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부처님에게 청원한 하느님, 아리야빠리예사나경 (고귀한 구함의 경, M26)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1. 9. 18:58

 

부처님에게 청원한 하느님, 아리야빠리예사나경 (고귀한 구함의 경, M26)

 

 

 

하루를 살더라도

 

아침에 도를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也)” 공자가 한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이 불교에도 있다. 법구경 천의 품 (Sahassavagga) 이 그것이다. 천의 품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o ca vassasata jīve     요 짜 와싸사땅 지웨

apassa amata pada    아빳상 아마땅 빠당

ekāha jīvita seyyo     에까항 지위땅 세이요

passato amata pada     빳사또 아마땅 빠당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법구경, Dhp11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죽지 않는 진리를 말씀하셨다. ‘죽지 않는 진리를 보면 지금 죽어도 좋다는 것이다. 죽지 않는 진리를 알면 결코 죽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불사는 어떤 의미일까.

 

죽음과 불사는 어떻게 다른가

 

불사(不死, amata)는 죽지 않는 것을 말하고, ()는 죽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죽는 다는 것은 오온의 파괴를 말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무너지면 죽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사란 무엇일까. 역시 오온의 파괴로 본다. 그러나 이 때 오온의 파괴는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의 파괴이다. 중생들의 죽음은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라고 집착된 오온의 파괴 되지만, 번뇌 다한 아라한의 죽음은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라고 여겨지는 집착이 떠난 오온의 파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결코 실재하는 사건의 체험할 수 없다. 우리는 남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죽음을 사유할 뿐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죽음은 죽음, 또는 죽음에 접근에 대한 사유에 대한 체험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위법적 사유의 근본구조 속에서 죽음을 사유하면서 그것을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로 동일시 하여 실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렇게 해서 사유하는 자아와 동일시되는 존재의 다발은 죽음과 동일시 된다. 모든 사물의 변화는 유위법적이며 그 속성을 주이성(住異性)에 두는 무상으로 나타나는 만큼. 괴로움을 수반하며 본질적으로 존재의 다발의 파괴는 죽음(: marana)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깨달아 더 이상 자아를 갖고 있지 않은 아라한의 체험 속에는 변화와 소멸은 자각 되지만 늙고 죽음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라한에게서의 존재의 다발의 파괴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내려놓음(jīvita pariyādāna)’이라고 불린다. 아라한의 체험에는 구조적으로 불사(不死: amata)가 수반된다.

 

(Dhp114 주석, 전재성박사 역자주)

 

 

불사에 대한 전재성 박사의 역자주에 따르면 죽음은 두 가지가 있다. 아라한의 죽음과 아라한이 아닌 존재의 죽음이다.

 

표를 만들어 보면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죽음(: marana)

불사(不死: amata)

오온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로 동일시 하여 실재하는 것으로 여김.

자아를 갖고 있지 않은 아라한의 체험.

오온의 파괴

사유하는 자아와 동일시되는 존재의 다발(오온)은 죽음과 동일시함.

존재의 다발(오온)의 파괴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내려놓음(jīvita pariyādāna)으로 봄

죽음

괴로움을 수반하며 본질적으로 존재의 다발(오온)의 파괴는 죽음(: marana)으로 이해함.

아라한의 체험에는 구조적으로 불사(不死: amata)가 수반됨.

 

 

죽음이라고 해서 똑 같은 죽음이 아니다. 번뇌에 가득찬 범부와 번뇌 다한 아라한의 죽음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부의 오온에 대한 죽음을 그냥 죽음이라 부르지만, 번뇌 다한 아라한의 오온에 대한 죽음을 죽지 않은  죽음또는 불사라 부르는  것이다.

 

하루를 살더라도 도를 이루면 오늘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말이나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 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문맥상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사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이고 구원론적으로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예를 아리야빠리예사나경(고귀한 구함의 경, M26)에서 본다.

