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세속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삶의 족쇄와 윤회의 감옥
라훌라경
[Rahulasutta] (*1)
주해(*1) 세존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은 후에 차츰 까삘라밧투로 갔다. 그곳에서 아들 라훌라로부터 ‘수행자여, 저에게 유산을 물려주십시오’라고 유산을 요청받았으나, 세존께서는 사리뿟따 장로에게 ‘라훌라를 출가시켜라’라고 명했다.
이와 같이 출가해서 라훌라는 성장해서 사리뿟따에게 구족계를 받고 목갈라나에게 갈마의규를 배웠다. 세존께서는 라훌라가 ‘출생, 성씨, 가문, 계급의 화려함 등으로 교만하고 수다스러워서는 안된다’라고 생각해서 어렸을 때부터 고귀한 자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항상 이 경의 가르침을 말씀하셨다.
1.
[세존]
“늘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어진 이를 무시 하는 것은 아니냐?
사람들을 위해 횃불을 비추는 님을 그대는 존경하고 있느냐?
2.
[라훌라]
“늘 힘께 살고 있다고 해서 어진 이를 무시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횃불을 비추는 님을 저는 항상 존경합니다.”
3.
[세존]
“믿음을 가지고 집을 떠났다면(*1)
사랑스럽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들을 버리고,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사람이 되라.
4.
선한 친구와 사귀어라.
인적이 없이 외딴 곳, 고요한 곳에서 거처하여라.
음식의 분량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
주해(*1)
prj. II. 341에 따르면 출가하는 것은 왕에 인도되어서나 도적에게 이끌려서나 빚 때문이나 공포에 시달림 때문이거나 생계가 곤란해서가 아니라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괴로움을 그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라훌라는 왕국의 유산을 바라고 무리하게 출가한 것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5.
의복과 얻은 음식과 필수 의약과 침구와 깔개,
이런 것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6.
계율의 항목을 지키고 다섯 감관을 지켜,
그대의 몸에 대한 새김(*1)을 확립하라.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2) 떠나라.
주해(*1)
올바른 새김(正念)을 말한다. 올바른 노력은 올바른 새김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거기에 필요한 힘을 제공하며, 올바른 새김은 주의력을 위한 안정된 기반을 제공하고 올바른 집중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삼매의 구성요소 사이의 수반적 관계에 관해서는 붓다고싸의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 세 소년이 놀이하러 정원에 갔다. 걸으면서 꼭대기에 꽃이 활짝 핀 나무를 보았다. 그래서 그 꽃을 따 모으기로 했다. 꽃은 제일 큰 사람의 키를 넘는 것이었으므로 친구가 엎드리고 키 큰 친구가 그 위에 올라갔으나 떨어질까 두려워했다. 그때 또 다른 친구가 그 옆에 서서 어깨를 빌려주어 키 큰 친구는 그 어깨에 기대어 꽃을 따 모을 수 있었다.’
여기서 꽃을 따 모으는 키 큰 친구는 올바른 집중을 의미하고, 등을 제공한 친구는 올바른 노력을 의미하고, 어깨를 빌려준 친구는 올바른 새김을 뜻한다. 올바른 집중은 이와 같이 올바른 노력과 올바른 새김의 지원을 받아 그것들을 수반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도나 사유는 직접적인 체험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것이 소멸됨으로써 새김 속에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새김은 그냥 수동적인 관찰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김은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우리를 현실 속에 닻을 내리게 하며, 사유작용과 더불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 방황하게 두지 않는다.
새김이 없는 마음은 호박에 비유되고,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돌에 비유된다. 호박은 수면 위를 떠다니지만 돌은 물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가라앉는다. 이처럼 강한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대상의 겉모습 속에 떠돌지 않고 대상에 머물러 대상의 속성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통찰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디가니까야에는 네 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가 함께 주어져 있다. ‘무엇이 네 가지새김인가?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몸에 관해 몸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느낌에 관해 느낌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마음에 관해 마음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사실에 관해 사실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주해(*2)
prj. II. 343에 따르면, ‘윤회의 소용돌이에 아주 절망해서 모든 세상을 기뻐하지 않는 지각을 가져라’라는 뜻이다.
7.
탐욕에 물들어 아름다워 보이는 인상을 회피하라.
부정한 것이라고 마음을 닦되, 마음을 하나로(*1) 집중 시켜라.
8.
인상이 없는 경지를 닦아라.(*2)
교만의 잠재적 성향을(*3) 버려라.
그리하여 교만을 그치면, 그대는 고요하게 지내리라.”
9.
이처럼 거룩한 세존께서는 라훌라 존자에게
참으로 이와 같은 시로써 되풀이해 가르치셨다.
