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꺼진 등불로 묘사된 열반, 라따나경(보배경)11

담마다사 이병욱 2013. 4. 9. 18:24

 

꺼진 등불로 묘사된 열반, 라따나경(보배경)11

 

 

 

상가에 대한 일곱 게송

 

라따나경은 총 17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14개라 볼 수 있다. 15번부터 17번 까지 세 개의 게송은 일종의 유통분과 같은 것으로  때문이다. 따라서 14번 째 게송이 라따나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정종분이라 볼 수 있다.

 

14번 게송은 상가에 대한 것이다. 상가에 대한 게송은 라따나경에서 가장 비중이 높다. 6번부터 11번 까지 여섯 개에다 14번 게송을 더 하면 일곱 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라따나경을 보면 붓다, 담마, 상가 삼보 중에 상가에 대한 비중이 가장 높다. 부처님과 가르침을 실천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자 들의 커뮤니티인 성스런 상가야말로 오늘날 법의 바퀴가 굴러 오게 하는 실질적인 원동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송에 따르면 사쌍팔배의 성자에 대하여 공양하면 커다란 과보를 받는다는 것(게송 6)과 그런 성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을 이룬 자들(게송 7)이고, 한 번 성자의 지위에 올라 서면 땅위에 굳게 박혀 있는 기둥처럼 흔들림이 없을 것(게송 8)이라 한다. 또 성자의 흐름에 들면 적어도 일곱생 이내에는 윤회에서 벗어나고(게송 9), 유신견과 법에 대한 의심과 계금취에서 벗어나야 흐름에 들 수 있다(게송 10)고 하였다. 이처럼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간 자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잘못을 저지르기 힘들 것(게송 11)이라 한다.

 

성자가의 궁극적인 길은

 

이와 같이 게송 일곱개의 게송을 보면 성자의 흐름에 든 자에 대한 특징에 대하여 설명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성자가의 궁극적인 길은 어떤 것일까? 라따나경 14번 게송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라따나경 게송14

빠알리

Khīa purāa nava natthi sambhava
Virattacittā āyatike bhavasmi
,
Te
īabilā avirūhicchandā
Nibbanti dhīrā yathāyampadīpo,
Idampi sa
ghe ratana paīta
Etena saccena suvatthi hotu.

 

-낭 뿌라-낭 나왕 낫티 삼바왕

위랏따찟따- -야띠께 바와스밍

떼 니나빌라- 아위루-리찬다-

닙반띠 디-- --얌빠디-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전재성님역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법정스님역

묵은 업은 이미 다 했고, 새로운 것은 생기지 않는다. 그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종자를 없애고 그 성장을 원치 않는 어진이들은 등불처럼 멸한다. 이 뛰어난 보배는 모임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 행복하라.

中村元

い()はすでにき、しい()はもはやじない。その生存執著することなく、種子をほろぼし、それが生長することをしないそれらの賢者は、灯火のようにびる。このすぐれたが〈つどい〉のうちにする。このによってせであれ

영역

Old destroyed, new not arising the mind dispassioned not thinking of the future2

Seeds destroyed, there is no interest to grow, the wise extinguish like a lamp.

This too is precious in the jewel of the Community, by this truth may there be mental happiness.

 

 

 

Khīa: totally destroyed, finished, gone

purāa[=purāa, cp. Epic Sk. paurāa] old, ancient, formn. [〃] , 以前,

nava: -dussa, -dussayuga 新衣. -purāa 新古. -ratta 新染. -vedanā しき苦痛. nava

natthi: n'atthi [na-atthi] , 沒有, , 存在, 非有.

sambhava: m. [<sa-bhū] ... sambhava からまれた, 母系. ... Explanation, ,(-sambhava) [for *māti°=mātu °=*māt, after pitti°=pitu°=*pit] born (from a mother) Sn.620 (=mātari ...

Viratta: vi-rajjati<raj, rañj] 離貪, 離染. pp. viratta; caus. virājeti 離貪せしむ. ...

Āyatika:   āyatika,【 ... 未來 ~ka, 【 未來的(p54). Back to Top . āyati巴漢詞典 明法尊者增訂. ,【未來āyatika,【未來的

Āyatike: .III,45 (rūpadhātuyā citta viratta vimutta); Sn.204 (chandarāga°), 235 (°citta āyatike bhavasmi); A.V,3, 313; J.V,233 (mayi); Sdhp.613. (Page 633) ...

