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염오의 대상은 무엇인가, 염오-이욕-해탈론과 사띠(sati)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1. 2. 11:55

 

염오의 대상은 무엇인가, 염오-이욕-해탈론과 사띠(sati)

 

 

 

 

한국불교를 여러단계 레벨업 시킨 각묵스님

 

도시에서, 사람사는 곳에 불교가 자취를 감추다 보니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한다. 그런데 인터넷시대를 맞이 하여 불자들은 동영상이나 음성강의 등으로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것도 2600년 전 부처님의 원음이다. 그런 부처님의 원음을 전달하는 스님이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스님이다.

 

각묵스님은 온라인은 물론 오프라인에서도 유명하다. 특유의 열정적인 강의로 부처님의 원음에 목말라 하는 불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강렬한 경상도 억양으로 강의 하는 스님의 강의는 들을만 하고 박력 있다. 그런 스님의 강의의 특징은 주로 한자어를 섞어서 강의 하는 것이다. 그것도 이해하기 쉽게 축약해서 강의한다. 대표적으로 온처계근제연(蘊處界根諦緣 )’을 들 수 있다.

 

온처계근제연은 무슨말일까.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교학체계를 여섯글자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 , ‘오온 십이처 십팔계 이십이근 사성제 십이연기(5,12,18,22,4,12)’의 준말이다. 이런 긴 용어를 간단히 줄이면 온처계근제연이라 하는데, 이는 단글자로 모든 것을 이미지화 할 수 있는 한자의 특수성 때문이라 한다. 반야심경에서 색수상행식, 고집멸도 등의 용어도 매우 외우기 쉬운 단글자형식으로 이미지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스님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인하여 2000년 이후 한국불교는 한단계가 아니라 여러단계 레벨업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교학과 수행을 병행 하는 재가들자들의 향상이 두드러졌는데, 이런 추세는 결과적으로 한국불교 개혁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염오하면 뭐가 팍 떠올라야 됩니까?”

 

그러나 스님의 강의를 듣다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내용도 있다. 특히 스님이 만든 신조어나 새로운 불교용어에 대해서이다. 스님의 인터넷음성강의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염오하면 뭐가 팍 떠올라야 됩니까? 전봇대! 해체해서 보면 무상, 고, 무아가 보이고 그래서 염오가 일어난다. 염오가 억수로, 억수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염오를 위빠사나라고 설명합니다. 강한 위빠사나. 우리가 왜 위빠사나를 합니까. 결국은 염오를 일으키기 위해서 입니다. 염오가 일어나야, 넌더리를 쳐야 감각적 욕망이 빛 바랜다는 것이죠. 아이고 이영애다, 아이고 김태희다 불끈 쥐고 있는데 무슨 감각적 욕망이 빛바램니까. 염오가 일아나야 탐욕이 빛 바랜다. 탐욕이 빛바랜 것을 도의 단계라 합니다.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 입니다. 도를 얻으면 해탈하게 됩니다. 이 해탈의 단계를 과의 단계라 합니다.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 입니다. 그래서 태어남은 다 했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구경 해탈지가 일어난다. 멋있지 않습니까?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18: 제8장 나는 누구인가-오온II(경들의 분류), 초기불전연구원 2012-07-11)

 

 

초기불전연구원카페에 올려져 있는 음성강의 내용중의 일부이다. 비구니 학인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초기불교에 대한 강의내용인데, 스님은 염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스님은 염오를 일으켜야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염오 하면 전봇대를 떠올리라 한다. 전봇대 옆에 구토한 오물을 생각하게 위해서이다. 그런 오물을 보면 염오감이 일어나듯이, 염오감이 일어나야 다음 단계인 탐욕이 빛바래서 해탈과 열반을 실현 할 수 있는데, 이를 줄여서 한자어로 염오 이욕 해탈이라고 불교관련 신조어를 만들었다. 그래서 스님의 강의를 들어 보면 늘 염오 이욕 해탈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탈을 실현하려면 가장 첫단계가 염오를 일으켜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염오의 대상은 무엇일까?

