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맛을 알고부터, 생리적욕구와 수행자의 도둑질

담마다사 이병욱 2013. 4. 16. 09:00

 

맛을 알고부터생리적욕구와 수행자의 도둑질

 

 

 

출가한다고 하여 반드시 비구로서의 삶을 마치리라는 보장이 없다. 해마다 수백명의 스님들이 계를 받지만 정진이나 포교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환속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행자교육은 지나치리만큼 혹독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수행자가 되어 계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되었다가 혹시라도 세속에 미련을 못 버리고 다시 환속하는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왜 환속 하였을까?

 

빠알리 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에도 환속문제가 있었다. 상윳따니까야 가사의 경(S16:11)’에 따르면 그 때 존자 아난다와 함께 기거하던 대부분 젊은이인 수행승 서른명이 수행을 그만 두고 환속했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든 뒤 교단을 이끌어 가던 두타제일  깟사빠 존자의 눈에 보았을 때 이런 현상이 좋을리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깟사빠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깟싸빠]

벗이여 아난다여, 그대는 왜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지 못하고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며 깨어있음에 전념하지 못하는 그런 젊은 수행승들과 함께 유행을 합니까? 벗이여 아난다여, 그대는 곡물을 축내며 유행하고 가정을 파괴하면서 유행하는 것입니다. 벗이여 아난다여, 그대의 무리들은 빗나간 것입니다. 벗이여, 그대의 젊은 추종자들은 타락한 것입니다. 그 젊은 애송이들은 분수를 모릅니다.”

 

(찌와라경-varasutta- 가사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11, 전재성님역)

 

 

깟사빠는 아난다에게 수행승관리를 잘 하지 못하여 환속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세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1)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지 못한 것과 2)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는 것과 3) 깨어있음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를 들었다.

 

이와 같은 세 가지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젊은 비구들이 타락하여 환속하였다고 보고 아난다와 환속한 수행승들의 무리를 싸 잡아 애송이같다고 하였다. 팔십이 넘어 머리가 하얗게 샌 아난다 존자에게 애송이 라고 한 것은 새로 승단에 입단한 새내기 수행승처럼 행동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깟사빠존자는 삽십명이 환속하게 된 요인으로 감각능력수호 부족, 음식에 대한 갈애, 깨어 있지 않음을 들었다. 그런데 이런 세 가지 요인에 대하여 부처님이 수레의 비유에 대한 경(S35:239)’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감각능력수호

 

첫 번째로 감각능력수호에 대한 것이다.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감각능력의 문을 어떻게 수호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수행승이

 

1) 시각으로 형상을 보더라도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연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시각능력을 이렇게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불만의 악하고 불건한 것들이 그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제어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한다.

 

(라투빠마경-Rathūpamasutta- 수레의 비유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9, 전재성님역)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 이렇게 여섯가지 감각능력이 있는데  시각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여섯 가지 감각능력 중에 정신도 들어가 있다. 정신도 감각능력으로 보는 것이다. “정신으로 사실을 인식하더라도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S35:239)”라고 하였다. 이때 정신이 감각능력이고 사실(dhamma)이 감각 대상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각능력을 다스려야 하는가?

 

인상(표상)과 연상(부분상)

 

경에서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연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이는 무슨말일까? 인상과 관련된 말이 빠알리어로 니밋따(nimita)이고, 연상과 관련된 말이 나누뱐자나(nānubyañjana)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상부분상이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청정도론에서 ‘감각기능 단속에 대한 계’에 따른 설명을 참고 하여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들 수 있다.

 

 

 

청정도론

 

  

인상

(nimita)

표상

안식(眼識)으로 형상을 본다는 뜻.

 

여자라든지 남자라든지 하는 표상이나 아름답다는 표상 등

번뇌의 바탕이 되는 표상을 취하지 않는다. 단지 본 것에서만 그친다.

연상

(nānubyañjana)

부분상

번뇌들을 더욱 상세하게 하기 때문에, 분명히 드러나게하기 때문에 세상(細相)이라고 함.

--웃음-이야기-앞으로 봄-옆으로 봄 등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있는 그대로 그것을 취한다.

 

 

 

여자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시각능력과 시각대상이 접촉할 때 안식이 일어난다. 이때 단지 본 것으로 그치지 않고 여자다라고 표상을 취할 경우 “예쁘다” 거나 “아름답다” “매력적이다”라는 개념이 달라 붙는다. 이를 경에서는 인상(nimita, 표상)’이라 하였다.

