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태국계맥의 전수, 쾌거인가 헤프닝인가
조계사의 국화국꽃 구경을 마치고 세미나를 듣기 위하여 조계종 총무원 청사내에 있는 국제회의장으로 향했다. 오후에 이루어질 세미나는 모두 세 개인데 월호스님의 ‘선불교’, 각묵스님의 ‘초기불교’, 금강스님의 ‘참여불교’에 대한 것이다. 발제에 대한 세미나가 끝나면 한 시간 동안 종합토론 방식으로 진행 되게 되어 있다.
세 개의 세미나 중에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각묵스님이 발제한 ‘초기불교의 눈으로 본 통합종단 50년 소고’이다. 이는 격렬한 논쟁을 야기할 만한 내용이 포함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불교에서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는 ‘태국계맥’에 대한 것이다.
‘태국계맥’에 대한 기사
세미나가 시작 되기 이전인 불교신문 10월 16일자 기사에서는 본 세미나와 관련된 예고 기사를 내 보냈다. 기사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계율은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았을까 초기불교의 영향을 받았을까. 조계종 교육원(원장 현응스님)이 조계종단 출범 50주년을 맞아 10월19일 오전10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하는 ‘이 시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말하다’ 교수아사리 세미나에서 상반된 의견이 나와 눈길을 끈다.
‘초기불교의 눈으로 이 시대 한국불교를 말하다’는 주제로 발제를 맡은 각묵스님은 미리 발표한 논문에서 “조계종단이 초기불교를 존중하고 초기불교를 통해 통합종단의 청정성과 정통성을 회복하려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스님은 1973년 한국의 중진 스님들이 태국의 비구계를 수지한 역사적 사건을 언급했다. 당시 율사 스님들은 태국 승단으로부터 3사7증을 초빙했고 종단 주요 스님들은 정식으로 비구계를 받았다.
이에 대해 각묵스님은 “한국불교 2000년사에 가장 획기적이고 위대한 사건”이라고 평가하며 “이것이야 말로 한국불교가 중국의 대륙불교를 넘어서서 초기불교의 정통 계맥을 한반도에 다시 복원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또 “스리랑카에 계를 전한 태국계맥은 남방상좌부불교에서도 중요하다”며 “이것을 수치스러워하는 것은 부처님 계맥에 대한 모독”이라고 덧붙였다.
(태국 비구계 수지…수치스럽다면 ‘모독’ 남방 부파불교의 계 받는다는 것은 ‘위험’ , ‘한국불교의 계맥, 초기불교 영향인가 대승 특징인가’, 불교신문 2012-10-16)
참으로 놀라운 기사이다. 다른 불교신문 사이트도 아니고 조계종 기관지라 불리우는 불교신문에서 39년전에 일어 났던 일을 알려 준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 불교가 ‘태국계맥’을 잇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3년 우리나라 고승들이 태국율사들로부터 집단으로 비구계를 받은 사건을 말한다.
1973년 태국율사들에 의하여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은 숨겨져 왔다고 한다. 계를 받은 스님들도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숨기려 했다는 것이다. 소승불교라 불리우는 남방국가에서 비구계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부끄럽고 창피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불교신문의 기획연재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종단이 성립된 이래 종단의 역사에 대하여 빠짐 없이 기록하여 수십회에 걸쳐 연재한 ‘통합종단에서 개혁종단까지’에서 전혀 보이지 않고, ‘기록으로 보는 한국불교 역사’시리즈에서도 역시 태국율사들에 의한 계맥전수를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1973년에 통도사의 홍법·상우, 부산 선암사의 석암, 쌍계사의 고산, 송광사의 보성·학산, 해인사의 혜암·도견·일타·종진·운산·현우·도성, 대구의 수산, 법주사의 혜정 스님 등무려 40여명이나 되는 스님과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승들이 태국율사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큰 사건이 일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마성스님의 언급대로 이 때 받은 수계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수계받은 사실자체를 지금까지 숨겨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세미나에서 각묵스님이 이슈화 한 것이다. 그렇다면 각묵스님은 왜 이슈한 것일까.
