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빠알리 니까야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교리적 시각과 역사적 시각

담마다사 이병욱 2013. 4. 11. 15:28

 

빠알리 니까야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교리적 시각과 역사적 시각

 

 

 

연기(緣起, Paiccasamuppāda)와 연생(緣生, paiccasamuppanna)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 중요한 내용의 경우 4부 니까야 이곳 저곳에 중복되어 있는데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는 정형구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거룩한 제자들은 이 연기와 연생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관찰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전생에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없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어떻게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었는지’ 숙세로 거슬러 올라가 가거나

 

‘나는 내세에 있을지, 나는 내세에 없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을지, 나는 내세에 어떻게 있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될 것인지’ 내세로 달려가거나

 

‘나는 현세에 있는지, 나는 현세에 없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는지, 나는 현세에 어떻게 있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는지’ 현세에 의혹을 갖게 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빳짜야경-Paccayasutta-조건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0,전잭성님역)

 

 

연기(緣起, Paiccasamuppāda)와 연생(緣生, paiccasamuppanna)으로 설명되는 조건의 경(S12:20)’이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imasmi sati ida hoti, 若有此卽有彼)”를 연기로 볼 수 있고,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Imassuppādā ida uppajjati, 若生此卽生彼)”를 연생으로 볼 수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전생과 내세와 현세 이렇게 삼세에 걸쳐서 총 열 다섯가지 의심을 말하고 있다. 이런 의심은 외도들의 의심으로서 삿된 견해들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연기법을 알면 결코 의심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한다.

 

부처님이 출현하였거나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았거나 원리(dhamma)로 정해져 있는 것이 연기법이라 한다. 그런 연기법은 불교의 근간이며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과(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와 조건(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으로 설명되는 연기와 연생법이 왜 중요한가?

 

부처님이 연기법을 설한 이유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S스님은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견성성불이라 한다. 중국조사의 가르침을 따르는 한국불교에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견성성불이다. 과연 부처님은 견성성불한 것인가?

 

빠알리니까야 그 어느 곳을 찾아 보아도 견성성불하였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 대신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라 한다. 이는 과거칠불 모두가 동일하게 깨달은 내용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상윳따니까야 인연상윳따(S12)에서는 위빠시붓다를 비롯하여 과거 칠불의 깨달은 내용이 반복구문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로 시작 되는 십이연기법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연기법을 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이 연기법을 설한 이유는 부처님 당시 시대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그때 당시 지배층의 종교이었던 브라만교와 신흥종교라 볼 수 있는 육사외도 사상을 논파하기 위해서이었다.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서는 갖가지 사상이 난무하던 시대이었다. 그래서 왕족을 포함한 민중들은 어느 가르침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런 혼란은 니까야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그때 부처님이 연기법을 설하였다. 연기법으로 갖가지 사상을 모두 논파한 것이다. 그런 내용 중의 하나가 위 빳짜야경(조건의 경)에 언급된 나는 전생에 있었는지,~”로 시작 되는 열 다섯 가지 의문이다. 모두 외도와 관련된 사상들이다.

 

삼세에 대한 열 다섯 가지 의심

 

과거, 미래, 현생과 관련된 열 다섯 가지 의문은 빠알리니까야에서 하나의 정형구이다. 말룽끼야뿟따경(M63)’에서도 언급되어 있고, ‘모든 번뇌의 경(Sabbāsavasutta , M2)’에서도 표현 되어 있다. 특히 모든 번뇌의 경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수행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삼세에 걸친 열 다섯 가지 의문의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열 다섯 가지 의문과 관련하여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의 각주를 참고 하였다. 각주를 참고하면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들 수 있다.

 

 

삼세에 대한 열 다섯 가지 의심

No

 

시제

 

1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ahosi nu kho aha atītamaddhāna.

전생

상주와 무인의 상태에 의존하여 과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의심하는 것.

2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Na nu kho ahosi atītamaddhāna

전생

상동

3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Kinnu kho ahosi atītamaddhāna

전생

태어난 신분과 성()을 의지해서 귀족이나 성직자, 평민, 노예, 재가자, 출가자, , 인간 가운데 어떤 자였는가를 의심하는 것.