Bhavam:  [〃<bhū] , 存在, 生存 , , 幸福.

īabilā;???

avirūhi: 不生延的 avirūhi,

icchandā:  [(icchan + āvacara) adj.] moving in desires; behaving as one likes. Browse ...

Nibbanti : to get cold, to become passionless Sn.235 (nibbanti dhīrā yathâya padīpo= vijjhāyanti;

dhīrā : 확고한, 현명한, 현자

padīpa :   [padīpa-iya padīpeti grd.] 燈光, 燈具, 燈燭

 

 

 

 

 

 

불교의 구원관

 

부처님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을까. 유일신 종교와 달리 창조주에 의한 구원이 있을 수 없는 불교에서 구원관은 어떤 것일까? 이런 의문을 해소해 주는 것이 라따나경 14번 게송이라 볼 수 있다.

 

이전 게송에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들은 최대 일곱생이내에 완전한 열반이 들것이라 하였다. 아라한이 되어야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완전한 열반 그 자체가 불교의 구원론이라 볼 수 있다.

 

불교의 구원론이라 볼 수 있는 열반은 스스로 힘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게송에 따르면 그에게 과거가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이 없으려면,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가 파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어야만 완전한 열반이 성취 되는 것이다.

 

꺼진 등불로 묘사된 열반

 

번뇌 다한 아라한의 죽음에 대하여 등불이 꺼지는 것으로 묘사 하였다. 이와 같은 묘사는 빠알리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등불과 관련된 또 다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누룻다]

 

Nāhu assāsapassāso

hitacittassa tādino,

Anejo santimārabbha

cakkhumā parinibbuto

 

 확고한 믿음을 지닌 완전한 분에게

들숨도 날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네.

욕망이 없는 지멸을 성취하여

눈을 갖춘 님은 완전한 열반에 드셨네.

 

 

Asallīnena cittena

vedana ajjhavāsayi,

Pajjotasseva nibbāa

vimokkho cetaso ahūti.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

죽음의 고통을 참아내고

등불이 꺼지는 것처럼

그 분의 마음은 참으로 해탈되었네.”(S6:15)

 

 

상윳따니까야 빠리닙바나경(Parinibbāasutta, 완전한 열반의 경, S6:15)’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자 제자들이 브라흐마 사함빠띠와 아난다, 아눗룻다가 게송을 읊었는데, 아누룻다는 완전한 열반(Parinibbāa)에 대하여 등불(Pajjota)이 꺼지는 것으로 묘사 하였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그의 해탈은 어떤 것에도 방해받을 수 없고 완전히 서술할 수 없는 상태(sabbaaso appannattibhavupagamo)에 들어서 등불처럼 꺼진다.(Srp. I. 225)”라고 되어 있다.

 

네 가지 견해

 

등불이 꺼진 것으로 묘사된 열반은 서술하거나 말로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견해에 대하여 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룽끼야뿟따경(M63)에 따르면 말룽끼야 뿟따가 내게 설명하지 않는다면, 나는 배움을 포기하고 세속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설명을 하지 않은 것일까? 맛지마니까야 불의 비유와 왓차곳따경(M72)에 따르면 네 가지 경우에 대하여 각주로 설명되어 있다. 이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여기서 여래는 자아를 말하는데, 그 행위자 행수자 등 영원하고 견고한 자로서의 여래존재에 관련된 여래라고 묘사되는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는 자아.

-이 자아가 사후에 몸이 파괴된 뒤에 존재하는 것으로 봄.

-초기 우파니샤드의 학파 가운데 일부에 의해 주장.

-영혼이나 진아로 바꾸어 생각하면 쉬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물론자들의 주장.

-현명한 성자나 어리석은 자나 누구든지 신체가 파멸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무주의주장으로 사후세계를 부정.

아지따 께사깜발린이 주장함.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어떤 영혼들은 열반에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제3의 존재인 존재와 비존재(sadasat)’란 항목을 설정함.

-이 영혼들은 윤회로부터 해탈 되었으나 아직 완전히 해탈하지는 못한 존재와 비존재의 범주로 분류됨.