 

한편의 대서사시, 아리야빠리예사나경 (고귀한 구함의 경, M26)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은 한편의 대서사시와도 같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시고 난 후 그 깨달음을 선포하는 장면이 마치 대서사극을 보는 듯 하다. 또 법화경에서 영산회상을 연상시키듯이 하늘과 땅에서 벌어지는 장대한 드라마를 보는 듯 하다. 이와 같은 대서사시에서 말하고자 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법구경의 한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위에 언급된 법구경 114번 게송과 연계 되어 있는 115번 게송은 다음과 같다.

 

 

Yo ca vassasata jīve     요 짜 왓사사땅 지웨

apassa dhammamuttama   아빳상 담마뭇따망

ekāha jīvita seyyo     에까항 지위땅 세이요

passato dhammamuttama    빳사또 담마뭇따망.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법구경, Dhp115,전재성님역)

 

 

게송에서 최상의 원리(dhammamuttama)’ 란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아홉가지 출세간의 원리(九出世間法, nava lokuttaradhamma)’라 한다. 단 하루라도 단 한순간이라도 그러한 원리를 꿰뚫어 아는 자의 삶을 사는 것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사는 자의 백년 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야빠리예사나경는 이 아홉가지 출세간의 원리(구차제정)’에 대하여 설명을 하기 위하여 대서사시 형식으로 꾸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Paisotagāmi, 빠띠소따가미)

 

아리야빠리예사나경에서 총 네 개의 게송이 나온다. 주로 상윳따니까야 브라흐마야짜나경(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 S6:1)의 게송과 일치한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다음 브라흐마 사함빠띠와 나눈 대화에 대한 게송이다. 첫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Kiccena me adhigata            낏쩨나 메 아디가땅

halandāni pakāsitu,            하란다니 빠까시뚱

Rāgadosaparetehi nāya          라가도사빠레떼히 나양

dhammo susambudho.               담모 수삼부도

 

Paisotagāmi nipua           빠띠소따가밍 니뿌낭

gambhīra duddasa au              감비랑 둣다상 아눙

Rāgarattā na dakkhinti           라가랏따 나 닥킨띠

tamokkhandhena āvaāti.           따목칸데나 아와따띠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지금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 오묘하며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무리에 뒤덮인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 고귀한 구함의 경, 맛지마니까야 M26, 전재성님역)

 

 

아리야빠리예사나경(고귀한 구함의 경-M26).docx

 

 

 

부처님은 부처님이 증득한 진리는 심원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진리는 사고를 뛰어 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자가 아니면 알려지기 어려운 것이라 하였다.

 

그런 진리는 원래부터 있었다. 단지 모르고 있던 것을 부처님이 지혜로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범부들이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범부들은 일반적으로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흐름을 거슬러(Paisotagāmi, 빠띠소따가미)’ 가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위라가(viraga)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세상에서 흐름은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오욕락을 추구하며, 동시에 돈과 명예와 권력을 바란다. 그런데 부처님이 증득한 불사의 진리는 세상의 흐름대로 가면 절대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즉 탐진치를 소멸하는 길로 가지 않으면 결코 불사의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 모든 형성의 그침(sabbhasankharasamatha)

2) 모든 집착의 보내 버림(sabbhupadhipatinissagga)

3) 갈애의 부숨(tanhakkhaya)

4) 사라짐(viraga)

5) 소멸(niroda)

6) 열반(nibbana)

 

 

이렇게 여섯가지이다.

 

여기서 네 번째의 사라짐은 빠알리어로 위라가(viraga) 인데, 원래 뜻은 색깔이 바래서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초불 각묵스님은 이 번역어에 대하여 탐욕이 빛바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각묵스님은 색깔이 바래다는 표현에 탐욕을 덧 붙여 탐욕이 빛바래다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냈는데, 이는 탐욕이 모든 번뇌를 대표하지 않기 때문에 과잉 표현이라 보여진다. 빛바래는 것은 탐욕 뿐만 아니라 성냄, 갈애 등 온갖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전재성 박사는 위라가에 대하여 단지 사라짐이라고 표현 한 듯이 보인다.

 

그런데 위라가는 다섯번째의 소멸(niroda,  니로다)과 구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로다는 부수어 없어짐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성제의 멸성제에 쓰이는 말이다.

