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삶이라는 고단한 바다에서, 콩닥거리는 ‘가슴 섬’으로 피신하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3. 3. 7. 17:27

 

 

삶이라는 고단한 바다에서, 콩닥거리는 가슴 섬으로 피신하기

 

 

 

마음이 답답할 때

 

마음이 답답하면 바다를 찾는다. 툭 터진 바다를 바라보면 마음도 넓어 질 뿐만 아니라 호연지기도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가난한 자나 부자나 바다를 찾는다. 그런 바닷가는 삶에 지친 자들에게 있어서 활력소와 같다.

 

 

 

 

 

HD화면으로 제공 되는 자연 다큐 프로를 보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바다의 모습은 항상 같다는 것에 놀란다. 필리핀 원주민들이 사는 바닷가의 수평선이나 잘 사는 나라의 수평선이나 모두 똑 같다. 사람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살아 가는 모습이 서로 다를지라도 바다 그 자체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바다는 평등해 보인다.

 

바다는 넓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평등하다. 그래서 바다는 빈부도 없고 귀천도 없어 보인다. 바닷물과 수평선을 특징으로 하는 바다는 어느 곳에나 어느 나라에서나 차별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다를 좋아 하는 것 같다.

 

부처님은 바다에 가셨을까?

 

부처님은 바다에 가셨을까? 부처님 당시 부처님이 활동한 지역이 십육대국인데 바다에 면한 나라는 보이지 않는다. 16대국 지도를 보면 바다와 가까운 나라가 마가다앙가임을 알 수 있는데, 앙가의 경우 갠지스강 하안의 벵골지역이 포함 되어 있다. 그래서 바다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나라가 앙가라 볼 수 있다.  

 

 

 

 

고대 인도의 십육대국

 

 

빠알리 니까야에서 바다에 대한 언급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 살라야따나상윳따(Saāyatana Sayutta, S34)에 사뭇다왁가(Samuddavagga)라는 별도의 품이 있을 정도이다. 여기서 빠알리어 사뭇다(samudda)는 ‘갠지스강의 커다란 물’ 또는 ‘바다’라고 번역된다. 그래서 사뭇다왁가에 대하여 ‘바다의 품’이라고 한다.

 

긍정적으로 묘사된 바다

 

이와 같이 빠알리 니까야에서는 바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 바다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긍정적 의미로서 바다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커다란 강이든 예를 들어 갠지즈 강, 야무나 강, 아찌라바띠 강, 싸라부 강, 마히 강이든 그들 모든 강은 동쪽으로 향하고 동쪽으로 기울고 동쪽으로 들어간다. 수행승들이여,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익하면, 이와 같이 수행승은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들어간다.

 

(찻타빠찌나닌나경-Chaṭṭha pācīnaninnasutta-동쪽으로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96(9-6),전재성님역)

 

 

경에서는 바다가 긍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열반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바다로 비유한 것이다. 그런 바다는 보편적이고 평등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부자나 가난한자나 귀한 자나 미천한 자나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바다로 비유한 것이다. 마치 모든 재료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같듯이, 전단향목재의 불꽃이나 야크똥의 불꽃이나 불꽃 그 자체는 같듯이, 누구나 성자자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갠지스강의 어느 지류이든지 결국 바다로 들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누구나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바다로 비유하였을 것이다.

 

부정적으로 묘사된 바다

 

하지만 빠일리니까야에서 바다는 부정적으로 묘사 되는 경우도 많다. 바다가 항상 잔잔하지만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듯이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는 위험한 곳으로 묘사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볼 수 있다.

 

 

[알라바까]

 “사람은 어떻게 거센 흐름을 건너는가?

어떻게 커다란 바다를 건너는가?

어떻게 괴로움을 뛰어넘는가?

그리고 어떻게 청정해지는가?”

 

[세존]

“사람은 믿음으로 거센 흐름을 건너고

방일하지 않음으로 커다란 바다를 건너네.

정진으로 괴로움을 뛰어넘고,

지혜로써 완전히 청정해진다네.”

 

(알라와까경-Āavakasutta, 상윳따니까야 S10:12(1-12),전재성님역)

 

 

숫따니빠따 알라와까경에서도 볼 수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서 야차 알라와까가 어떻게 커다란 바다를 건너는지에 대하여 묻는다. 이때 바다는 안전하지 못한 것이다. 거센 흐름이 있는 곳, 거센 파도가 있는 위험스런 곳이다. 그런 바다에 대하여 부처님은 ‘방일하지 않음(appamāda)’ 으로 건넜다고 하였다.

