빨리 삼장에서는 거의 대부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법을 이해해서 법의 눈(法眼, dhamma-cakkhu)이 생긴 경우를 뜻한다. 그래서 법의 눈이 생긴 위의 정형구 바로 다음에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체득했고 법을 간파했고 의심을 건넜고 혼란을 제거했고 무외를 얻었고 스승의 교법에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라는 문맥에서 나타난다.

 

이 경우 중국에서 견법(見法)으로 옮겼는데 문자 그대로 ‘법의 무상·고·무아를 보았다’, ‘부처님 법의 의미를 보았다, 체득했다’는 뜻이 된다.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제8장 주석)

 

 

현법열반을 빠알리어로 디타담마(diṭṭha-dhamma) 또는 딧테와 담메(diṭṭheva dhamme)라 하는데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보여진 법에서라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법을 보았다’라는 의미라 한다.

 

전자의 경우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의미가 되는데, 마하시 사야도에 따르면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 D1)에서 볼 수 있는 62가지 사견중의 하나라 한다. , 천상의 지복을 지금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다고 보는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 diṭṭhidhammanibbāna-vada)이라는 것이다.

 

현세에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성취한다

 

한자어 현법으로 옮긴 빠알리어 딧테와 담메(diṭṭheva dhamme)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다운 받아 가지고 있는 ‘Chattha Sangayana Tipitaka 4.0’에서 이다. 키워드 검색해 보니 수 많은 경의 이름이 뜬다. 이 중 상윳따니까야 실려 있는 경에 딧테와 담메(diṭṭheva dhamme)라는 용어가 매우 많이 보인다. 이를 추적해 보니 봇장가상윳따에 실려 있는 실라경 (Sīlasutta, 계행경)이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Eva bhāvitesu kho, bhikkhave, sattasu sambojjhagesu eva bahulīkatesu satta phalā sattānisasā pāikakhā. Katame satta phalā sattānisasā? Diṭṭheva dhamme paikacca añña ārādheti. No ce diṭṭheva dhamme paikacca añña ārādheti, atha maraakāle añña ārādheti. No ce diṭṭheva dhamme paikacca añña ārādheti, no ce maraakāle añña ārādheti, atha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antarāparinibbāyī hoti. No ce diṭṭheva dhamme paikacca añña ārādheti, no ce maraakāle añña ārādheti, no ce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antarāparinibbāyī hoti, atha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upahaccaparinibbāyī hoti. No ce diṭṭheva dhamme paikacca añña ārādheti, no ce maraakāle añña ārādheti, no ce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antarāparinibbāyī hoti, no ce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upahaccaparinibbāyī hoti, atha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asakhāraparinibbāyī hoti. No ce diṭṭheva dhamme paikacca añña ārādheti, no ce maraakāle añña ārādheti, no ce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antarāparinibbāyī hoti, no ce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upahaccaparinibbāyī hoti, no ce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asakhāraparinibbāyī hoti, atha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sasakhāraparinibbāyī hoti. No ce diṭṭheva dhamme paikacca añña ārādheti, no ce maraakāle añña ārādheti, no ce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antarāparinibbāyī hoti, no ce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upahaccaparinibbāyī hoti, no ce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asakhāraparinibbāyī hoti, no ce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sasakhāraparinibbāyī hoti, atha pañcanna orambhāgiyāna sayojanāna parikkhayā uddhasoto hoti akaniṭṭhagāmī. Eva bhāvitesu kho, bhikkhave, sattasu bojjhagesu eva bahulīkatesu ime satta phalā sattānisasā pāikakhā’’ti. Tatiya.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일곱가지 깨달음 고리를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익히면 일곱가지 결과, 일곱가지 과보가 기대된다. 일곱가지의 결과, 일곱가지의 과보란 어떠한 것인가?

 

현세에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성취한다. 만약에 현세에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목숨을 다할 때에 깨달음을 성취한다.

 

만약에 현세에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목숨을 다할 때에도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하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로 태어나는 도중에 열반에 드는 중반열반에 이른다.

 

만약에 현세에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목숨을 다할 때에도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하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로 태어나는 도중에 열반에 드는 중반열반에 들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상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에 태어나서 열반에 드는 생반열반에 이른다.

 

만약에 현세에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목숨을 다할 때에도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하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로 태어나는 도중에 열반에 드는 중반열반에 들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상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에 태어나서 열반에 드는 생반열반에 들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상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에 태어나서 노력 없이 열반에 드는 무행반열반에 든다.