 

탐진치에 절어 사는 뭇삶(중생)

 

이렇게 어렵게 증득한 진리에 대하여 부처님은 설하지 않으려 하였다. 일체지를 증득한 부처님이 탐진치에 절어 사는 뭇삶(중생)들이 가르침을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지켜 보고 있던 브라흐마 사함빠띠에 의하여 반전된다.

 

부처님이 불사의 진리를 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함빠띠를 비롯한 뭇삶들은 윤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함빠띠는 참으로 세계는 멸망한다. 참으로 세계는 파괴된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이니라

 

부처님에게 청원한 브라흐마 사함빠띠 (brahmā sahampati)는 어떤 인물일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하느님 싸함빠띠는 깟사빠 부처님 당시 싸하까(sahaka)라는 장로이었다. 그는 첫 번째의 선정에서 목숨을 마치고 한 우주기()를 사는 하느님(일겁범천,  kappayugabrahma)이 되었다. 쿠르트 슈미트는 Brm.92에서 싸함빠띠는 아마도 베다시대의 쓰와얌빠디(Svayampati) ‘자신의 주인을 뜻한다고 한다. 그것은 샵따빠타 브라흐마나(Saptapatha-Brahmana VI.1.1.)에 등장하는 절대자를 말한다. 그러나 아마도 고따마 붓다의 시대에는 DN.9에 따르면, 더 이상 이해되지 않고, 민속적인 어원분석을 통해 쏘-아함-빠띠(so-aham-pati: ‘내가 그 주인이다’.)라고 변형 되었을 것이다.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 고귀한 구함의 경의 주석, 전재성박사)

 

 

전재성박사는 빠알리어 브라흐마에 대하여 하느님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스타일에 대하여 “기독교의 하느님도 우리 고유의 하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인 용어”라며 “불교의 범천을 하느님으로 번역하고 있다”라고 이띠붓따까 책 출간에서 말했다. 그래서 브라흐마 사함빠띠(brahmā sahampati)’하느님 사함빠띠로 번역한 것이다.

 

그런 사함빠띠는 한 우주의 겁을 사는 하느님이라 한다 이는 주석에서 깟사빠 부처님 당시 장로 이었는데 한 세계의 하느님으로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성주괴공 속의 하느님이고, 또 무상한 존재로서 윤회할 수밖에 없는 범부중생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 하느님이 부처님 당시에는 브라만교의 창조주와 절대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사함빠띠라는 어원이 내가 그 주인이다’ “내가 그이니라라는 뜻의 -아함-빠띠(so-aham-pati)’라 한다.

 

부처님에게 애걸한 하느님

 

이렇게 한 세계의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하느님 사함빠띠가 부처님에게 청원하였다. 애걸하듯이 간청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Pāturahosi magadhesu pubbe,
Dhammo asuddho samalehi cintito.

Avāpureta1 amatassa dvāra,
Su
antu dhamma vimalenānubuddha.

Sele yathā pabbatamuddhaniṭṭhito,
Yath
āpi passe janata samantato,
Tath
ūpama dhammamaya sumedha,
P
āsādamāruyha samantacakkhu,

Sokāvatiṇṇa janatamapetasoko,

Avekkhassu jātijarābhibhūta
U
ṭṭhehi vīra vijitasagāma satthavāha anaa vicara loke,
Desassu4 bhagav
ā dhamma aññātāro bhavissantī

 

일찍이 번뇌에 물든 자들이 생각해낸

부정한 가르침이 일찍이 마가다 인들에게 퍼져있으니,

불사의 문을 열어젖히소서! 청정한 님께서 깨달은 진리를.

 

산꼭대기의 바위 위에 서서

사방으로 사람들을 굽어보는 것처럼,

현자여, 널리 보는 눈을 지닌 님이여.

 

진리로 이루어진 전당에 오르소서.

슬픔을 여윈 님께서는 슬픔에 빠지고

태어남과 늙음에 고통받는 뭇 삶을 보소서.

