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하루일과
상윳따니까야 1편과 2편
어느 토론회에 참석 하였다. 스님들이 묻고 답하는 열띤 토론이었는데, 어느 스님이 “범천과 제석천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믿습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초기불교를 연구하고 있는 스님은 “경에 있기 때문에 믿고 있고 부처나 아라한의 경지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상윳따니까야 1편과 2편은 하늘사람(Devatā) 과 하늘아들(Devaputta) 에 대한 것이다. 주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로 “그때 어떤 하늘사람이 깊은 밤중에 아름다운 빛으로 제따바나를 두루 밝히며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렇게 상윳따니까야에서 1편과 2편은 하늘사람들과 부처님이 한 밤중에 시로서 대화를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또 이 두편의 상윳따는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이 매우 많아서 테와다불교 전통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고 한다.
부처님의 일과
그렇다면 부처님이 이처럼 하늘사람들과 깊은 밤중에 대화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깊은 밤중은 몇시쯤 되는 것일까. 전재성박사의 해제에 따르면 부처님의 일과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해제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오전 6시에서 12시까지는 하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뭇삶을 도와주고 탁발하고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였다.
그리고 12시에서 오후 6시까지는 대자비삼매(大慈非三昧:mahākaruṇā samā-patti)에 들어 수행승이나 뭇삶들의 괴로움을 살피고 그들을 돕거나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오후의 수면에 들기도 하고 일반사람들을 제도하거나 신도들에게 가르침을 설했다.
초저녁인 오후 6시에서 밤 10시까지는 수행승들이 방문하면 친견을 허락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밤중인 밤 10시에서 새벽 2시까지는 하늘사람이나 악마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제도했다.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에 경행(經行)을 하였으며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는 마음새김을 하며 취침했다.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에는 열반에 들어 아라한의 경지에 들었다. 그리고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에는 대자비삼매에 들어 뭇삶들의 괴로움을 살펴보았다.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전재성박사)
부처님의 일과를 보면 일정이 매우 타이트함을 알 수 있다. 마치 주요 요직에 있는 사람들의 일과 못지 않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
이와 같은 부처님의 일과를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과 |
내 용 |
시간 |
비 고 |
오전 6시에서 12시 |
-하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뭇삶을 도와줌 -탁발함 -대중들에게 설법함 |
6 |
하루 한끼 식사함 |
12시에서 오후 6시 |
대자비삼매에 들어 수행승이나 뭇삶들의 괴로움을 살피고 도와줌 - 오후의 수면에 들기도 함 -일반사람들을 제도하거나 신도들에게 가르침을 설함 |
6 |
|
오후 6시에서 밤 10시 |
수행승들이 방문하면 친견을 허락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눔 |
4 |
|
밤 10시에서 새벽 2시 |
하늘사람이나 악마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제도함 |
4 |
상윳따니까야 1편과 2편 |
새벽 2시에서 3시 |
경행(經行)을 함 |
1 |
|
새벽 3시에서 4시 |
마음새김을 하며 취침 |
1 |
한시간 수면 |
새벽 4시에서 5시 |
열반에 들어 아라한의 경지에 들어감 |
1 |
|
새벽 5시에서 6시 |
대자비삼매에 들어 뭇삶들의 괴로움을 살펴봄 |
1 |
|
부처님도 우리와 같이 하루 24시간을 먹고 자고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일정이 우리와 다른 것은 잠을 그다지 많이 자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식수면시간은 고작 한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 중생(뭇삶)제도에 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일정중에 특이한 것이 밤10시에서 새벽2시 사이인 4시간이다. 이때 부처님은 하늘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제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상윳따니까야 1편과 2편에 실려 있는 게송이 바로 부처님과 하늘사람들과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The Realm of the Thirty-Three (Tavatimsa) is an advanced world in space.
