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바위도 고통을 느낄까? 일체개고와 아라한의 깨달음

담마다사 이병욱 2012. 9. 8. 00:25

 

바위도 고통을 느낄까?  일체개고와 아라한의 깨달음

 

 

 

바위도 고통을 느낄까? 일체개고라 하였는데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일체가 고통을 느껴야 할 것이다. 책상도, 컴퓨터도 심지어 이런 생각을 하는 의식까지 괴로워야 할 것이다.

 

일체개고는 빠알리어로 삽베 상카라 둑카(Sabbe sakhārā dukkhā)’라 한다. 문자 그대로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청정에 이를 수 있다고 법구경(Dhp278)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셨다.

 

고성제를 보면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는 것을 알려면 먼저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고성제를 보면 괴로움의 종류는 다음과 같이 8가지가 있다.

 

 

태어남(jāti),

늙음(jarā),

죽음(maraa),

슬픔(soka),

비탄(parideva),

육체적인 고통(dukkha),

정신적인 고통(domanassa),

절망(upāyāsa),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appiyasampayoga),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piyavippayoga),

⑪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icchitālābha),

⑫ 집착하는 무더기(upādāna-kkhandha).

 

 

이와 같은 괴로움은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성질로 구분된다.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

삶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

아무리 큰 행복일지라도 결국은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행고성(行苦性, sakhāra-dukkhatā):

본질적으로 오온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나’, ‘나의 것’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과 같은 세 가지 분류방식은 경전적 근거가 있는 것일까.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의 경전적 근거

 

논장이나 주석에서 쓰여 지고 있는 용어는 어느 것 하나 경전적 근거를 가지지 않는 것이 없다. 모두 경전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위 세 가지 분류 방식 역시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Tisso imā bhikkhave, dukkhatā. Katamā tisso: dukkhadukkhatā sakhāradukkhatā vipariāmadukkhatā. Imā kho bhikkhave, tisso dukkhatā. Imāsa kho bhikkhave tissanna dukkhatāna abhiññāya ariyo aṭṭhagiko maggo bhāvetabbo.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가지 괴로움이 있다. 어떠한 것이 세가지인가? 고통의 괴로움, 형성의 괴로움, 변화의 괴로움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것이 세가지 괴로움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가지 괴로움을 잘 알고 두루 알고 소멸시키고 버리기 위해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을 닦아야 한다.

 

(둑카따숫따니-Dukkhatāsuttāni- Unpleasant States- 괴로움, 상윳따니까야 S44.15.65-80, 전재성님역)

 

둑카따숫따니(괴로움-S44.15.65).docx

 

 

 

부처님은 세 가지 괴로움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것은 둑카둑카따 (dukkhadukkhatā, 고통의 괴로움), 상카라둑카따 (sakhāradukkhatā, 형성의 괴로움), 위빠리나마둑카따(vipariāmadukkhatā, 변화의 괴로움)이다.

 

삽베 상카라 둑카(Sabbe sakhārā dukkhā, 일체개고)’인가

 

중요한 것은 이 세가지 괴로움을 잘 아는 것이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팔정도를 닦아야 한다고 말씀 하신다. 이와 같은 문구는 기본적으로 법구경 278번 게송과 똑 같은 내용이라 볼 수 있다.

 

 

Sabbe sakhārā dukkhā ti,    “삽베 상카라 둑카” 띠

~ yadā paññāya passati,          야다 빤냐야 빳사띠                 

Atha nibbindati dukkhe ~         아타 닙빈다띠 둑케

- esa maggo visuddhiyā.          에사 막고 위숫디야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법구경, Dhp278, 전재성님역)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초기경전은 종횡으로 통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 주는 것 같다.

 

불교 술어 가운데 번역하기 가장 힘들고 난해한 용어

 

이렇게 부처님은 고고, 괴고, 행고 세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이중 행고가 가장 이해 하기 어렵다. 그런 행고는 어떤 것일까. 먼저 행에 대하여 알아 보면 다음과 같다.

 

전재성 박사의 법구경 해제에 따르면 행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쌍카라는 한역에서 행()이라 하는 것인데, 그것은 불교 술어 가운데 번역하기 가장 힘들고 난해한 용어이다. 이 용어에 대한 현대적 번역에는 결정, 구성, 결합, 형성, 의도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 형성이다.