4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Kathannu kho ahosi atītamaddhāna

전생

외모의 형태에 의존해서 컸는지, 작았는지, 희었는지, 검었는지, 측량할 수 있었는지 측량할 수 없었는지 어땠을까 하고 의심하는 것.

5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Ki hutvā ki ahosi nu kho aha atītamaddhāna

전생

신분등에 의존해서 귀족으로 있다가 성직자가 되었거나신으로 있다가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자신의 변천을 의심하는 것.

6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Bhavissāmi nu kho aha anāgatamaddhāna

내생

 

7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Na 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

내생

 

8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Kin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

내생

 

9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Kathan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

내생

 

10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

Ki hutvā ki bhavissāmi nu kho aha anāgatamaddhānanti

내생

 

11

나는 있는가?

aha nu kho'smi

현생

 

12

나는 없는가?

no nu kho'smi

현생

 

13

나는 무엇인가?

kinnu kho'smi katha

현생

 

14

나는 어떻게 있는가?

nu kho'smi aya

현생

 

15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nu kho satto kuto āgato so kuhi gāmī bhavissatī

현생

 

 

 

위 표에서 보는 열 다섯 가지 의심은 조건의 경(S12:20), 말룽끼야뿟따경(M63), 모든 번뇌의 경(M2)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열 다섯 가지 의심의 공통점은?

 

위 표를 보면 삼세에 걸쳐 다섯가지 의심이 중복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열 다섯 가지 의심의 공통점은 항상 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라는 식으로 나를 앞세우고 있다. 영원불변하는 고정적인 자아를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생에 나가 있었다면 이는 영원론(상주론)을 의지하는 것이고, 과거생에 나가 없었는데 나타났다면 이는 우연론(무인론)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삿된 것이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D1)에 따르면 62가지 삿된 견해 중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우연론의 경우 수행승들이여, 그런데 어떤 뭇삶은 그 무리에서 죽어서 여기에 오는 경우가 있다.(D1)”라고 설명되어 있어서 무상유정천의 존재가 현생에 태어난 것을 말한다. 전생에 인식을 혐오하여 그 수행의 과보로서 인식 없이 태어나 마치 죽은 듯이 산 존개가 무상유정천이다. 마치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산듯이 보여지는 무상유정천은 죽어야 다시 인식이 생기기 때문에, 현생에 태어 났을 때 전생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 우연히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경에서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라고 의심하는 것은 우연발생론자(무인론자)에 해당되는 것이다.

 

3번 항의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것은 전생의 신분과 성()에 대한 것이고, 4번 항의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에 대한 것은 전생의 외모의 형태 등에 대한 것이고, 5번 항의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에 대한 것은 전생의 직업 등이 변천 등에 대한 것이다. 이런 설명은 내생과 현생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번뇌만 증폭시키는 의심

 

사람들은 자신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는 누구일까?”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고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대하여 의문하고 의심을 품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가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번뇌의 경(M2)에 따르면 이와 같은 열 다섯 가지 의심은 모두 번뇌를 야기할 뿐이라 한다. 의심을 하면 할수록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의혹만 증폭시켜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번뇌만 야기 하는 열 다섯 가지 의심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Tassa amanasikaraīyāna dhammāna manasikārā manasikaraīyāna dhammāna amanasikārā, anuppannā ceva āsavā uppajjanti, uppannā ca āsavā pavaḍḍhanti.

 

신활동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활동기울이고,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할 것들에 정신활동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번뇌가 성장한다.

 

(삽바사와경-Sabbāsavasutta-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한 마디로 쓸데 없는 생각에 신경을 쓰는 것을 말한다. 나를 기반으로 한 삼세에 대한 열 다섯 가지 의심을 하는 것은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 없는 희론이라는 것이다.

 

잡도리하다는 무슨뜻일까?

 

여기서 정신활동에 기울인다라는 뜻이 빠알리어 마나시까라(manasikara)’이다. 이 마나시까라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잡도리하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래서 위 번역과 비교하여 번역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 원문

Tassa amanasikaraīyāna dhammāna manasikārā manasikaraīyāna dhammāna amanasikārā, anuppannā ceva āsavā uppajjanti, uppannā ca āsavā pavaḍḍhant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신활동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활동기울이고, 신활동을 기울여야 할 것들에 정신활동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번뇌가 성장한다. 그는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초불연

대림스님

그가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하고,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번뇌들이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번뇌들은 증가한다.

