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내 등에 짐이 있기에, 바라경(짐의 경, S22:22)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1. 7. 12:52

 

내 등에 짐이 있기에, 바라경(짐의 경, S22:22)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 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등이 없었다면으로 시작되는 시이다. 복지관련기관 로비에서 본 것이다.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정호승 시인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연탄지게꾼의 형형한 눈빛

 

연탄불에 의존하던 시절이 있었다. 연탄보일러 이전의 시대이다. 그 때 당시에 누구나 연탄을 때며 한 겨울을 보냈는데, 특히 달동네’ ‘산동네라 불리우던 고지대에서 겨울은 가혹한 것이었다. 그래서 추위가 닥치기 전에 ㅂ 부엌 한켠에 연탄을 수 백장 가득 쌓아 놓는 것이 보통이었다.

 

고지대의 경우 길이 좁고 가파르다. 수 백장이나 되는 연탄을 나르기 위해서는 지게꾼이 필요했다. 그래서 도로가에 있는 연탄공장 또는 연탄배급소에서 지게꾼이 고지대까지 지게에 가득 연탄을 지고 날라야 했다.

 

 

 

 

지게

 

 

연탄지게꾼이 진 연탄의 무게는 매우 무거운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온 힘을 다하여 내딛으며 비탈길을 올라가는 지게꾼의 거친 숨소리와 땀방울, 그리고 형형한 눈빛이 떠오른다. 그것도 10대 후반이나 스므살 이전의 젊은 지게꾼이었다. 그런 연탄지게는 삶의 지게일 뿐만 아니라 무거운 인생의 등짐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몇 년후 그 지게꾼은 커다란 트럭운전수로 변해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자그마한 체구와 연탄을 가득 실은 커다란 트럭과 매우 대조 되었다.

 

공사판의 질통

 

학교 다닐 때 친구가 있었다. 지방에서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온 친구이었다. 그러나 집안형편이 좋지 않아 자신의 힘으로 살아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학비를 벌기 위하여 닥치는대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다 하였다. 그 중에 공사판도 있었다.

 

그 친구는 방학철 공사판에서 질통을 매기도 하였다. 그렇게 한철 일하고 나면 학생신분으로서는 꽤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 돈으로 다음 학기를 살 밑천을 마련 한 것이다.

 

공사판에서 질통은 힘든 등짐이다. 마치 연탄지게처럼 질통에 자갈이나 모래를 가득 담고 가파른 경사판을 한 발 한 발 올라 가는 것이다.

 

형형한 눈빛과 함께 땀에 범벅이 되어 거친숨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 갈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런 질통정신의 산물이서일까 그 친구는 부자가 되었다. 

 

연탄지게꾼의 등짐과 공사판의 질통은 보통사람들로서는 좀처럼 경험 할 수 없는 삶의 무게이다. 등에 짐을 가득 싣고 한 걸을 한 걸음 힘겹게 옮겼을 때 등을 짖누르는 무게만큼 육체적 고통은 가중 되었을 것이고 그 고통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고통이 있었기에 트럭운전사가 되었고 나중에 부자가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등짐은 늘 조심하고 성실하게 바르게 세상을 살 수 있도록 이끈 귀한 선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내 등에 짐이 있기에

 

누구나 짐을 지고 살아 간다. 그 짐이 작은 짐을 수도 있고 큰 짐일 수도 있다. 또 가벼운 짐일 수도 있고 무거운 짐일 수도 있다. 때로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에 짐이 있다는 사실은 시에서와 같이 나를 바르게 살게 한 귀한 선물이 될 수 있다.  

 

내 등에 짐이 있었기에 세상을 바르게 살 수 있고, 그 짐의 무게로 인하여 남의 고통도 느낄 수 있고, 그 등짐 때문에 인생의 거센물결도 건널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등에 짐이 있다는 것은 귀한 선물이 될 수 있고 어쩌면 축복이 될 수 있다.  

 

그런 짐의 종류는 많다. 인연으로 맺어진 가족의 짐이 있고, 이를 부양해야 할  직장의 짐이 있고, 사회적 역할을 필요로 하는 나라의 짐이 있다. 이런 짐으로 인하여 고통스럽지만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양면성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등짐이 너무 무거우면 벗어나고 싶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게 되었을 때

 

누구나 하루 하루 힘겹게 세상을 살아 간다. 어떤 이는 삶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워 마치 형벌 같은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이는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등에 감당할 수 없는 짐이 실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종종 교회 담벼락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로 시작되는 문구를 볼 수 있다.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강력한 메시지이다. 이런 메시지는 바이블에 실려 있는 수고하 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 28-30)”문구로 표현 된다.

