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그 때 그 마음이 누구 마음이냐?” 아라한으로 인도한 빤짜왁기야경(S22:59, 무아상경)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0. 31. 17:45

 

그 때 그 마음이 누구 마음이냐?” 아라한으로 인도한 빤짜왁기야경(S22:59, 무아상경)

 

 

 

 

수행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행한다고 말하지 말라수행처에서 듣던 말이다. 수행한다고 떠 벌리고 돌아 다녀 보았자 하나도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칭찬은 커녕 대부분 한 마디씩 한다. “수행한다는 사람이 저 모양이다라느니 언행이 일치 안된다느니 하는 말들이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 있으면 다행이다.

 

수행기를 남겼는데

 

지난 2008년 말 위빠사나 수행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그 때 수행기 형식으로 기록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다.

 

 

수행 중에 특별한 변화를 느끼지는 못하였다. 다리가 저리고 시간이 매우 더디게 지나가는 것을 느꼇을 뿐 인터뷰 하는 사람들처럼 특이한 경험은 없었다. 온갖 잡생각과 잡념만 떠 오를 뿐 마음 집중은 좀처럼 되지 않았고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수행이 진전되면 인터뷰 하는 사람처럼 수행의 묘미를 느낀 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좀 더 진전 되면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인간이라는 것도 또 다른 사람의 강의를 들어서 알고 있다.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거나 머리로 이해 하려는 것과 수행과는 다를 것이다. 나에게도 인터뷰 하는 사람처럼 특별한 체험을 느낄 수 있을지 또는 내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 이었던 가를 느낄 날이 올 수 있을까.

 

( [위빠사나 수행기1] 나도 수행을 있을까, 2008-12-28, 진흙속의연꽃)

 

 

수행처 첫날 기록이다. 매주 토요일 한 번 있는 것인데 법문과 경행, 좌선, 인터뷰 순으로 이루어졌다. 토요일 저녁 6시부터 9 30분까지 3시간 30분간이다. 인터뷰가 길어 지면 10시 가까이 끝나기 일쑤이었다.

 

첫날 기록에서 수행이 진전 되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을 기대했었다. 이런 말은 김시태 교수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법회 모임에 김진태 교수를 초빙하여 한 달에 한번 씩 1년 동안 불교강의를 들었다. 1990년대 미얀마에서 수행하고 온 김교수는 수행 위빠사나 수행지도도 하고 있었는데, 집중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김교수에 따르면 자신이 수행지도자로 있는 곳에서 집중 수행중 어느 수행자가 짐을 싸 가지고 가려 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수행을 하면 할수록 자기자신이 혐오 스러워서 더 이상 수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 이야기가 생각나서 수행처에서의 첫날 소감에 자신에 대한 혐오 이야기를 썼다.

 

마지막 날 소감문

 

수행처에서 1년이 지난 후 마지막 소감을 다음과 같이 올렸다.

 

 

수행을 하면 큰 변화가 있을 줄 알았다. 일종의 수행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빛이 보인다거나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에 호흡을 볼 수 있었다. 몸의 감각이 사라지고 호흡만 남은 듯한 그런 상태를 말한다.

 

더 깊은 수행의 경지로 가려면 아마 집중수행이 필요 할 것이다. 집중수행은 수행처에 입소 하여 10일간 경행과 좌선만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생업에 종사 하는 사람이 10일간 시간을 내기란 여간 해서 쉽지 않을 것이다.

 

(수행처에서 1년간, 무명과 갈애를 극복 하려면, 2009-12-12, 진흙속의연꽃)

 

 

수행처에서 일년간 보낸 것에 대한 마무리 글을 작성한 것이다. 50회 가까운  법문을 듣고 경행과 좌선을 하였지만 뚜렷한 변화를 보지 못한 것이다.

 

수행처에서 첫날 기대하였던 내가 얼마나 더러운 놈이라는 것을 보기를 기대하였으나 못 본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허락되면 집중수행이라도 하여 보기를 바랬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인가?”

 

인터넷에서 묘원법사의 수행이야기를 들었다.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프로에서 초대손님으로 나온 묘원법사가 위빠사나 수행 전반에 대하여 시리즈로 들려 주는 형식이다. 그런데 4편에서 묘원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도 수행을 하면서 제 마음을 봐요. 그런데 제 마음이 그렇게 더러울 수가 없어요. 그 때 저는 수행을 포기 한 적도 있었어요. 내가 수행을 오랫동안 했는데 부처님께서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인가?’라고 스스로 혐오감을 느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 사실을 스승 한테 말씀 드렸어요. 그랫더니 그 때 그 마음이 누구 마음이냐그래서 제가 무릎을 쳤죠. ‘아닙니다. 제 마음이. 그 순간의 마음입니다라고 그것을 새로 보는 마음을 내서 지혜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 몸과 마음이라고 여기게 되면 비관하게 되요.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 지금은 수행시대 - 위빠사나4., 2012-10-23, 묘원법사)