 

삶이라는 고단한 바다에서

 

이와 같이 바다는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빠알리 니까야에서는 부정적으로 더 많이 묘사 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 불교닷컴에서 플럼빌리지를 창립한 ‘찬콩스님’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1982년 틱낫한 스님과 함께 프랑스 도르도뉴에 수행공동체인 플럼빌리지를 세운 찬콩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교에서 깨어 있는 사람은 삶 속에 있지만 마치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한다. 삶이라는 고단한 바다에서 거듭 이 ‘섬’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스님은 “이 바다는 놀라운 일로 가득 차 있지만 때론 위험으로 들끓는다”며 “깨어 있는 사람은 키의 손잡이를 단단히 잡고 거친 파도와 폭풍을 피해 고요히 머무를 수 있는 섬을 찾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틱낫한 스님과 플럼빌리지 세운 찬콩 스님 “非我 실천하면 늙음ㆍ두려움 없어”, 불교닷컴 2-13-02-28)

 

 

베트남에서 태어난 찬콩스님은 1982년 틱낫한 스님과 함께 프랑스 도르도뉴에 수행공동체인 플럼빌리지를 세웠다. 스님은 고단한 삶과 같은 바다에서 안전한 곳과 같은 섬으로 피난 가야함을 강조 하였다. 그러면서 바다는 신기한 것들로 가득하기도 하지만 폭풍우치는 것 같이 몹시 위험한 곳으로 묘사 하였다. 이는 바다의 양면성에 대한 것이다.

 

여덟 가지 바다의 경이롭고 놀랄 만한 것들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바다에는 여덞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 이를 여덟 가지 바다의 경이롭고 놀랄만한 것이라 한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세존이시여, 큰 바다는 점차 기울어지고 점차 비탈지고 점차 경사지지, 갑작스럽게 절벽이 되지 않습니다. 

 

2) 세존이시여, 큰 바다는 머무는 특징을 가져서 해안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3) 세존이시여, 큰 바다는 죽은 시체와 함께 머물지 않습니다. 

 

4) 세존이시여, 강가, 야무나, 아찌라와띠, 사라부, 마히와 같은 큰 강들이 큰 바다에 이르면 이전의 이름과 성을 버리고 큰 바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5) 세존이시여, 이 세상에 강은 그 어떤 것이건 큰 바다로 이르고 또 허공에서 비가 떨어지지만 그것 때문에 큰 바다가 모자라거나 넘친다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6) 세존이시여, 큰 바다는 하나의 맛인 짠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7) 세존이시여, 큰 바다는 진주, 수정, 녹주석, 소라, 규석, 산호, 은, 금, 루비, 묘안석과 같은 여러 종류의 많은 보배를 가지고 있습니다. 

 

8) 세존이시여, 큰 바다는 띠미, 띠밍갈라, 띠미라밍갈라, 아수라, 나가, 간답바와 같은 큰 존재들의 거주처입니다

 

(빠하라다 경(A8.19), 앙굿따라니까야, 대림스님역)



이와 같이 바다는 여덟 가지 경이롭고 놀라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찬콩스님이 언급한 ‘놀라운 일로 가득 차 있는 바다’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라 보여진다.

 

상어와 나찰로 득실거리는 인간바다

 

하지만 바다에는 진주, 수정, 녹주석 같은 보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바다, 바다’ 라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은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거룩한 이의 규범에는 그것은 바다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커다란 물의 더미요, 커다란 물의 홍수이다.

 

수행승들이여, 시각이야말로 인간의 바다로서 그 거센 흐름은 형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 형상으로 이루어진 거센 흐름을 견디어낸다면, 그는 파도와 소용돌이와 상어와 나찰이 많은 시각의 바다를 건너 그것을 뛰어넘어 피안에 도달하여 대지위에 선 고귀한 님이라고 한다.

 

(사뭇다경-Samuddasutta-바다로의 경, 상윳따니까야  S25:228(3-1),전재성님역)

 

 

상윳따니까야에 표현되어 있는 바다는 앙굿따라 니까야에 표현되어 있는 바다의 여덟가지 경이로운 요소와 매우 대조적이다. 바다에 대하여 여섯가지 감각능력으로 비유하였기 때문이다. 인간바다는 파도(ūmi)와 소용돌이(vaṭṭa)와 상어(sagāha)와 나찰(rakkhasa)이 득실거리는 무서운 곳이다.

 

경에서 파도(ūmi)는 분노의 번뇌를 말하고, 소용돌이(vaṭṭa)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를 말한다. 그리고 상어(sagāha)와 나찰(rakkhasa)은 ‘여인’을 뜻한다고 각주에 표현되어 있다.

 

이와 같이 경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 이렇게 여섯가지 감각능력에 대하여 인간바다로 묘사하였다. 그래서 인간바다라는 거센 흐름에서 벗어나 저쪽 언덕, 피안에 도달하여야 안전하다고 하였다. 그렇게 피안에 도달한 자를 고귀한 님이라 하였는데, 이는 아라한을 말한다.