 

이런 메세지는 세상에서 열심히 산다고 했는데 되는 일이 없을 때, 각종 근심과 걱정 등으로 고달프고 실의와 좌절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메아리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창조주에게 믿고 의지하고 모든 것을 맡겨 버린다. 감당하기 어려운 등짐을 떠넘겨 버린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이 부담이 있을 때 털어 버리면 홀가분하다. 그리고 잘 되지 않을 때 포기하면 역시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신적 부담을 누군가에게 떠 넘겼을 때 역시 마음이 편안해지고 홀가분해짐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런 대상이 유일신교에서는 창조주이고, 대승불교라면 불보살일 것이다. 그러나 자각의 종교인 불교에서 타자에게 떠 넘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

 

짐에는 등짐과 같은 육체적인 짐도 있지만 마음의 짐도 있다. 더구나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짊어졌을 때 사람들은 낙담하고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럴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초월적 존재에게 의존하고 떠 넘기는 방식이다.

 

신에게 의지하는 방식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는다. 하지만 그때 뿐이다. 현실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또 낙담하고 절망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짐을 내려 놓을 수 있을까.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위하여 짐과 짐꾼과 짐을 짊어지고 내려놓는 것에 관해 설할 것이니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이라고 부르는가? 다섯가지 집착다발을 짐이라고 부른다. 다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예를 들어 물질의 집착다발, 느낌의 집착다발, 지각의 집착다발, 형성의 집착다발, 의식의 집착다발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들을 짐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꾼이라고 부르는가? 사람을 짐꾼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이름, 이와 같은 성씨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짐꾼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재생을 가져오고 향락과 탐욕을 수반하며 여기저기에서 환희하는 갈애이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짐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하는가?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되고 포기되고 방기되어 집착 없이 해탈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짐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한다.”

 

(바라경-Bhāra sutta-짐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22(3-1), 전재성님역)

 

  바라경(짐의 경-S22.22).docx

 

 

 

부처님은 짐과 짐을 내려 놓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유일신교 처럼 수고하 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처럼 메시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 해결방법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사성제이다. 

 

사성제와 비교해 보니

 

경에서 부처님은 짐과 짐꾼, 짐을 짊어지는 것, 짐을 내려놓는 것에 대하여  사성제와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핵심어 사성제

( bhāra)
다섯가지 집착다발
(pañcupādānakkhandhā,오취온)
고성제
짐꾼
( bhārahāra)
사람
(puggala)
짐을 짊어지는 것
(bhārādāna)
갈애
(tahā)
집성제
짐을 내려놓는 것
(bhāranikkhepana)
해탈
(mutti)
멸성제

 

 

짐과 짐꾼은 고성제, 짐을 짊어지는 것은 집성제, 짐을 내려놓는 것은 멸성제에 해당 된다. 짐을 내려 놓는 방법에 대한 것 즉, 도성제는 경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성제는 도성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성제를 이해하고 팔정도를 실천하면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고성제의 핵심 오취온(pañcupādānakkhandhā)

 

짐과 짐꾼은 고성제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 짐(bhāra)은 고성제에서의 오취온(pañcupādānakkhandhā)’인 것을 알 수 있다. 오취온 고성제에서 핵심단어이다. 초전법륜경에서 고성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담마짝깝빠왓따나경(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S56.11).docx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생노병사등 사고와 팔고 등의 괴로움이 모두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오취온)에서 기인한다고 하였다. 그런 오취온은 무엇일까.

 

오취온은 오온에 대하여 나, 나의 것으로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집착은 반드시 괴로움을 야기 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존재를 윤회하게 만든다. 그래서 모든 중생계는 반드시 집착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아라한이 되면 집착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다시는 윤회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아라한이 되면 오취온이 떨어져 나가게 되어 오온과 오취온은 다른 것이 된다. 그러나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고 여기는 집착이 있는 한 오온과 오취온은 같은 말이 된다. 이와 같은 오취온에 대하여 경에서는 짐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자아라고 오해될 수 있는 짐꾼(bhārahāra)

 

짐이 있다면 짐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연탄지게나 질통이 짐이라면 이를 나르는 사람을 말한다. 경에서는 짐꾼(bhārahāra, 바라하라)이라 하였다. 그리고 짐꾼은 다름 아닌 사람(puggala, 뿍갈라)이라 하였다.

