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거미줄로 비유한 심장토대설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0. 10. 14:13

 

거미줄로 비유한 심장토대설

 

 

 

 

마음만능주의

 

마음이란 무엇일까. 선사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한다. 마음이라는 말을  수 도 없이 반복하는데, 모든 것이 마음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마음먹기에 달렸다든가, ‘일체유심조를 말한다. 또 팔만대장경의 팔만사천법문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 마음)’이라 하는데, 이는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마음만능주의의 다름이 아니다. 이렇게 마음을 강조하지만 불자들은 마음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

 

마음,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은 좀처럼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법구경에 마음에 대한 주제가 있다. 26개의 주제중의 하나인 마음의 품(Cittavagga)이다.

 

마음의 품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Dūragama ekacara             두랑가망 에까짜랑

~ asarīra guhāsaya,           아사리랑 구하사양

Ye citta saññam-essanti        예 찟땅 산냠 엣산띠

~ mokkhanti Mārabandhanā.        목칸띠 마라반다나

 

멀리 미치고 홀로 움직이고

신체가 없는 동굴에 숨어 있는

마음을 제어하는 님들은

악마의 밧줄에서 벗어나리라.

 

(법구경, Dhp37)

 

 

법구경 37번 게송을 보면 마음의 특징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 마음의 특징중에 홀로 움직이고 (ekacara)라는 문구가 있다. 이 말뜻은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일곱 여덟 마음들이 황화수의 꽃다발이 묶인 것처럼 결코 한 순간에 모두 일어 날 수 없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말은 한 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처리 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생멸법(生滅法)을 알았을 때의 법열이란

 

왜 이말이 중요할까. 다음과 같은 어느 거사의 수행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번뇌망상이 손님으로 오면 ‘망상’이라고 알아차리면 믿지 못하겠끔 곧 사라진다. 그것은 마음은 한 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못하기 때문에 나중에 알아차림 하는 마음을 일어나게 하면 앞서 일어났든 괴로움이나 번뇌망상은 사라지게 된다. 마음의 본성품과 생멸법(生滅法)을 알았을 때의 법열이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도이거사의 미얀마 수행기2, 미디어붓다 2009-06-08)

 

 

도이거사의 미얀마수행기에 따르면 마음은 한 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못한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춤을 추고 싶은 법열을 느꼈다고 한다. 이제까지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풀렸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선불교 전통에서 마음에 대한 해석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이라 한다.

 

피가 철철 흐르도록 수행을 하였건만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그 동안의 선불교 전통에서 수행한 경험담을 써 놓았다.

 

 

이와 같은 의구심을 풀고자 불교계에서는 공인된 수행의 선지식인 법사 한분을 찾아가 상담을 드렸다. 그분은 나의 수행과정을 다 들으시더니 일성이 “거사님 수행 잘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혜가 생겨났습니까?”였다. 그야 말로 다짜고짜 식이었다. 나의 대답 또한 간결했다.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그분의 대답 또한 간결했다. “그것을 보고 있는 의식을 깨뜨리십시요!

 

이 세 마디가 내가 선지식과 마주앉아 주고받은 수행에 대한 면담의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학생처지의 불자이니 선정체험후의 지혜수행의 과정을 소상히 설명해 주셨더라면 내가 더 더디 갔을까? 대승(大乘)의 선사(禪師)님들 가르침이 ‘언하(言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하고 무작방편(無作方便)이라지만 이건 나 같은 초급자에게는 너무 심한 화두였다.

 

6개월을 의식을 깨기 위한 수행을 피가 철철 흐르도록 했다. 스스로 얻은 바도 컸다. 그분의 답이 설령 무()라 해도 맞고 공()이라 해도 맞다. 질문이 명확하면 오는 답도 명확해야하거늘 정신세계의 질의응답은 이렇게 두루뭉술한 가보다. 하기는 듣는 자가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선지식은 자기의 수행체험을 하여 답해야지 교리에 근거하여 이해하는 폭의 두루뭉술한 답은 묻는 자를 당황하게 할 뿐이다.

 

(도이거사의 미얀마 수행기2, 미디어붓다 2009-06-08)

 

 

재가불자중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경우 선사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선사들의 가르침이 그다지 친절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무뚝뚝한 말과 다짜고짜식의 짤막한 가르침이 전부라는 것이다. 특히 아무 것도 모르는 초보자에게 화두를 주기도 하는데, 도이거사도 그런 케이스라 보여진다.