주해(*1)
prj. II. 343에 따르면 근접삼매에 의해서 하나로 된 것과 근본삼매에 의해서 잘 집중된 것을 말한다.
주해(*2)
prj. II. 343에 따르면 이와 같이 근본적인 삼매의 경지에 들어 통찰을 가르치기 위해 ‘인상이 없음(無相)’이라고 말한 것이다.
주해(*3)
prj. II. 344에 따르면 교만은 ‘나는 있다는 교만’을 말한다.
- 라훌라의 경이 끝났다. -
(Rāhulasuttaṃ, 숫따니빠따 Sn2.11, 전재성님역)
라훌라상윳따 (Rāhula Saṃyutta)에서
초기경에서 라훌라에 대한 이야기는 숫따니빠따 뿐만 아니라 상윳따니까야와 맛지마니까야 등에서도 볼 수 있다. 특히 상윳따니까야에는 56개의 주제중에 17번째 상윳따가 라훌라에 대한 것으로 이를 ‘라훌라상윳따 (Rāhula Saṃyutta)라 한다.
라훌라 쌍윳따 해제에 따르면 부처님의 라훌라에 대한 가르침을 모아 놓은 22개 경전의 모음이다. 주로 연기되고 있는 인식의 세계(18界)의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 없음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해탈연기를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라훌라여,
그것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혹은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혹은 거칠든 미세하든 혹은 열등하든 수승하든 혹은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간에 어떠한 물질이라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로 알아서 관찰하면 취착이 없는 해탈이 이루어진다.”
(마나누사야경, Mānānusayasuttaṃ-아만의 경향 경, 상윳따니까야 S17.6.2.11, 전재성님역)
라훌라가 자만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묻자 부처님이 답변한 내용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yathābhūtaṃ, 야타부땅)” 관찰할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이제까지 내것이라고 여겼던 나의 몸과 나의 몸이 나의 것이 아님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교만이 일어나지 않고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것이라 한다.
“라후(Rāhu)가 태어났다, 족쇄가 채워졌다”
라훌라는 부처님의 외아들이다. 부처님이 출가하던 날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라훌라가 태어 났을 때 부처님은 “장애”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 라훌라(Rahula)에 대한 것을 보면 부처님은 “라후 자또, 반다남 자땀(Rāhu jāto, bandhanam jātam) ”이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 말뜻은 “라후( Rāhu)가 태어났다, 족쇄가 채워졌다”라는 말이다. 아이의 이름이 라훌라(Rāhula)인 것은 ‘족쇄’ 또는 ‘체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라후(Rāhu)라는 말의 의미는 족쇄로 표현 되고 있지만, 또 하나의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라후가 일식이나 월식의 의미로 사용됨을 말한다.
위키피디의 설명에 따르면 라후의 의미는 ‘물라사르와스띠와다 위나야(Mūlasarvāstivāda vinaya)’에서 발견된다고 하는데, 힌두전통에 따르면 아수라의 잘려진 머리(cut-off head of an asura)로서 천문현상으로 인한 태양이나 달의 일식과 월식의 현상으로도 받아 들여진다고 한다.
가장 강한 족쇄는?
부처님은 라훌라가 태어 났을 때 “라후( Rāhu)가 태어났다, 족쇄가 채워졌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장애라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족쇄가 채워졌다고 하였을까.
아내와 자식이 있는 삶은 가장으로서 즐거움과 기쁨을 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아내와 자식에게 묶이게 된다. 이와 같이 족쇄에 묶인 존재에 대하여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Na taṃ daḷhaṃ bandhanam-āhu dhīrā, 나 땅 달항 반다나마아후 디라
Yad-āyasaṃ dārujaṃ babbajañ-ca, 야다야상 다루장 밥바잔짜
Sārattarattā maṇikuṇḍalesu 사랏따랏따 마니꾼달레수
Puttesu dāresu ca yā apekhā 뿥떼수 다레수 짜 야 아뻭카
쇠나 나무나 밥바자 풀로 만든 것을
현명한 님은 강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석이나 귀고리에 대한 탐착,
자식과 아내에의 애정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
(법구경 Dhp345, 전재성님역)
쇠로 만든 족쇄가 있다. 손이나 발을 묶어 놓아 도망 가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을 말한다.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채워지는 족쇄는 도망도 가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행동반경도 제한된다.
그런데 법구경 게송에 따르면 쇠로 만든 것이든 나무로 만든 것이든 어떤 사람을 묶어 놓는 족쇄는 그다지 강력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왜 그럴까. 쇠붙이로 만든 족쇄는 언제든지 칼 등으로 끊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족쇄가 있다. 그것은 “탐착”과 “애착”이라는 족쇄이다.
