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세상보기를 물거품 처럼, 금강경사구게와 상윳따니까야 포말경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0. 9. 15:09

 

세상보기를 물거품 처럼, 금강경사구게와 상윳따니까야 포말경

 

 

 

금강경의 멋진 게송

 

금강경에 멋진 게송이 있다. 가장 많이 애송된다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는 게송이다.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라는 내용이다. 이는 모든 현상에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금강경과 유사한 게송

 

그런데 이와 유사한 게송이 초기경전에 도처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Pheapiṇḍūpama rūpa           페나삔두빠망

vedanā bubbuupamā                웨다나 붓불루빠마

Maricikupamā saññā                마리찌꾸빠마 산냐

sakhārā kadalūpamā,             상카라 까다루빠마

Māyūpamañca viññāa             마유빠만짜 윈냐낭

dīpitā diccabandhunā.             디삐따 딧짜반두나

 

[세존]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수포와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페나삔두빠마경-Pheapiṇḍūpama sutta- Foam-포말 비유의 경, 상윳따니까야 S21.2.5.3, 전재성님역)

 

 

 

bubbles

 

 

게송을 보면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물질(rūpa)을 포말로, 느낌(vedanā)을 수포로, 지각(saññā)을 아지랑이로, 형성(sakhārā)을 파초로, 의식(viññāa)을 환술로 비유하여 노래 하고 있다. 이는 오온이 무상이고 무아임을 말한다. 그래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금강경에서는 ,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이렇게 여섯 개의 단어를 나열하고 일체유위법이 이와 같음을 관찰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초기경에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경에 표현된 내용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오온

비유어 설명

오온 설명

물질

(rūpa)

 

 

포말

(Pheapiṇḍūpama)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이 갠지즈강이 커다란 포말을 일으킨다고 하자. 눈 있는 자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포말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물질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그것을 수행승이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물질의 본체인가?

느낌

(vedanā)

 

수포

(bubbuupamā)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을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에 물거품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눈 있는 자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물거품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느낌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그것을 수행승이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느낌의 본체인가?

지각

(saññā)

 

아지랑이

(Maricikupamā)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늦여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눈 있는 자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 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아지랑이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지각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그것을 수행승이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지각의 본체인가?

형성

(sakhārā)

 

파초

(kadalūpamā)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견고한 나무심을 바라고, 견고한 나무심을 구하고, 견고한 나무심을 찾아, 날카로운 도끼를 가지고 숲으로 들어갔다고 하자. 그가 거기서 커다랗고 새로 자란 아주 높이 솟은 파초의 줄기를 발견하면 그는 그 뿌리를 벤다. 그 뿌리를 베고 꼭대기를 자른다. 꼭대기를 자르고 바깥 껍질을 벗긴다. 그가 그 바깥 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벗겨도 어떻게 그 수심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눈 있는 자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파초줄기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형성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그것을 수행승이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형성의 본체인가?

 

의식

(viññāa)

 

환술 (Māyūpamañca)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환술사나 환술사의 제자가 커다란 길에서 환술을 보여준다고 하자. 눈 있는 자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환술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의식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그것을 수행승이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의식의 본체인가?

 

 

이와 같이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오온이 무상하고 실체가 없음을 문답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근본을 보아 자세히 관찰하고 이치에 맞게 탐구 하면 비어 있고 공허한 것임을 알라는 것이다. 이는 금강경에서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하여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라고 말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친절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유사한 게송이 법구경에서도

 

초기경전의 특징은 서로 연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페나삔두빠마경에 실려 있는 오온의 비유에 대한 게송과 유사한 것이 법구경에서도 발견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Yathā bubbulaka passé,   야타 붑불라깡 빠쎄

yathā passe marīcika,    야타 빠세 마리찌깡

Eva loka avekkhanta   에왕 록깡 아웩칸탕

Maccurājā na passati.      맛쭈레자 나 빳사띠.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

 

(법구경, Dhp 170, 전재성님역)

 

 

법구경 세상의 품(Lokavagga)’ 실려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서 물거품아지랑이두 개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페나삔두빠마경에서 물질과 지각에 해당된다. 물질(rūpa)을 물거품으로 보고, 지각(saññā)을 아지랑이로 보는 것이다.

