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사 불상이야기
올해 들어 처음 순례법회를 떠났다. 목적지는 ‘청암사’와 ‘수도암’이다. 김천에 있는 전통사찰이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곳에 위치한 절이다. 너무 멀리 가면 돌아 올 때 교통난으로 고생하기 때문이다.
이번 순례법회 가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26명으로 평소보다 훨씬 적다. 비록 적자여행이긴 하지만 떠나는 이유는 계획된 일정이기 때문이다.
일년에 서너차례 떠나는 여행을 통하여 그동안 보지 못하였던 법우님들을 만난 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그런 분들 중에 노보살 부부님이 있다.
노보살님은 연세가 드셨음에도 인터넷도 하고 컴퓨터도 다룰 줄 안다. 그래서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글을 틈틈이 읽는다고 한다. 아마도 작성된 글과 작성자 얼굴이 매칭되는 것을 아는 몇 분 중의 한 분 일 것이다.
청암사 가는 길에
청암사는 김천에 있다. 김천으로 가는 길에 보는 바깥 풍경은 완전한 봄이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었고,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벚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부지방에는 아직 벚꽃이 개화 되지 않았지만 소백산맥 이남의 경우 이제 벚꽃이 시작되고 있다.
청암사 가는 길은 마치 강원도 산길을 가는 것 같다. 굽이굽이 S자로 휘어진 산길을 올라가자 저 멀리 산들이 아득히 보였다. 더구나 전날 비가 오고 눈이 내려서인지 저 멀리 산 정상에는 눈이 쌓여 있다. 4월의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기온이 급강하 하는 바람에 눈이 온 것이다. 마치 히말라야 설산을 보는 것처럼 장관이다.
지도검색을 하였더니
경사가 심하고 S자형 급커브 길을 오른지 한참 후 분지 모양의 지형이 나타났다. 경상북도 김천이라 하지만 마치 강원도 오지에 온 것 같다. 도무지 감히 잡히지 않아 청암사 가는 길에 대한 지도를 검색하여 보았다.
지도를 보니 서쪽에 덕유산 국립공원 가까이 있다. 남쪽으로 가야산국립공원이 있다. 덕유산과 가야산 사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1317미터에 달하는 수도산 바로 아래에 있다. 이번 순례지 중의 하나인 수도암은 청암사의 말사라 한다. 이렇게 오지에 있다 보니 주변에 있는 산중에 북쪽 사면에는 눈이 쌓여 마치 히말라야 연봉처럼 보인다.
청암사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청암사에 도착하였다. 그런 청암사는 비구니도량이다. 더구나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는 도량이다.
청암사는 불자들에게 생소한 절이다. 잘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청암사를 알게 된 것은 어느 비구니스님의 댓글을 받고 나서이다. 청암사에도 비구니승가대학이 있고 강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암사에 대하여 알게 된 계기는 지난해 11월 초불연의 4부 니까야 완역 봉정법회에서이다. 코엑스 그랜드 볼룸에서 열렸는데 사회를 보던 각묵스님은 청암사에서 40명의 비구니 학인스님이 참석하였다고 소개 하였다.
각묵스님은 그때 청암사로 말하였으나 청암사가 생소 하였기 때문에 잘 알아 듣지 못하여 블로그에 ‘ㅇㅇ사(봉녕사?)’라고 써 놓았다. 수원에 있는 봉녕사 비구니 승가대학이 생각났었기 때문이다. 그런 청암사는 매우 생소하다. 그리고 그곳에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5대 비구니 강원
청암사 비구니강원은 불자들에게 생소하다. 그러나 불교신문 연재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5대 비구니 강원에 속한다. 승가대학이 있는 5대 비구니 강원은 운문사, 동학사, 봉녕사, 청암사, 삼선승가대학이라 한다. 그렇다면 비구니 강원의 역사는 어떤 것일까?
불교신문 기사에 따르면 해방후 최초의 비구니 강원은 동학사라 한다. 1956년의 일이다. 동학사에 이어 2년 후 청도 운문사에서 비구니 강원이 문을 열었다. 1970년 명성스님이 강주와 주지를 맡으면서 가람을 크게 일으켰는데 현재 100명이 넘는 우리나라 최대 비구니 강원이다. 수원 봉녕사 비구니 승가대학의 역사는 1071년부터 시작 된다. 묘전, 묘엄 스님들이 운문사에서 봉녕사로 옮겨와 비구니 강원을 열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청암사의 역사는?
