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산중불교 스님불교가 된 이유,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와 부처님의 돈오점수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0. 28. 12:52

 

 

산중불교 스님불교가 된 이유,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와 부처님의 돈오점수

 

 

 

 

불교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수 많은 선지식들이 법문을 통하여, 글로서, 방송 등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말을 하기 때문에 불자들은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알음알이에 비추어 보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 말 중에 중도가 있다.

 

중도란 무엇인가?

 

초전법륜경에 중도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부처님은 처음으로 담마의 수레바퀴를 굴릴 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의 극단을 섬기지 않는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담마짝깝빠왓따나경(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S56.11).docx

독송용 빠알리 초전법륜경.docx

 

 

 

부처님은 중도 (majjhimā paipadā) 팔정도 (ariyo aṭṭhagiko maggo)’ 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중도가 다름아닌 팔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팔정도의 여덟가지 항목에 대하여 나열하여 설명하고 있다.

 

중도가 ()’이라는데

 

그런데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초전법륜경의 중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 동안에 다섯 비구가 깨쳐서 부처님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섯 비구에게 설한 내용이 공무아(空無我)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초전법륜에서 중도. 팔정도. 사성제. 공을 전부 다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초전법륜에서 부처님이 평생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하셨다고 평합니다.

 

동시에 어떤 학자는 부처님이 평생하시고 싶은 말씀을 어떻게 다서시 비구에게 전부 다 하실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부처님이 나중에 말씀한 것을 후대 사람들이 한데 묶어 놓은 것이지 일시에 말씀하신 것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부처님이 깨친 근본자리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근본적으로 깨치신 것이 중도이면서 팔정도이고 사성제이며 공()이기 때문에 한 시간 이내에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고 한 장으로도 다 설명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경전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인정되는 초전법륜에서 이렇게 사성제를 비롯하여  공무아(空無我)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공사상이 근본불교의 사상이 아니라고는 아무도 의심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 5. 공사상(空思想)과 중도)

 

 

성철스님은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결국 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라는 것은 초전법륜경에서 언급된 사성제, 팔정도와 같은 개념으로 본 것이다. 그런 연결고리가 바로 중도라는 것이다.

 

성철스님의 목적론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도로 보아 결국 공과 같은 것으로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목적론이 되어 버린다.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자신의 논문 백일법문에 나타난 중도사상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이처럼 성철스님은 부처님이 깨치신 진리가 ‘중도’이며, 그 중도의 내용이 팔정도이고, 팔정도는 방법론이 아닌 목적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대승불교적 시각인데, 자칫 잘못하면 초기불교의 실천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견해라고 오해받을 소지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성스님, <百日法門> 타난 中道思想)

 

 

성철스님은 중도에 대하여 실천론 또는 방법론이 아닌 목적론 또는 구경론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선불교 전통의 입장에서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 부처임을 깨닫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는 성불의 논리때문이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목적론(구경론)과 방법론(실천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 팔정도가 방법론(方法論)이냐 또는 목적론(目的論). 구경론(究竟論)이냐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팔정도는 구경 목표를 향하는 방법론이지 목적론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중도의 근본 뜻을 망각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확실히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고 하셨지 중도를 닦아서 바르게 깨달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중도를 바로 깨친 그 사람이 부처이므로 중도의 내용인 팔정도는 목적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이와같이 목적론적, 구경론적의미를 내포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전도되고 근본과 지말이 뒤섞인 여기에서는 올바른 삶의 방향의 지침이기도 하므로 방법론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일리가 있을 것 입니다.

 

(백일법문, 4 원교(圓敎)의 중도설, 성철스님)

 

 

성철스님은 중도가 목적론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중도와 동의어인 팔정도 역시 목적론임을 말하고 결코 방법론이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는 글에서 팔정도는 구경 목표를 향하는 방법론이지 목적론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중도의 근본 뜻을 망각하는 말입니다.”라고 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팔정도에 대하여 방법론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일리가 있을 것이라고 여지를 두고 있다.

 

성철스님의 돈오돈수

 

성철스님의 이와 같은 주장은 선불교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이다. 그리고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적 사상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 없다.