막킬리 고살라의 추종자이었던 뜨라이라씨까 아지비까에 의하여 천명됨.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마라위케빠와다(amaravikkhepavada) 로서 뱀장어를 잡듯이 혼란스런 이론을 말함.

-존재도 비존재도 사후의 성인을 기술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파의 학설.

산자야 벨랏티뿟따의 주장

 

 

 

네 가지 경우를 보면 모두 부처님 당시 외도들의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여래가 사후에 존재한다고 말하면 영원론이 되어서 영혼이나 진아를 인정하게 된다. 반대로 여래가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는 단멸론이 되어 유물론적 허무주의 견해에 빠지게 된다.

 

불의 비유를 들어 문답식으로

 

그래서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대하여 존재한다라거나 존재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대신 다음과 같이 불의 비유를 들어 문답식으로 설명하였다.

 

 

[세존]

“밧차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대 앞에 불이 타오르면, 그대는 ‘내 앞에 불이 타오른다.’라고 아십니까?”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내 앞에 불이 타오르면, 나는 ‘내 앞에 불이 타오른다.’라고 압니다.

 

[세존]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타오르는데,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타오르는가?’라고 묻는다면, 밧차여, 그 물음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내 앞에 불이 타오르는데,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타오르는가?’라고 물으신다면, 존자 고따마여, 나는 ‘내 앞에 불이 타오르는데, 그 불은 풀과 섶이라는 땔감을 조건으로 하여 타오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세존]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꺼진다면, 밧차여, 그대는 ‘내 앞에서 불이 꺼진다.’라고 압니까?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내 앞에 불이 꺼진다면, 존자 고따마여, 나는 ‘내 앞에서 불이 꺼진다.’라고 압니다.

 

[세존]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꺼진다면, ‘그 불은 이 곳에서 동쪽이나 서쪽이나 남쪽이나 북쪽의 어느 방향으로 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밧차여, 그 물음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그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 불은 섶과 나무라는 땔감을 조건으로 하여 타오르고, 그 땔감이 사라지고 다른 땔감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양분이 없으므로 꺼져버린다고 여겨집니다.

 

(악기왓차곳따경-Aggivacchagotta sutta-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맛지마니까야 M72,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부처님은 문답을 통하여 열반이란 어떤 상태에 대한것인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땔감이 공급되지 않으면

 

밧차곳따의 대답에서 땔감이 공급되지 않으면 불이 꺼지는 것으로 열반을 이해시켰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말은 경에서 섶과 나무라는 땔감을 조건으로 하여 불탓는데, 그것이 소모됨으로써 다른 것이 공급되지 않으면 연료가 떨어져 꺼졌다고 불린다.”라는 말은 연료의 공급조건으로 불이 타오르는 것이지 연료의 공급에서 불이 타오름이 오는 것이 아니며, 연료의 떨어짐을 조건으로 불이 꺼지는 것이지 꺼진 불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인데, 그것은 인과성에 본질적으로 시간적-공간적 근접성이 수반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열반은 서술될 수 없다는 초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각주, 전재성박사)

 

 

각주에 따르면 연료의 공급조건으로 불이 타오르는 것이지 연료의 공급에서 불이 타오름이 오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공급이 아니라 공급조건인 것이다. 누군가 연료를 공급해 주어 불이 계속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공급을 조건으로 하여 불이 타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땔감이라는 자양분이 없으면 불이 꺼져 버릴 것이다. 이는 연기의 인과와 조건에 대한 것이다.

 

네 가지 자양분

 

불이 계속 타오르게 하려면 땔감이라는 자양분이 있어야 한다. 자양분은 일반적으로 (1)먹을 수 있는 자양분(麤細食, 추세식), (2)느낌을 위한 접촉의 자양분(觸食, 촉식), (3)새로운 존재의 생성을 위한 의도의 자양분(意思食, 의사식), (4)정신-신체를 위한 의식의 자양분(識食, 식식) 이렇게 네 가지가 있다.

 

네 가지 자양분 중에서 정신-신체를 위한 의식의 자양분(識食, 식식)’의 경우 주석에 따르면 쮸띠찌따(cuticitta, 死沒心)’로서 죽을 때의 마음, 즉 수태의식(結生食)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를 다른 말로 재생연결식이라 한다.