우리나라 5대 비구니 승가대학 중의 하나인 청암사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불교신문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청암사승가대학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고봉태수스님이 주석하며 가르치고 고산스님, 우룡스님이 강사로 활약해 40명에 이르는 학인이 경을 배웠지만 이후 쇠락해졌다. 이를 1987년 학장 겸 주지인 지형스님과 강사인 상덕스님에 의해 비구니 승가대학으로 거듭난다
( <24> 비구니교육 시대 개막 - 배경과 전개과정, 불교신문 2010-07-17)
불교신문 기사에 따르면 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부터 시작 되었다 하니 운문사나 봉녕사 보다 더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도중에 쇠락하였지만 1987년부터 다시 부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주차장도 없고 사하촌도 보이지 않고
청암사가 불자들에게 덜 알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지리적 요인이라 보여진다. 강원도 산간지방 보다 더 오지처럼 보이는 깊숙한 산중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S자형의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도달한 청암사 입구에는 주차장이 없다. 또 유명사찰에서 볼 수 있는 사하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주차장도 없고 사하촌도 보이지 않고 나물이나 농산물을 파는 지역민들도 보이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보아 관광객이라든가 순례객이라든가 심지어 등산객 조차 보이지 않는다. 깊은 심산유곡에 보이는 것은 이곳이 절의 입구임을 알려 주는 일주문만이 덜렁 서 있을 뿐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절이 청암사이다. 그러다보니 청암사에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다는 사실 조차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그림으로 표현된 사천왕
일주문을 따라 오르니 아름드리 키 큰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아름드리 전나무는 오지에서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주문을 지나니 천왕문이 나타난다.
천왕문에는 사천왕상이 있다. 그런데 청암사 사천왕상은 다른 절과 달리 그림으로 되어 있다.
계곡 바위에 새겨진 글발
일반적으로 사천왕문을 지나면 곧바로 법당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청암사의 경우 사천왕문을 지나면 산길이 계속된다. 계곡의 바위에는 글발이 새겨져 있다. 주로 사람들의 이름이다.
다리를 건너면
천왕문을 지나 산길을 올라가면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있는 곳이 청암사 승가대학이 있는 곳이다.
청암사 대웅전
깊은 산중에 숨어 있는 듯이 청암사가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전각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을 바라 보고 좌측이 승가대학 건물이고, 우측이 진영각과 율원건물이 있다.
청암사 대웅전
청암사는 신라 헌안왕 2년(858년) 도선국사가 건립하였다.
현재 보는 대웅전은 1900년대 초에 중건하였다.
청암사 신도 정기법회날
이렇게 깊은 산중에 불자들이 많이 모였다. 오늘이 청암사 신도들을 위한 정기법회일이라 한다. 매달 첫째 주 일요일에 법회가 열린다고 한다. 이 깊은 산중에도 신도들이 찾아 오는 것이다.
신도들이 법회를 보는 곳은 사면이 유리로 된 전각이다. 교육장소로도 사용되고 차를 마시는 곳으로 사용되는 다용도 건물이라 볼 수 있다. 오지임에도 불구하고 청암사 신도들과 순례팀으로 사면전각에 가득찼다.
신도들을 위한 법문은 학장스님이 하였다. 인욕과 보시에 대한 법문이었다. 사리뿟따존자 어사 박문수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성내지 말고 인색하지 않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하얀 매화와 이제 막 피어난 목련
청암사에는 이제 봄이 시작 된 듯 하다. 산아래 세상에서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었지만 이곳 청암사는 고지대이어서일까 아직도 겨울 같다. 다만 하얀 매화와 이제 목련이 막 피어나고 있다. 만 피어 있을 뿐이다.
아침에 눈이 내렸다는데
아침에 눈까지 내렸다고 하니 오지중의 오지이고 높은 고지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갠후 하늘이 맑듯이 구름사이로 하늘이 보일 때 따스한 햇볕이 비추자 금새 봄으로 바뀐 것 같다.
청정한 점심공양
법회는 108배로 마무리 되었다. 불교tv에서 볼 수 있는 나레이터의 목소리에 따라 108배를 하는 것이다. 법회가 끝나자 점심공양 시간이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절에서 먹는 밥은 맛있다. 기름진 음식은 볼 수 없고 자연에서 수확된 청정한 음식물이다.
스님들의 차공양을 받고
점심공양이 끝난 후 순례팀은 사면이 유리로 된 전각에서 차를 마셨다. 법회를 보던 장소가 차 마시는 장소로 변한 것이다. 스님들이 차를 만들어 주어서 마신 것이다. 이렇게 단체로 차 대접까지 받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차를 마시는 도중에 청암사에 대한 소개시간이 있었다. 비구니 스님이 청암사의 역사와 전각에 대하여, 그리고 승가대학에 대하여 자세히 소개해 주었다. 특히 승가대학이 있는 ‘육화요’에 대한 소개가 인상적이었다.