영문번역

These thoughts that should be thought are not thought. Thinking thoughts that should not be thought, and not thinking thoughts that should be thought, non-arisen desires arise and arisen desires develop.

 

 

마나시까라(manasikara)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이다마음에 잡도리하다라고 표현 한 것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초불연의 번역어 잡도리하다라는 말은 생소하다. 국어사전을 찾아 보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 족치다.”라고 되어 있다.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 ‘마음에 잡도리하다주의를 기울이다’, ‘주의를 돌리다(몰두하다)’라는 뜻이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다는 그 반대의 뜻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국어사전의 의미와 달리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

 

마나시까라(manasikara)에 대한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지혜로운 주의 기울임’이라 번역되는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에서 yoni는 ‘자궁’이나 ‘모태’를 나타내며 여기에다 ‘so’ 라는 접미어를 붙여서 탈격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모태로부터, 근원으로부터’의 뜻을 나타낸다.

 

manasikāra manas(, 마음)의 처소격을 만들어 거기에 √k(하다)를 붙여서 말 그대로 ‘마음에 만든다, 마음에 둔다, 마음에 새긴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yoniso manasikāra는 ‘아주 근원에서부터 잘 마음에 새겨 사유한다, 깊이 통찰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중국에서는 여리작의(如理作意)로 옮겼고 서양학자들은 ‘wise attention(지혜로운 주의)’ 혹은 ‘systematic analysis(체계적인 분석이나 사유)’ 등으로 옮기고 있다.

 

먼저 경의 어떤 문맥에서 요니소 마나시까라가 나타나는가를 살펴보면 이 술어가 뜻하는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M2)에서 부처님은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들은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번뇌들은 버려진다.”고 하신다.

 

또 상윳따 니까야, 12, 인연상응(Nidāna-sayutta)의 여러 경들에서 “연기에 대해서 아주 깊게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해탈을 성취한다.”고 나타난다. 그리고 맛지마 니까야, 「유명대경(有明大經, Mahāvedalla-sutta)(M43)에서는 “지혜로운 주의를 반연하여 정견(正見)이 생겨난다.”라고 나타난다. 그리고 아울러 yoniso upapari-kkheyya(근원적으로 [지혜롭게] 되새겨 봐야 한다)는 표현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요니소 마나시까라와 같은 의미라 하겠다.

 

(지혜로운 주의 기울임, 마하시 사야도 십이연기 주석)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에 대한 설명이다. 요니소(yoniso)와 마나시까라(manasikāra)의 결합어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주의 기울임이라 하였다. 따라서 마나시까라는 주의 기울임으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나시까라에 대한 영어표현은 attention’이라 한다. 공항에서 “attention please!”할 때의 그 attention이다.

 

이와 같이 마나시까라는 주의 기울임’, ‘마음 기울임이라는 뜻이 강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마음을 잡도리함이라 하였다.

 

다구치고 잡도리를 해 나갈 때

 

불자들에게 매우 생소한 잡도리하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인천 Y선원의 S선사가 법문에서 들었다. 현재 일년 이상 매일 아침 법문하고 있는 내용은 90년대 법문한 것이다. 10여 년전의 녹음테이프를 매일 들려 주고 있는 것이다. ‘잡도리하다와 관련된 내용을 녹취하여 블로그에 올려 놓은 바 있다. 이를 다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공부는 처음 출가할 때부터 마지막 도를 이룰 때 까지 하는 일이 한결 같이 한생각을 돌이키고 또 한생각을 돌이켜서 계속 본참화두 본참 공안에 대분심과 대신심과 대의단으로 계속 그 초점을 흐리지 아니 하고 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대의단이 가슴속에도 꽉 차고 나의 주변에도 꽉 차고 이 우주 법계에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 이렇게 다구치고 잡도리를 해 나갈 때 모든 번뇌와 망상이 발 붙일 것이 없어..