“혹시 제석천이나 범천을 보신 분이 있으면 저에게 문자 보내 주세요”
이와 같은 부처님의 하루 일정으로 본다면 하늘사람이나 하늘하들 등 인간이외의 존재들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천신을 비롯한 삼계의 모든 존재들은 교화의 대상이다.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가 남아 있어서 삼계를 윤회할 수 밖에 없는 뭇삶(중생)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들과 대화를 통하여 인간과 똑같이 제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초기경전에는 천신, 범천, 제석천, 악마 등 각종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들 존재가 단지 부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문헌상에만 존재하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우리 눈과 귀등 오감으로 느끼지 못한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이들 존재들과 대화를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저녁 10시부터 새벽 2 시까지 4시간 동안이다. 이런 사실이 1편과 2편에 시로서 기록 되어 있고, 수 많은 경에서 화자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불신하는 불교인들이 매우 많은 것 같다. 세미나에서도 천신등 인간 이외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 하는 어느 스님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혹시 제석천이나 범천을 보신 분이 있으면 저에게 문자 보내 주세요.”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하늘사람(Devatā) 과 하늘아들(Devaputta)
상윳따니까야 1편과 2편은 하늘사람과 하늘아들에 대한 것이다. 사람이 아닌 하늘사람을 등장시켜 부처님과 대화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하늘사람과 하늘아들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하늘아들은 하늘사람의 품에서 화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하늘사람은 대부분 익명이지만 하늘아들은 언제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 다르다. 이렇게 하늘사람과 하늘아들이 다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어른과 청년을 구별 할 수 없듯이 내용 역시 쉽게 구별이 안된다는 것이다. 다만 1편 데와따상윳따(하늘사람상윳따)에서는 광범위한 주제의 스펙트럼을 보여 주고 있고, 2편인 데와뿟따상윳따(하늘아들상윳따)에서는 수행과 관련된 모음이라는 것이 차이이다.
케마(Khema)경에서
주로 수행과 관련된 게송의 모음으로 되어 있는 2편 데와뿟따상윳따에 다음과 같이 아름다은 게송이 있다.
하늘아들 케마도 한 쪽에 서서 세존께 시를 읊었다.
[케마]
"어리석어 지혜가 없는 사람은
자신을 적으로 만들며
쓰디쓴 열매를 가져오는
사악한 행위를 지어가네.
지은 행위가 착하지 않으면
지은 뒤에 후회하고
슬픈 얼굴로 울면서
그 열매를 거두리.
지은 행위가 착하면
지은 뒤 후회스럽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즐거워하면서
그 열매를 거두리."
[세존]
"슬기롭고 지혜로운 님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알아서
어리석은 마부를 본받지 않고
올바로 실천하고 정진하네.
.
참으로 어리석은 마부는
평탄한 큰길을 벗어나
평탄하지 않은 길을 가다가
차축을 망가뜨려 걱정하네.
어리석은 자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가르침 아닌 것을 따르니
죽음의 문턱에 떨어지네.
차축을 망가뜨려 걱정하듯이."
(케마경-Khemasuttaṃ, 상윳따니까야 S2:23(3-2), 전재성님역)
초기경전에 케마(Khema)라는 이름은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하늘아들로서 케마는 이경에서만 나온다.
법구경과 중복 되는 게송
위 게송에서 케마가 읊은 세 개의 시는 법구경에서도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을 적으로 삼아 방황한다.
악한 행위를 일삼으며
고통의 열매를 거둔다.
행한 뒤에 후회하고
얼굴에 눈물 흘리며 비탄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
행한 뒤에 후회하지 않고
만족스럽고 유쾌한
결과를 초래하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이 좋다.
(법구경, Dhp66-68, 전재성님역)
법구경 ‘어리석은 자의 품’에 있는 게송이다. 게송을 보면 상윳따니까에 실려 있는 내용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상윳따니까야 1편과 2편이 법구경 보다 더 고층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고층으로 보는 이유는 도입부에서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Evaṃ me sutaṃ)”라는 문구가 없이 곧바로 대화체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비교표를 작성해 보면
상윳따니까야의 ‘케마경’과 법구경 ‘어리석은 자의 품’에서 유사한 게송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상윳따니까야 케마경(S2:23) |
법구경 어리석은자의 품(Dhp66-68) | ||
Caranti bālā dummedhā amitteneva attanā, |
어리석어 지혜가 없는 사람은 자신을 적으로 만들며 쓰디쓴 열매를 가져오는 사악한 행위를 지어가네. |
Caranti bālā dummedhā ~ amitteneva attanā, kammaṃ ~ yaṃ hoti kaṭukapphalaṃ. |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을 적으로 삼아 방황한다. 악한 행위를 일삼으며 고통의 열매를 거둔다. |
Na taṃ kammaṃ kataṃ sādhu yaṃ katvā anutappati, |
지은 행위가 착하지 않으면 지은 뒤에 후회하고 슬픈 얼굴로 울면서 그 열매를 거두리.
|
Na taṃ kammaṃ kataṃ sādhu ~ yaṃ katvā anutappati, |
행한 뒤에 후회하고 얼굴에 눈물 흘리며 비탄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 |
Tañca kammaṃ kataṃ sādhu yaṃ katvā nānutappati, |
지은 행위가 착하면 지은 뒤 후회스럽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즐거워하면서 그 열매를 거두리. |
Tañ-ca kammaṃ kataṃ sādhu ~ yaṃ katvā nānutappati, |
행한 뒤에 후회하지 않고 만족스럽고 유쾌한 결과를 초래하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이 좋다. |
빠알리어는 동일하고 번역만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은 동일하다.