보석이나 귀거리나 보석으로 이루어진 장식물은 탐착의 대상이다.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런 탐착은 쇠붙이로 만들어진 족쇄보다 더 강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더 강력한 것은 “자식과 아내에 대한 애착”이라 한다.
자식과 아내에 대한 애착은 보석등의 탐착보다 더 강하고 쇠붙이로 만든 족쇄와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족쇄라고 한다. 쇠붙이로 된 족쇄는 끊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자식과 아내와의 인연에 따른 족쇄는 끊을래야 여간해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 남자가 자식과 아내를 가진 가장이 되면 삶의 과정에서 즐거움과 기쁨도 맛 보지만, 또한 고통도 맛보게 된다.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을 맛보게 하는 족쇄에 묶이면 결국 개인의 삶을 고통속에 빠뜨려 버리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삶의 과정에서 싫어 하는 것과 만나는 것도 고통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고통을 맛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족쇄에 묶이면 윤회(samsara)의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라”
그렇다면 족쇄에서 해방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에서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mā lokaṃ punarāgami” 마 로깡 뿌나라가미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세속(lokaṃ)’으로 돌아 가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라’ 하였다. 이는 ‘윤회의 소용돌이에 아주 절망하여 모든 세상을 기뻐하지 않는 지각을 가지자 말라’라는 말과 같다고 주석에 쓰여 있다.
세속에 돌아 가지 말라는 뜻은 “다시는 윤회하는 삶을 살지 말아라” 또는 더 나아가 “다시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라”는 말과 같다.
이렇게 부처님이 자신의 외아들인 라훌라에게 ‘세속으로 돌아가지 말아라’라고 하였는데, 이는 환속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부처님은 ‘세속으로 돌아가지 말아라’라고 신신당부 하듯이 말하였을까. 그것은 라훌라가 자발적으로 출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훌라의 출가
라훌라가 자발적인 출가가 아닌 타의에 의한 출발한 이유에 대하여 주석을 참고 하면 다음과 같다.
- 라훌라 : rahula.
부처님의 외아들이다. 아버지가 출가하던 날 태어났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뒤 숫도나다왕의 초청으로 까필라밧뚜를 처음 방문했을 때 라훌라의 어머니는 아들을 부처님에게 보내서 유산의 승계를 요청했다.
부처님은 침묵한 채 공양을 들고 궁을 떠났다. 라훌라가 쫓아나서자 부처님은 마침내 싸리뿟따를 시켜 라훌라를 승단에 입단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어린아이들의 출가는 부모의 허락을 맡아야 한다고 요청하자 부처님은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라훌라는 이미 출가했고 부처님은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전했다. 어렸을 때 라훌라는 한 줌의 모래를 집어들고 '오늘 내가 이 모래알처럼 많은 가르침을 얻기를 바란다' 고 기도했다. 라훌라가 일곱 살이었을 때 부처님은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 것을 설했고, 라훌라가 18살 때 위빠싸나 명상을 가르쳤으며, 나중에 지혜가 무르익었을 때 아라한이 되도록 했다. 라훌라는 밀행제일의 제자가 되었다.
(S17 라훌라상윳따 시각경-Cakkhuādisuttaṃ 주석, 전새성박사 )
주석에 따르면 라훌라는 부처님에게 유산의 승계를 요청하였다. 이는 라훌라의 어머니인 야소다라 비가 시켰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듣고 부처님은 라훌라를 출가 시켰다. 그것도 일곱살 정도의 어린 나이이다.
이렇게 부처님이 라훌라를 출가시시킨 이유는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는 부처님에게 있어서 유산으로 줄 것은 출가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탈하여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 최고의 유산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자발적으로 출가한 것이 아니었기에 세속의 삶에 대한 동경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의복, 음식, 의약, 침구 등 사대필수품 외에 욕심을 부리면 안된다고 하면서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mā lokaṃ punarāgami)”라 하고 당부 하듯이 말씀 하신 것이다.
부처님제자의 출가이유
스님들의 출가이유를 들어 보면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출가하는 것이 왕이나 도적에게 이끌려서 출가한다거나, 빚 때문에 출가한다거나, 공포에 시달려, 생계가 곤란해서 출가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출가는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환속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로서 출가한다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괴로움을 그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출가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출가이유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경이 있다. 맛지마니까에 랏타빨라경이 그것이다. 게송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출가이유
내가 세상에 부유한 사람들을 보건대
어리석어 재산을 얻어도 보시하지 않으니
탐욕스러워 재물을 쌓아두고
점점 더 감각적 쾌락을 열망합니다.
왕은 폭력으로 땅을 정복하고
바다에 이르기까지 전국토를 다스리며,
바다의 이쪽에 만족하지 않고
바다의 저쪽마저도 갖길 원합니다.