 

도이거사는 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고 피가 철철나게 수행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얻는 것도 많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다. 누구나 이야기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마음의 기본적인 정체

 

그런데 미얀마에서 수행하면서 마음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 난다.

둘째, 마음은 한 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못한다.

셋째,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넷째, 마음은 과보를 남긴다.

 

 

이것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기본적인 정체이다. 특히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처리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마치 크게 깨달은 것인냥 그 희열이 말할 수 없이 컷다고 말하고 있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마음이 한 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처리하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이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와 선불교 전통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 주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마음을 생멸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결된 마음, ‘한마음(一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을 하나로 본다면 한 순간에도 여러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 날 수 있다. 법성계에 실려 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는 문구가 대표적일 것이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에 대한 해석을 보면 한 생각이 한량 없는 시간이며 중생(衆生)의 업()이 수행에 의해 지혜(智慧)로 전환되어 진여공성(眞如空性)에서 나투는 시간의 무자성(無自性)을 여실히 알아차릴 때, 마음에 일어나는 한 순간의 시간이 무량(無量)한 시간이 됩니다. (법성게 제12 일념즉시무량겁 一念卽是無量劫)라고 설명되어 있다. 하나의 마음에 대하여 무량겁과 같다고 보는 것은 모든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은 생멸현상이므로 점과 점들이 이어져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선형적인 인과관계를 말한다. 그래서 한 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처리 하지 못하고 마음이 과보에 따라 다음 마음이 일어나는 연기적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 마음에홀로 움직이고 (ekacara)라고 하였는데, 이는 한 순간에 하나의 일만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을 말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천방지축 날 뛰는 마음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마음이 일어 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문구가 법구경 게송 37번에서 가장 첫 번째 문구인 멀리 미치고 (Dūragama)라는 말이 있다. 멀리 미친다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마음에는 동쪽 방향등으로 특별한 운동이 없다. 그러나 거미가 거미줄을 친 것에 못지 않게, 멀리 있는 대상을 파악한다. 그런 의미에서 멀리 미친다고 한 것이다.

 

(법구경 게송 37멀리 미치고 (Dūragama)’의 주석)

 

 

거미는 거미줄을 벗어 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동서남북 천방지축 날 뛰는 것이 마음이다. 이는 마음의 대상이 있으면 언제든지 마음이 일어남을 말한다. 그런 마음은 실체가 있을까.

 

마음은 심장을 토대로 한다

 

게송에서 마음에 대하여  신체가 없이는 (asarīra)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는 마음에는 신체적인 구조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푸르다 등의 색깔 구별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마음은 동굴에 숨어 있다고 한다.

 

신체적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는 마음을 왜 동굴에 숨어 있다고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DhpA.I.304에 따르면, 동굴은 지수화풍의 네 가지 위대한 존재(catumahabhutani)로 이루어진 신체의 동굴을 말하는데, 마음은 심장물질(hadayarupa)에 의존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동굴에 숨어 있는 존재로 표현된다. Sds.II.475; III.536에 따르면, 마음은 심장토대의 물질(hadayavatthurupa) 또는 심장물질(hadayarupa)에 의존해서 일어난다.

 

(법구경 게송 37동굴에 숨어 있는(guhāsaya)’ 의 주석)

 

 

주석에 따르면 마음은 심장을 토대로 한다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는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라는 여섯가지 감각기관이 -----이라는 여섯가지 감각대상에 부딪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의(, mano)감각기관으로 본다는 것이다.

 

감각기관으로서 마노(mano,)

 

감각기관에서 눈은 눈을 토대로 한다. 귀는 귀의 토대로 한다. 이렇게 감각기관이 토대를 갖는다면 마음 역시 당연히 토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마음이 심장을 토대로 갖는다는 것은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심장토대의 물질은 다섯 가지 알음알이를 제외한 나머지 마노의 감각장소에게 의지하는 조건, 먼저 생긴 조건, 서로 관련되지 않은 조건, 존재하는 조건, 떠나가버리지 않은 조건의 다섯 가지로 [삶의] 전개과정에서만 조건이 된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217)

 

 

청정도론에 따르면 심장토대의 물질은 마노(, 마음)의 감각장소에 의지하는 조건이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에서 의(, mano)라는 것은 마음이긴 하지만 대상을 접촉한다는 의미에서 감각기관이라 볼 수 있고, 감각기관이기 때문에 당연히 토대를 가져야 하는데, 주석에서는 심장을 토대로 갖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심장토대설이 나온 것이다.