 

만약에 현세에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목숨을 다할 때에도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하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로 태어나는 도중에 열반에 드는 중반열반에 들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상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에 태어나서 열반에 드는 생반열반에 들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상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에 태어나서 노력 없이 열반에 드는 무행반열반에도 들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상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에 화생하여 오랜시간 익히여 열반에 드는 유행반열반에 든다.

 

만약에 현세에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목숨을 다할 때에도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하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로 태어나는 도중에 열반에 드는 중반열반에 들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상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에 태어나서 열반에 드는 생반열반에 들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상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에 태어나서 노력 없이 열반에 드는 무행반열반에도 들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상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에서 형상의 세계에 화생하여 오랜시간 익히여 열반에 드는 유행반열반에도 들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상부의 다섯가지 장애를 극복하여 상류의 색구경천에 이른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일곱가지 깨달음 고리를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익히면 이러한 일곱가지의 결과, 일곱가지 과보가 기대된다.

 

(실라경-Sīlasutta- 계행경, 상윳따니까야 S45.1.3, 전재성님역)

 

  실라경(계행경-S45.1.3).docx

 

 

 

봇장가상윳따 실라경(계행경)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빠알리어 원문을 보면 딧테와 담메(Diṭṭheva dhamme)라는 용어가 많이 보인다. 번역을 보면 현세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종교가 삶은 죽어서 완성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온 사람들이 없기에 죽어서 천국에 태어나 영원히 산다든지, 죽어서 극락왕생하기를 발원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 몸과 마음이 살아 있을 때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씀 하셨다. 열반이라는 것이 반드시 죽어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현세에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성취한다.(Diṭṭheva dhamme paikacca añña ārādheti”라 하였다.

 

부정적인 현법열반론

 

현세로 번역된 딧테와 담메 (Diṭṭheva dhamme)지금 여기(here and now)’와도 같은 뜻이다. 그래서 현법(現法)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는 현법열반론에 대하여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 D1) 62가지 사견(邪見)중의 하나로 보았다. 이에 대하여 묘원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붓다가 출현하기 전에도 천상의 지복을 지금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견해를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감각적 쾌락은 지고의 행복이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쾌락은 지금 이 생에서 향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내생의 지복을 기다리면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귀중한 순간인 현재를 지나쳐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감각적 쾌락을 완벽하게 누릴 시간은 바로 이 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으로서, 디가 니까야, 계온품戒蘊品, 범망경(梵網經, Brahmājala Sutta),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62가지 사견 의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은 세속 사람들이 열중하는 문제이지 수행자와 비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비구에게 있어 감각적 욕망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이 비난했던 세속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비구를 세속의 번잡스러움이나 이성異性의 유혹에 교란 받지 않고 출세간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매우 공경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만이 아니라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이 필요한 것까지도 희생해가면서 수행자들에게 제일 좋은 음식과 가사를 바칩니다. 비구가 사람들의 보시로 생활하면서 재가자와 똑같이 세속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매우 부적절 합니다.

 

 더구나 비구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수행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세상을 버립니다. 만약 비구가 재가자처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그러한 고귀한 이상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자는 즐거운 감각적 쾌락에 빠지면 안 됩니다.

 

(묘원법사,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

 

 

현생에서 오로지 감각적 쾌락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부정적 의미의 현법열반론이라 한다. 지금 이 몸과 마음이 살아 있을 때 마음 껏 쾌락을 향유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는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오히려 이 몸과 마음이 살아 있을 때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진정한 현법열반의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금 여기를 강조하였다.

 

긍정적인 현법열반론

 

지금 여기를 강조한 게송이 있다. 두 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맛지마니까야에 있는 밧데까랏따경(M131)이다.

 

 

Atīta nānvāgameyya,            아띠땅 난와가메이야

nappaikakhe anāgata;          납빠띠깐케 아나가땅

yadatīta pahīna ta        야다띠땅 빠히낭 땅

appattañca anāgata.            압빳딴짜 아나가땅

 

Paccuppannañca yo dhamma,      빳쭙빤냔짜 요 담망

tattha tattha vipassati;         땃타 땃타 위빳사띠

asahīra asakuppa,         아상히랑 아상꾹빵

ta vidvā manubrūhaye.          땅 위드와 마누브루하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밧데까랏따경-Bhaddekaratta Sutta-한 밤의 슬기로운 님의, MN13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오로지 지금 여기서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tattha tattha vipassati)”라고 하였다. 이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태를 바로 일어나는 곳에서 통찰을 통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관찰해야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관찰하면 결코 탐욕 등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한 구절이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없이(asahīra asakuppa)”라는 내용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지금 여기서 통찰을 닦아야 될 것을 말하였다.