 

 

묘원법사는 부정관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마음 보는 이야기를 하였다. 미얀마에서 수행중에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았더니 자신의 마음이 더러워서 더 이상 수행을 계속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중에  포기 하였다는 것이다. 김시태 교수의 이야기와 동일하다. 자신의 마음을 보니 자신이 너무 형편 없어서 몹시 혐오 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 났다. 그런 사실을 사야도에게 물었더니 그 때 그 마음이 누구 마음이냐라는 한 마디에 무릎을 쳤다고 한다. 그 때 그 마음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그 순간의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달마대사의 안심법문을 생각나게 한다. 혜가가 달마에게 마음이 괴롭다고 하자 그 마음을 가져와 봐라하였을 때 크게 깨우쳤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마음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고정 불변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때 그 때 상황과 조건에 따른 임시적인, 일시적인 마음 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누구나 몸과 마음이 자신의 것이라고 알 고 있다. 그래서 내 몸, 나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몸과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다.

 

어떻게 승가가 탄생하였나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라고 읊으신다. 그리고 존자 꼰당냐는 앙냐 꼰당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라는 구절로 초전법륜경이 끝난다. 그런데 율장 대품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어떻게 승가가 탄생하였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를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진실로 아냐시 꼰단냐는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체득했고, 법을 간파했고, 의심을 건넜고, 혼란을 제거했고, 무외無畏 얻었고, 스승의 교법에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찬탄의 말씀을 하시자, 꼰단냐 존자는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율장 마하왁가,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에서)

 

 

경장에는 없고 율장에만 있는 내용이다.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듣고 법안이 열린 꼰단냐가 부처님에게 구족계를 받고자 요청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labheyyāha bhante bhagavato santike pabbajJ labheyya upasampadanti)”라고 요청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구족계는 깨달음을 얻어야 가능한 것으로 본다.

 

구족계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구족계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주석을 참고 하였다.

 

 

 구족계

  

‘구족계(具足戒)’라 번역한 우빠삼빠다(upasampada) upa(위로)+sa(함께)+pad(가다)의 합성어이다. PED에서는 ‘(in special sense) taking up the bhikkhuship, higher ordination, admission to the privileges of recognized bhikkhus.’라고 설명되듯이, 승가에 입문하여 비구(bhikkhu) 또는 비구니(bhikkun)가 되고자 할 때 반드시 받아 지녀야 하는 계율이다.

 

상좌부의 비구계는 227가지, 비구니계는 311계로 이루어져 있다. 사미 또는 사미니가 받는 10계와 비교하여 계품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뜻에서 중국에서 구족계(具足戒)라고 번역한 듯하다.

 

현재 상좌부 전통에서 행하고 있는 이 구족계 수계의식은 부처님 당시와 거의 같다. 구족계를 받으려면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즉 나이는 20세가 넘어야 하고,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하며, 병역에서 면제되어야 하고, 부채가 없고 전염병에 걸리지 않아야 하는 것 등이다.

 

구족계 수계의식은 우기(雨期)의 하안거 기간(vassa)을 제외하고는 길일(吉日)이라고 생각되는 어느 때라도, 그리고 이미 구족계를 수지한 승려가 참석한 신성한 장소라면 어느 곳에서라도 행할 수 있다.

 

다만 구족계를 받을 때에는 특별한 수계작법이 있다. , 삼사칠증(三師七證:삼사는 계율을 직접 설하는 수계아사리, 계율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교수아사리 그리고 갈마아사리를 말하는 것이며, 칠증은 수계의식이 원만히 이루어졌는가에 대하여 증명해주는 법사 7)을 모시고 위의를 갖추어 설하게 되어 있다.

 

(구족계 <초전법륜경> 3, 마하시 사야도 법문집 주석)

 

 

구족계는 비구나 비구니가 되고자 할 때 받는 계율이라 한다. 그래서 비구의 경우 227, 비구니의 경우 311계를 완전히 갖춘다는 의미에서 구족계라 한다.

