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하느님(범천)도 환희용약한 부처님의 불사(不死)진리, 초전법륜경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0. 26. 20:21

 

하느님(범천)도 환희용약한 부처님의 불사(不死)진리, 초전법륜경에서

 

 

 

수다원이 된 꼰단냐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꼰단냐가가 법안이 열리는 장면이 있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양 낀찌 사무다야담망 삽반땅 니로다담만띠”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법문이 설해 지고 있는 동안 다섯명의 수행자 중 유일하게 콘단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아는 장면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라고 묘사 하고 있다. 여기서 진리의 눈은 빠알리어로 담마짝꾸(dhammacakkhu)인데 이를 한자어로 법안(法眼)으로도 옮긴다.

 

이와 같이 법안이 열린 상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의 첫 청중 가운데 한 명인 꼰단냐 존자가 방금 설명한 방법으로 법문을 이해하게 되어, 자신에게서 들음, , 신심, 희열, 기쁨, 닿음, () 등의 현상이 일어나는 순간 알아차림으로써, 위빠사나 도를 계발하여 수다원의 도과를 얻었습니다.

 

(초전법륜경 제8, 마하시사야도)

 

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상).hwp

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하).hwp

 

 

마하시사야도는 초전법륜경 법문에서 꼰단냐가 진리의 눈이 열린 것(법안)에 대하여 수다원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도 법문이 설해지고 있는 동안 또는 설하자마자 수다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설한 법문에서 수다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리야빠리예사나경(고귀한 구함의 경, M26)에서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시고 난 다음 잠시 망설인다. 그러자 사함빠띠가 나타나서 법을 설해 주기를 간청한다. 이에 대한 경이 상윳따니까에서 아야짜나경(청원경, S6:1)에 실려 있다. 그런데 맛지마 니까야의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 고귀한 구함의 경, M26)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특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 한 때 함께 수행하였던 다섯명의 수행자들을 찾아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51.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나는 점차로 유행하면서 바라나씨에 있는 이씨빠따나의 미가다야로 다섯 명의 수행승들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수행승들이여, 그들 다섯 명의 수행승들은 멀리서 내가 오는 것을 보았다. 보고 나서 그들은 서로 약조했다.

 

‘벗이여, 수행자 고따마가 온다. 윤택하게 살며 정진을 포기하고 사치에 빠졌다. 우리는 그에게 인사도 하지 말고 일어나 영접하지도 말고 옷과 발우를 받지도 말자. 그러나 그가 앉기를 원한다면, 자리를 깔아주자.’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 고귀한 구함의 경, 맛지마니까야 M26, 전재성님)

 

아리야빠리예사나경(고귀한 구함의 경-M26).docx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다가가자 다섯명의 수행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타락한 사문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가까이 오면 말도 하지 말고 아는 체 하지 말자고 약속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점점 다가 오자 점점 상황은 바뀌어 간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하고 있다.

 

 

52.

그렇지만, 수행승들이여, 내가 더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서 그들 다섯 명의 수행승들은 스스로 약조를 지킬 수 없었다. 어떤 자는 나를 맞으러 나와 가사와 발우를 받아 들었다. 어떤 자는 자리를 펴주고, 어떤 자는 발 씻을 물을 준비했다. 또한 그들은 나의 이름을 부르며 ‘벗이여’라고 말을 걸었다.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 고귀한 구함의 경, 맛지마니까야 M26, 전재성님)

 

 

부처님이 가까이 다가섬에 따라 어떤 자는 가사와 발우를 들어 주고, 또 어떤 자는 자리를 펴주고, 심지어 발을 씻을 물을 준비하는 자도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벗이여” 하며 말을 걸었다고 하였다.

 

범접할 수 없는 위의

 

그렇다면 왜 이렇게 입장이 바뀌었을까. 경에서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범접할 수 없는 위의가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여진다. 그래서일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여래의 호칭을 ‘벗이여’라고 부르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이다. 수행승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불사가 성취되었다. 내가 가르치리라. 내가 법을 설할 것이다. 내가 가르친 대로 그대로 실천하면, 머지 않아 훌륭한 가문의 자제로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그 목적인 위없는 청정한 삶의 완성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알고 깨닫고 성취하게 될 것이다. '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 고귀한 구함의 경, 맛지마니까야 M26, 전재성님)

 

 

부처님은 벗이여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한다. 그대신 부처님은 거룩한 이’, ‘원만히 깨달은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들으라고 하고 불사가 성취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불사(atama)란 열반과 동의어로서 다섯수행자 역시 추구하던 목표 이었다. 이와 같은 불사의 성취하기 하기 위하여 출가 하였고 고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불사를 성취하였다고 한것이다. 그래서 불사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출가목표가 달성될 것이라 한다.