사분률(四分律)이란 무엇인가
각묵스님의 세미나 내용을 직접 들어 보았다. 오전에 봉은사에서 두 시간 동안 신나게 강의를 하고 강의가 끝나자 마자 식사를 급히 하고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스님은 가장 민감하게 거론 되고 있는 태국계맥에 대하여 자랑스런 일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로 ‘비구계’를 들고 있다.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비구계는 대승과 소승의 구별이 없다고 한다. 오로지 ‘사분률’이 근본이라 한다. 사분률이란 무엇인가. 붓다피아에 실린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사분율(四分律)
▶ 뷸교의 4대 계율서(四大戒律書)
뷸교의 4대 계율서(四大戒律書)의 하나로, 석가모니 입멸 후 100년경에 담무덕(曇無德)이 상좌부(上座部)의 근본 계율 중에서 자기 견해에 맞는 것만을 네 번에 걸쳐 뽑아 엮은 불교책.
60권. 요진의 불타야사(佛陀耶舍), 축불염(竺佛念) 번역. 법장부(法藏部)의 율장(律藏)으로, 전체 내용이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므로 이와 같이 일컬음. 제 1분에는 비구의 250계, 제 2분에는 비구니의 348계와 수계건도(受戒犍度), 설계건도(設戒犍度) 등 4건도, 제 3분에는 자자건도(自恣犍度), 피혁건도(皮革犍度), 의건도(衣犍度), 약건도(藥犍度), 가치나의건도(迦絺那衣犍度) 등 14건도, 제 4분에는 방사(房舍), 잡건도(雜揵度), 결집(結集), 조부(調部) 등으로 구성되어 있음.
(부다피아, 전자수다라장, 사분률)
사분율은 부처님 입멸후 100년경에 만들어진 4대 계율서라 한다. 초기불교의 계율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4분율은 테라와다 불교전통은 물론 대승불교전통에서도 고스란히 전승되어 온 것이라 한다. 그래서 비구계를 받는 다는 것은 대소승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고맙고 감사할 일이다. 정통비구종단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 비구계의 맥이 완전히 끊긴 적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불교라 한다. 일제에 의하여 대처식육제도에 의하여 비구계의 맥이 단절된 것으로 본다.
이렇게 비구계맥이 단절 되자 비구계맥을 복원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1973년에 일어난 태국율사로부터 태국계맥을 전수받은 사건이다. 1962년 통합종단이 발족한 이래 11년만의 일이다.
통합종단이 발족하였다는 것은 비구종단이 발족하였다는 말과 같다. 해방후 일제의 잔재라 여겨지던 대처비구승을 몰아내고 오로지 독신비구승들 위주의 종단이 성립한 것이다.
이렇게 비구종단이 성립하였지만 한번 끊어진 계맥을 복원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 태국의 율사를 초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국의 율사들로부터 현재 송광사 방장인 보성스님, 쌍계사 조실인 고산스님, 입적하신 전 은해사 조실 일타스님 등 기라성 같은 고승들이 태국의 비구계를 받은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당연한 것이라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초기불교의 사분율에 근본한 비구계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비구계에 있어서 대승과 소승의 구분이 있을 수 없고, 있다면 오로지 ‘소승비구계’만 있을 뿐이라 한다.
그 소승비구계라는 것이 다름 아닌 초기불교에서 사분률에 따른 비구계를 말하는데, 우리나라 고승들이 태국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는 것은 초기불교의 계맥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라 한다.
따라서 1973년에 일어났던 사건은 헤프닝이 아니라 한국불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 한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비로소 한국불교가 주류불교에 편입하는 계기가 되었고 전세계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교국가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회복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각묵스님은 1973년의 사건에 대하여 “고맙고 감사할 일이다. 정통비구종단을 만들어 주었다”라고 세미나에서 말하였다.
스리랑카의 경우
그렇다면 왜 태국비구계맥을 잇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 가장 첫째 이유는 비구계는 오로지 초기불교의 사분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대소승 구별이 없고 오로지 소승이라 부르는 비구계 하나만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비구계맥이 단절 되었을 때 다른 불교국가로부터 비구계맥을 이어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스리랑카를 들 수 있다.