 

28가지 근본물질

 

이와 같이 초기불교에서는 심장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데, 이는 82구경법(paramattha dhamma) 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28가지중의 하나로 본다. 참고로 28가지 근본물질은 다음과 같다.

 

 

28가지 물질들

No

물질

근본물질

파생물질

토대

1

 

 

 

 

 

2

 

 

 

 

 

3

 

 

 

 

 

4

바람

 

 

 

 

 

5

 

 

 

 

 

6

 

 

 

 

 

7

 

 

 

 

 

8

 

 

 

 

 

9

 

 

 

 

 

10

형상

 

 

 

 

 

11

소리

 

 

 

 

 

12

냄새

 

 

 

 

 

13

 

 

 

 

 

*

감촉

 

 

 

 

 

14

여성

 

 

 

 

 

15

남성

 

 

 

 

 

16

심장토대

 

 

 

 

 

17

생명기능

 

 

 

 

 

18

영양소

 

 

 

 

 

19

허공

 

 

 

 

 

20

몸의 암시

 

 

 

 

 

21

말의 암시

 

 

 

 

 

22

가벼움

 

 

 

 

 

23

부드러움

 

 

 

 

 

24

적합함

 

 

 

 

 

25

생성

 

 

 

 

 

26

지속

 

 

 

 

 

27

쇠퇴

 

 

 

 

 

28

무상

 

 

 

 

 

 

합계

4

24

5

23

6

 

 

82구경법을 구성하고 있는 28가지 물질들에 대한 표이다. 표에서 심장토대가 28가지 구경법 중의 하나에 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심장토대는 파생물질로서 밖에 존재하며 마노(mano, 마음 또는 생각)의 토대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장토대(hadaya-vatthu)란 무엇인가

 

이렇게 초기불교에서는 심장을 뇌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과학이 발달된 요즘 도전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의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심장토대(hadaya-vatthu)

 

아비담마에 의하면 안식(眼識)과 이식(耳識)과 비식(鼻識)과 설식(舌識)과 신식(身識)은 각각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기관을 토대로 하지 않는 마음과 의식(意識)은 모두 심장토대(hadaya-vatthu)의 물질을 토대로 해서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심장토대는 심장 속에 있는 피의 반만큼의 양에 해당하는 피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심장자체는 아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현대 서양의 아비담마 학자들은 이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빨리 삼장에는 심장토대라는 말은 나타나지 않고 주석서 문헌에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과 의식(意識)은 심장토대를 의지해서 일어난다는 것은 아비담마의 정설이다. 그리고 뇌는 상좌부 불교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 기관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31. 물질과 여섯 감각장소[六入] 1번 주해)

 

 

 

 

 

 

The heart

 

 

주석에 따르면 마음과 의식은 심장을 토대로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뇌과학이 발달된 현대에 있어서 서양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으나,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는 오히려 뇌에 관련된 것은 그다지 주목의 대상이 아니라 한다. 

 

거미줄의 비유로 설명한 심장토대설

 

왜 그럴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주석서에 따르면 심장은 모든 정신 활동의 물질적 토대가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서양의사들은 환자의 병든 심장을 제거하고 건강한 대용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 실험이 완전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보도에 따르면 이식된 심장이 며칠 동안은 기능했다고 합니다. 이 뉴스는 인간의 정신생활에 있어 심장의 역할에 의문이 들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마치 도마뱀붙이의 꼬리가 잘려진 뒤에도 움직이는 것처럼 심장은 제거되었지만 그 잠재력은 소멸되지 않을 수도 있고 바왕가의 마음은 심장이 있던 자리에 여전히 머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식된 새로운 조직이나 안구가 새로운 감성을 가지듯이 이식된 심장이 몸에서 공급받은 피에 의해 활기를 되찾아 바왕가의 마음이 다시 활성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논서에 근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비담마 칠론중의 하나인「발취론(發趣論)」에 보면 의식(意識), 즉 마음의 육체적 토대를 “마음의 토대로써 마음을 조건지우는 육체적 기관이다.”라고만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취론」은 몸의 어느 특정 기관이나 부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논서에 따른다면 몸의 어느 특정부위가 마음의 토대라고 가정해도 좋을 것이며 아마도 그것은 심장이나 머리의 어떤 부위일 것입니다. 마음을 심장에 위치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머리를 그 육체적 토대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논장의 주석서에 나와 있는 거미와 마음이 전개되는 유사성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거미는 파리를 잡기 위하여 그물의 일종인 거미줄을 칩니다. 거미는 태어난 지 며칠만 지나면 본능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태어난 지 1년이 된 아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거미는 거미집의 중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줄에 걸리는 생명체는 모두 먹어치우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왕가, 즉 의식(意識)은 거처로써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거처와 그 주변을 연결하고 있는 거미집의 거미줄처럼 심장에 의해 주입된 피가 혈관을 통해서 온 몸에 퍼집니다. 그리고는 눈에 있는 형상이 심장에 있는 바왕가를 자극하면 그것은 안문(眼門) 인식과정을 통해서 안식(眼識)등으로 변환됩니다. 그리고 나서 바왕가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소리[]와 냄새[] 등에 대해서도 각각에 해당되는 감각기관과 함께 같은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 법문집)