 

(법구경 해제, 전재성님)

 

 

빠알리 상카라(sakhārā)는 번역하기 매우 힘든 용어라 한다. 여러가지 뜻이 있지만 전재성 박사는 형성으로  번역 하였다. 초불연의 경우 상카라들이라 하여 상카라에 복수의 의미를 뜻하는 우리말 을 붙여 상카라들이라 번역하였다. 아마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여 선택한 용어라 보여진다.

 

상카라의 중요한 의미 세 가지

 

그런 상카라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전재성박사는 법구경 해제에서 모두 7가지를 설명하고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세 가지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상카라(형성)의 의미

설명

경전적 근거

(Kamma)의 동의어

십이연기에서 형성은 무지나 갈애와 관련하여 윤회를 지속시키는 능동적이고 의도적인 형성이다.

상윳따니까야 S12:2

여섯가지 감각대상에 대한 의도

착하고 건전하고나 악하고 불건전한 다양한 모든 정신적인 요소들이 모두 형성에 속한다.

상윳따니까야 S22:56

모든 조건 지어진 것

제행무상과 일체개고의 제행과 일체는 바로 이 형성을 말하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S22:90

 

 

상카라는 크게 업, 의도, 모든 조건 지어진 것 이렇게 세 가지 뜻이 있다. 이에 대한 경전적 근거를 찾아 보았다.

 

(Kamma)’으로서 상카라

 

먼저 업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e ca bhikkhave sakhārā? Tayome bhikkhave, sakhārā: kāyasakhāro vacīsakhāro cittasakhāro. Ime vuccanti bhikkhave, sakhārā.

 

또한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형성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그것들 가운데는 세 가지 형성, 즉 신체의 형성, 언어의 형성, 정신의 형성이 있으니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형성이라고 부른다.

 

(위방가경-Vibhagasutta- Explanation- 분별경, 상윳따니까야 S12.1.2, 전재성님역)

 

  위방가경(분별경-연기-S12.1.2).docx

 

 

 

부처님은 상카라 (sakhārā, , 형성)에 대하여 신업, 구업, 의업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이로 보았을 때 상카라는 업(Kamma)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행을 뜻한다. 전생에서부터 정신에 남아 있다가 현세에서 작용하며 내세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업력(業力)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윤회를 거치면서 잠재되어 있는 형성이 적절한 조건과 만나면 다시 등장하게 된다고 주석에서 설명하고 있다.

 

 의도로서의 상카라

 

상카라가 의도로 쓰일 때는 다음과 같다.

 

 

Chayime bhikkhave, cetanākāyā: rūpasañcetanā saddasañcetanā gandhasañcetanā rasasañcetanā phoṭṭhabbasañcetanā dhammasañcetanā, ime vuccanti bhikkhave, sakhārā.

 

수행승들이여, 형성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들 가운데는 여섯가지 의도의 무리, 즉 형상에 대한 의도, 소리에 대한 의도, 냄새에 대한 의도, 맛에 대한 의도, 감촉에 대한 의도, 사물에 대한 의도가 있으니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형성이라고 부른다.

 

(우빠다나 빠리왓따경-Upādāna parivatta sutta- Holding and Turning in a Circle-집착된 것의 계열, 상윳따니까야 S21.2.1.4, 전재성님역)

 

  우빠다나 빠리왓따경(집착된 것의 계열-S21.2.1.4).docx

 

 

 

오온에서의 행을 말한다. 이때의 상카라는 의도라 한다. 오온에서 수와 상을 포함하여 52가지 정신적 요소(마음부수, 심소)를 상카라로 볼 수 있다. 

 

모든 조건 지어진 것으로서의 상카라

 

상카라가 모든 조건 지어진 것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rūpa kho āvuso channa, anicca, vedanā aniccā, saññā aniccā, sakhārā aniccā, viññāa anicca, rūpa anantā, vedanā anattā, saññā anattā, sakhārā anattā, viññāa anattā, sabbe sakhārā aniccā, sabbe dhammā anattā

 

[장로들]

"벗이여, 찬나여,

물질도 무상하고 감수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고 형성도 무상하고 의식도 무상하다. 물질도 실체가 없고 감수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물은 무상하다."