 

돈오돈수의 국어사전적 풀이는 깨달음()과 닦음()은 한 순간에 모두 완성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선불교의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성철스님의 입장에서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당연히 목적론이 될 수 밖에 없다. 한번 깨닫고 나면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돈오돈수에 대하여  대하여 로버트 버스웰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깨달음의 실현 전에 오는 모든 것들은 결국 의미가 없는 것이, 뒤에 추가적인 닦음이 요구되는 깨달음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닦음이 뒤따라야 하는 깨달음은 진짜가 아니고, 진짜 깨달음은 이해와 실천이 완전히 통합된 것이어야만 한다.

 

(로버트 버스웰교수, 제24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 불교TV 2011-11-29)

 

 

한 번 깨닫고 난 다음 추가적인 수행이 요구되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깨달은 가짜 깨달음으로서 돈오점수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돈오돈수적 깨달음은 상근기에나 해당되는 것이다. 단번에 몰록 깨달아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는 말은 부처님의 경지나 가능한 것이다. 그런 부처님도 돈오돈수적 깨달음 이전에 보살로서 수 없는 생을 수행자로 살아야 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돈오돈수를 이룬 수행자는 이미 그 이전 또는 그 이전 생에 수행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미 깨달음의 이해 과정을 거쳐 닦음을 계속 하다가 이생에서 갑자기 깨달음의 모든 실현을 한 순간에 가능하게 보인 것으로 보아야 옳다고 로버트 버스웰 교수는 주장하다.

 

지와 견을 세 번 굴린 부처님

 

돈오돈수라는 것은 이전 생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돈오돈수가 아니라 돈오점수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목적론(구경론)이 아니라 방법론(실천론)으로 이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성제, 팔정도와 동의어인 중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왜 돈오점수적 방법론적 주장이 타당할까. 이는 초전법륜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에 따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는 제거되어야 한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가 제거되었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고성제에 대한 것이다. 위 세문장을 보면 모두 같은 문장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결정적으로 두 개의 단어가 차이가 난다. 그것은 제거되어야 한다제거되었다이다. 부처님이 고성제에서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하였을 때 이런 선언으로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는 제거되어야 한다라고 하여 제거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추가 되어 현재진행형 형식으로 설명 되었다.  또 이어지는 문장에서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가 제거되었다라 하여 제거 되었다라고 완료형으로 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은 고성제에 있어서 지(, ñāa)와 견(, dassana)에 대하여 세 번 굴렸다. 이런 구조는 집성제와 멸성제, 도성제에서도 볼 수 있다.

 

돈오점수의 예를 보면

 

이와 같은 구조에서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앎과 봄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인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앎과 봄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

사성제

이해

과정

완성

고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pariññeyyanti)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 (pariññātanti)

집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는 제거되어야 한다. (pahātabbanti)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가 제거되었다. (pahīnanti)

멸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 (Sacchikātabbanti)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었다. (sacchikatanti)

도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져야 한다. (bhāvetabbanti)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졌다. (bhāvitanti)

 

 

 

표에서와 같이 부처님은 세 가지 단계로서 사성제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 ñāa)와 견(, dassana)이 세번 굴린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다.

 

목적론으로 보았을 때

 

그런데  완성형을 보면 알려졌다(pariññātanti)’제거 되었다(pahīnanti)’실현되었다(sacchikatanti)’닦여졌다(bhāvitanti)’라고 표현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목적론에 대한 것이다. 이미 완성된 것이다. 그런 자를 무어라 부를까. 숫따니빠따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르고 있다.

 

 

Abhiññeyya abhiññāta,   아빈네이양 아빈냐땅.

bhāvetabbañca bhāvita;    바웨땁반짜 바위땅.

Pahātabba pahīna me,     빠하땁방 빠히낭 메,

tasmā buddhosmi brāhmaa.   따스마 붓도스미 브라흐마나.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전재성님역)

 

셀라의 경(Sn3.7).docx

 

 

 

셀라경에서는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다고 하였다. 그런 자를 깨달은 자라하였다. 빠알리어로 깨달은 자는 붓다(Buddha)’를 말한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에게

 

이렇게 모두 완료형으로 끈난 단어인 알려졌다(pariññātanti)’제거 되었다(pahīnanti)’실현되었다(sacchikatanti)’닦여졌다(bhāvitanti)’라는 단어는 이미 완성된 것을 말한다. 이는 깨달은 자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선언이 나온다.