 

 

마하시 사야도는 왜 심장이 마노(마음)의 토대가 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를 거미줄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법구경 게송에서 마음을  동굴에 숨어 있는(guhāsaya)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주석에 따르면 심장을 토대로 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거미줄과 같은 혈관

 

심장은 피를 공급하는 곳이다. 심장에서 뿜어진 피는 몸의 구석 구석까지 미친다. 이는 혈관이 온 몸에 걸쳐 퍼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거미줄과 같은 것이다.

 

거미가 거미줄을 쳐 놓고 있으면 먹이가 걸려 들듯이, 뇌를 비롯하여 온 몸에 퍼져 있는 혈관은 마음의 토대이기 때문에 생각은 심장을 토대로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a spider's thread 

 

 

 

열반은 어떻게 실현되는가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고,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할 수 없고, 마음은 과보를 남기며 상속한다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마음에 대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 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를 알았을 때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고 하였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마음에 대하여 선형적(線形的)인 인과관계로 본다. 따라서 조건이 끊어지면 다음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 성립할 수 없다. 바로 그 상태가 열반이라 본다. 그래서 열반을 실현하려면 마음에 대하여 선형적 인과관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서로 연결되었다고 보았을 때 결코 열반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신 합일은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끊어지지 않고 서로 연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하나 또는 동시적인 것이라고 보는 대승불교와 선불교 전통에서는 열반이라는 말을 그다지 많이 쓰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왜 대승불교경전에 열반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없는지, 왜 선사들의 법문에서 삼매에 대한 이야기와 나를 찾는 이야기만 할 뿐 열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법구경 ‘마음의 품’

 

법구경의 게송에는 마음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비록 짤막한 게송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한 구절안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런 법구경 마음의 품은 다음과 같다.

 

 

마음의 품

 

 

1.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을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잡는다.

마치 활제조공이 화살을 바로 잡듯.(33)

 

2.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이

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34)

 

3.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온다.(35)

 

4.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지만,

지극히 보기 어렵고 미묘한 마음을

현명한 님은 수호해야하리.

마음이 수호되면, 안락을 가져온다.(36)

 

5.

멀리 미치고 홀로 움직이고

신체가 없는 동굴에 숨어 있는

마음을 제어하는 님들은

악마의 밧줄에서 벗어나리라.(37)

 

6.

마음이 안정을 잃어버리고

올바른 가르침을 식별하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이 흔들린다면,

지혜가 원만하게 완성되지 못한다.(38)

 

7.

마음에 번뇌가 없고

마음의 피폭을 여의고

공덕과 악행을 떠난

깨어있는 님에게 두려움은 없다.(39)

 

8.

이 몸을 옹기라고 알고

이 마음을 성채처럼 확립하여

지혜를 무기로 악마와 싸워

성취한 것을 수호하되 집착은 여의어야 하리.(40)

 

9.

,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머지 않아 이 몸은

땅 위에 눕혀지리라.(41)

 

10.

적이 적을 대하고

원적이 원적에게 대하는 것보다

잘못 지향된 마음이

자신을 대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42)

 

11.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하고

다른 친족이 대하는 것보다 올바로 지향된 마음이

자신을 대하는 것은  더욱 훌륭하다.(43)

 

(법구경, 마음의 품, 전재성님역)

 

 

  

2012-10-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