쓰디쓴 고통의 열매
첫번째 게송에서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을 적으로 만든다 (Caranti bālā dummedhā amitteneva)” 고 하였다. 이는 걸을 때나 서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나, 즉 행주좌와 시에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악한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고통의 열매, 쓰디쓴 열매를 가져 올 것이라 한다.
미래의 비참한 운명으로
두번째 게송에서 “행한 뒤에 후회한다 (Na taṃ kammaṃ kataṃ sādhu yaṃ katvā anutappati)” 는 말이 있다. 이 말뜻은 무엇일까. 사람은 누구나 지나간 과거를 회상해 본다. 그런데 후회스러운 것이라면 지금 비탄스런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안 좋은 것은 미래 역시 안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비탄으로 인하여 미래의 비참한 운명의 상태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에 눈물 흘리며 비탄해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번영과 열반의 성취
세번째 게송에 따르면 항상 만족과 기쁨과 유쾌한 결과를 초래하는 행위를 하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다. 그래서 “행한 뒤에 후회하지 않는다 (yaṃ katvā nānutappati)” 라 하였는데, 이는 번영과 열반의 성취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현세에서 과거를 회상하여 기쁨과 만족과 환희로운 상태라면 미래의 삶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라는 말이다.
붓다고사의 주석
이와 같이 세개의 게송한 법구경 주석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붓다고사가 단 주석이라 한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 케마경에서는 세개의 게송에 대한 주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대신 부처님이 말씀 하신 네번째 게송부터 주석이 있는데 이는 붓다고사가 단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케마경에서 반복적 주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법구경 주석을 단 이가 붓다고사가 틀림 없을 것이라 한다.
마부와 차축 이야기
케마경에서 부처님이 읊은 게송을 보면 마부와 차축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를 마부에 비유 하였다. 요즘말로 하면 운전자와 같다.
몇 해 전 대부도에 간적이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화방조제를 건너면 시화호 옆에 드넓은 개활지가 있다. 그곳은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이나 사륜구동차를 가진 사람들이 노는 장소이다. 그래서 길이 거칠다.
그런 곳을 멋도 모르고 승용차로 들어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길이 아닌 거친 길로 들어 가는 바람에 바퀴가 웅덩이 빠졌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어서 꼼싹달싹 할 수 없었다. 마침 지나가던 일단의 사륜구동 지프차 무리들이 있었다. 난감해 하는 장면을 본 어느 지프차 운전자가 도움을 주었다. 지프차에 로프를 걸어서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마부가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 섰을 때 바퀴가 빠지거나 바퀴축이 망가지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럴 경우 후회하고 걱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길 아닌 곳으로 가는 자들에 대하여 부처님은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이라 하였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죽음의 문턱에 떨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어떻게 될까. 죽음의 문턱에 떨어지지 않고 죽지 않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초기경에 따르면 열반을 ‘불사(不死, Atama)’로 묘사하고 있다.
“경에 있기 때문에 믿는다”
여러 개의 길이 있다. 그 중에 어떤 길이 바른 길일까. 범부들은 좀처럼 알 수 없다. 그래서 앞서간 사람들을 따라 가보지만 그 사람들 역시 제대로 길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길을 잃고 헤매이기 쉽다. 자동차를 가지고 갔다면 바퀴가 빠지고 망가져서 오도가도 못할 수 있다. 그럴 경우 길이 아닌 길로 갈 것이 아니라 바른 길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런 바른 길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하늘사람, 하늘아들, 범천, 마라 등이 등장하는 장면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등장하는 경에 대하여 갖가지 이유를 들어 회의적 시각으로 본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틀림없음을 믿는 사람들은 회의적 의심을 하지 않는다. 부처님이 “이것이 고통이다”라고 하였을 때 이에 대하여 “그것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라고 할 수 없고, “이것이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하였을 때 역시 “그런 길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라고 말 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틀림 없는 것이라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경에서 비록 천신등이 등장하지만 전혀 게의치 않는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른 길임을 아는 이들에게 있어서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내용을 의심없이 받아 들인다. 그래서 초기불교를 연구하는 스님이 범천이나 제석천이 등장하는 것에 대하여 “경에 있기 때문에 믿고 있고, 부처나 아라한의 경지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201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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