 

고성제로 설명되는 짐과 짐꾼의 관계에 있어서 종종 짐꾼이라는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바라경에 대한 해제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짐이란 경에서는 종종 후대의 불교에서 자아의 존재로서 오해되어 왔던 짐꾼(bharaharo)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거기서 짐꾼이 사람이라면 짐을 짊어지는 것은 갈애가 생겨나는 현상이고 짐을 내려놓는 것은 갈애가 소멸하여 해탈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우드워즈가 우려하는 것처럼 바라하로를 짐꾼이라고 번역할 때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붓다고싸는 '짐은 괴로움의 진리(苦諦)이다. 그것을 짊어지면 그것이 생성의 진리(集諦)이고 그것을 내려 놓으면 그것이 소멸의 진리(滅諦)이고 그 짐을 내려놓는 방법이 길의 진리(道諦)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자아라고 오해될 수 있는 짐꾼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붓다고싸는 자아라고 하는 것은 토끼뿔처럼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에 대하여 '있다' 거나 '없다' 라는 것이 모두 성립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케이스는 이 경전을 편집한 자가 자아론을 옹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서 '이 경전의 편집자는 붓다고싸나 바쑤반두나 야쏘미트라 등이 주장하는 것처럼 개인이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 즉 오온(五蘊)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경전이 개인을 허용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자들은 정당화된다' 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우드워즈는 불교적 관점에서 짐꾼은 결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짊어지는 것은 있다고 주장해서 바라하로를 '나르는 자' 라고 다소 추상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문맥으로 보아 '짐꾼' 이라는 번역어를 피하기는 어렵다.

 

(쌍윳따니까야 3권 존재의 다발 모아엮음 해제, 전재성박사)

 

 

경에서 짐꾼이라는 말이 사용 되고 있고 이를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진아론자나 영원주의자들은 자아개념의 근거가 되는 경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짐꾼이라는 말이 마치 변치 않는 영혼처럼 세세생생 윤회하는 아뜨만과도 같은 개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물리적 복합체로서의 자아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아라는 것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어떤 변치 않는 자아를 상정한다는 것은 토끼뿔처럼 개념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에서 짐꾼으로 표현 되어 있기 때문에 짐꾼이라는 번역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해제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단지 여기서 우리가 명확히 해야 할 것은 짐꾼은 단지 어떤 사람이고 짐은 그의 정신물리적 복합체이고 그것을 취하고 내려놓는 것은 갈애의 작용과 소멸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초기불교가 어떤 측면에서는 모든 의미에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말랄라쎄케라는 초기 불교의 자아의 의미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1.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

2.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

3. 정신물리적 복합체로서의 개인

 

분명히 초기불교의 관점은 존재의 다발이 보여주는 세번째 의미의 자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1 2의 관점은 부정된다.

 

(쌍윳따니까야 3권 존재의 다발 모아엮음 해제, 전재성박사)

 

 

해제에 따르면 타인과 구별되는 자아나 토끼뿔과도 같은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는 부정된다고 하였다. 다만 정신물리적 복합체로서의 자아는 부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인습적인 명칭에 불과한 것인데

 

그렇다면 정신물리적 복합체로서의 자아는 무엇일까. 이는 경험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자아를 말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오온으로서의 자아는 존재한다. 그런 자아는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온의 상호작용에 따라 존재하는 자아를 말한다. 그래서 짐과 짐꾼과의 관계에 대하여 경의 주석에 다음과 같이 설명 하고 있다.

 

 

리스 데이비즈 부인이 ‘Buddhist Psychology’p.259에서 밝힌 것처럼 사람이 죽을 때에 짐을 내려놓고 다시 태어날 때에는 짐을 취하는 형식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붓다고싸는 Srp.II.264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짐꾼이라는 표현은 사람이 단지 인습적인 명칭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태어나는 순간에 존재의 다발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동안에 목욕하고 먹고 앉고 누음으로써 짐을 유지하고, 죽는 순간에는 그것들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에 다른 짐을 지기 때문에 짐꾼이라고 한다.’

 

독자부(puggalavada)는 이 경의 구절을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개인의 존재의 증명으로 삼는다. 그들의 변화를 통해 유지되다가 다시 태어나고 열반에 들기도 하는 것은 이 사람(puggala)’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다른 불교학파에서는 이교적인 진아론(眞我論)의 변형이라고 비판한다. 불교의 정통이론에 따르면, 사람(puggala)’은 단지 다섯가지 준재의 다발에서 유래된 개념이나 인습적인 명칭에 불과한 것이다.

 

(바라경-Bhāra sutta-짐의 경 주석, 전재성박사)

 

 

경에서 짐과 짐꾼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진아론자들이 이 바라경의 문구를 유아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짐꾼에 대하여 윤회의 주체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 하지 못하였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경에서 말한 짐꾼이라는 표현은 인습적인 명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짐꾼이나 사람이라는 말은 인습적이고 관습적인 명칭과 표현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짐을 오취온이라 하였고, 이를 지고 가는 사람인 짐꾼을 사람아라 하였다. 마치 나의 이름이 호적상의 이름, 직책상의 이름, 주민번호의 이름, 아이디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과 같다.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tatra tatrābhinandinī)

 

고성제 다음에 집성제인데, 경에서는 이를 짐을 짊어지는 것(bhārādāna)’이라고 표현 하였다. 여기 연탄이나 자갈이 있는데, 이를 연탄지게나 질통에 넣어 짐을 지는 행위를 말한다.