 

(송담스님, 알기쉬운 불교이야기 2012-06-03)

 

 

S선사는 다구치고 잡도리를 해 나갈 때라 하여 잡도리하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화두를 참구 하는데 있어서 번뇌와 망상이 발 붙이지 못하도록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대의단을 형성하기 위하여 화두를 다구치고 잡도리 하는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루 미로어 알 수 있는 것은 잡도리하다라는 말은 화두참구하는데 사용되는 선가의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오로지 화두챙기는 것에 전념하기 위하여 국어사전의 의미대로 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 족치는 것이 잡도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나를 기반으로 한 여섯가지 견해

 

부처님은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할 것들에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yoniso manasikāra)이라 한다. 그런데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다른 말로 쓸데 없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 번뇌가 생겨난다고 하였다. 삼세에 걸친 열 다섯 가지 의심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을 쓰면, 여섯 가지 견해 가운데 하나의 견해가 생겨난다.

 

‘나의 자아는 있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나의 자아는 없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자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자아에 의해서 무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무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

또는 이와 같이

‘나의 이 자아는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체험하는데, 그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항주하고 항존하는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는 견해가 생겨난다.

 

(삽바사와경-Sabbāsavasutta-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이 문장은 모든 번뇌의 경(M2)’에서만 볼 수 있는 내용이다. 모두 여섯 가지 삿된 견해에 대한 것이다. 이는 모두 자아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자아는 있다 없다는 식으로 항상 가 개입되어 있다.

 

자아가 개입되어 있는 한 번뇌가 생길 수밖에 없다위 여섯가지 견해에 대한 각주를 보면 왜 삿된 견해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외도사상이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견해에 대한 각주비교

 

자아를 기반으로 한 외도사상 여섯 가지에 대하여 각주를 참고하여 표를 만들었다. 비교하기 위하여 성전협회의 전재성박사의 각주(Pps.I.70)와 초불연의 대림스님의 각주(MA.i.170)을 참고 하였다.

 

 

 

1. 나의 자아는 있다

구 분

각주 내용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영원주의 견해.

초불연

대림스님

나에게 자아가 있다는 것은 상견이라는 사견이 자아를 거머 쥐는 것.

 

2. 나의 자아는 없다

구 분

각주 내용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허무주의 견해.

나의 자아는 없다라는 견해는 불교적 무아사상에 기초한 진술이 아니라 개인을 신체와 일치시켜서 죽음을 넘어서는 개인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유물론적 견해를 말한다.

초불연

대림스님

자아가 없다는 것은 단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무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유물론자들의 주장을 거머쥐는 것을 말한다.

 

3. 자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

구 분

각주 내용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그 다음의 세가지 견해는 체험이 반성적 구조를 갖는, 마음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마음의 능력, 몸과 연결된 마음의 인식 등 좀 더 철학적으로 복잡한 관찰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에 대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세 번째 견해에서 처럼 체험의 두 양상 -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 가운데 어느 하나와 일치시킨다.

초불연

대림스님

인식의 무더기를 선두에 두고, 그 인식의 무더기로 다른 무더기들에 대해 자아라고 거머쥐고는 인식으로 나머지 무더기들을 인식하면서 나는 이 자아로써 이 자아를 인식한다는 견해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4. 자아에 의해서 무아를 지각한다

구 분

각주 내용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자신의 본성에 대해 배우지 못한 범부는 네 번째 견해에서 처럼 오로지 관찰자와 일치시킴.

초불연

대림스님

인식의 무더기는 자아이고, 나머지 무더기들은 무아라고 거머쥐고는 인식으로서 인식하면서 이러한 견해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5. 무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

구 분

각주 내용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자신의 본성에 대해 배우지 못한 범부는 다섯 번 번째 견해에서처럼 오로지 관찰된 대상과 일치시킴.

 

다섯 번째의 무아에 의해서 자아를 인식한다는 것이 왜 옳지 않은가 하면, 자아는 존재하지 않고 정신적-신체적인 요소들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사실이나 존재의 다발도 실체가 없다.