 

이렇게 표상을 취했을 다음 단계로서 얼굴, , , , 가슴 등 부분적인 상을 취한다. 단지 본 것으로만 그치지 않은 결과에 따른다. 그래서 눈이 매혹적이다든가, “코가 높다든가 등의 세세한 부분상을 취한다. 이를 경에서는 연상(nānubyañjana, 부분상)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인상과 연상애 집착하였을 때, 필연적으로 번뇌가 일어날 것이라 하였다. 경에서는 악하고 불건한 것들이 그를 공격할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감각능력을 수호하려면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고 있는 그대로 취해야 된다. 그렇게 하려면 전체상은 물론 부분상도 취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원리는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 등 모든 감각능력에 적용된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두 번째로 음식에 대한 것이다. 깟사빠존자는 아난다존자에게 왜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먹지 못한 것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음식이 왜 세 가지 지적사항에 속할까?

 

음식은 미각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미각능력을 수호해야 하는 것으로 수레의 비유에 대한 경에서 설명되어 있다. 시각능력수호와 마찬가지로 미각에 대해서도 인상과 연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음식을 절제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먹어야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라고 이치에 맞게 성찰해서 음식을 취한다.

 

(라투빠마경-Rathūpamasutta- 수레의 비유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9, 전재성님역)

 

 

빠알리 니까야를 읽다 보면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불교상식이 무너지는 것을 많이 본다. 위 문구 역시 그런 케이스이다.

 

경에서 음식을 섭취하는데 있어서 마음 가짐이 나온다.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을 뿐만 아니라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불자들이 알고 있는 공양게와 약간 다른 것이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기독교인들과 달리 불자들은 밥먹을 때 특별한 의식을 치루지 않고 먹는다. 그러나 밥먹기 전에 낭송하는 게송이 있다. 스님이나 불자들이 식사 전에 외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오관게(공양게송)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나무석가모니불,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이것이 불자들이 알고 있는 공양게송이다. 골자는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고 깨달음을 이루고자 음식을 먹는 것이라 한다. 형식으로 보아 경에서의 내용과 유사하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빠알리 니까야에 있는 공양게가 원조라 볼 수 있다.

 

빠알리 공양게송

 

 경에서 언급된 공양게송을 빠알리어와 함께 다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neva davāya na madāya na maṇḍanāya na vibhusanāya, yāvadeva imassa kāyassa hitiyā yāpanāya vihisūparatiyā brahmacariyānuggahāya, iti purāañca vedana paihakhāmi, navañca vedana na uppādessāmi, yātrā ca me bhavissati anavajjatā ca phāsuvihāro cā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S35:239)

 

 

몸을 지탱하기 위하여 식사를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하여 먹는 것이지 놀이나 사치, 장식, 치장을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렇게 하면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이는 괴로움의 소멸, 윤회의 종식을 의미한다. 먹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와 같다.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

 

경에서 이어지는 가르침에 따르면 먹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치료가 될 때까지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 또한 예를 들어 짐을 옮길 수 있도록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라고 이치에 맞게 성찰해서 음식을 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안다.

 

(라투빠마경-Rathūpamasutta- 수레의 비유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9, 전재성님역)

 

 

경에서 음식을 먹을 때 두 가지 예를 들고 있다. 하나는 연고를 바르듯 먹어야 하고, 또 하나는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탐욕으로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바퀴가 잘 굴러 갈 정도로 꼭 필요한 양만 먹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경의 이름이 수레의 비유에 대한 경이다.

 

어떻게 깨어있음에 전념하는가?

 

세 번째로 부처님은 깨어있음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어떻게 깨어있음에 전념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대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초야에는 거닐거나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중야에는 오른 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밤의 후야에는 일어나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깨어있음에 전념한다.

 

(라투빠마경-Rathūpamasutta- 수레의 비유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9, 전재성님역)

 

 

항상 깨어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낮에는 경행과 좌선을 하고, 밤에는 경행과 알아차림을 유지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밤의 경우 초야, 중야, 후야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특히 중야의 경우 잠을 자는 시간을 말한다.

 

중야, 즉 잠을 잘 때에도 새김을 확립하여 알아차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잠자면서도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함을 말한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 와선수행으로 알 수 있다.

 

와선을 하게 되면 편안안 자세로 눕는다. 그리고 가장 강한 대상인 배에서 일어나는 호흡에 집중한다. 그 상태로 잠이 들기 전까지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유지한다. 잠에서 깰 때 역시 알아차림을 유지하라고 한다. 그런 내용이 경에서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라는 구절이라 본다.

 

세 가지 원리에 왜 음식이?