 

짐을 짊어진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더구나 정신적인 짐을 짊어지게 되었을 때 더욱 괴롭다. 그런 짐은 어떻게 해서 짊어지게 되는 것일까. 경에서는 그것은 재생을 가져오고 향락과 탐욕을 수반하며 여기저기에서 환희하는 갈애이다.”라고 표현 하였다. 갈애로 인하여 짐을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환희하는 갈애 때문이라 하였다.‘여기저기에서 환희한다는 뜻은 무엇일까.

 

여기저기에서 환희하다는 말을 빠알리어로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tatra tatrābhinandinī)’라 한다. 이는 여기 저기에서 즐길거리를 찾는 것을 말한다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자는 부자나름대로의 즐길거리를 찾고, 가난한 자는 또 그 나름대로의 즐길거리를 찾는다.

 

이렇게 존재들이 여기 저기서 즐길거리를 찾는 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때문이다.  이런 갈애는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수반하게 되고 결국 다시 태어남(ponobhavikā, 뽀노바위까)을 가져 오게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짐을 짊어지는 것에 대하여 사성제의 집성제에서 갈애로 본 것이다.

 

짊을 내려 놓는다는 것

 

짐을 짊어지는 것이 괴로움을 일으키는 갈애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제 짐을 내려 놓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를 짐을 내려놓는 것(bhāranikkhepana)’이라 하였다. 이는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되고 포기되고 방기되어 집착 없이 해탈로 표현 되었다. 이는 다름아닌 멸성제로서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다. 열반을 성취하여야 비로서 짐을 내려 놓게 되는 것이다. 

 

갈애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이렇게 부처님은 짐과 짐꾼을 고성제로, 짐을 짊어지는 것을 집성제로, 짐을 내려놓는 것을 멸성제로 설명하였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와 대비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시었다.

 

 

Bhārā bhave pañcakkhandhā        바라 바웨 빤짜칸다

bhārahāro ca puggalo,            바라하로 짜 뿍갈로
Bh
ārādāna dukha loke          바라다낭 둑캉 로께

bhāranikkhepana sukha       바라닉케빠낭 수캉

 

짐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며

세상의 짐꾼은 사람이니

짐을 짊어지는 것은 괴로움이며

짐을 내려놓는 것이 안락이네.

 

 

Nikkhipitvā garu bhāra        닉키삐뜨와 가룽 바랑

añña bhāra anādiya,           안냥 바랑 아나디야
Sam
ūla taha abbuyha          사물랑 딴항 압부이하

nicchāto parinibbuto.            닛찬또 빠리닙부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

다른 짐을 짊어지지 않는다.

갈애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욕심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네.

 

(바라경-Bhāra sutta-짐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22(3-1), 전재성님역)

 

 

이렇게 부처님은 짐과 짐꾼을 오온 (pañcakkhandhā)으로 표현하고, 짐을 짊어지는 것을 괴로움(dukha)이라 하였고, 짐을 내려 놓은 것을 행복(sukha)이라 하였다. 그래서 다시 태어남을 오게 하는 갈애를 뿌리 째 뽑아 버렸을 때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은 수고하 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유일신교의 가르침 보다 매우 구체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천적이다.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누구나 짐을 짊어지고 살아 간다. 어떤 이는 등짐이 너무 무거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고, 또 어떤 이는 짐에 짓눌려 형벌 같은 삶을 살아 가기도 한다. 그런 짐들은 모두 자신과 관련 있는 것들이다.

 

내 등에 짊어진 짐이 무겁기는 하지만 그 짐이 있음으로 인하여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시인은 내등의 짐’ 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 하였다.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 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게 살아 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짐이 있어야 물에 휩쓸리지 않고,
화물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짐을 실어야 헛바퀴가 돌지 않듯이
내등의 짐이 나를 불의와 안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했으며,
삶의 고개 하나하나를 잘 넘게 하였습니다.

내나라의 짐, 가족의 짐, 직장의 짐,
이웃과의 짐, 가난의 짐, 몸이 아픈 짐,
슬픈 이별의 짐들이
내삶을 감당하는 힘이 되어
오늘도 최선의 삶을 살게 합니다.

 

(내등의 짐)

                            

 

 

 

2012-11-07

진흙속의연꽃

 

담마짝깝빠왓따나경(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S56.1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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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경(짐의 경-S22.22).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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