 

각묵스님의 염오-이욕-해탈론

 

스님이 말한 염오 이욕 해탈의 경전적 근거는 무엇일까. 스님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해체를 통해서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은 초기불전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의 여섯 단계가 된다. 즉 ① (..계로) 해체해서 보기 ② 무상..무아 ③ 염오 ④ 이욕 ⑤ 해탈 ⑥구경해탈지이다. 이제 이 여섯 단계를 조금 더 부연해서 살펴보자.

 

첫째,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존재나 ‘세상’이라는 존재 등의 존재일반을 온..계 등의 법(dhamma)이라는 기준으로 해체해서 설하신다. 그러면 왜 법으로 해체해서 설하시는가? 이렇게 법들로 해체해서 보면 드디어 법들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가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해체해서 드러나는 이러한 법들의 무상..무아는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두 번째 단계이다. 개념적 존재로 뭉뚱그려두면 무상..무아는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라는 존재를 자아니 진인이니 중생이니 하는 개념적 존재로 그대로 두고 보면 영원불변하는 자아나 진인 등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을 색....식의 5온으로 해체해서 보면 무상이나 고나 무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법들의 무상..무아를 아비담마/아비달마에서는 ‘보편적 성질(sa-man~n~a-lakkhan.a)’이라 부르고, 이것을 중국에서는 공상(共相)으로 옮겼다. 그리고 반야.중관, 유식과 화엄에서도 그대로 다 채용해서 강조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셋째, 이렇게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봄으로써 존재일반에 염오(厭惡, nibbida-)하게 된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S22:59 )라고 초기불전의 도처에 나타나고, 주석서는 이 염오를 강한 위빳사나와 동의어(MA.ii.115)라고 설명하고 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산책16] 여섯 단계의 가르침, [불교신문 2618/ 428일자-2010-04-24)

 

 

스님이 불교신문에 기고한 내용이다. 기고문에 따르면 염오-이욕-해탈론에 대한 경전적 근거로서 상윳따니까 무상경(S22:12) 을 들고 있다. 경에서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으로 시작 되는 정형구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무상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하고 심리현상들은 무상하고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도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

 

(상윳따 니까야 무상 경(S22:12), 각묵스님역)

 

 

각묵스님이 번역한 무상경을 보면 물질, 인식 등 오온에 대하여 염오한다고 하였다. 이는 오온이 무상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라는 정형구가 성립되는데, 이런 정형구는 무상경 뿐만 아니라 둑카경(S22:13), 아낫따경(S22:14) 등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번역스타일을 보면

 

스님이 번역한 정형구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염오-이욕-해탈론의 토대가 된다. 그렇다면 다른 번역자는 이를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이 부분에 대하여 전재성박사의 번역과 비교하면 다음 표와 같다.

 

 

빠알리어

전재성 박사

각묵스님

Nibbinda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먼저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보면, 빠알리어 ‘Nibbinda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라고 우리 말로 가급적 풀이하여 번역하였다. 반면 각묵스님은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라고 번역 하여 염오탐욕이라는 한자어를 이용하여 번역 하였다. 같은 빠알리어를 두고 양번역자의 번역 스타일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이와 같은 두 번역의 가장 큰 차이는 사라진다는 의미의 빠알리어 virajjati virāgā (위랏자띠 위라가)이다. 이에 대한 전재성 박사의 주석을 보면,  virajjati viraga  이탐(離貪)을 뜻하기는 하지만 원래 빛이 바래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사라지고, 사라짐으로서' 의 뜻이다.”라 하였다. 그래서 '사라지고' 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virajjati, virāgā의 원래 뜻을 살려 빛이 탐욕이 빛바랜다라고 원래 의미대로 번역 하였다. 이는 직역이라 볼 수 있다.

 

왜 직역하였을까?

 

그렇다면 각묵스님이 이렇게 직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문구에 대한 설명에서 알 수 있다.