 

(찬나경-Channa sutta-Venerable Channa- 찬나, 상윳따니까야 S21.2.4.8, 전재성님역)

 

  찬나경(S21.2.4.8).docx

 

 

 

찬나는 부처님의 마부 이었다. 부처님이 성문을 나설 때 함께 하였는데 무례하고 악의적인 인물로 묘사 되고 있다. 이 경은 부처님이 열반에 들고 난 후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에 수행승들이 찬나와 이야기 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성자의 흐름에 들지 못한 찬나가 장로들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장로들이 답변한 내용에 따르면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물은 무상하다. (sakhārā aniccā, sabbe dhammā anattā)라고 말한다. 이는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이 상카라라는 말이다. 이때의 상카라는 우주 전체가 조건지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왜 찬나에게 일체개고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경의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 장로들이 찬나에게 시설한 가르침에 대한 설명:

'모든 수행승들이 그를 가르치면서 왜 무상의 특징과 무아의 특징만을 말하고 괴로움의 특징은 말하지 않았다. ? 왜냐하면 괴로움의 특징이 시설되면 이와 같이 이 수행승은 물질도 괴롭고 의식도 괴롭고 도()도 괴롭고 과위(果位)도 괴롭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고 붓다고싸는 설명한다.

 

(찬나경 주석)

 

 

경에서 장로들은 찬나에게 무상과 무아의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였지만 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찬나가 오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체개고라고 알려 주었을 때 마치 바위도 괴로움을 느낀다라는 식으로 오해 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장로들은 왜 찬나에게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지만 일체개고에 대해서는 침묵한 것일까. 그것은 찬나가 행고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고(行苦)는 오온(五蘊) 또는 오취온(五取蘊)이다

 

고고, 괴고, 행고와 관련하여 인터넷검색결과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들 수 있었다.

 

 

 

  

설 명

사성제의 괴로움

고고

고고(苦苦)는 누구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인 생로병사의 고통을 말한다. 생로병사 중 특히 생과 사는 아직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며, 깨달음을 성취할 때까지는 배움을 위해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 태어나는 고통

-(): 늙는 고통

-(): 병드는 고통

-(): 죽는 고통

 

괴고

괴고(壞苦)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무너지는 고통"인데, 모든 것이 인과 연에 의해 발생한다는 연기의 법칙 즉 인과의 법칙과 모든 존재가 고정됨이 없이 항상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법칙에 바탕하여 일어나는 "변화하고 무너지는 고통"이다.

-애별리(愛別離):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

-원증회(怨憎會):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구부득(求不得):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하는 고통

행고

 

행고(行苦)는 오온(五蘊) 또는 오취온(五取蘊)으로 이루어진 존재인 인간 자신에 대하여 ""라고 할 수 있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에 의해 비롯되는 고통으로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도 한다.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

 

출처: 사성제, 위키피디아

 

 

 

위 표에서 주목 되는 것은 행고이다. 행고에 대하여 오취온고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오취온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불자들은 오온에 대하여 잘 모른다. 더구나 오취온 이야기가 나오면 매우 어렵게 생각한다. 그런 오취온은 무엇일까.

 

맛지마 니까야에 오취온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담마딘다]

“벗이여 비싸카여, 그 집착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동일한 것도 아니며,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는 별도로 집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벗이여 비싸카여,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을 지니면,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이 바로 그 집착(*)입니다.

 

(쭐라웨달라경, Culavedallasutta, 교리문답의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44, 전재성박사역)

 

쭐라웨달라경(교리문답의 작은 경-M44).docx

 

 

 

여기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은 오취온을 말한다. 오취온과 집착에 대한 설명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집착은 욕망처럼 형성의 다발의 한 부분이므로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집착은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과 분리된 것도 아니다.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과 분리된 집착은 없기 때문이다.

 

(전재성박사, 쭐라웨달라경-M44, upadana주석에서)

 

 

집착(우빠다나)은 오취온(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 한다. 오온에 집착이 들러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 집착은 다름 아닌 오온에 대하여 내것,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취온은 언제 없어지는가

 

그렇다면 이런 집착은 언제 없어지는 것일까.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주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리고 고성제의 핵심은 오취온(五取蘊)의 괴로움이다. 오온을 나, 나의 것으로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중생계의 모든 물질과 정신은 반드시 집착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욕계든 색계든 무색계든 존재하는 모든 것(오온=오취온=일체유위법)은 반드시 집착을 야기하고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을 바로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세한 집착은 아나함과<不還果>에 이르기까지 남아있으며 그래서 아나함과를 증득한 사람들은 정거천(淨居天)이라는 색계천(色界天)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오취온의 괴로움은 아라한이 되어서야 궁극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주석)

 

 

주석에 따르면 오온에 대한 집착 즉, 오취온은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진다고 한다. 모든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 이전 까지 오온과 오취온은 사실상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정각원 법회에서

 

그렇다면 행고와 관련된 아라한은 어떤 상태일까. 정각원 법회에서 전재성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라한이라고 하면 완전한 해탈을 이룬 사람입니다. 저는 거룩한 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아라한은 어떻게 해서 도달하느냐. 일체를 괴롭다고 볼 때만 도달합니다.