왕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갈애를 떨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아
불완전한 채로 몸을 버리니.
세상의 감각적 쾌락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친지들은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죽었다.’라고 울부짖지만
수의로 그를 감싸서 운반하고는
장작더미를 모아 그곳에서 불태웁니다.
재산은 버려지고, 한 벌 수의만 입혀지고
불 꼬챙이에 찔리며 불태워지니
죽어 가는 자에게는 친족도
벗들도 친구들도 피난처가 되지 않습니다.
상속자가 그 재산을 가지고 가고
사람은 그 행위를 따라서 저 세상으로 가니
죽은 자에게 재산이 따라다니지 않으니
처자도 재산도 땅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돈으로 장수를 얻지 못하고
또한 재산으로 노쇠를 면할 수 없네.
인생은 짧고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현자는 말합니다.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죽음과 만나고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도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에 얻어맞아 누웠으나
현명한 자는 죽음과 만나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재산보다 탁월하고
지혜로 궁극적인 목표를 이룹니다.
생에서 생으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모태에 들어 저 세상으로 가니
다른 곳에서 다른 곳으로 윤회합니다.
적은 지혜로써 그것을 신뢰하는 자
모태에 들어 저 세상으로 갑니다.
마치 도둑이 강도에 사로잡혀
악한 행위에 괴로워하듯이
사람들은 죽은 후에 다음 세상에서
악한 행위로 괴로워합니다.
감미롭고 즐거운 다양한 감각적 쾌락이
여러 가지 형색으로 마음을 교란시키니
감각적 쾌락의 묶임에서 재난을 보고
왕이여, 나는 출가를 택했습니다.
마치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청년이건 노인이건, 몸이 부수어지면 떨어지니
왕이여, 이것을 보고 출가했습니다.
진실한 수행자의 길이 보다 탁월합니다.
(랏타빨라경-Raṭṭhapālasuttaṃ, 맛지마니까야 M82, 전재성님역)
이것이 부처님제자의 출가이유이다. 출가이유가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괴로움을 그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윤회를 종식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최고의 유산
출가자가 다시 세속으로 돌아 간다는 것은 윤회의 감옥에 스스로 갇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아내와 자식을 두는 것은 쇠붙이로 만든 족쇄 보다 더 강력하여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족쇄와 같다. 따라서 세속(lokaṃ)으로 돌아 간다는 것은 스스로 윤회의 감옥에 갇히는 것과 같고, 스스로 족쇄에 얽매이며 살아가는 것과 같다.
이를 잘 알기에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mā lokaṃ punarāgami)”라고 하였다. 이는 “다시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라”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라훌라를 출가시키는 것이야말로 라훌라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으로 생각하였다고 본다.
부디스트송 ‘Reason Behind Your Birth’
음성: Reason Behind Your Birth 诞生背后的原因
Reason Behind Your Birth
Theres a reason behind your birth
Its not by chance youre here on earth
Who you are is how you have been
The law of karma tirelessly spins
Natures law is perfect and just
With a cause the effect is cast
Though in life no one escapes pain
This sad human state, need not always remain
Break free from this cycle that binds
Leave your earthly selfish concerns behind.
Be a Buddha in your thoughts, deeds, and ways
And surely, youll be in pure land one day
Look inside your heart, and you will find
A nature that is pure and kind
Let your heart be noble and true
Let your mind be calm and stable, too
Break free from this cycle that binds
Leave your earthly selfish concerns behind
Be a Buddha in your thoughts, deeds, and ways
And surely, youll be in pure land one day
이 윤회의 속박에서 해방 되어라
당신이 태어난 이유가 있다.
당신이 여기에 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신의 전생이 여기에 있게 만들었다.
까르마의 법칙은 이렇게 끊임없이 돌고 돌게 만든다.
자연의 법칙은 완전한 것이다.
원인으로 결과를 낳아서
어느 누구도 이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탈출 할 수 없다.
불쌍한 존재는 끊임 없이 윤회계를 돌고 돌 뿐이다.
당신를 속박하고 있는 이 윤회의 사이클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당신의 내면에 있는 이기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라!
당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붓다가 간 그 길로 향해 가라!
그렇게 하면 당신은 언젠가 확실히 피안으로 가게 될 것이다.
당신의 내면을 주시하라 그리고 발견하라!
자연은 순수하고 매우 친절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가슴을 고귀하고 정직하게 만들어라!
또한 당신의 마음을 평온하고 안정되게 만들어라!
이 윤회의 속박에서 해방 되어라!
당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이기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라!
당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붓다가 간 그 길로 향해 가라!
그렇게 가면 당신은 언젠가 확실히 피안으로 가게 될 것이다.
(진흙속의연꽃 번역)
2012-10-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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