 

일어서소서.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세상을 거니소서.

캐러밴의 지도자여, 허물없는 님이여,

알아듣는 자가 반드시 있으리니,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여 주소서.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 고귀한 구함의 경, 맛지마니까야 M26, 전재성님역)

 

 

하느님은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때로는 찬탄의 말로, 때로는 읍소하는 형식으로 갖가지 표현을 총동원하여 부처님의 마음을 돌리려 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 듣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송에서 허물없는 님이여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빠알리어 아나나(anaa)’를 말하는데, ‘빚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재가자의 행복 중에 빚 없는 행복도 있는데, 이 게송은 부처님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허물 없는뜻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하느님의 거듭된 요청에

 

이와 같은 하느님의 거듭된 요청에 부처님은 뭇삶(중생)들의 자비심 때문에 불안(佛眼)으로 세상을 바라 보게 되었다. 그러자 부처님의 눈에는 많이 오염된자, 덜 오염된 자등 갖가지 뭇삶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를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를 들어 비유 하였다.

 

그런데 이들 연꽃에 대한 빠알리어 이름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이다. 빠알리 원전에는 ‘uppaliniya vā paduminiya vā puṇḍarīkiniya로 되어 있는데, 청련화는 우빨리니(uppalini)이고, 홍련화는 빠두미니(padumini)이고, 백련화는 뿐다리끼니(puṇḍarīkini)로 되어 있다.

 

 

 

 

Blue lotus

 

 

홍련화와 백련화

 

천수경에 육자진언이 있다.  옴마니반메훔(Om mani padme hum)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때 padme연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빠알리어 빠두미니(padumini)가 홍련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육자진언에서의 빠드메(padme)홍련화임을 알 수 있다.

 

묘법연화경의 산스크리트어 명칭은 삿다르마 뿐다리까 수뜨라(Saddharma-pundarika-sutra)'이다.   삿다르마는 정법이라는 뜻이고, 뿐다리까는 백련화라는 뜻이다. 그래서 다시 이름을 붙인다면 '정법백련화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한역한 구마라습은 '묘법연화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뿐다리까는  빠알리어 뿐다리끼니(puṇḍarīkini)와 같은 말이다. 따라서 묘법연화경에서의 연화는 백련화인 것이다.

 

불사의 문은 열렸다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속에서 자란다. 그러나 자라는 모습을 보면 모두 제각각이다. 어느 경우는 물속에서만 자라는 경우도 있고, 어느 경우는 수면에서 자라는 경우도 있고, 또 어느 경우는 수면을 벗어나 물에 묻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는 뭇삶등의 근기가 매우 다양함을 말한다. 따라서 덜 오염된 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 들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하느님에게 답하였다.

 

 

Apārutā tesa amatassa dvārā           아빠루따 떼상 아마땃사 드와라
Ye sotavanto pamuñcantu saddha
       예 소따완또 빠문짠뚜 삿당
Vihi
sasaññi pagua nabhāsi,              위힝사산니 빠구낭 나바싱
Dhamma
paīta manujesu brahme ti.   담망 빠니땅 마누제수 브라흐메 띠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나는 곤란을 예견하고

극히 미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 고귀한 구함의 경, 맛지마니까야 M2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Apārutā tesa amatassa dvārā)라는 말로 법을 설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법을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리라고 하였다. 이는 예전의 잘못된 신앙을 버리라는 것이다. 

 

왜 피곤하다고 하였을까

 

부처님의 불사의 진리를 성취하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사를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첫번째 조건이 유신견의 타파이다.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창조주를 믿는 영원주의자들이나  육사외도의 경우 단멸주의자, 허무주의자 등은 철저하게 자아를 거머 쥐고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예전의 잘못된 믿음이나 신앙을 버리라고 한 것이다.

 

게송에서 세 번째 문구인 나는 곤란을 예견하고 (Vihisasaññi)라는 말은 무슨뜻일까. 이 문구에 대한 이전 번역어는 나는 상처받는다는 생각으로라고 되어 있었다. 개정판에서 문구가 바뀐 것이다. 이 문구를  포함 하여 3, 4행의 게송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재해석하고 있다.