스리랑카는 테라와다불교의 ‘종가집’으로 불리운다. 그리고 ‘교학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스리랑카에서 한 때 비구계맥이 단절 된 적이 있었다.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시절에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불교탄압으로 인하여 비구 계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그 때 태국의 율사를 초청하여 비구계맥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태국에 비구계맥을 전승한 나라가 바로 스리랑카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구계맥이 단절되면 다른 나라로부터 율사를 초청하여 계맥을 복원시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따라서 1973년 우리나라에서 일어 났던 사건도 그런 맥락의 하나로 본다.
“태국불교에 붙이자는 소리입니까?”
이와 같은 각묵스님의 주장에 대하여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자현스님이 대립각을 세웠는데, 스님은 오전에 ‘종단출범 50주년과 한국불교 계율의식의 재고’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주관한 바 있다. 자현스님은 세미나 자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여기에 1973년에는 조계종의 홍법, 상우, 석암, 고산, 보성, 학산, 혜암, 도견, 일타, 종진, 운산, 현우, 도성, 수산, 혜정, 고암, 경산, 천장이 태국의 승려 12명을 초청해서, 통도사에서 계를 받는 헤프닝까지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동북아 불교가 대승불교이며 한국불교 계율관에는 특수성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남방부파불교(혹은 소승)의 계를 받았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그 만큼 당시에는 계율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이다.
(자현스님, 종단출범 50주년과 한국불교 계율의식의 재고)
자현스님은 1973년의 사건에 대하여 단지 ‘헤프닝’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 때 당시 스님들이 대승에 대한 계율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일어난 사건으로서 있을 수 없는 현상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일까 자현스님은 각묵스님을 향하여 “태국불교에 붙이자는 소리입니까?”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비구율은 소승이기 때문에 대승비구는 비구계와 함께 보살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종지 3장 9조에 언급되어 있는 사항이라 한다. 따라서 소승의 비구계만 받아서는 비구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삼사칠증(三師七證)의 형식을 갖추지 않아도
한편 교육원장 현응스님 역시 각묵스님의 주장에 비판적인 의견을 보였다. 각묵스님의 1973년 이후의 태국계맥 전수와 1981년의 단일계단으로 인하여 한국불교가 정통비구교단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되고 정통성을 확보 하였다는 주장에 대하여 1973년 이전에 계를 받은 승려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지, 다 앞서 조선시대, 고려시대, 삼국시대의 승려들의 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에 대한 것이다.
현응스님은 반드시 삼사칠증(三師七證)에 의한 형식을 갖추지 않았어도 비구로 인정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삼사칠증(三師七證)’이란 정식비구가 되려면 3명의 스승과 7명의 증인을 말한다. 정식비구가 되려면 구족계를 받아야 하는데 계를 주는 계화상(戒和尙), 청결을 증명하는 갈마사(葛磨師), 의식을 가르쳐 주는 교수사(敎授師)를 말하고 칠증은 입회인을 말한다.
현응스님은 과거에 삼사칠중계단을 만들어 시행하지 않아도 비구가 될 수 있다는 취지로 말하였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역사적 사료로서 형식적인 결계에 따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때 당시 국가제도와 특수한 조건에 따라 비구가 될 수 있었는데, 비록 삼사칠증에 따른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고승을 중심으로 하여 당사자를 비구로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등 동아시아 불교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받아 들인 현상으로 본 다는 것이다. 따라서 1973년에 벌어졌던 사건에 대하여 단지 가볍게 받아들이고 큰 의미를 부여 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하였다.
‘흑일점’이 되어
세미나 열린 국제회의장에 처음 들어 가 보았다. 마치 국회의사당 같은 분위기의 회의장은 ‘중앙종회’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더.
인터넷 신문에서 사진에서만 보던 회의장으로 들어가니 청중들로 가득 하다. 거의 대부분 스님들이다. 사회를 보는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봉녕사, 청암사등 학인 스님들이 자발적으로 참석하였다고 한다.
자리에 착석하니 재가자는 혼자 뿐인 것 같다. 교육원 종무원과 신문사 기자 몇 명을 제외하고 오로지 혼자이었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홍일점’ 또는 ‘청일점’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검은 색 점퍼를 입었기 때문에 회색 승복 가운데 ‘흑일점’이 된 듯 한 느낌이다.