 

 

Ñāañca pana me dassana udapādi 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냐난짜 빠나 메 닷사낭 우다빠디 아꿉빠 메 쩨또위뭇띠, 아야만띠마 자띠 낫티다니 뿌납바워띠.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이 것이 아라한 선언이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다시는 나고 죽는 일이 없다. 그래서 태어남은 없다고 하였다. 윤회가 종식된 것을 말한다. 이렇게 번뇌가 다한 자에게 있어서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 그래서 아라한의 경지에 대하여 무학도(無學道)’라 한다.

 

이와 같이 완료형, 완성형의 문구로 본다면,  중도에 대하여 목적론으로 주장한 성철스님의 주장이 타당하다. 그러나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목적론을 암시하는 ‘~이었다로 끝나는 완료형 구문과 함께 ‘~이어야 한다로 끝나는 진행형도 있고, ‘~이다로 끝나는 이해형도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성철스님의 목적론은 타당하지 않다. 방법론과 목적론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돈오점수

 

부처님의 가르침은 돈오점수적임에 틀림 없다. 깨달음은 단 한번에 완성되고 깨닫고 나면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는 돈오돈수적 관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깨닫자 마자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데 다만 남아 있는 번뇌가 있기 때문에 번뇌를 소멸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향사과를 말하였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와 과를 말한다.

 

이런 부처님의 돈오점수적 가르침은 맛지마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최상의 지혜가 단번에 성취된다고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그와 반대로 오로지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닦고

점차적으로 발전한 다음에 지혜의 성취가 이루어진다.

 

(끼따기리경-Kīāgiri sutta -Advice given at Kitagiri -끼따기리 설법의 경, 맛지마니까야 M70, 전재성님역)

 

끼따기리경(끼따기리 설법의 경-M70).docx

 

 

 

부처님은 최상의 지혜가 단 번에 성취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점차적으로 배우고 닦는 과정에서 지혜가 성취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일곱단계의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는 일곱 종류의 참사람이 있다.

일곱 종류란 어떠한 것인가?

‘양변으로 해탈한 자,

지혜로 해탈한 자,

몸으로 깨달은 자,

견해를 성취한 자,

믿음에 의해 해탈한 자,

가르침에 따르는 자,

믿음에 따르는 자’이다.

 

(끼따기리경-Kīāgiri sutta -Advice given at Kitagiri -끼따기리 설법의 경, 맛지마니까야 M70, 전재성님역)

 

 

여기서 양변으로 해탈한 자 지혜로 해탈한 자 는 아라한을 말한다. 번뇌가 다하여 더 이상 배울 것도 닦을 것도 없는 무학을 말한다. 돈오돈수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번뇌가 아직 남아 있는 자들은 더 배우고 더 닦아야 한다. 그래서 몸으로 깨달은 자’ ‘견해를 성취한 자’ ‘믿음에 의해 해탈한 자성인 3라 한다. 성인3과는 아직 번뇌가 남아 있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을 말한다. ‘가르침에 따르는 자  믿음에 따르는 자는 범부수행자를 말한다.

 

수다원의 오도송과 아라한의 오도송

 

이렇게 부처님은 단계적 닦음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깨달음의 내용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번뇌가 남아 있는 수다원의 깨달음이나 번뇌다한 아라한의 깨달음이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깨달음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가 소멸되어 마음이 일어 나지 않을 때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런 상태가 열반이고 불사(不死) 등으로 불리운다. 그런 깨달음은 번뇌가 남아 있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도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번뇌가 있기 때문에 수행과정이 필요 한 것이다. 그래서 돈오하였을 때의 수다원에 대하여 견도(見道)’라 하고, 번뇌를 소멸하는 과정에 있는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를 수도(修道)’라 하고, 번뇌가 다한 아라한을 무학도(無學道)’라 한다.

 

수다원의 견도단계는 돈오라 볼 수 있다. 비록 남아 있는 번뇌가 있어도 수행함에 따라 돈오 할 수 있는 것이다. 돈오 한다는 것은 깨닫는는 것을 말한다. 이는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초전법륜경에서 꼰단냐에게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꼰단냐는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 났다고 하였다. 그때의 상황에 대하여 경에서는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표현 하였다. 이 선언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수다원의 오도송이라 한다. 견도의 단계를 말한다.

