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말씀도 상품화 하다니! 불교방송의 ‘오늘의 부처님 말씀’
커피 한 잔 값도 안된다는데
불교방송을 듣다 보면 오늘의 부처님 말씀이라는 광고방송을 듣게 된다. 정목스님의 음성으로 소개 되고 있는 이 광고방송에 따르면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문자를 스마트폰이나 핸드폰으로 전달 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무료는 아니다. 후원금 형식으로 돈을 지불해야 한다.
비용은 얼마나 될까. BBS불교 방송 웹사이트에서 확인한 결과 한달에 3.240원이다. 하루 108원씩 하여 30일을 곱한 것이다. 설명에 따르면 커피 한 잔 값도 되지 않는 가격임을 강조 하고 있다. 그리고 본인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많이 소개 해줄 것을 권고 하고 있다. 열흘 무료체험을 할 수 있고, 최대 5명에게 무료로 소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부처님 말씀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후원금 형식이라고는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건당 108원에 받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현 세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스마트폰에서 문자로 접한 부처님 말씀
스마트폰에서도 부처님의 말씀을 문자로 접할 수 있다. 불교 TV 앱에 접속하면 ‘오늘의 법문’이라는 방이 있는데 법구경 등 짤막한 문장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에서는 별도로 요금을 받지 않고 서비스 해 주고 있다. 이는 스마트폰 요금에 다 포함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마트폰에 실려 있는 오늘의 법문 중의 하나를 보았다. 11월 9일자 서비스에 다음과 같은 법구경 게송이 실려 있다.
한그루의 나무를 자르지 말고
욕망의 숲 전체를 잘라라.
위험은 욕망의 숲에서 생긴다.
욕망의 숲과 잡목을 자르고,
욕망에서 벗어난 자가 되어라.
그리고 영원한 자유를 찾으라.
(법구경, 불교TV, 오늘의 법문 2012-11-09일자)
게송을 보면 법구경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몇 번 게송인지, 누구 번역인지 나와 있지 않다.
정반대의 번역
법구경을 찾아 보았다. 283번 게송이다. 283번 게송은 ‘길의 품(Maggavagga)’에 속해 있다. 그런데 이 게송을 보니 전재성 박사가 번역한 내용과 다르다. 전재성 박사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숲을 잘라버려라.
나무는 말고,
숲에서 두려움이 생기니
수행승들이여, 숲과 덤불을 자르면
그대들은 숲에서 벗어나리.
(법구경, Dhp283, 전재성님역)
두 번역을 비교해 보니 마치 다른 게송을 보는 것 같다. 형식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다.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것이 1행과 2행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불교TV의 번역을 보면 “나무를 자르고 숲을 자르라”라는 식의 번역이다. 그러나 전재성 박사의 번역은 이와 정반대이다. “숲을 자르라, 나무는 자르지 말고”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막스 뮐러’류 번역에 의존한 결과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이 정반대의 번역이 나오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의 법구경-담마파다 해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근대 위대한 인도학자 막스 뮐러의 법구경번역에 의존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일지 모른다.
오늘날 서구에서 현대어로 번역된 주요한 법구경들은 파우스 뵐의 라틴어 법구경을 제외하면, 최초의 영어 법구경의 역자인 막스 뮐러에 주로 의존한다. 그러나 막스 뮐러류의 번역은 역자의 번역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들은 위 시의 ‘숲을 잘라버려라. 나무는 말고,’라는 대목을 ‘숲을 자르라. 하나의 나무만이 아니라.’라고 번역한다.
(법구경 해제, 전재성박사)
오늘날 대부분의 번역서들이 최초로 영역된 막스 뮐러에 의존 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사양에 법구경에 최초로 알려진 것은 1855년 덴마크 학자 파우스 뵐이 빠알리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후 1870년 막스 뮐러가 빠알리어 법구경을 영역한 것이 영어권에서는 최초의 일이다. 이후 대부분의 번역서가 막스 뮐러의 번역을 참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재성 박사의 경우 전통적인 빠알리 주석서를 참고한 번역이라고 한다.
새내기 출가승을 위해서
그렇다면 ‘숲을 잘라 버려라’하는 내용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해제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붓다고싸에 따르면, ‘숲을 잘라버려라.’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출가한지 오래되지 않은 수행승들에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스승이 우리로 하여금 도끼를 가지고 숲을 잘라버리게끔 하고 있다.’라고 생각했다. ‘숲을 잘라버려라. 나무는 말고’라는 말은 실제 나무들을 자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나는 이 말을 감각적 쾌락의 욕망, 성냄, 어리석음과 같은 번뇌의 ‘숲’과 관련하여 말한 것이지 실제의 나무들과 관련해서 말은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다.