 

물거품(bubbulaka)과 아지랑이(marīcika)

 

이 때  물거품(bubbulaka)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상윳따니까야 페나삔두빠마경의 주석에 따르면 포말은 영원하지도 않고, 안정되어 있지도 않고, 실체를 결여 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그 구멍과 틈새로 가득 차 있어서 작은 생물들이 사는 곳이라 한다. 이는 우리의 몸과 같은 구조이다. 우리의 몸도 포말과 같아서 팽창하고 균열되고 죽음이 닥치면 부서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포말을 우리의 몸과 같은 의미로 물질의 비유로 사용한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아지랑이(marīcika)는 어떻게 설명되어 있을까. 빠알리어 마리찌까(marīcika)아지랑이신기루를 말한다. 이를 지각((saññā)에 비유하였는데, 지각은 실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마시거나 목욕하거나 주전자를 채울 수 없는 신기루와 같다고 한다. 사막의 신기루는 사람들을 속인다. 마찬가지로 지각은 푸른 색등의 대상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즐길만하고  영원할 것이라는 관념으로 사람을 유인한다는 것이다.

  

게송에서 물거품은 물질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고, 아지랑이는 정신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물질을 물거품처럼, 정신을 아지랑이나 신기루처럼 이 세상을 보면 죽음의 사자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한다. 여기서 이 세상(loka)이라는 것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열여덟가지의 인식의 세상을 공허하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면 죽음의 신도 잡아 가지 못할 것이라 한다. 왜 그럴까.

 

고디까비구의 자결

 

죽음의 신에 대한 이야기가 상윳따니까야 고디까경(Godhikasutta , S3.3.3)에 있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제자인 고디까비구가 있었다. 그런데 고디까비구는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며 여섯번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러나 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퇴전하였을 때 이제 나는 여섯번이나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나는 차라리 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어떨까?”라고 생각하며 자결한다.

 

죽음의 신은 왜 발견하지 못하였을까

 

고디까 비구가 자결하였다는 것을 안 부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고디까 비구가 수행하였던 라자가하 근처 이씨길리라는 산의 중턱에 있는 검은 바위에 도착한다. 그런데 경에서는 죽음의 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너희들은 저 연기와 같은 아련한 것이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위쪽으로 움직이고 아래쪽으로 움직이며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느냐?”

 

[수행승]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

수행승들이여,

악마 빠삐만이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을 찾고 있다.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고디까경-Godhikasutta,상윳따니까야 S3.3.3, 전재성님역)

 

 

연기와 같은 것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의 신 빠삐만이 고디까를 찾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죽음의 신은 고디까를 찾지 못하였다. 그것은 고디까가 죽음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다. 여섯번째 마음의 해탈을 이루고 난 다음 자결 하였기 때문에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다.

 

고디까비구의 자결은 자살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병 등으로 인한 아라한의 자살은 허용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일반사람들의 자살과 달리 마음의 해탈을 이룬 자는 자결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기 때문이라 한다.

 

사람들은 죽을까봐 늘 두려워 한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Kiso vicaṇṇo bhavati             끼소 위짠노 바와띠

bhisamattānamattatā,           빙사맛따나맛따따
Na tena petā pāpenti            
나 떼나 뻬따 빠뻰띠

niratthā paridevatā.             니랏타 빠리데와따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살라경-Salla sutta-화살의 경, 숫따니빠따Sn3.8,    전재성님역)

 

 

사람들은 죽을까봐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후에 대하여 걱정한다. 특히 이 세상에서 악행을 많이 저지른 자들은 두려움에 떨 것이고, 불로소득 등으로 인하여 한 평생 잘 먹고 잘 산 경우 아쉬움이 많이 남을 것이다. 그래서 죽으면 죽음의 신이 잡아 가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물거품이나 아지랑이 처럼 보는 자, 즉 공허하고 실체가 없다고 보는 자들은 걱정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신이 그를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재생으로 연결되는 마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금강경 보다도

 

재생연결식이 일어 나지 않았을 때 죽음의 신은 죽음의 신은 보지 못한다고 한다. 따라서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물질(rūpa)을 포말로, 느낌(vedanā)을 수포로, 지각(saññā)을 아지랑이로, 형성(sakhārā)을 파초로, 의식(viññāa)을 환술로 보라고 하였다. 이런 가르침이 금강경의 유명한 여몽환포용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보다 훨씬 더 마음에 다가 온다. 이와 같은 게송을 접할 때 초기불교의 진수를 느끼는 것 같다.

 

 

 

2012-10-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