 

이와 같이 마음을 항상 현재 지금 여기에 두었을 때 더 이상 후회나 걱정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아란냐경(S1.1.1)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tīta nānusocanti,     아띠땅 나누소짠띠

nappajappanti nāgata;    납빠잡빠띠나가땅

paccuppannena yāpenti,     빳쭙빤네나 야뻰띠

tena vaṇṇo pasīdati.    떼나 완노 빠시다띠

 

 Anāgatappajappāya,      아나가땁빠잡빠야

atītassānusocanā;          아띠땃사누소짜나

etena bālā sussanti,       에떼나 발라 숫산띠

naova harito lutoti.    나로와 하리또 루또띠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으며

현재의 삶을 지켜 나가면

얼굴빛은 맑고 깨끗하리.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며

지나간 일을 슬퍼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시든다네

낫에 잘린 푸른 갈대처럼.

 

 (아란냐경-Araññasutta - In the Forest- 숲속에서 경, 상윳따니까야 S1.1.10, 전재성님역)

 

 

비록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지금 여기에서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지 않고 현재 있다면 얼굴빛은 맑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항상 현재, 지금 여기에 두면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현법열반이라는 것이 현생에서 지금 여기에서 마음대로 쾌락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지금 여기에 두고 현상이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인 것을 알아 차림으로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본다.

 

완전한 열반 (parinibbutā)이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다. 그런 열반은 모든 번뇌가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아라한의 경지를 말한다. 그런 아라한이 죽으면 무여의열반이라 한다.

 

그런데 법구경 게송 89번에서는 완전한 열반 (parinibbutā)’ 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법구경 주석에 따르면 게송에서 완전한 열반이라는 것은 유요의열반과 무여의열반 두 가지 양상에 대한 것이라 한다.

 

왜 이런 설명을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연료의 비유를 들고 있다. 완전한 열반이라는 것이 연료가 없어 꺼진 불꽃처럼 정의 할 수 없는 상태(apannattikabhava)에 이른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또 주석에서는 Itv.38-39의 근거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아라한의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 양자는 이미 자아에 취착된 유위법적인 세속적인 죽음을 완전히 초월해서 불사(不死, amata)’라고 불리우기 때문이라 한다.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자아에 취착된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오온)의 짐을 모두 내려 놓은 상태(ohitabharo)’에 있기 때문이라 한다.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이와 같이 법구경에서는 번뇌를 부순 빛나는 님들, 그들이 세상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Dhp89)”라 하여 완전한 열번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는데, 숫따니빠따에도 이와 유사한 게송이 있다. 라따나경(보배경, Sn2.1)에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14.

Khīa purāa nava natthi sambhava 키-낭 뿌라-낭 나왕 낫티 삼바왕
Virattacitt
ā āyatike bhavasmi,        위랏따찟따- 아-야띠께 바와스밍
Te
īabilā avirūhicchandā             떼 니나빌라- 아위루-리찬다-
Nibbanti dh
īrā yathāyampadīpo,          닙반띠 디-라- 야-타-얌빠디-뽀
Idampi sa
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라따나경-Ratanasutta- The three Jewels-보배경-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라따나경 14번 게송 음악동영상(Imee Ooi창송)

 

 

 

라따나경 14번 게송을 보면 법구경 현명한 자의 품에 있는 89번 게송과 유사하다. 특히 번뇌를 부순 빛나는 님들, 그들이 세상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Dhp89)”가 있는데, 라따나경에서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구절이 비슷하다. 경에 따르면 열반에 드는 것에 대하여 연료가 없어 꺼진 불꽃에 묘사하고 있기 땨문이다.

 

지금 여기(diṭṭheva dhamme)에서

 

법구경 89번 게송으로 칠각지와 열반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짤막한 게송 하나에도 엄청난 의미가 함축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모든 초기경전과 서로 연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게송으로 인하여 칠각지를 알게 되었고 그에 따라 열반의 종류도 알게 되었다.

 

특히 현법열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리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비록 번뇌가 다하지 못한 범부일지라도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면 일시적인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상태가 현법열반이 아닐까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눈에 띈다.

 

 

Diṭṭheva dhamme paikacca añña ārādheti

딧테와 담메 빠띠깟짜 안냥 아라데띠

 

현세에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성취한다.”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온 사람들이 없기에 종교인들은 천국이나 극락을 이야기 하지만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을 펼쳤다. 그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살아 있을 때 열번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열반은 죽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diṭṭheva dhamme)’ 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2012-10-06

진흙속의연꽃

실라경(계행경-S45.1.3).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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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로 봇장가낭경(깨달음 고리의 자양분경-S45.6.2).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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