(법구경 해제, 전재성박사)
‘숲을 잘라버려라. 나무는 말고’라는 말은 새내기 출가승을 위해서라고 한다. 잘라야 될 것은 욕망이지 실제 숲이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무는 자르지 말고’ 라는 말을 덧 붙였다고 하였다.
거해스님의 번역을 보면
참고로 거해스님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 빅쿠들이여! 욕망의 숲을 쳐 버려라.
이는 진짜 나무를 친다는 뜻이 아니니
욕망의 숲은 위험을 낳는 것
그것을 뿌리까지 모두 제거하라.
그러면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리니.
(법구경, Dhp283, 거해스님역)
거해 스님의 번역을 보면 ‘이는 진짜 나무를 친다는 뜻이 아니니’라고 하여 주석적, 설명적 번역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재성박사의 ‘숲을 잘라버려라. 나무는 말고’라는 번역과 뜻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빠알리어를 보면
283번 게송에 대한 빠알리어를 보면 다음과 다음과 같다.
Vanaṃ chindatha mā rukkhaṃ, 와낭 친다타 마 룩캉
vanato jāyatī bhayaṃ, 와나또 자야띠 바양
Chetvā vanañca vanathañca, 체뜨와 와냔짜 와나탄짜
nibbanā hotha bhikkhavo. 닙바나 호타 빅카오
숲을 잘라버려라.
나무는 말고,
숲에서 두려움이 생기니
수행승들이여, 숲과 덤불을 자르면
그대들은 숲에서 벗어나리.
(법구경, Dhp283, 전재성님역)
베어 내야 될 것은 무엇인가
‘숲을 잘라버려라. 나무는 말고(Vanaṃ chindatha mā rukkhaṃ)’라는 문구는 새내기 수행승들에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관련하여 한 말이다. 잘라 내야 될 것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와 같은 번뇌의 ‘숲’이지 진짜 숲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무는 말고 (mā rukkhaṃ)’라 말한 것이다. 여기서 빠알리어 룩카(rukkha)는 나무를 뜻하고, 마 (mā) 는 ‘하지마라’ 라는 뜻으로 부정의 뜻이다.
숲에서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3항의 ‘숲에서 두려움이 생기니(vanato jāyatī bhayaṃ)’라는 말은 자연의 숲에서 짐승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처럼, 번뇌의 숲에서 태어남의 두려움이 생겨남을 말한다. 탐진치로 인하여 업유가 형성되어 괴로움을 겪을 것이라는 말이다.
사성제를 따라야
‘숲과 덤불을 자르면 그대들은 숲에서 벗어나리(Chetvā vanañca vanathañca, nibbanā hotha)’라는 문구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큰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은 숲(vana)라 부르고, 작은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은 덤불(vanatha)라 부른다. 또는 먼저 성장한 나무들은 숲이라 부르고, 나중에 성장한 나무들은 덤불이라고 부른다.
동일한 방식으로 미래의 다시 태어남으로 이끄는 커다란 번뇌들을 숲이라 부르고, 현세에서의 지속적인 삶에서 악한 영향을 끼치는 작은 번뇌들을 덤불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수행승들이여, 숲과 덤불을 자르고 숲들을 여의어라.’ 즉, 번뇌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이 양자는 네 가지길(四向: cattaro magga)을 통해서 제거 되기 때문이다.
(Dhp283 주석, 전재성박사)
숲과 덤불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숲은 큰 번뇌에 해당되고, 덤불은 작은 번뇌에 해당된다. 이들 번뇌를 모두 소멸해야 다시 태어남이 없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 즉, 사성제를 따르면 된다는 것이다.
몇 장 몇 절 식으로 해야
스마트폰에서 제공되는 오늘의 부처님의 말씀을 보면 짤막한 문자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 단지 법구경, 숫타니파타, 별잡아함경 식으로 경전의 명칭만 보일뿐 더 상세한 정보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품의 몇 번 게송인지 알 수 없다.
이왕 서비스를 한다면 유일신교에서 하난 것처럼 바이블 몇 장 몇 절 식으로 표기해 주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초기경의 경우 약어 표시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출처 되었다면 S22:22식으로 하여 찾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번역 내용이다. 정확한 번역어를 올려 놓아야 정확하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자르고 숲을 자르라”라는 식의 번역은 “숲을 자르라, 나무는 자르지 말고”의 번역과 정반대의 뜻이 되기 때문이다.
2012-11-1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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