 

괴로움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둑카둑카라 하는데, 괴롭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아플 때 입니다. 한역으로 고고라 합니다.

 

그 다음에 괴고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위빠리나마둑카라 하는데, 변화에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가을에 낙엽이 지면 왠지 쓸쓸 하고 , 겨울에 추위가 닥치는 등 변화에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동물적인 차원에서는 아파서 느끼는 괴로움 밖에 못 느낍니다. 변화에서 오는 괴로움은 조금 단계가 높은 괴로움입니다. 사람만이 느끼는 것 입니다.

 

그 다음에 조금 더 높은 단계에서 느끼는 괴로움을 행고라 합니다. 상카라둑카라 하는데 일체 조건 지어진 것은 모두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전부가 조건 지어졌습니다. 이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기도 바람도 물도 지수화풍 전부가 조건이 충족이 되면 생겨 났다가 사라집니다. 태풍도 우주도 생겨 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일체가 괴롭다고 하는 것은 우주 전체가 괴롭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철저히 느꼈을 때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을 때 만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전재성박사, 정각원 토요법회 2012년 3월 24, mms://mms.dubscast.com/dubsmms4/2012_1st/Special/jkw/jkw_0324.wmv [52])

 

 

 

 

박사

 

 

 

전재성박사의 법문에 따르면 고고성은 동물적 차원에서 느끼는 괴로움이고, 괴고성은 사람들이 느끼는 괴로움이라 한다. 그런데 행고성을 느끼는 것은 아라한이라 한다. 아라한이 되어야 행고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체개고라 하였을 때 우주전체가 괴로운 것인데, 이는 괴로움을 철처히 뼈에 사무치도록 느낀 아라한 이외에는 느낄 수 없는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왜 찬나에게 일체개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고 본다.

 

둑카의 어원

 

우주적 괴로움을 느낀다는 행고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먼저 둑카의 어원에 대한 것이다. 전재성박사의 논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괴로움을 알면 열반을 본다고 하셨다. 이 괴로움이라는 말에 대해서 나는 지금까지의 여러 불교학자들과 달리 새로운 해석과 정의를 내렸는데 산스크리트에서는 괴로움을 두카(duh+kha)라고 한다. 인도에서는 두 가지 이상의 말이 합쳐질 때는 여러 가지의 해석방법이 있는데 그것을 육합석이라고 한다.

 

두카의 카는 영어의 car와 같은 뜻으로 자동차인데 여기서 두와 카가 합쳐졌는데 카의 본래 뜻은 태양에서 나오는 빛살을 말하는 것으로 수레바퀴와 비슷하다.

 

태양이라는 것은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태양은 우주의 중심이고 우리의 내부에도 영원한 태양이 있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번뇌가 없는 영원한 태양이 우리의 몸속에 숨어 있는데 바고 그 영원한 태양을 발견하게 되면 바로 이 실제의 태양보다도 위대한 진리를 체득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양이라는 것은 고대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불교도 서양에서 처음 이해될때는 태양신화적인 철학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할 때 도가철학이나 불교에서의차크라가 단저에 있기도 하고 척추에 있다고도 하는데 이것을 발견하게 되면 결국 해탈의 길로 가게 된다.

 

이 차크라는 태양의 빛살이 퍼져나가는 상태로 이것을 수레바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법륜이라고 하는 것은 수레바퀴를 말하며 가르침의 수레바퀴라고 하고 태양의 수레바퀴라고도 한다.

 

태양의 바퀴는 빛이요, 진리이다. 그래서 이 두(dhu)라는 말은 나쁘다, 좋지 않다, 어렵다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으며, (kha)라는 말은 바퀴살을 말하는데 전차의 수레바퀴가 좋지 않으면 거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흔들리고 불안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이 두카라는 말은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불안이라든가 불안정의 뜻이라 하겠다.

 

우리가 심리적인 괴로움은 우주가 붕괴되고 있고 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실제의 사태하고 자기 내부에서 느끼는 괴로움과 심리적인 문제, 형이상학적인 문제, 실존적인 문제와 종합되어 표현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가 있다.