 

준비된 수행자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이 첫 설법의 대상으로 삼았던 다섯수행자는 준비된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범부에게 설법하였다면 결코 알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경에서 “‘내가 증득한 이 진리는 심원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여 사고의 영역을 뛰어넘고 극히 미묘하여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M26)”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적의 인물들이 함께 고행하였던 다섯명의 수행자들 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준비된 수행자에게 법을 설하자 효과가 즉각 나타났다. 다섯명의 비구 중에 최초로 꼰단냐가 알아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법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이 법문을 하시면서 팔정도인 중도에 관하여 말씀하시자 꼰단냐 존자는 팔정도를 계발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스러운 도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꼰단냐 존자가 사성제에 관한 말씀을 들었을 때도, 알아야 할 것을 주시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도와 과의 높은 지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초전법륜경 제8장, 마하시사야도)

 

 

마하시사야도의 설명에 따르면 꼰단냐는 부처님의 중도법문을 듣고 수다원 도와 과를 얻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초전법륜경의 반복구문

 

초전법륜경을 보면 반복구문이 여럿 보인다. 그 중 사성제에 대한 반복구문이 있다. 고성제와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에 대한 반복구문이 각각 3번 씩 12번 나온다. 이 중 도성제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져야 한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졌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담마짝깝빠왓따나경(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S56.11).docx

 

 

 

처음에 이 반복구문을 보았을 때 내용이 모두 똑 같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른 데가 있었다. 그것은 두번째 문장의 ‘닦여져야’ 한다 와 세번째 문장의 ‘닦여졌다’이다.

 

첫문장에서는 법안이 열린 것을 말하는데, 이는 모종의 이해차원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문장의 닦여져야 한다수행의 차원으로 볼 수 있다. 세번째의 닦여졌다완성차원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지혜가 실천 되어 완성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과 봄()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

 

이를 고성제에서부터 도성제까지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성제

이해

수 행

완성

고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pariññeyyanti)’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 (pariññātanti)’

집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는 제거되어야 한다. (pahātabbanti)’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가 제거되었다. (pahīnanti)’

멸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 (Sacchikātabbanti)’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었다. (sacchikatanti)’

도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져야 한다. (bhāvetabbanti)’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졌다. (bhāvitanti)’

 

 

 

이렇게 이해 차원에서 시작하여 차츰 알려지고, 제거되고, 실현되고, 닦여지는 과정을 거친 다음 마지막으로 알려졌고, 제거 되었고, 실현 되었고, 닦여졌다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를 경에서는 ()과 봄()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로 표현 하고 있다.

 

셀라경 (Sn3.7)에서

 

초전법륜경에서 이와 같은 반복구문은 단계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숫따니빠따에서도 이와 유사한 문장을 볼 수 있다. 셀라경 (Sn3.7) 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Abhiññeyya abhiññāta,   아빈네이양 아빈냐땅.

bhāvetabbañca bhāvita;    바웨땁반짜 바위땅.

Pahātabba pahīna me,     빠하땁방 빠히낭 메,

tasmā buddhosmi brāhmaa.   따스마 붓도스미 브라흐마나.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전재성님역)

 

셀라의 경(Sn3.7).docx

 

 

부처님은 알아야할 것을 알았고 닦아야할 것을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다고 하였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고성제에 해당되고, 닦아야할 것은 도성제’, 버려야할 것은 집성제에 해당된다. 그런데 멸성제에 대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멸성제에 대한 것은 어떤 문구일까.

 

톱니바퀴가 맞물려 가는 것처럼

 

초전법륜경의 멸성제를 보면 실현되어 할 것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을 말한다. 알아야 할 것을 알고, 닦아야 할 것을 알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다면 이는 실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열반을 성취한 자를 무어라 부를까. 이는 숫따니빠따 마지막 구절에 있다. ‘깨달은 자(Buddha)’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실현해야 할 것은 해탈과 열반이고 이를 성취한 자, 즉 깨달은 자이다.  

 

이와 같이 실현해야 할 것은 결국 해탈과 열반이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구가 있다.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Katame ca bhikkhave, dhammā abhiññā sacchikātabbā:

vijjā ca vimutti ca. Ime dhammā abhiññā sacchikātabbāti.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실현해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명지와 해탈이 있는데,

이것들은 실현해야 할 것이다.