 

그러나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아직 남아 있는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번뇌가 소멸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단계가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이다. 그런데 수다원과 아나함의 단계에서는 오도송이 없다고 한다. 처음 깨쳤을 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수다원의 오도송은 있지만 수도단계의 오도송은 없는 것이다.

 

다만 수도를 하여 모든 번뇌가 소멸 되었을 때 깨달음이 완성되는데 이 때 오도송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아라한 선언이다. 이를 아라한의 오도송이라 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오도송은 두 번 있게 된다. 처음 깨달았을 때 수다원의 오도송과 번뇌가 다하여 다시 태어남이 없다는 아라한의 오도송이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중도에 대하여 목적론으로 간주하여  아라한의 돈오돈수적 관점으로만 설명하였다. 이는 선불교의 영향 때문이다. 만일 성철스님이 초전법륜경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 보았다면 중도에 대하여 목적론으로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산중불교, 스님불교가 된 이유

 

이와 같이 사성제, 팔정도와 동의어인 중도에 대하여 단지 목적론적 관점, 돈오돈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국불교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산중불교, 스님불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팔정도에 대하여 방법론에서부터 목적론까지 모두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선불교에서는 오로지 목적론이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서 중도를 목적론으로 설명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한국불교에 실천론(방법론)이 부재한 것이다. 오로지 목적론 또는 구경론만 강조 하다 보니 본래불을 찾게 되었고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성불하는 것이라 하였다. 깨달음에 있어서 단계적 과정이 부재한 것이다.

 

한국의 선방에서 이야기 되는 것 세가지

 

한국불교에는 수행에 대한 메뉴얼이 없다. 이는 경전에 의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어느 토론회에서 K스님은 한국의 간화선 수행풍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 하였다.

 

 

첫째, 본래 없다

둘째, 무대뽀 이다.

셋째, 문득 깨닫는다.

 

 

이것이 한국의 선방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이라 한다. 간화선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가르쳐 주는 선지식도 없고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 위와 같이 딱 세가지라 한다. 특히 세번째의 문득 깨닫는다가 돈오돈수를 말하는데, 문득 깨닫기 위해서 단계적 수행이나 매뉴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몰록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하는 믿음이 선방에 있다고 있다. 그런 미련을 아직까지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라 한다.

 

 

 

 

해제

 

 

 

일대일 독참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데

 

이렇게 수행체계 없이 매뉴얼도 없이 무대뽀식의 수행을 하다 보니 물어 볼 선지식도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같은 토론회에서 W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출가하여 봉암사, 해인사 등 선방을 다니면서 일곱철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일대일로 독참하여 지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수행을 하면서 선지식으로부터 일대일 독참 지도를 받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하였다. 다만 송장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 놈이 무엇인고?”하는 등의 화두를 가지고 각자 알아서 정진하는 것이 전체적인 선방분위기라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선방에서 문답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스님은 궁금한 것이 많아 유명선지식을 찾아 떠났다고 했다. 그래서 인천에 있는 Y선원에 방부를 틀고 유명한 S선사에게 배우고자 하였으나 한번도 독참을 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 이유에 대하여 아마도 누군가로부터 험한 경험을 당했을 것이다라고 추측하고 있다.

 

머트럽다라는 말의 의미는?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느 스님은 머트럽다라는 표현을 하였다. ‘머트럽다라는 무슨뜻일까. 인터넷 국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선방에서만 쓰이는 용어 같다. 아마도 다툼이 있어서 서로 껄끄럽다라는 뜻으로 보여진다.

 

선지식과 이를 물어 보는 학인의 관계에 있어서 머트럽다라는 표현은 좋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선지식이 독참하는 것에 대하여 피하고 있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번뇌만 야기 하는 나를 찾는 수행

 

왜 이와 같은 현상이 선방에서 벌어지는 것일까. 이는 깨달음에 대하여 목적론으로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깨달음애 대하여 목적론 또는 구경론으로 본다면 독참하여 말해 주는 것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나를 찾는 수행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나를 찾는 수행을 부정하였다. 삽바사와경(모든 번뇌의 경, M2)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 또는 현세에 이것에 대해 의심한다 - 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삽바사와경-Sabbāsavasutta -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삽바사와경(모든번뇌의 경-M2).docx

 

 

 

이와 같이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탐구하려 하고 의심을 하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경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고, 정신을 써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번뇌가 성장한다.”라고 말씀 하셨다. 나를 찾는 수행이란는 것이 결국 번뇌만 야기 할 것이라는 말이다.