 

이와 같이 감각능력수호, 음식절제, 깨어있음 이렇게 세 가지를 살펴 보았다. 이 세 가지를 지키지 않았을 때 타락한다고 하였다. 깟사빠존자가 아난다 존자에게 질책하는 내용과 같다. 이는 아난다 존자와 함께 있던 젊은 비구 30명이 환속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세 가지 중에 왜 음식에 대한 것이 끼여 있을까? 부처님이 수레의 비유에 대한 경에서 세 가지 원리를 갖춘 수행승, 즉 감각능력 수호와 음식절제와 깨어있음 이렇게 세 가지를 강조하였는데, 거기에 왜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을까? 그것이 궁금하였다. 

 

늘 먹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먹는 것이 번뇌의 원인이 되고 해탈과 열반의 실현에 그토록 장애가 되는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하여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먹는 것이야말로 여섯 가지 감각능력 모두 해당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TV에서 보는 먹거리방송

 

저녁 TV 프로에서는 경쟁적으로 먹거리 방송을 내 보내고 있다. 한상 가득 차려 놓고 진행자가 한 입에 음식을 집어 넣는다. 그리고 맛있다는 표현을 말로도 하고, 엄지를 치켜 올리기도 하고, 표정으로도 짓는다. 그러나 시청자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비록 눈으로 소리로 확인 할 수 있지만 냄새나 맛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먹으면 어떤 맛이 날까?

 

누구나 음식을 먹는다. 음식을 먹을 때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고기를 먹을 경우 불판에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굽고 있는 고기에서 맛는 냄새가 난다. 이 경우 시각, 청각, 후각을 느낀다. 고기를 입에 넣으면 미각을 느낀다. 그리고 씹어서 삼키면 촉각을 느낀다. 또 맛있는 고기를 먹으면 술생각이 난다. 그래서 술을 마시게 된다. 술 역시 음식의 일종이기 때문에 술로 인하여 모든 감각기관이 총동원 된다.

 

이렇게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이 모두 총동원된다. 먹는 것 하나로서 미각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여섯 가지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음식을 절제하라고 하였을 것이다. 여섯 가지 감각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모든 번뇌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식욕과 성욕의 관계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면 여섯 감각기관의 노예가 되고 번뇌가 증장되어 청정한 삶을 살아 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식욕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인 성욕은 왜 언급이 없을까?

 

일반적으로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라 한다. 그래서 이런 생리적 욕구가 만족 되었을 때 그 다음 단계로 나가는 것이 마슬로우 욕구 오단계설이다. 불교에서는 오욕락이라 하여 식욕, 성욕, 안락욕, 재욕, 명예욕 등 다섯 가지 세속적 욕구를 충족하는 삶에 대하여 말한다. 모두 식욕과 성욕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그런데 식욕과 성욕과 같은 생리적 욕구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이 속인들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리적 욕구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장애 요인으로 보았다. 청정한 삶을 살아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데 방해 요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는 것에 대한 경계와 음계에 대한 것이 많다.

 

식욕과 성욕은 여섯 가지 감각능력을 극대화 시킨다. 그래서 음식에 대한 갈애가 심화 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성욕에 대한 갈애로 이어질 것이다. 왜 부처님이 음식에 대한 갈애를 세 가지 원리에 넣었는지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본다. 

 

맛을 알고 부터

 

음식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미각 뿐만 아니라 후각, 시각, 청각, 촉각, 정신 등이 총동원 된다. 그런데 맛에 대한 갈애가 모든 번뇌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예를 디가니까야 아간냐경에서 볼 수 있다.

 

디가니까야 아간냐경(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D27)에 따르면 맛에 대하여 태초에 다음과 같은 이야가 전한다.

 

 

바쎗타여, 그러자 어떤 뭇삶에게 어참, 이것이야말로 무엇일까?’라고 동요가 생겨나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았다.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자 그것에 매료되어 갈애가 그를 엄습했다.(D27)

 

 

 천상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스스로 빛이나고 기쁨을 먹고 살던 존재가 복과 수명이 다하여 아래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대한 이야기이다. 존재는 땅조각을 입에 대면서 처음으로 맛을 느낀다. 그때 맛에 대한 갈애가 엄습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혀 끝에 놓인 것만으로 칠천 개의 미각신경이 퍼져나가 마음에 드는 상태가 되어 갈애가 생겨났다.(Smv.865)”라고 설명되어 있다. 한 번 맛을 알게 되자 맛에 대한 갈애가 생겨 다시 찾게 되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맛을 알게 되자 빛나던 몸은 거칠어지고, 기쁨을 먹고 살던 존재는 음식에 의존해야 했다. 음식에 의존하게 되자 남녀의 성구분이 일어났고 이후에 성적교섭이 일아 나게 되었다. 이 모두가 맛을 알고 나서 부터이다.