각묵스님을 만났는데
월호스님과 각묵스님의 발제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10분간 휴식시간이 주었졌다. 초청하였던 스님이 각묵스님을 만나 보라고 권유한다. 다른 스님은 몰라도 각묵스님께는 꼭 인사 드리라고 한다.
그러나 일체 아무도 만나지 않을 작정으로 왔다. 블로그에서도 철저하게 익명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오프라인에서도 역시 알리기 싫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스님에 대한 비판글을 많이 써서 미안하기도 하였다.
버티다 거듭되는 요청으로 각묵스님을 찾아 뵈었다. 반배로 인사를 올리자 즉각 알아 보았다. ‘진흙속의연꽃’이라는 필명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에게 먼저 “비판을 많이 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안철수 후보의 예를 들어 “빚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씁니다”라고 말하였다. 또 보통불자의 일상적인 글쓰기임을 강조 하였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전혀 게의치 않는다”라고 말하고 자신도 ‘보통스님’에 지나지 않는다고 낮추어 말하였다. 그리고 ‘초불회원중에도 글을 열심히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까지 덧 붙여 주었다.
보통불자의 글도 자료가 될 수 있다니!
스님의 논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블로그에 실려 있는 글을 인용하여 논문을 작성하였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태국계맥 수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마성스님의 <한국불교와 상좌불교의 만남의 역사와 과제>(마성스님, 불교평론 2010년 9월호)에 잘 정리되어 나타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진흙속의 연꽃의 블로그(http://blog.daum.net/bolee591/16155089)에 <한국은 테라와다불교국가인가, 1973년 태국고승들로 부터 받은 비구계>(진흙속의 연꽃, 2011-11-30)으로 나타나고 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의 눈으로 본 통합종단 50년 소고)
초기불교의 눈으로 본 통합종단 50년 소고-각묵스님.docx
마성스님의 논문을 보고 글쓰기를 한 것인데, 이 글이 논문의 자료로 활용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스님은 블로그에 실려 있는 내용을 상당부분 상세히 인용하였는데, 일개 이름 없는 보통불자의 글 (한국은 테라와다불교국가인가, 1973년 태국고승들로 부터 받은 비구계 )도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블로그의 글은 잡문이라는데
지난 번 불교평론 폐간 사건이 일어 났을 때 어느 교수는 불교평론에 올린 글에 대하여 논문이라기 보다 ‘잡문’에 더 가깝다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긴 편의 논문을 불교평론에 싣지 않고 학술지에 싣는다고 하였다.
그 교수의 논리대로 라면 블로그에 실린 글은 잡문축에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익명을 전제로 한 블로거의 글은 책임감이 없어서 자료로서 가치가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블로그에 실려 있는 대부분의 글들이 읽을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료로 사용하기에 객관적인 신뢰가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묵스님이 블로그의 글을 인용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파격적이다. 아마도1973사건에 대한 유일한 글이 아니었나 싶다.
블로그에 올리는 글은 늘 일상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때 그때 보고 느꼈던 사항들이다. 그런데 때에 따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료로 활용되고 있음을 본다. 그럴 때 자랑스럽기 보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앞선다. 인용된 글을 보면 숨어서 몰래 슬며시 들여다 보고 싶은 심리가 발동한다.
쾌거인가 우려인가
이번 통합종단 50주년 세미나에서 최대의 쟁점은 단연 태국비구계맥 전수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발제한 각묵스님은 한국불교가 비로소 정통불교에 편입된 것으로 보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한 ‘쾌거’로 보고 있다.
반면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한국불교가 소승불교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고, 그런 사건에 대하여 단지 ‘일회성 헤프닝’ 정도로 치부하는 시각도 있다. 또 별것도 아닌 것으로 큰 의미를 부여 하지 않는 시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계맥에 대하여 거론 하였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뉴스거리이다. 그래서일까 이를 전하는 불교관련 인터넷신문 사이트(미디어붓다, 불교신문)에서는 상세히 다루고 있다. 특히 1973년 태국비구계맥전승에 대하여 비중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각묵스님이 점화시킨 이슈에 대하여 크게 평가할 수도 있고 평가절하 할 수도 있다.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내용을 보면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1973년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스님들이 집단으로 태국율사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이 믿고 싶지 않지만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은 계율의 나라라고 불리우는 태국에서는 그 때 당시 큰 뉴스거리이었고 태국언론에 대서특필 되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은 인터넷에도 올려져 있다.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II. The Reform of Korean Buddhism
Korean Buddhism with its major sect of Chan ran the same course of development and decline [1] as in China until the annexation by the Japanese in the year 2453/1910. Then, under Japanese rule (2453-2488/1910-1945), Korean Buddhism underwent a great change.