(전재성박사, 불교사상과 환경문제)

 

  불교사상과 환경문제.docx

 

 

 

둑카의 어원과 행고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우주가 붕괴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를 이어지는 글에서 엔트로피법칙과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엔트로피 법칙과 행고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우주는 종말을 맞을 수 밖에 없다. 향수병을 예로 든다면 뚜껑을 열면 다 날아 가 버리듯이 우주 또한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동하기 때문에 결국 종말을 맞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우주의 종말과 생성은 큰 주기로도 반복 되지만 매 찰나에도 물질과 정신현상이 찰나생, 찰나멸한다는 것이다. 찰나의 생성소멸이 연기적 관계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혼란도 즉, 질서에서 무질서로 증가되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둑카와 엔트로피의 증대와 관련하여 전재성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카라는 말은 결국은 혼란도라는 말과 같다. 우주는 혼돈의 상태이고 괴로움의 상태이다. 여기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자각하지 않고서는 이 괴로움을 극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혼란이나 괴로움이라는 것은 물질적, 정신적인 것을 철저히 파악할 때만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을 인식하는 자만이 열반을 볼 수 있다.

 

(전재성박사, 불교사상과 환경문제)

 

 

물질과 정신을 철저하게 파악하여 번뇌에서 해방된 자가 아라한이다. 깨달은 자만이 우주적 괴로움 즉, 행고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행고는 어떤 느낌일까

 

이와 같은 행고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고고처럼 육체적으로 고통스런 것일까, 괴고처럼 불만족 스러운 것일까. 행고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행으로 인한 괴로움(行苦)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각대상들을 보고, 듣고, 접촉하는 일상의 모든 현상은, 즐거운 느낌이나 행복한 느낌도, 괴롭거나 불쾌한 느낌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고통스럽지도 즐겁지도 않는 것을 특성으로 하고 있는, 중립적이고 중도적인 상태를 덤덤한 느낌(upekkhā-vedan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중립적인 평온은 영원히 지속하지 않습니다. 이 중도적인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필요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물론 괴롭게도 힘겨운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이 덤덤한 느낌을, 행으로 인한 괴로움(行苦 sakhāra-dukkha)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덤덤한 느낌 외에도, 세간의 정신과 물질로 형성된 모든 것들 또한 끊임없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행으로 인한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행고는 괴롭지도 불쾌하지도 않는 느낌이라 한다. 중립적이고 덤덤한 상태라 한다. 그런 상태를 우뻬카웨다나(upekkhā-vedanā)’라 한다.

 

맛지마니까야 주석서에서는

 

이와 같이 중립적인 느낌인 행고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행고성(sakhāra-dukkhata)은 행(行)이 있기 때문에 괴로운 상태다. 이것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이름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형성되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생겨남, 늙음, 변함에 의해서 짓눌렸기 때문에 행고성이라고 한다.

 

(맛지마니까야 주석 DA.III992,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형성된 모든 것들은 형성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드시 소멸 되어야 한다. 도자기는 언젠가 깨지게 되어 있고, 담장은 마치 무너지기 위해서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직장인이 현재 잘 나간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퇴출로서 끝이 나고, 끝없이 성장할 것 같은 회사 또한 부도로서 끝이 나듯이 형성된 모든 것은 조건이 성숙되면 사라지고 말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조건 지워져 무상하게 변하기 때문에

 

도자기, 담장, 직장인, 기업이 나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어느 방식으로든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행고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행고성은 우주 만물, 즉 모든 창조되는 것 또는 모든 조건 지어지는 것, 연기되는 것 말하자면 어떤 상관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이 괴롭다는 뜻으로 행고성이라 한다.

 

불교에서 볼 때 모든 것이 단독으로 만들어진 것이 없으며, 여러 가지 다양한 조건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여기서 환경에 대하여 논하게 된것도 여러 가지 다양한 조건들이 잘 적절하게 조화가 되어서 이렇게 참여를 했고 나 또한 한 시간전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다양한 조건들이 갖추어지고 결국에는 세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불교의 아비달마의 이론에는 이런 것이 있다. 어떤 사물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능작인(能作因)이라는 것이 하나 있는데 이 능작인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지금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데 저 남극의 바다에 있는 고래나 상어와 나는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볼 때 능작인이란 적어도 남극의 고래나 상어가 방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있고, 또 내가 그들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도움의 관계에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볼 때 우주의 만물은 서로 조화되어 있고 서로가 도와주는 관계에 있다. , 모든 인과관계 속에는 능작인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데도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은 최소한 그 사물이 성립하기 위해서 방해하지 않는 원인을 제공한다. 방해하지 않는 도움을 준 것이다. 그래서 우주 전체는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어느 것 하나도 서로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조건 지워져 무상하게 변하는 이러한 전체를 부처님은 행고성(行苦性)의 세계라 하여 괴롭다고 설명했다.