청암사승가대학 ‘육화요’
육화요는 청암사승가대학이 있는 전각의 이름이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좌측에 있다. 육화의 의미는 여섯가지 법으로서 신(身), 구(口), 의(意), 계(戒), 견(見), 이(利)의 화합을 통한 승가의 실천내용이라 한다.
현재 청암사 승가대학 강원에서 공부하는 학인 스님은 40명가량이라 한다. 약 70여명에 달하는 스님들 중 거의 반이상이 학인 스님인 것이다. 그런데 40명이 육화요 전각에서 함께 산다고 한다.
육화요 전각의 경우 문이 여러 개 보이지만 내부 구조를 보면 큰 방으로 되어 있다. 멀리서 보니 발우가 가지런히 정돈 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큰 방에서 40명이 함께 생활하는데, 그 공간은 침실도 되고, 공부방도 되는 등 용도에 따라 달리 쓰인다고 한다.
청암사 불상이야기
청암사를 소개하는 스님은 또 하나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것은 불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웅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상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상호와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 불상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육계가 있는 정수리에는 빨간 원모양이 있고, 입술 역시 빨갗게 칠해져 있다. 손 모양도 두손을 모으고 있는 것이 우리 불상과 다르다. 더구나 가사모양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청암사 대웅전 석가모니부처님상
어디서 온 불상일까?
이 불상은 어디서 온 것일까?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불상이라 한다. 청암사를 중창한 스님이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스님은 항주의 ‘영은사’라 하였다. 중국 항주 영은사에 가면 똑 같이 생긴 불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항주의 영은사를 검색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영은사 대불을 볼 수 있었다.
중국 항주 영은사(灵隐寺, Lingyin Temple) 불상
중국 최대 포털 바이두 (baidu.com)에서 검색한 것이다. 한 눈에 보아도 청암사 불상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머리의 빨간 육계부분, 중국인의 얼굴 모습,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사를 입은 모습이다.
이런 청암사 불상에 대하여 김천시청 자료에 따르면 “대운스님이 1914년에 중국 항주 영은사에서 조성한 석가모니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붉은색 계주와 진홍빛 가사 안자락 등 청나라 말기 불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청나라 말기 불상이라 한다.
이와 같이 청암사 불상과 영은사 불상이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크기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20배가 큰 항주 영은사 불상
중국 여행이 풍부한 법우님의 설명에 따르면 항주 영은사 불상을 직접 보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청암사 불상과 20배 차이가 난다고 한다. 항주 영은사 불상은 무려 20여미터 크기라 한다.
중국 여행을 다녀 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스케일이 크다고 한다. 크고 우람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건물을 지어도 높게 짓고, 도로를 만들어도 대로를 만든다. 관광서 역시 어마어마하게 크게 짓는다. 이처럼 공적인 건물과 기념비적인 건축물은 거대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는 땅덩어리가 넓은 대륙의 스타일도 있지만 옛날부터 거대한 건조물을 많이 지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낙양의 용문석굴, 사천의 낙산대불 같은 것이 좋은 예이다.
이처럼 예로부터 대불조성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국에서 최근 불교가 부흥되면서 역시 대불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자유여신상 보다 더 높은 대불
중국 하이난섬(海南島)에는 높이 108m의 대불이 있다. 중국최대이자 세계최대인 ‘해남삼아남산해상관음 (海南三亞南山海上觀音)’이라 한다. 이 해상관음이 공개된 것은 2005년 4월 24일이라 한다. 1995년부터 공사를 시작한 이래 10년만인 것이다.
해남삼아남산해상관음 (海南三亞南山海上觀音)
중국 해남성에 있으며 높이가 108미터에 달한다.
그림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265
이 해상관음은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보다 더 높다고 한다. 이밖에도 중국 광서성 동림사에서 높이 48미터에 달하는 ‘동림대불’이 조성되고 있다. 아미타불이라 한다.
그렇다면 중국에서는 왜 이와 같은 대불조성이 유행일까? 그것은 중국정부에서 불교를 후원하기 때문이다.
종단이나 개인의 원력으로 대불을 조성하기 힘들다. 용문석굴의 대불이나 낙산대불이 황실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듯이 오늘날 중국의 대불조성은 중국정부의 지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중국정부의 불교육성정책
그렇다면 중국정부는 왜 불교육성정책을 펴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미국에 대한 견재를 들 수 있다.
현재 중국은 미국 다음으로 국민총생산이 많은 국가로서 이제 ‘G2’라 불리운다.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계속해서 확대해 나가고 있는데 앞으로 한 세대 후가 되면 미국을 제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그런 중국이 미국의 종교라 불리우는 기독교에 대하여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더구나 미국은 과거 기독교패권주의를 앞세워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한 바 있다. 그런 나라 중에 우리나라도 포함된다.