 

 

 

 

 

 

 

taste

 

 

이와 같은 사실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맛을 추구하면 할수록 갈애가 생긴다는 사실이다. 마치 식도락가가 맛집을 찾아 순례하는 것처럼 맛에 대한 갈애가 생기면 온갖 번뇌가 발생함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먹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먹긴 먹되 수레바퀴가 굴러 갈 수 있도록 기름치는 정도로 먹으라는 것이다. 단지 몸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먹어야지 식탐으로 먹는다면 예전의 삶으로 삶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음식에 대한 갈애는 단지 미각만 만족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만족 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성욕과도 같은 것이다. 성욕 역시 식욕과 마찬가지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먹는 것을 절제 하지 못하였을 때 아난다와 함께 있었던 젊은 수행승들 30명이 환속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곱 번까지 반복할 수 있는 환속과 출가

 

그런데 철우스님의 글에 따르면 출가와 환속은 자유로운 것이라 한다. 출가자가 환속하였다가 다시 재출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율사인 철우스님의 불교신문 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비구가 자유롭게 세속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비구계를 지키지 않거나, 못하는 경우나, 걸식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비구의 생활을 그만두고 재가자의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한 번 비구생활을 그만둔 사람이 다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아서 비구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 출가와 환속을 일곱 번까지 반복할 수 있다. 환속과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는 일이 가능하다.

 

( 21. 사계(捨戒 : 還戒), 철우스님, 불교신문 2005-11-26)

 

 

출가와 환속을 일곱 번까지 반복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네가지 바라이를 범하였을 경우 추방되는데 그 경우 재출가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네 가지 바라이는 사람을 죽이는 것, 도둑질 하는 것, 음란한 짓을 하는 것,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거짓말 하는 것을 말한다.

 

환속하는 경우 계를 지키기 어려워서 이다. 그래서 대중에게 계를 버린다고 고하고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 가는 것을 말한다. 오계를 준수하는 우바새의 삶을 살다가 다시 출가 할 수 있는데, 법대로 환속한 사람은 구족계를 받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환속과 출가를 일곱번 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야

 

음식을 탐하는 것, 맛에 대한 갈애가 단지 미각에 대한 갈애 뿐만 아니라 시각, 청각 등 여섯 가지 감각에 대한 갈애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았다. 아직까지 그런 글이나 경전적 근거를 찾지 못하였으나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 보여진다. 또 맛을 추구하면 할수록 성적욕망도 높아 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 역시 맞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성욕은 식욕과 함께 생리적 욕구에 속한 것으로 항상 함께 하고 있음을 마슬로우의 욕구 오단계설이나 불교의 오욕락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식욕과 성욕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는 식욕과 성욕은 공통적으로 여섯 가지 감각에 대한 갈애를 촉발시키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하여 눈으로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정신으로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 모두가 식욕과 성욕에 적용할 수 있다. 이처럼 식욕과 성욕은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는 세속인들이 삶의 방식이다. 그런 욕구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바탕한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를 유발하여 뭇삶으로 하여금 끊임 없이 윤회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세속의 삶과 반대로 살아 가는 사람들이 수행자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청원경(S6:1)에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하였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거슬러 가야 부처님이 증득한 미묘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

 

수행자의 도둑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자가 맛에 대하여 탐착한다면 이는 세상의 흐름를 따라 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더구나 수행자가 맛을 추구하여 미각에 대한 갈애를 일으킨다면 이는 맛도둑이라 볼 수 있다.

 

왜 맛도둑인가? 빠알리 니까야에 따르면 어느 수행자가 매일 연꽃향기에 집착하였을 때 ‘향기도둑’이라 하였다. 비록 연꽃을 꺽어 가는 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행자가 향기를 취하는 것은 탐욕으로 발전되어 갈애를 일으킬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눈으로 형상에 집착하는 행위는 ‘형상도둑’이 될 것이다. 또 귀로 소리에 집착하는 것은 ‘소리도둑’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혀로 맛을 집착하는 것은 ‘맛도둑’이 될 것이다. 이처럼 수행자가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하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차맛에 천착 하는 등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즐겁게 하는 행위는 모두 ‘도둑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번뇌의 소멸을 위한 세 가지 원리(S35:239)’로서 감각능력의 문의 수호와 음식에 대한 절제, 그리고 항상 깨어있음 이렇게 세 가지를 말씀 하셨다.

 

탁구공만한 허물도 축구공만큼

 

탐진치에 찌들어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세속인과 달리,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사는 수행자의 허물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크게 보인다. 그래서 탁구공만한 허물도 축구공만큼 크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나왔을 것이다.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S9:14)

 

 

 

2013-04-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