 

(전재성박사, 불교사상과 환경문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종족들이 나하고 전혀 관련이 없지만 그들 역시 형성되어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의 마뚜경(Mātusutta , S14.3.2.4)에 따르면 이렇게 오랜 세월을 통해서 일찍이 한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지구 반대편의 어느 종족의 한 사람이 한량 없는 윤회과정에 있어서 언젠가 나를 낳아 준 어머니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과정에서 이 몸을 이룬 지,,,풍 사대는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수 없이 반복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주 저편에 있는 어떤 존재나 물질이 나하고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자애송에서

 

이와 같이 형성된 모든 것들이 나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자애의 마음이 생기기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자애송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한다고 노래 하였다.

 

 

일곱가지 한정적으로 가득 채워

 

Sabbe sattā                      삽베 삿따-

sabbe pāā                       삽베 빠--

sabbe bhūtā                      삽베 부--

sabbe puggalā                    삽베 뿍갈라-

sabbe attabhāva - pariyāpannā    삽베 앗따바-와 빠리야-빤나-

sabbe itthoiyo                   삽베 잇토이요

sabbe purisā                     삽베 뿌리사-

sabbe ariyā                      삽베 아리야-

sabbe anariyā                    삽베 아나리야-

sabbe devā                       삽베 데와-

sabbe mānussā                    삽베 마-눗사-

sabbe vinipātikā                 삽베 위니빠-띠까-

averā hontu                      아웨라 혼뚜

abyāpajjhā hontu                 아뱌-빳자- 혼뚜

anīghā hontu                     아니-- 혼뚜

sukhī - attānam pariharantu      수키- 앗따-남 빠리하란뚜

Dukkha muccantu                  둑카 뭇짠뚜

Yattha-laddha-sampattito māvigacchantu 얏타 랏다 삼빠띳또 마-위갓짠뚜

 

모든 유정중생들

모든 숨쉬는 것

모든 생명체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

‘나’라고 말하는 모든 것들

모든 암컷

모든 수컷

모든 성인

모든 범부

모든 신

모든 악처 중생들이

증오를 여의어지이다.

성냄을 여의어지이다.

격정을 여의어지이다.

그들이 행복하게 지내게 하여지이다!

고통에서 벗어나지이다!

이미 성취한 것을 잃지 않게 하여지이다!

 

 

자애송(자비송-The chant of metta).docx

  

 

 

 

巴利文

 

 

이와 같은 자애는 까라니야멧따경(자애경, Sn1.8)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라는 문구에 근거한다.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할까. 경에 따르면 마따 야타 니양 뿟땅 아유사 에까뿟당 아누락케(Mātā yathā niya putta āyusā ekaputtam anurakkhe)”라 하였다.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자애의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일체가 괴롭다고 지혜로 보면

 

이렇게 조건 지워져 무상하게 무심하게 변하는 것을 행고성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변화에 따른 괴로움이라는 것은 세계를 향하여 열리는 순간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어야 비로소 무상함을 느끼고 만물이 서로 연관지어져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지혜로 보았을 때 부처님이 말씀하신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즉, 고성제를 알 수 있어서 해탈하여 열반에 이를 것이라 한다. 그래서 법구경 278번 게송 일체개고가 나왔을 것이다.

 

 

Sabbe sakhārā dukkhā ti,    “삽베 상카라 둑카” 띠

~ yadā paññāya passati,          야다 빤냐야 빳사띠                 

Atha nibbindati dukkhe ~         아타 닙빈다띠 둑케

- esa maggo visuddhiyā.          에사 막고 위숫디야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법구경, Dhp278, 전재성님역)

 

 

 

2012-09-07

진흙속의연꽃

둑카따숫따니(괴로움-S44.15.65).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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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상과 환경문제.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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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빠다나 빠리왓따경(집착된 것의 계열-S21.2.1.4).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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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나경(S21.2.4.8).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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쭐라웨달라경(교리문답의 작은 경-M44).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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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방가경(분별경-연기-S12.1.2).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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