 

깨달은 자만이 구족계를

 

그런데 율장 대품을 보면 깨달음을 얻은 꼰단냐가 구족계를 요청하는 것으로 보아 깨달은 자만이 구족계를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시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때 꼰단냐 존자는 부처님 승가에 입문, 허락을 요청했을까요? 그 해답은, 꼰단냐 존자가 소위 현법(現法, 법을 봄, diṭṭha-dhamma)이라고 통칭되는 공덕과 자질들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현법現法 등의 공덕을 완전히 구비한 꼰단냐 존자는 법을 보았기 때문에 부처님께 구족계를 청했습니다. 그는 네 가지 진리의 멸제滅諦 보았습니다. 다른 말로, 열반을 실현하였습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제8)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다섯명의 수행자 중에 꼰단냐 만이 구족계를 받겠다고 요청한 것은, 꼰단냐가 열반을 실현 하였기 때문으로 본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라고 인정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오너라, 비구여”

 

이와 같이 부처님의 사성제를 완전히 이해하고 동시에 깨달음을 이룬 꼰단냐가 구족계를 요청하고 제자가 되겠다고 하자 부처님은 무어라고 말씀 하셨을까. 율장 대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오너라, 비구여” “법은 잘 설해졌다. 와서 괴로움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 계율 집중, 지혜의 출세간의 수행을 닦도록 하여라.

 

(율장 마하왁가,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에서)

 

 

최초로 비구가 탄생하는 장면이다. 부처님은 “오너라, 비구여(Ehi Bhikkhu)” 라는 말과 함께 구족계를 주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초대의 말씀자체가 구족계를 준 것이다. 그래서 꼰단냐는 불교역사상 최초의 비구가 되었고 또한 최초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새가 알을 품듯

 

그런데 아직 남아 있는 네 명의 수행자가 있었다. 꼰단냐(Kondañña) 이외에 와빠(Vappa), 바띠야(Bhaddiya), 마하나마(Mahanama), 아싸지(Assaji) 이렇게 네 명이다. 부처님은 이들 네 명에게도 가르침을 주셨다. 율장 대품에는 이들 네 명의 수행자를 교화시키는 장면이 묘사 되어 있다.

 

 

“‘오너라, 비구여!’라는 말씀으로 와빠 존자와 바띠야 존자에게 승가에 들어올 것을 하락하신 부처님께서는 직접 탁발을 나가지 않고 남아있는 마하나마 존자와 아싸지 존자에게 법을 가르치고 지도하셨다.

 

세 명의 비구는 탁발을 나갔고 세존을 포함한 여섯 명 모두는 이들 세 명의 비구가 가져온 음식으로 연명하였다. 세존에게서 그렇게 법에 대한 지도와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마하나마 존자와 아싸지 존자에게는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소멸하게 되어있다.’라고 하는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들 마하나마 존자와 아싸지 존자는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에 도달하였으며, 확실하게 이해되었고, 법을 꿰뚫어 관통하였으며, 혼란에서 벗어나 모든 의심에 벗어났으며, 망설임과 우유부단, 결단력 없음에서 벗어나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의 용기(無畏)를 얻어, 가르침에 관하여 남에게 의지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부처님께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하게 되었다.

 

‘존자시여. 저희는 부처님 앞에서 사미로써 출가자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승가에 들어가고자 합니다.(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법은 잘 설해졌다. 괴로움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 와서 출세간의 길을 닦도록 하여라.

 

세존의 이 초대 말씀은 곧 수계식을 행한 것과 같은 것이었고 이에 따라 마하나마 존자와 아싸지 존자는 부처님의 승가의 비구가 되었다.

 

(율장 마하왁가,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에서)

 

 

이 부분을 보면 마치 새가 알을 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새에 대한 다큐프로를 보면 새가 알을 낳고 난후 지극정성으로 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다섯명의 수행자 역시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정성을 다해 교화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도 탁발을 걸러 가면서 까지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설명한다.

 

마침내 네 명의 수행자 모두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부처님은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 다시 한 번 틀림 없음을  확인 한다. 마치 의사가 자신이 발견한 이론을 임상에 적용하여 틀림 없음을 확인하는 듯한 장면이다.

 

 

알을 품어 차례로 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네 명의 수행자들이 차례로 모두 깨닫게 되자  그들은 모두 구족계를 요청한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꼰단냐에게 말했던 것처럼 오너라, 비구여하며 초대하였다. 이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은 자가 모두 다섯명이 되었다.

 

아라한의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하지만 이는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진리의 눈, 법의 눈이 열린 수다원의 도와 과에 불과하다. 부처님의 경지인 아라한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설법이 필요 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와쏘의 하현 달 다섯째 날 부처님께서는 다섯 비구 모두를 한자리에 불러 모아 그들에게 무아상경을 설하셨습니다. 그 법문을 듣는 동안 다섯 비구들은 오취온을 지켜보고 위빠사나의 도를 계발하여 모두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제8)

 

 

부처님은 무아상경을 설함으로서 다섯비구들이 한꺼번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율장 대품에 따르면 그때 무아상경이 설해지자, 이 세상에는 부처님을 비롯한 여섯 분의 아라한들이 계셨다. 참으로 경이롭고 희유(稀有) 일이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이 세상에 부처님의 경지와 동일한 깨달음을 얻은 자가  여섯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비구를 아라한으로 만든 무아상경이란 어떤 가르침일까.