 

(마하살라야따니까경-Mahāsaāyatanika sutta - 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49, 전재성님역)

 

마하살라야따니까경(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M149).docx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실현해야 할 것은 해탈과 열반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말씀은 종횡으로 연결 되어 있고,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가는 것처럼 한치의 오류도 없고 정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다원과 아라한의 열반은 같을까 다를까

 

꼰단냐가 부처님의 첫 설법을 듣는 과정에서 법의 눈이 열려 수다원의 도와 과를 성취한 것으로 마하시사야도는 설명한다. 이렇게 수다원의 도와 과를 성취하였다는 것은 열반을 성취하였다는 말과도 같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번뇌가 남아 있는 수다원의 열반과 번뇌가 다한 아라한의 열반은 같은 것일까 틀린 것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초전법륜경 법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약 누군가가 ‘수다원 도가 대상으로 하는 열반과 수다원 도 이상의 도가 대상으로 하는 열반은 같은 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예. 똑같습니다. 다른 점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초전법륜경 제8, 마하시사야도)

 

 

마하시사야도의 설명에 따르면 수다원의 열반과 수다원 이상의 열반, 즉 아라한의 열반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열반은 어느 단계에서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비록 번뇌가 남아 있는 수다원이나 사다함, 아나함이 성취하는 열반일지라도 열반 그 자체는 아라한이 성취한 열반과 동일한 것인데, 그런 열반은 어떤 상태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아마도 수다원의 도과는 오로지 수다원 도로 성취되는 다섯 가지 불선한 마음의 소멸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열반은 불선의 부분적인 소멸도 아니요, 정신과 물질 법의 어느 일부분만의 소멸도 아니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는 아주 그릇된 견해입니다.

 

사실상, 열반은 번뇌(kilesa), 업(kamma), 과보(vipāka)라는 세 가지 바퀴(vatta)의 완전한 소멸을 말하고, 모든 정신과 물질의 행, 형성된 모든 것이 완전히 소멸함을 뜻합니다.

 

(초전법륜경 제8, 마하시사야도)

 

 

열반은 정신과 물질등 형성된 모든 것들의 완전한 소멸이라한다. 그런 소멸에 번뇌를 포함하여 지은 업이나 과보 역시 완전하게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건 지워진 모든 정신(nāma)과 물질(rūpa)의 완전한 소멸이 열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꼰단냐가 성취한 열반은  어떤 상태이었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수다원의 도과를 얻는 순간에는 오직, 감각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의 소멸만이 인지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로 지켜본 것을 사실에 입각하여 언급한 것입니다.”라고 설명 하고 있다.

 

이는 아는 마음이 소멸 되었을 때 다음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 세상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런 상태를 열반이라 한다.

 

우주적인 사건

 

이와 같이 부처님의 첫 설법을 듣는 순간 꼰단냐가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해하고 수다원의 도와 과를 성취하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아니 우주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왜그럴까.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틀림없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 자신만이 알고 있었던 것을 남들도 안다는 것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의사가 자신이 알고 있는 이론을 임상에 적용하여 실험하였는데 들어 맞는 경우와 같다. 꼰단냐가 그런 케이스라 볼 수 있다.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법의 바퀴

 

이렇게 꼰단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함으로써 최초로 법의 바퀴가 굴러 가게 되었다. 그래서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렸다고 해서 초전법륜이라 한다. 그렇다면 법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실 때에 땅위의 신들은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초전법륜경은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따르면 부처님 열반후 제1차 결집당시 장로비구들이 합송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환희에 넘치는 장면이 많은데, 이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꼰단냐 비구가 법의 눈이 열리자 마자 법의 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하였는데, 이 법의 바퀴는 아무도 막을 수 없다고 한다.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로서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다고 한다.

 

불교의 범천을 하느님으로

 

그런데 전재성 박사의 초전법륜경을 보면 하느님이라는 말이 나온다. 경에서는 빠알리어로 brāhmaena’, ‘brahmunā’, ‘brahma ‘로 표기 된다. 한자용어로 범천을 말한다. 범천은 일반적으로 색계의 초선천을 말한다. 그리고 대범천이 있는데, 이는 초선천의 세 번째 천상을 뜻하기도 하고 유력한 범천을 뜻하기도 한다. 유력한 범천으로 경에서는 뚜두(Tudu), 나라다(Nārada), 가띠까라(Ghaikāra), 바까(Baka), 사냥꾸마라(Sanakumarā), 사함빠띠(Sahampatī)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 사함빠띠 범천이 대범천으로 많이 등장한다. 부처님께 법륜을 굴려주시길 간청한 대범천이 바로 사함빠띠이다.