 

 

나는 내가 잘 만들어낸 극히 미묘한 최상의 진리를 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 피곤하리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인류가 그들의 요구를 충족하게 될 믿음의 그릇을 제공할 것이다.

 

 

부처님이 영원주의자나 단멸론자들을 대상으로 법을 설하는 것에 대하여 피곤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길거리에서 전철에서 예천불지를 부르짖는 자들이나 가가호호 방문하여 전도하는 자들을 만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들에게 법을 설해 보았자 양측 모두 피곤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자신의 믿음을 내려 놓고 그 다음에 법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리고 법을 청할 때, 법을 설해야 피곤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마침내 길을 떠나고

 

이렇게 법을 설하기로 결정한 부처님은 마침내 길을 떠난다. 아리야빠리예사나경에 따르면 옛스승인 알라라 깔라마와 웃따까 라마뿟따를 떠 올렸으나 이미 죽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전에 함께 수행하였던 다섯명의 수행자를 떠 올렸다. 다섯명의 수행자에게 설명하면 가장 빠르게 이해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섯 수행자가 있는 바라나시를 향하여 출발한 것이다.

 

부처님의 첫 제가 될 뻔한 우빠까

 

그런데 도중에 한 외도 수행자를 만났다. 사명외도 우빠까이다. 정각을 이루고 난 후 처음 만나는 수행자이다.

 

먼저 우빠까가 말을 건다. 이유는 안색 등 겉으로 보기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빠까가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맑고 피부색은 청정하다. 벗이여, 그대는 무엇을 위하여 출가하였으며, 그대의 스승은 누구인가, 누구의 가르침을 즐겨 배우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한다.

 

 

Sabbāhibhū sabbavidūhamasmī
Sabbesu dhammesu anūpalitto,
Sabbañjaho ta
hakkhaye vimutto
Saya
abhiññāya kamuddiseyya?

Na me ācariyo atthi sadiso me na vijjati,
Sadevakasmi
lokasmi natthi me paipuggalo,

Aha hi arahā loke aha satthā anuttaro,
Ekomhi sammāsambuddho sītibhūtosmi nibbuto.

Dhammacakka pavattetu gacchāmi kāsina pura,
Andhabhūtasmi
lokasmi āhañcha5 amatadundubhinti.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

스스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하겠는가.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고,

하늘과 인간에서 나와 견줄만한 이 없네.

 

나는 참으로 세상에서 거룩한 님, 위없는 스승이고

유일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로서 청량한 적멸을 얻었네.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하여 까씨 성으로 가네

눈 먼 세계에서 불사의 북을 두드리리.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 고귀한 구함의 경, 맛지마니까야 M26, 전재성님역)

 

 

이 게송을 보면 부처님은 자신감에 넘쳐 보인다. 이제 막 정각을 이루고 난 젊은 부처님의 패기가 넘쳐 나는 게송이다. 그런 부처님은 감각기관도 맑고 피부색도 청정하여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데, 부처님은 우빠까에게 자신은 승리자, 일체지자 등의 최상급 용어를 사용하요 부처님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부처님은 일체를 아는 자라 하였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일체지 (一切智, 삽반누따 냐나. sabbaññuta ñāa)

 

종종 대승불교 전통에서 부처님의 교법에 대하여 덜 완성된 것, 불완전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말과 글이 아닌 마음으로 전해진 것이라고 강조 한다. 그래서 불교는 부처님 당시부터 대승불교를 거쳐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거듭발전하고 진화해 온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주류불교(테라와다)에서는 선사들의 생각과 다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전한 가르침’이라고 본다. 이는 깨닫고 난 다음과 가르침으로 펴는 동안 또 깨달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처음 깨달았을 당시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 (一切智, 삽반누따 냐나. sabbaññuta ñāa)’를 갖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구차제정이란 무엇인가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은 마침내 다섯수행자를 대상으로 법을 편다. 주석에 따르면 가르침을 펼친지 2주 후에 모두 진리의 흐름에 든자(예류자)가 되었고, 무아의 특징경(무아상경)을 설했을 때 모두 부처님과 같은 경지인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 대한 설명이 경에 있는데 법구경에서 말한 최상의 원리(dhammamuttama)이다. 이는 아홉가지 출세간의 원리(九出世間法, nava lokuttaradhamma)’이라 하며 또 다른 말로 구차제정이라 한다.