초불연

대림스님

인식의 무더기는 무아이고, 나머지 네 가지 무더기들은 자아라고 거머쥐고는 인식으로서 그들을 인식하면서 이러한 견해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6. 나의 이 자아는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체험하는데, 그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항주하고 항존하는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구 분

각주 내용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Mdb.1170에 따르면, ‘말하는 자로서의 자아는 능동적 행위의 주체로서의 자아개념을 드러낸다. 반면 느끼는 자로서의 자아는 수동적 주체로서의 자아개념을 나타낸다.

 

여기저기라는 말은 상이한 전생(轉生)의 영속성을 통한 자기동일성을 갖고 있는 윤회하는 본질로서의 자아를 나타낸다.’ 그리고 자아는 항상하고 항주하고 항존하는 것이라는 것은 모든 제약이 완전히 철폐된 바라문교적인 영원주의의 완전한 표현이다.

 

그러나 MN.38에서 부처님은 수행승 싸띠(Sati)가 주장한 의식이 윤회하는 것으로 자기동일성을 갖는다.’라는 견해를 부정했다. 왜냐하면 의식도 조건지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초불연

대림스님

여기저기서라는 것은 각각의 모태, 태어날 곳, 머묾, 거처, 부류나 혹은 각각의 대상을 말한다.

 

항상하다는 것은 일어남과 멸함이 없다는 것이고, ‘견고하다는 것은 정수를 나타내고, ‘영원하다는 것은 항상 어느 때나 항상있다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법이란 자아의 본성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은 달, 태양, 바다, , 산은 세상의 용어로는 영원한 것이라 불리는데, 그것과 같은 뜻이다. 그들이 머무는 한 이 자아도 머문다고 이와 같이 견해가 일어난다.”(MA.i.71)

 

이 견해는 본서 제2갈애 멸진의 긴경(M38)’에 나타나는 사띠라는 비구가 가진 삿된 견해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부처님은 삼세에 걸친 열 다섯 가지 의심이 발생하는 것은 이치에 맞게 정신을 기울이지 않아 발생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의심이 발생하는 요인은 위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여섯가지 견해이다.

 

무아와 자아를 브라만과 아뜨만의 관계로 보았더니

 

여섯가지 견해 중의 하나가 의심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표에서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인식의 무더기 개념으로 설명되어 있다. 특히 4  5번에 대한 무더기 개념은 좀처럼 이해 하기 힘들다.

 

그런데 무아와 자아에 대하여 브라만과 아뜨만 개념으로 생각하면 단번에 의문이 풀린다. 무아를 브라만이라 가정한 것은 우리나라 선사들이 진아에 대하여 무아라고 표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의 브라만에 대하여 무아라 가정하였다. 그래서 4, 5, 6번의 견해에 대입하면 쉽게 이해된다.

 

그래서 4번 항의 경우 자아에 의해서 무아를 지각한다에 대하여 ‘아뜨만에 의해서 브라만을 지각한다로 되어 아뜨만이 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5번 항의 경우 무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브라만이 아뜨만을 지각한다로 되어 브라만을 관찰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4번과 5번항에 대하여 브라만과 아뜨만의 관계로 보면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초불연의 경우 인식의 무더기 개념으로 설명되어 있어서 좀처럼 이해 하기 어렵게 설명되어 있다.

 

4번과 5번항이 브라만과 아뜨만의 관계라는 것은 6번 항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6번 항에 대하여 모든 제약이 완전히 철폐된 바라문교적인 영원주의의 완전한 표현이라고 각주 하였다. 경에서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항주하고 항존하는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는 내용 때문이다. 그러나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단어 풀이만 되어 있을 뿐 바라문교적인 영원주의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빠알리니까야를 보는 두 개의 시각

 

빠알리니까야를 보는 두 개의 시각이 있다고 보여진다. 크게 역사적 시각과 교리적 시각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두 종류의 빠알리니까야 번역서가 있다. 하나는 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이고, 또 하는 초기불전연구원의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의 번역물이다.

 

 

 

 

두 번역서를 보면 번역에 임하는 시각이 서로 다른 것 같다. 이는 해제와 각주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전재성박사의 경우 주석서를 참고 하였으되 자신의 견해도 종종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초불연의 경우 철저하게 주석서 위주이다. 이 같은 차이는 해제글에서 볼 수 있다.