The Japanese brought with them Japanese Buddhism together with the beliefs, practices and activities of the different sects. They set up their temples and introduced social and educational programmes. Buddhism seemed to be restored to life. But, to the Korean Buddhists, the Japanese brought also the worst corrupting element, that is, the practice of married monkhood which they encouraged by policy and which completely destroyed the Korean Buddhist tradition.
Therefore, with the end of Japanese rule, leading Buddhists united in a movement to purify monastic life, to return the monks to the proper monastic discipline, and to restore their religious life and traditions. They established a well-organized celibate order of Korean Buddhist monks called the Ch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and created a hierarchy of administration headed by a Patriarch or chief executive. From its headquarters at the Chogye temple, the Korean Sangha supervises all provincial councils that administer its 1,700 temples [2] in the 9 provinces of South Korea.
The Korean Sangha is dedicated to education. The Dongguk Buddhist University, which in 2509/1966 had an enrolment of about 6,000 students, is open both to monks and to lay students. The Korean Sangha also operates independent colleges, high schools, middle schools and kindergartens of its own. Monks have been sent to pursue their studies in other Buddhist countries. There has been an increasing interest in Theravada Buddhism during recent years. Besides sending Korean monks to study in Theravada countries, the Korean Sangha welcomes Theravada ordination in its own country. In 2516/1973, a group of Theravada monks from Thailand went on invitation to hold an ordination ceremony in Seoul, admitting about 40 Korean monks into the Theravada Order.
(A Glimpse of Buddhist Developments in China and Korea)
내용을 보면 “한국의 승가는 자국내에서 테라와다 성직수임식을 환영하였다. 1973년(불기2516년), 일단의 태국출신 테라와다 승려들은 서울에서 성직서품식을 거행하였는데, 이 테라와다 서품식에서 약 40명의 한국의 승려들이 테라와다 승단에 들어가기 위한 계를 받았다.”라고 되어 있다. 이런 사실이 이미 전세계에 알려 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 계를 받았던 스님들은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고 쉬쉬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각묵스님에 따르면 부끄럽고 창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럽고 떳떳한 것이라 한다. 비구계는 대소승의 구분이 없고 오로지 초기불교에서 전승되어온 사분률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태국에서 계를 받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왜그럴까. 그것은 구족계를 받은 비구들은 어느 나라에서 비구계를 받았든지간에 모두 다 똑 같은 부처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부처님이 이미 초기경전에서 언급되었다고 한다. 디가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Atha kho bhagavā āyasmantaṃ ānandaṃ āmantesi— “siyā kho panānanda, tumhākaṃ evamassa— ‘atītasatthukaṃ pāvacanaṃ, natthi no satthā’ti. Na kho panetaṃ, ānanda, evaṃ daṭṭhabbaṃ. Yo vo, ānanda, mayā dhammo ca vinayo ca desito paññatto, so vo mamaccayena satthā.
그때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셧다.
“아난다여,
그런데 아마 그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안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것이다.”
(마하빠리닙바나경- Mahāparinibbana Sutta-대반열반경, 디가니까야 D16, 각묵스님역)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법(dhamma)’과 ‘율(vinaya)’을 스승으로 하라고 당부 하셨다. 그 율이라는 것이 비구들이 지켜야 할 계에 대한 것이다. 그런 계에 대한 것이 사분율로 정리 되어 지금까지 전승되어 온 것이다.
누가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인가
일제시대 대처식육제도에 따라 계맥이 완전히 단절 된 상태에서 계맥이 살아 있는 태국율사를 초청하여 비구계맥을 복원한 것은 초기경전의 가르침에 따르면 다행스런 일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부처님의 제자라면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대하여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한다거나 쉬쉬하며 숨기려 한다면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로 볼 수 없을 것이다.
2012-10-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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