 

이와 같은 범천은 창조주로 등장하는데 천상의 세계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으로도 표현된다. 그런데 전재성 박사는 범천, 즉 브라흐마에 대하여 하느님으로 번역하였다. 이에대하여 전재성박사의 이띠붓따까(여시어경)’ 출간과 관련하여 현대불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전 박사는 번역에 있어 초등학생도 받아들일 수 있는 쉬운 말과 우리 문화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박사는 그 예시로 하늘님을 들었다. 전 박사는기독교의 하느님도 우리 고유의 하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인 용어라며불교의 범천을 하느님으로 번역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띠붓따까’ 부처님 직설 관련 경장 완역한 전재성 박사, 현대불교, 2012-09-04)

 

 

전재성박사는 초등학생도 받아 들일 수 있는 알기 쉬운 우리 말을 이용하여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하느님이라는 말도 우리의 고유의 말로서 누구나 알 수 있는 말이라 한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

 

이렇게 한번 구르기 시작한 바퀴는 앞을 향해 굴러 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숫따니빠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Rājāhamasmi sela           라자하마스미 셀라

dhammarājā anuttaro,       담마라자 아눗따로
Dhammena cakka
vattemi   담메나 짝깡 왓떼미

cakka appativattiya.   짝깡 압빠띠왓띠양

 

“셀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 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

 

(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전재성님역)

 

 

 

 

 

조계사 팔정도

 

 

 

한번 굴러간 법의 바퀴는 결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다고 한다. 전륜성왕의 전차처럼 오로지 앞으로 갈 뿐이라 한다. 오로지 앞으로만 전진하는 전륜성왕의 전차 앞에서 저항은 있을 수 없다. 모두 성문을 열어 주고 맞이 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굴린 법의 바퀴는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뿐 결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바퀴와 같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을 설하였다. 이런 진리에 대하여 어느 누가 그것은 현실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라거나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륜성왕의 전차바퀴와 같아서 어느 누구든지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의 담마의 바퀴는 오로지 앞으로만 갈 뿐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범천에서 빛나더라도 돼지우리에서는 꿀꿀 거리네”

 

꼰단냐에 의하여 굴러간 법의 바퀴는 삽시간에 우주에 퍼졌다. 그래서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미가다야(녹야원)에 있는 땅의 신(Bhummāna devā)이었다. 이들이 우주적인 사실을 사대왕천(cātummahārājikā devā)에 알리고, 사대왕천은 삼십삼천 (tāvatisā devā) 에 알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세계(brahmakāyikā devā, 범천)’에 알려 지게 되었다. 그러자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무량한 빛이 나타났다고 경에 묘사 되어 있다. 왜 이렇게 우주적 사건이 되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불사(不死)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 이하의 세계는 업대로 산다고 한다. 반면 천상에 사는 존재는 수명대로 산다. 그래서 지은 공덕 만큼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덕이 다하면 어느 세계에 태어 날지 모른다. 그래서 미얀마에 “범천에서 빛나더라도 돼지우리에서는 꿀꿀 거리네” 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지금 빛나는 존재일지라도 윤회하는 무상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행복을 누리고 있는 모든 천상의 존재들과 자신을 창조주라 착각하고 있는 하느님(브라흐마, 범천)역시 윤회하는 무상한 존재이다.

 

일만세계가 왜 진동하였을까

 

그런데 부처님의 불사의 진리가 꼰단냐에 의하여 동일하게 체험 되었을 때 이는 우주적인 사건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만 세계가 진동하고 천상의 존재가 환희 용약한 것이다. 이렇게 천상의 존재들이 환희용약한 것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전법륜경이 설해질 때 인간세계에는 오직 다섯 비구들만이 첫 설법을 들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오직 꼰단냐 존자만이 높은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빨리어 경전의 미린다 왕문경에서는 일억 팔천만 범천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욕계천인들이 그때 높은 지혜를 얻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초전법륜경 제8, 마하시사야도)

 

 

밀린다왕문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다섯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불사의 법을 설할 때 천상의 존재들도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꼰단냐가 지혜의 눈이 열림과 함께 이를 지켜 보고 있던 범천과 욕계천신들도 함께 깨달은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는 천상의 존재들이 인간 보다 더 수승한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환희용약하고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빛으로 빛났다고 표현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굴러온 법의 바퀴

 

이렇게 법의 바퀴가 최초로 굴러가게 되자 부처님은 감흥어린 말로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이는 설법을 마친 부처님이 꼰단냐에게서 법안이 생겨 수다원의 도와 과를 이루자 기쁨에 찬 감탄이다.

 

꼰단냐에 의하여 최초로 법의 바퀴가 구르기 시작한 이래 부처님의 불사의 진리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굴러 왔다. 그런 부처님의 진리는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다. 심지어 창조주라 착각하는 하느님(범천)도 멈추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부처님의 불사의 진리에 대하여 환희용약한 것으로 되어 있다.

 

 

 

 

2012-10-26

진흙속의연꽃

 

담마짝깝빠왓따나경(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S56.1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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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라의 경(Sn3.7).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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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야빠리예사나경(고귀한 구함의 경-M26).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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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살라야따니까경(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M149).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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