 

초불연의 경우 맛지마니까야 해제에서 첫째, 주석서를 중시하였다. 둘째, 청정도론을 중시하였다. 셋째,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중시하였다. 넷째, 술어를 한글화하려 노력하였다라고 천명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철저하게 논서를 참고 하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하는데 있어서 교리적 시각이 반영되었다고 본다.

 

전재성박사의 경우 해제글에서 역자는 영국-독일-일본 등 세계적인 번역본을 모두 참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심지어 티벳본까지 참고 하였음을 밝혔다. 그러다 보니 주석서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고 심지어 주석서의 내용이 잘못된 부분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의견도 각주에 반영되어 있다. 6번 항의 바라문교적인 영원주의라는 직설적 표현이 대표적이다. 이와 같이 과감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은 역사적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 본다.

 

이와 같이 교리적 시각이 반영된 초불연 번역과 역사적 시각이 투영된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볼 수 있다.

 

빠알리니까야는 시대와 역사의 산물

 

번역을 임하는 태도가 다름에 따라 각주의 내용이 다름을 확인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빠알리니까야가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빠알리 니까야에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실려 있지만 그것 못지 않게 역사적 사실도 많이 담겨 있다. 그런 내용 중의 하나가 위에 언급된 여섯 가지 견해에 대한 것이다.

 

역사의 산물로서 빠알리 니까야에는 부처님 당시 시대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지배종교인 브라만교와 신흥사조인 육사외도에 대한 비판이다.

 

부처님이 발견한 것은 연기법이다. 이 연기법으로 부처님 당시 가장 강력한 지배종교인 브라만교를 비판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브라만교의 영원주의를 비판하며 성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견과 단견을 논파한 유명한 문구

 

오늘날 기독교와 비슷한 창조주 개념을 가진 브라만교를 비판 가능하게 한 것은 연기법이다. 이 연기법으로 영원주의(常見) 뿐만 아니라 단멸론으로 대표 되는 허무주의(斷見)도 비판 하였다. 어떻게 비판하였을까? 경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 또는 비존재 두 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 상윳따니까야 S12:15(2-5), 전재성님역)

 

 

이것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한 유명한 문구이다. 이렇게 유명한 문구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위 내용을 전혀 이해 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연기법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기법을 접하고 나면 왜 유명한 문구인지 알게 된다. 불교가 존속할 수 있는 근간이 되고 또한 부처님의 중도사상이 잘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각주를 참고 하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된다. 

 

발생(samudaya)’소멸(nirodha)’

 

경에서 키워드는 발생(samudaya)’소멸(nirodha)’이다. 세상의 발생과 소멸을 관찰하면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사라질 것이라 하였다. 발생과 소멸에 대하여 부처님은 두 가지로 설명하였다.

 

먼저 발생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발생은 연기의 순관을 말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인과와 조건에 따른 순관을 말한다. 그래서 지혜로써 모든 형성된 존재들이 업(kamma), 무명(avijja), 갈애(tanha) 때문에 끊임없이 생겨나는 현상을 통찰한다면, 현세의 존재에 더 이상 내세가 없다는 허무주의가 사라지는 것이다. 즉 연기의 생성을 봄으로서 유물론적 허무주의가 논파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소멸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소멸은 연기의 역관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인과와 조건에 따른 연기의 역관을 말한다. 그래서 지혜로써 모든 형성된 존재들이 끊임없이 무상하게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면 모든 존재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가 사라진다. 이는 연기의 소멸을 봄으로써 영원주의가 논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 당시 지배종교인 브라만의 영원주의와 단멸론으로 대표되는 유물론적 허무주의는 연기법으로 논파 되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유무 양극단을 떠난 중도의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중도사상이다.

 

역사적 배경과 시대를 이해하였을 때

 

이와 같이 연기법에 입각한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고 역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빠알리 니까야가 성립된 배경을 알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 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무더기등으로 표현된 교학적 내용만 언급하였을 때 이해 하기 어렵다. 따라서 빠알리 니까야를 읽을 때 교학적 접근 방식도 좋지만 역사적 배경과 시대를 이해하였을 때 더 이해 하기 쉽다.

 

 

 

2013-04-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