 

 

넷째, 염오가 일어나면 탐욕이 빛바랜다(離慾, vira-ga). 주석서는 “‘탐욕의 빛바램(이욕)’이란 도(magga, 즉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를 말한다”(MA.ii.115)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섯째,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vimutti)한다. 주석서는 이것을 과(phala, 즉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의 경지라고 설명한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산책16] 여섯 단계의 가르침, [불교신문 2618/ 428일자-2010-04-24)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염오-이욕-해탈론에서 이욕에 대한 것을 보면, 탐욕의 빛 바램(vira-ga)이란 위빠사나 도(magga)를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해탈(vimutti)한다라는 말은 위빠사나의 과(phala)라 한다.

 

이렇게 각묵스님이 염오-이욕-해탈론에 대한 번역은 주석에 바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주석에 바탕을 둔 번역을 한 결과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라고 번역하였고, 이는 스님의 염오-이욕-해탈론’이라는 새로운 론을 만든 것으로 본다. 이는 주석의 의견을 존종하고 또한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 지어 번역하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염오의 대상은 무엇일까? 스님의 강의나 설명에서 염오의 대상은 존재일반이라 하였다. 경에서는 오온이라 하였다. 그러나 막연한 느낌이다. 

 

무상과 무아에 사무쳐야

 

염오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마음에 들지 않고 싫어서 미워함”이다. 미워하는 감정이 더 큰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무엇을 미워한다는 말일까. 이에 대하여 스님과 초불회원 들간의 대화록을 보았다.

 

 

[대선] 염오와 싫어하는 마음의 차이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각묵 스님] 염오(넌더리)라고 하면 전봇대에 구토해놓은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염오하려면 기본 법수로 해체해서 보아야 합니다. 해체해서 보면 무상·고·무아가 보이고, 그 다음에 염오가 일어납니다. 이어서 이욕, 해탈, 해탈지견이 생깁니다. 염오는 강한 위빳사나, 이욕은 도라고 주석서에 나옵니다.

 

 

[달빛] 무상과 무아를 보면 염오를 일으킨다고 하는데, 무상과 무아를 보면 염오가 왜 필요할까요?

 

[각묵 스님] 정말 무상에 사무쳤다면 무아에 사무쳤다면 그것은 염오가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좋은 질문이십니다.

 

(초기불전연구원 카페, (서경) 8 공부모임 후기)

 

 

회원이 염오에 대하여 묻고 있다. 오온에 대하여 무상, , 무아를 철견하면 되었지 왜 염오를 일으켜햐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무상과 무아에 사무쳐야 된다고 말한다.

 

사무친다는 말은 넌더리를 친다는 말과 같고 이는 전봇대 옆의 구토한 오물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막연하다. 구체적으로 어느 대상에 대하여 염오 해야 하는 것일까. 

 

염오의 대상은 무엇인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염오하고 이욕하는 단계는 필요할 것이다. 그런 염오의 대상에 대하여 가장 먼저 세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일 세상이 염오의 대상이 세상이라면, 그는 염세주의자로 몰릴 것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탐욕이 빛 바래서 해탈과 열반도 실현 할 수 없을 것이다. 불교는 염세주의자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염오의 대상에 대하여 자기자신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이는 자기혐오에 대한 것이다. 자기자신이 싫은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을 보았을 때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알고 수행을 포기 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자신을 혐오 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그러나 그 마음은 그 때 그 순간의 마음일 뿐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염오의 대상이 자기자신이 될 수 없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나의 것, 나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싫어함의 대상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염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세상도 아니고 자신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염오의 대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부처님의 말씀을 들 수 있다.

 

 

Kā ca bhikkhave, virāgassa upanisā? Nibbidātissa vacanīya. Nibbidampaha bhikkhave saupanisa vadāmi, no anupanisa.

 

수행승들이여, 갈애를 떠남의 연유는 무엇인가? 싫어하여 떠남이 그 대답일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싫어하여 떠남에는 연유가 있으며 연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우빠니사경- Upanisasutta-연유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3(S12.3.3), 전재성님역)

  

우빠니사경(연유의 경-S12.23).docx

 

 

Bodhi Tree

 

 

전재성박사의 번역 우빠니사경을 보면 ‘싫어 하여 떠남’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말은 각묵스님의 번역어 ‘염오 이욕’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경을 보면 싫어 하여 떠남의 원인이 되는 것이 ‘갈애의 떠남’이라 하였다. 이는 싫어 함, 염오의 대상이 갈애라는 말과 같다. 염오의 대상은 세상도 아니고 자신도 아닌 ‘갈애’와 같다는 것이다. 