 

매뉴얼화 된 수행체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수행은 방법론과 목적론 모두에  대한 것이다. 이런 수행방법에 대하여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매뉴얼화 되어 있다. 그것이 청정도론이다.

 

청정도론은 빠알리니까야의 주석서이기도 하지만 훌륭한 수행지침서이다. 그래서 선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보고 따라 할 수 있도록 매뉴얼화 되어 있다. 이렇게 수행에 대하여 단계적으로 매뉴얼화 되어 있는 것이 청정도론인데, 이는 ‘7청정과 16단계의 지혜로 요약 될 수 있다. 이를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칠청정과 16단계 지혜

칠청정

16단계 지혜

1

계(sīla visuddhi)

 

네 가지 청정한 계

2

마음(citta visuddhi)

 

근접삼매와 본 삼매

3

(diṭṭhi visuddhi)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4

의심을 극복함

(kakhāvitaraa visuddhi)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5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

6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

(patipadāāadassa visuddhi)

4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

5

무너짐의 지혜(bhaga ñāna)

6

공포의 지혜(bhaya ñāna)

7

위험의 지혜(ādīnava ñāna)

8

역겨움의 지혜(nibbidā ñāna)

9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ā ñāna)

10

깊이 숙고하는 지혜(paisakhā ñāna)

11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

12

수순하는 지혜(anuloma ñāna)

6과 7사이에

13

종성의 지혜(gotrabhu ñāna)

7

지와 견

āadassa visuddhi)

14

도의 지혜(magga ñāna)

15

과의 지혜(phala ñāna)

16

회광반조의 지혜(paccavekkhaa ñāna)

 

 

표를 보면 좌측이 칠청정에 대한 것이고, 우측이 ‘16단계의 지혜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삼학에 대한 것이다. 먼저 계행의 청정(sīla visuddhi)을 이루고, 그 다음에 마음의 청정(citta visuddhi)을 수행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계와 정의 바탕하에 지혜를 이루는 식으로 되어 있다. 최종목표는 당연히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 스승과 제자

 

이렇게 단계별 지혜가 강조되는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는 돈오점수에 대한 것이고,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이 방법대로 하면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단계적 수행과정에서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의 얼굴 표정이 온화하고 은은하며 깨끗하다. 그는 스승을 향해서 공손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할 것이다. 또한 스승에게 예의가 바르고 조용하게 보고 한다. 이는 매우 훌륭한 일이다.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의 수준에서 생멸의 지혜로 올라선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서)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 스승과 제자와의 수행문답장면이다. 비록 책에 써 있는 것이긴 하지만 스승에 대한 제자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제자가 수행중에 겪은 현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 표정이 온화하고 깨끗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스승에게 물었을 때, 스승은 그가 생멸의 지혜에 올라 선 것을 안 것이다. 생멸의 지혜는 위 표에서 4번째 단계이다.

 

이렇게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철저하게 스승과 제자사이에 독참이 이루어지고 매우 공손하고 은은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어디에도 스승과 제자사이에 머트러운일이 일어 날 수 없는 것은 수행체계가 매뉴얼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말로 철저하게 빠알리니까야에 근거하여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날 왜 사람 사는 곳에서 불교가 사라졌는지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목적론(구경론)으로 보느냐 방법론(실천론)으로 보느냐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선불교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는 목적론의 영향으로 인하여 돈오돈수적 깨달음을 지향하기 때문에 산중불교, 스님불교가 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방법론과 목적론 두 가지 영향을 받은 테라와다 불교 전통의 경우 돈오점수적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생활불교, 대중불교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 즉, 사성제와 팔정도의 동의어라고 보는 중도에 대하여 목적론과 방법론 중 어느 것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산중불교와 생활불교, 스님불교와 대중불교로 갈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날 왜 도시에서, 사람사는 곳에서 불교가 자취를 감추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2012-10-28

진흙속의연꽃

끼따기리경(끼따기리 설법의 경-M70).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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