 

구차제정이란 곧이어 소개되는 첫번째 선정인 초선에서부터 열반의 상태인 상수멸정에 이르기까지의 아홉 가지 선정의 단계를 말한다. 경에 실려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구차제정에 대하여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차제정

구분

  

  

첫 번째 선정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고, 멀리 떠남에서 생겨난 희열과 행복을 갖춤

 

두 번째 선정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 안으로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춤

 

세 번째 선정

 

희열이 사라진 뒤, 아직 신체적으로 즐거움을 느끼지만, 깊이 새기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평정하게 지냄

 

네 번째 선정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려서, 이전의 쾌락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고, 괴로움을 뛰어넘고 즐거움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이 깊고 청정함

 

무한한 공간의 세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완전히 형상의 지각들을 뛰어넘어 대상의 지각들이 사라지고 다양성에의 지각들에 정신을 쓰지 않음으로써 공간은 무한하다.

공무변처

(空無邊處)

ākāsānañcāyatana

무한한 의식의 세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완전히 ‘무한한 공간의 세계’를 뛰어넘어 ‘무한한 의식의 세계’에 든다.

식무변처

(識無邊處)

viññāañcāyatana

아무 것도 없는 세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무한한의식의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 든다.

무소유처

(無所有處)

ākiñcaññāyatana

알라라 깔라마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아무 것도 없는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에 든다.

비상비비상처

(非想非非想處)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

웃따까 라마뿟따

지각과 느낌의 소멸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들어 지혜로써 보아 번뇌가 소멸된 것을 안다.

상수멸정

(想受滅定)

Saññāvedayitanirodha

 열반

 

 

 

열반에 이르기까지 아홉단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중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의 경우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전 스승이었던 알라라 깔라마와 웃따까 라마뿟따로 부터 배운 경지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러한 경지가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함을 알고 스승으로 부터 떠나게 된다. 그리고 홀로 수행하여 마침내 위없는 바른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경지가 이제까지 아무도 가 본적이 없는 지각과 느낌의 소멸 (saññāvedayitanirodha)’단계이다. 이를 한자어로 상수멸정(想受滅定) 이라 한다.  이 상수멸정단계에 이르면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들어 지혜로써 보아 번뇌가 소멸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번뇌가 소멸된 상태가 열반이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경에 따르면 두고 ‘악마를 눈멀게 만들고, 악마의 눈을 뽑아, 악마를 볼 수 없게 만드는 자, 세상에 대한 집착을 뛰어넘은 자’라고 하였다. 그것은 악마의 영역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경에서 말하는 악마는 일반적으로 오취온, 오염, 윤회의 지속으로 이끄는 경향, 죽음, 하늘아들로서의 악마 이렇게 다섯가지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

 

아리야빠리예사나경을 읽다 보면 장대한 대 서사시를 읽는 것 같다. 그리고 법화경의 영산회상을 연상시키는 장대한 스케일도 맛 볼 수 있는 것 같다. 부처님이 등장하는 무대에 하느님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하느님은 부처님 당시 주류종교인 브라만교의 하느님이었다.

 

그런 하느님이 부처님에게 청원을 한다. 불사의 진리를 설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만일 설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세계는 멸망하고 파멸할 것이라 한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브라만교의 하느님 역시 윤회할 수 밖에 없는 무상한 범부중생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애청에 결국 부처님은 진리를 설하기로 결심한다. 그런 과정이 고스란히 경에 담겨 있는데, 경을 읽어 보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 부처님임을 알 수 있다.

 

 

2012-11-09

진흙속의연꽃

아리야빠리예사나경(고귀한 구함의 경-M26).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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