 

갈애는 빠알리어 라가(rāga)의 번역어이다.  빠알리 라가(rāga)는 ‘빛깔’이라는 뜻이 있고 또 ‘탐욕’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접두어 vi가 붙어 virāga가 되면 ‘사라짐’ ‘색이 바램’ ‘탐욕에서 벗어남’의 뜻이 된다. 그래서 ‘갈애를 떠남의 연유(upanisā)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싫어 하여 떠남(Nibbidampaha)’이 그 답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싫어 함의 대상, 떠남의 대상은 세상이나 자신이 아니라 탐욕으로 대표 되는 갈애라 볼 수 있다.  그런 갈애는 십이연기에서의 갈애(tanha)’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초전법륜경 멸성제에서도

 

이렇게 염오의 대상이 세상도 아니고 자기자신도 아닌 갈애라는 명확한 대상이 생겼을 때, 이 갈애만 소멸시키면 해탈과 열반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도 알 수 있다.

 

 

Ida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o ariyasacca: yo tassāyeva ta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inissaggo mutti anālayo.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초전법륜경에서 멸성제에 대한 부분이다. 부처님은 갈애를 소멸시키는 것이 해탈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 하시고 있다.

 

갈애를 어떻게 소멸해야 하나?

 

그렇다면 그런 갈애는 어떤 방법으로 소멸시켜야 하는가. 이는 우빠니사경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무명을 연유로 형성이 이루어지고,

형성을 연유로 의식이 이루어지며,

의식을 연유로 명색이 이루어지고,

명색을 연유로 여섯 감역이 이루어지며,

여섯 감역을 연유로 접촉이 이루어지고,

접촉을 연유로 감수가 이루어지며,

감수를 연유로 갈애가 이루어지고,

갈애를 연유로 취착이 이루어지며,

취착을 연유로 존재가 이루어지고,

존재를 연유로 태어남이 이루어지며,

태어남을 연유로 괴로움이 이루어지고,

괴로움을 연유로 믿음이 이루어지며,

믿음을 연유로 만족이 이루어지고,

만족을 연유로 희열이 이루어지며,

희열을 연유로 청정함이 이루어지고,

청정함을 연유로 지복이 이루어지며,

지복을 연유로 삼매가 이루어지고,

삼매를 연유로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 이루어지며,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을 연유로 싫어하여 떠남이 이루어지고,

싫어하여 떠남을 연유로 갈애를 떠남이 이루어지며,

갈애를 떠남을 연유로 해탈이 이루어지고,

해탈을 연유로 소멸에 관한 지혜가 이루어진다."

 

(우빠니사경- Upanisasutta-연유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3(S12.3.3), 전재성님역)

 

 

우빠니사경에서는 십이연기의 순관을 말하면서 역관이 아닌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괴로움 다음에 괴로움을 연유로 믿음이 이루어지며 …”하는 순이다. 이를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믿음-만족-희열-청정함-지복-삼매-있는 그대로 알고 봄-싫어하여 떠남-갈애를 떠남-해탈소멸에 관한 지혜 순으로 되어 있다.

 

싫어하여 떠남은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즉, 무상, , 무아로 보았을 때 이루어지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갈애 때문이다. 싫어 하고 떠나야 될 대상, 염오의 대상을 갈애로 본다. 이런 갈애가 강화되면 집착으로 발전한다.  

 

한 번 붙으면 떨어지지가 않아

 

집착 중에 가장 큰 집착이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이를 한자어로 오취온이라 한다. 그래서 아닛짜경, 둑카경, 아낫따경에서 오온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집착은 다름 아닌 갈애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십이연기에서 집착은 갈애의 다음 단계이다. 그런 집착은 일반적으로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된 것이 집착이라 한다. 집착을 빠알리어로 우빠다나라 하는데, 이는 한 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오온에 대한 집착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 한다. 이와 같은 집착이 일어나는 이유는 갈애 때문이다. 그런 갈애는 어떤 것일까. 경에 따르면 감각적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에 이렇게 세가지이다.