 

아라한으로 인도한 빤짜왁기야경(Pañcavaggiya sutta, 무아상경)

 

무아상경은 빠알리어로 빤짜왁기야경(Pañcavaggiya sutta)이다. 상윳따니까야 칸다상윳따(Khandha Sayutta)에 실려 있다. 우리말로 다섯 명의 경’으로 번역되어 있다. 다섯비구에게 부처님이 무상, , 무아에 대한 가르침을 펴신 것이다.

 

이 빤짜왁기야경은 부처님이 두 번째로 설한 경으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 설한 것이 초전법륜경인데 이 경을 통하여 법의 눈이 열리게 한다음, 두 번째 가르침인 빤짜왁기야경을 설함으로서 모두 아라한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런 경은 어떤 내용일까. 전문을 올렸다.

 

 

한때 세존께서 바라나씨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다섯 명의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물질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감수는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감수가 나라면 이 감수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감수에 대하여 '나의 감수는 이렇게 되라. 나의 감수는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감수는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감수가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감수에 대하여 '나의 감수는 이렇게 되라. 나의 감수는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지각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지각이 나라면 이 지각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지각에 대하여 '나의 지각은 이렇게 되라. 나의 지각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지각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지각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지각에 대하여 '나의 지각은 이렇게 되라. 나의 지각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형성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형성이 나라면 이 형성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형성에 대하여 '나의 형성은 이렇게 되라. 나의 형성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형성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형성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형성에 대하여 '나의 형성은 이렇게 되라. 나의 형성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의식이 나라면 이 의식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의식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감수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각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형성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의식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물질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감수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감수는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지각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지각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형성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형성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의식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의식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고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감수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 는 지혜가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라고 그는 분명히 안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다섯명의 수행승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에 환희하여 기뻐했다. 그리고 이러한 설법이 행해지는 동안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의 마음은 집착없이 번뇌에서 해탈했다.

 

 

(빤짜왁기야경-Pañcavaggiya sutta- The Five –다섯경-무아상경, 상윳따니까야 S21.1.2.1.7, 전재성님역)

 

  빤짜왁기야경(다섯경- 무아상경-S22-59).docx

  무아의 특징 경(S22-59)-각묵스님역.docx

 

 

 

Anantalakkhana

 

 

이것이 부처님이 두 번째로 설한 경으로서 이 가르침을 듣고 다섯비구가 모두 아라한이 되게 한 경이다. 이는 경의 말미에 있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라는 아라한 선언과 마지막 구절인 "이 설법이 행해지는 동안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의 마음은 집착없이 번뇌에서 해탈했다.(masmiñca pana veyyākaraasmi bhaññamāne pañcavaggiyāna bhikkhūna anupādāya āsavehi cittāni vimuccisūti.)"라는 내용으로 알 수 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

 

경에 따르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로 분해 하여 그 어떤 것도 나의 것, 나의 마음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물질에 대하여 이렇게 되라 저렇게 되라 말 할 수 없는 것이 나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결국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나의 몸이라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내 의지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아라 하였다.

 

이렇게 내 것이 아님을 설명하고 난 다음 부처님은 문답식으로 무상과 괴로움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내 것이 아니고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는 가르침을 편다.

 

이 가르침을 듣고 다섯비구는 모두 아라한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아라한 여섯명이 되었다.

 

그 때 그 마음이 누구 마음이냐?”

 

누군가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특히 미워하는 사람으로부터 들을 때 속된 말로 뚜껑이 열릴 지경이다. 그럴 때 누가 화를 내는 것일까. 마음이 불안하여 안절부절 못할 때가 있다. 이 때 누가 걱정하는 것일까.

 

수행을 하는 중에 자신의 마음을 보았을 때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워 수행을 중단 하였다는 말이 있다. 이 때 그 때 그 마음이 누구 마음이냐라고 물었을 때 커다란 깨달음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 때 그 마음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그 순간의 마음이었다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치 하는 것이다. 빤짜왁기야경에서도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Viññāa bhikkhave, anattā, viññāañca hida bhikkhave, attā abhavissa nayida viññāa ābādhāya savatteyya, labbhetha ca viññāe "eva me viññāa hotu, eva me viññāa mā ahosī'ti.

Yasmā ca kho bhikkhave, viññāa anattā, tasmā viññāa ābādhāya savattati. Na ca labbhati viññāe "evamme viññāa hotu, evamme viññāa mā ahosī"ti.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의식이 나라면 이 의식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의식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빤짜왁기야경-Pañcavaggiya sutta- The Five –다섯 명의 경-무아상경, 상윳따니까야 22:59, S21.1.2.1.7, 전재성님역)

 

 

 

2012-10-3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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