 

재생연결식은 십이연기에서의 식()을 말한다. 이는 의식의 자양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일 의식의 자양분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은 누군가 공급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의식의 자양분(識食, 식식)

 

사람들은 윤회의 주체가 있거나 어떤 초월적 존재가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잘못을 일깨워 주는 경이 있다. 몰리야 팍구나경(S12:12)이다.

 

경에서 팍구나는 세존이시여,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공급합니까?”라고 물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러한 질문은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질문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자양분이 생겨납니까?”라고 물어 보아야 한다고 나무란다. 이는 인과와 조건에 따른 연기적으로 사고 하여야 한다는 말로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어 보아야 할까? 경에 따르면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자양분이 생겨납니까?”라고 물어 보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바른 대답은 어떤 것일까?

 

경에서는  의식의 자양분은 미래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의 조건이고, 그것이 생겨날 때 여섯 가지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난다.(S12;12)”라고 부처님이 친절하게 정답까지 말씀해 준다. 이는 재생연결식에 대한 설명이다.

 

땔감을 의미하는 우빠다나(집착)

 

자양분의 의미는 집착을 뜻하는 우빠다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각주를 보면 우빠다나(upadana, 집착)는 땔감을 의미하는데 아하라(ahara, 자양분)도 역시 불이나 등불의 자양분으로서 땔감을 뜻한다. ‘기름과 심지가 소모된다면 등불은 자양분이 없어 소멸될 것이다.’ 이 경구에서 ahara가 갈애를 통해서 조건지어진다는 사실은 연기의 고리에서, 취착 즉 upadana가 갈애를 통해서 조건지어진다는 사실과 일치한다.”라고 되어 있다.

 

번뇌 다한 자의 사후

 

이와 같이 재생을 있게 하는 땔감은 누군가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조건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땔감이 사라지고 다른 땔감이 공급되지 않으면 불은 꺼지고 말 것이다. 이것이 열반이다. 이렇게 꺼진 불로 묘사된 열반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밧차여,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물질로써 여래를 묘사하려고 하지만, 여래에게 그 물질을 끊겼습니다. 여래는 물질의 뿌리를 끊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고, 존재하지 않게 하여,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합니다.

 

(악기왓차곳따경-Aggivacchagotta sutta-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맛지마니까야 M72, 전재성님역)

 

 

이번에는 뿌리가 끊어진 종려나무의 비유를 들었다. 불이 꺼진 등불과 같은 뜻이다. 뿌리가 잘린 나무에서 더 이상 생장이 있을 수 없듯이 열반에 들게 되면 더 이상 미래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질 뿐만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마찬가지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밧차여, 참으로 여래는 물질이라고 여겨지는 것에서 해탈하여, 심오하고, 측량할 수 없고, 바닥을 알 수 없어 마치 커다란 바다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래에게는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란 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악기왓차곳따경-Aggivacchagotta sutta-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맛지마니까야 M72, 전재성님역)

 

 

번뇌 다한 자의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네 가지의 경우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외도의 가르침이 되지만, 인과와 조건에 따른 연기법적으로 설명하면 번뇌 다한 자의 사후가 훌륭하게 설명되는 것이라 보여진다.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 불교는

 

라따나경 14번 게송은 경의 하이라이트이자 정종분에 가깝다. 그것은 완전한 열반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연료가 공급이 되지 않아 꺼진 불로 묘사된 열반은 불교에서 있어서 구원론이다.

 

만일 불교에 꺼진 불로 묘사된 열반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렇고 그런 종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까지 불교가 전승되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열반 대신 현세와 내세의 행복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면 타종교의 가르침과 하등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행복, 평화, 생명만을 이야기하는 자들이 있다.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열반이 빠진 채 중생의 안락과 행복만을 이야기 하는 자들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와 행복을 얻고자 하듯이

이웃종교인들도 그들이 믿는 종교를 통해 평화와 행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길은 다르지만 우리가 이르고자 원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 -21세기 아쇼카 선언-, 조계종 화쟁위원회)

 

 

지난 2011년 조계종에서 추진되었던 종교평화선언문이다.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서원에 나오는 내용인데, 행복만을 이야기 하는 불교가 되었을 때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열반을 이야기 하지 않는 불교는 더 이상 불교라 이름 할 수 없는 것이다.

 

 

2013-04-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