 

이런 갈애로 인하여 존재가 윤회하게 되는데, 이런 갈애를 소멸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갈애가 발생 되기 이전 단계에서 조치 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느낌이다.

 

종교성을 배제한 존 카밧진의 명상기법 MBSR

 

최근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 존 카밧진 교수의 MBSR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MBSR은 불교의 명상기법을 정신치료에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종교성을 배제하였으므로 불교적 명상이라 보기 어렵다. 명상기법만 가져간 것이다.

 

그런데 존 카밧진의  MBSR명상을 소개하는 기사내용을 보니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빠알리어 사띠(sati)를 영어로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 하는데, 이를 마음챙김이라 옮긴 것이다. 과연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수행에 적합한 용어일까? 특히 느낌과 관련하여 적합한 용어일까?

 

왜 느낌이 중요한가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근본 요인이 갈애라 하였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요인이 무명과 갈애이지만, 무명은 과거의 원인이고, 갈애는 미래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초전법륜경에서도 갈애의 소멸이 괴로움의 소멸이고 동시에 윤회의 종식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 갈애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십이연기에 따르면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생겨난다고 하였다. 그런 느낌은 좋다, 싫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런 느낌을 알아차렸을 때 갈애로 발전되지 않는다. 그래서 수행처에서는 느낌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느낌의 단계를 지나 갈애로 발전 되면 이미 늦는다. 더구나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되어 집착이 되면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 그대로 새로운 탄생(업유)으로 나아 갈 수 밖에 없다.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몸과 마음 자체가 집착의 산물로 본다. 그래서 오취온이라 한다. 따라서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려야 한다.

 

수행처에서 사용하는 말은 알아차려라!”이다. 좋으면 좋네라고 알아차리고, 화가 나면 화가 났네라고 알아차리라고 한다. 갈애로 넘어 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띠(sati)이다. 

 

마음은 알아차릴 대상인가 챙겨야할 대상인가

 

그런데 사띠를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느낌을 알아차려라” “성내는 그 마음을 알아차려라라는 말 대신에 느낌을 마음챙겨라” “성내는 그 마음을 마음챙겨라라고 하는 이상한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이는 마음챙김이라는 용어의 모순이다. 마음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늘 변화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다. 그런 변화무쌍한 마음을 마음챙겨라고 말하는 것은 비불교적이다. 마음을 마음챙기는이중적 모순에 빠지고 만다.

 

마음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늘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챙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단지 그 변화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처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느낌에 대하여 알아차려라!”라고 말하지 마음챙겨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마음챙김은 간화선에서 말하는 화두챙김과 같은 말이라 본다. 화두는 늘 챙겨야 할 대상이지 알아차리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빠사나 명상에서 마음을 챙겨라 하는 것은 대단히 모순되는 말이다. 마음은 알아차릴 대상이지 챙겨야 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 차리지 않으면

 

 한국불교를 여러 단계 레벨업 시킨 각묵스님은 염오-이욕-해탈론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염오를 일으켜야 한다고 하는데 전봇대!”를 기억하자고 말하기도 한다. 구역질 나는 배설물을 보면서 염오를 일으킬 것을 우스개말로 표현 한 것이다. 그러나 염오를 일으키기 위하여 전봇대를 생각하라는 것은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고 염오해야 할 대상이 세상이라거나 자기자신이 될 수 없다.

 

경에 따르면 싫어 하고, 염오하고, 혐오해야 될 대상은 갈애라 본다. 또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되어 떨어지지 않는 집착이다. 그러나 모든 괴로움의 직접적인 발생 원인은 갈애에 있다. 그런 갈애의 원인은 느낌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느낌 단계에서 알아 차리지 않으면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느낌은 알아차릴 대상이지 마음챙겨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2012-11-02

진흙속의연꽃

우빠니사경(연유의 경-S12.23).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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