이처럼 기독교패권주의를 앞세운 미국과 맞서기 위하여 중국이 생각해 낸 것이 아마도 전통문화의 복원일 것이다. 그것도 수 천년의 역사와 문화와 영광을 가졌던 불교문화에 대한 복원이 이에 해당 될 것이다. 그런 예를 최근 ‘대불(大佛)’건설에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과거 대불조성역사를 가지는 있는 중국에서 불상 역시 크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중국의 절에 가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상을 볼 수 있다. 영은사 불상도 그런 예에 속할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중국의 인재불사 이야기
최근 중국불교의 흥기와 관련하여 함께 한 법우님이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버스속에서 마이크를 잡은 법우님은 해외 여행을 많이 다니신 분이다.
법우님은 20년 전 중국 항주 영은사에 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와 지금과 차이가 많다고 하였다. 20년 전에는 지금과 같이 절이 크지도 않았고 사람도 많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 영은사는 마치 우리나라 설날이나 추석날 서울역 대합실을 방불케 한다고 한다. 그리고 사찰도 엄청나게 커졌다고 한다. 20년 전과 비교하여 놀랄만큼 불교가 성장한 것이다.
중국불교는 어떻게 단기간에 놀랄만큼 성장하였을까? 중국정부가 미국의 기독교 패권주의에 맞서기 위해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받아 들인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중국정부의 통치이데올로기와 불교사상이 ‘궁합’이 잘 맞은 것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불교를 후원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인재불사라는 것이다.
법우님의 설명에 따르면 1990년 대 중반 중국정부에서 약 1,000명에 달하는 중국스님을 한국에 파견하여 교육 시켰다고 한다. 육칠십명 단위로 하여 십여차례 한국에 스님을 파견하여 의례를 배우게 하였다는 것이다. 문화혁명으로 인하여 중국불교의 전통이 사라진 중국에서 중국불교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을 선택한 한 것이다. 그래서 조계종으로 인재를 파견하여 교육시켰다고 한다. 이런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법우님은 두 번에 걸쳐서 이런 말을 하였다.
그 때 교육받은 스님들이 중국으로 돌아가 지금은 중국불교를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불교가 오늘날 처럼 부흥하게 되었고, 그 때 교육 받은 스님들이 현재 주지나 방장스님을 하고 있어서 그 때 교육시킨 스님들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깜짝 놀란다고 하였다.
원형이 잘 보전 되어 있는 한국
이런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불교신문을 포함하여 불교관련 신문사이트에서 한 번도 그런 이야기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불교가 우리의 도움을 받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무엇이든지 원형이 잘 보전 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교의 경우 지금은 중국에서 사라져 알 수 없는 것들이 마치 박제된 것처럼 전승된 그대로 보전 되어 있고, 불교 역시 중국불교의 모습을 잘 보전하고 있다고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기독교 역시 초기전래 모습을 잘 보전 하고 있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 전달한 독선적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을 특징으로 하는 기독교 원형이 잘 보전 된 것이 우니라나라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유교, 불교, 기독교가 초기 전래된 그 모습 그대로 마치 박제된 것처럼 보전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한다.
빠알리 니까야로 공부하게 된 강원
깊은 산중에 절이 있다는 것은 전통이 유지되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백년 된 전통이 잘 보전되어 왔을 것이다. 교육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백년전의 교과과정이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대화를 나눈 스님에게 물어 보았다. 빠알리 니까야로 초기불교 공부도 하는지 물어 보았다. 초기불교를 공부하지만 교재는 빠알리 니까야가 아니라고 하였다. 동국역경원에서 출판된 것이라 한다. 아마도 한역아함경이라 보여진다.
그런데 최근 조계종 교육원에 따르면 학인 스님들을 위하여 빠알리 니까야를 교재로 사용할 것이라 한다. 교재는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최근 간행된 ‘니까야 강독’이라 한다. 조사불교의 전통을 간직해 오고 있던 한국불교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자연과 세상은 극적으로 변한다
S자 굽이길을 돌아 올라간 곳 심산유곡에 있는 청암사에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4월도 초순이 지나 중순으로 넘어갈 시점에도 진달래가 피지 않고 이제 목련이 꽃 봉우리를 터뜨리고 있다.
깊은 산중에 봄이 늦게 오지만 불과 이삼주만 지나면 세상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지금은 나무마다 가지만 앙상하지만 모두 새옷을 갈아 입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연은 극적으로 변한다. 자연의 변화 못지 않게 세상도 때로 극적으로 모든 것이 바뀐다.
2013-04-0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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