 

어떻게 피신할 것인가

 

찬콩스님 역시 섬으로 피신 할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섬으로 피신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스님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 한다.

 

 

스님은 “폭력적인 기억이 덮친다면 ‘섬’, 그러니까 부동의 기준점 숨·호흡으로 돌아와야 한다”며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면서 ‘안정을 되찾은 다음 다시 너에게 돌아올게’라고 기억에게 말하라”고 말했다.

 

(틱낫한 스님과 플럼빌리지 세운 찬콩 스님 “非我 실천하면 늙음ㆍ두려움 없어”, 불교닷컴 2-13-02-28)

 

 

찬콩스님이 제시한 방법은 호흡이다. 과거의 좋지 않은 생각이 엄습하였을 때 즉시 호흡을 보라는 것이다. 호흡에 집중함으로서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위빠사나수행처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화가 나고 흥분 하였을 때 얼른 가슴으로 돌아 오라고 한다. 가슴에서 일어 나는 콩닥 거림에 마음을 집중하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한 가지 일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화가 났을 때 가슴의 쿵꽝거림에 마음을 둔다면 화나는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될 것이라 한다. 그런 호흡은 마치 섬과도 같다. 악하고 불건전한 거친 마음이 바다에서 일어나는 폭풍우와도 같다면, 가슴에 콩닥 거리는 호흡을 본다면 섬으로 피신 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섬은 종종 열반의 다름 이름으로 표현된다.

 

긍정적, 부정적 언표로 표시된 열반

 

일반적으로 열반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문자로 열반이 어떤 상태인지 표현되어 있는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무위상윳따(Asakhata Sayutta,S43)에  따르면, 열반은 부정적 언표와 긍적적 언표로 표현되어 있다.

 

부정적 언표로 표현된 것을 보면 무위(無爲 asankhata), 무루(無漏 anasavam), 불로(不老 ajaram), 무견(無見 anidassana), 무희론(無戱論 nippapanca), 무재난의 상태(無災法 anitikadhamma), 무에(? avyapajjha), 사라짐(離貪 viraja), 불사(不死 amata), 갈애의 소멸(愛盡 tanhakkhaya), 무착(無着 analayo) 이렇게 12가지 용어로 표현된다.

 

열반에 대한 긍정적 언표로 표현된 용어를 보면 끝(終極 antam), 진리(眞諦 saccam) , 피안(彼岸 para), 극묘(極妙 nipuna), 지극히 보기 어려운 것(極難見 sududdasa), 견고함(堅固 dhuva), 비추어봄(照見 apalokita), 적정(寂淨 santa), 탁월함(勝妙 panita), 지복(至福 siva), 안온(安穩 khema), 아주 놀라운 것(希有 acchariya), 예전에 없던 것(未曾有 abbhuta), 청정(淸淨 suddhi), 해탈(解脫 mutti), 섬( dipa), 동굴(洞窟 lena), 피난처(避難處 tana), 귀의처(歸依處 sarana), 구경(究竟 parayana) 이렇게 20가지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섬(dipa)에 대한 것도 열반을 표현 하는 하나의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섬은 윤회의 바다의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안전함을 뜻 한다. 그래서 섬을 열반의 비유로 사용하였는데, ‘너 자신을 섬으로 하라’라는 말이 있듯이, 빠알리 니까야에서 섬이라는 것은 열반과 동의어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열반이란 어떤 상태인가

 

열반과 동의어로 쓰인 섬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너희들을 위해 섬과 섬으로 이끄는 길을 설할 것이니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수행승들이여, 섬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섬이라고 한다.

 

(디빠경-Dipasutta-섬의 경, 상윳따니까야 S43:4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열반의 상태가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라 하였다. 그리고 열반으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사선과 사념처, 사정근, 사신통,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임을 설명한다.

 

이와 같이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가 열반임을 나타내는 것은 부정적 언표로 표현된 12가지와 긍정적 언표로 표현된 20가지 모두 동일하다.

 

가슴으로 피신하기

 

마음이 답답하면 바다를 찾는다. 그런 바다는 평등해서 좋다. 전세계 어디를 가나 똑 같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바다는 경이롭고 놀라운 것으로 가득찬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다는 바람이 일고 폭풍우가 몰아 치면 매우 위험한 곳이 된다. 그럴 경우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다에 대하여 여섯가지 감각능력에 따른 인간의 바다, 윤회의 바다라 하였다. 그래서 안전한 섬으로 피신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섬에 도착하면 아무리 폭풍우, 쓰나미가 들이 닥쳐도 안전하다. 그래서 섬은 열반과 같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범부들이 삶이라는 고단한 바다에서 벗어 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찬콩스님의 말대로 호흡이라는 섬으로 피난 가는 것이다.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 날 때 마다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피신하는 것이다.

 

 

2013-03-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