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상호의존적 연기와 재생연결식

담마다사 이병욱 2013. 4. 1. 12:39

 

 

상호의존적 연기와 재생연결식

 

 

 

연기법을 처음 접할 때

 

연기란 무엇일까? 불자들은 연기법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법상에 설 수 있는 스님들은 또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불자들은 연기법을 잘 모른다. 연기법에 대하여 알려 주고 있지 않은 것이 주된 이유라 본다.

 

불자들이 연기법을 처음 접하는 것은 반야심경이라 본다. 모든 것이 무()자로 환원되는 무자 행렬에서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이라는 문구를 통해서이다.

 

마치 주문외우듯이 모든 불교행사에서 독송하는 반야심경에서 십이연기는 일단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듯이 보인다. 더구나 열두 가지 연결고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명과 무노사만이 언급되어 있어서 그 안에 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다.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를 때, 정식으로 불교에 입문하기 전 연기가 중요하다고 하여 연기가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그래서 접한 문구가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있다라는 문구 이었다. 너무나 실망하였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이 고작 이것이었나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더구나 연기법이 심오하다고 하는데 짤막한 문구를 접하였을 때 전혀 심오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난다의 경솔함

 

연기법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알게 된 것은 2009년도이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십이연기(patticcasamuppada)’를 통해서이다. 수행센터에서 약 1년간 50회 가까이 들었다. 그런데 교재에서 연기법이 매우 심오한 법임을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 있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 가서 말씀드렸습니다.“세존이시여, 이 연기법은 아주 심오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해하기 아주 쉽게 느껴집니다.”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아난다야,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마하시사야도, 십이연기- patticcasamuppada)

 

 

이 문장은 상윳따니까야 니다나경(인연의 경, S12:60)에 나온다. 경에서 아난다는 연기가 매우 쉽게 느껴진다고 하였다. 이는 아난다 존자가 연기법을 순관과 역관으로 관찰 하였을 때 너무나 명확하였기 때문에 이해 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아난다존자는 쉽다라고 하였을까? 

 

법문집에 따르면 아난다 존자가 연기법을 쉽게 이해한 것은 전생에 쌓아온 바라밀, 스승들의 지도, 폭넓은 지혜, 예류과 증득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아난다야, 너는 지혜가 출중하기 때문에 연기법을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남들도 너처럼 쉽게 이해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연기법은 현자만이 제대로 알 수 있는 법이라는 것이다.

 

현자만이 부처님이 깨달은 법을 바로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브리흐마야짜나경(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 S6:1)에서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직후 아자빨라 보리수 아래에서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라고 마음속으로 말하듯이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오직 슬기로운자, 즉 현자들만이 심오한 법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연기법은 매우 심오한 진리

 

연기법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의 경솔함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아난다여, 이 연기의 법칙은 깊고도 심원하다. 아난다여, 이 법칙을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뭇삶들은 방치된 편물처럼 뒤죽박죽이 되고 실타래처럼 엉키고 잘못 배열된 갈대나 골풀같아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으로 태어나는 윤회를 벗어나기 어렵다.

 

(니다나경-Nidanasutta-인연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0,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연기법이 매우 심오한 진리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청원경에서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S6:1)”과 일치한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다름 아닌 연기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기법은 현자들만이 올바로 알 수 있는 법이기 때문에, 범부들은 이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윤회의 사슬을 끊을 수 없다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알기 어려운 심오한 법 네가지

 

연기법은 매우 알기 어려운 매우 심오한 법이라 한다. 그런 심오한 법은 더 있다. 청청도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법은 범부의 눈으로는 알 수 없고 오로지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에서 법문집에서 설명하는 청정도론의 심오한 법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괴로움의 진리[苦諦]와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集諦],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諦]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사성제(四聖諦)의 깊은 뜻을 파악하기는 더 어렵고 남에게 가르치기는 더욱 더 어렵습니다.

 

(2) 중생은 어떠한 개별적인 자아가 없는 정신-물질[名色]의 과정이며, 그러한 정신-물질의 복합체는 자신의 선업과 악업에 따라 내생을 결정짓는 업의 법칙에 따른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3) 전생에서 정신-물질의 전이 없이 번뇌와 업의 과보로 어떻게 재생(再生)이 일어나는지를 알기란 어렵습니다.

 

(4) 연기를 이해하는 것도 역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연기는 앞서의 세 가지 심오한 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기의 소극적인 측면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 중생과 태어남의 성질이고 그 적극적인 측면은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연기법을 이해거나 가르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어쩌면 도와 열반을 얻었거나 삼장(三藏)을 공부한 사람은 연기의 교의를 쉽게 배우겠지만, 경전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의미 없는 일입니다.

 

연기법에 대해 해설한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는 적어도 도의 가장 낮은 단계인 예류과를 얻었거나 삼장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연기법을 해설할 자격이 되었습니다.

 

(알기 어려운 심오한 법 네가지, 마하시사야도, 십이연기- patticcasamuppada)

 

 

청정도론에 따르면 범부들이 알기 어려운 심오한 법 네가지는 사성제, 업의 법칙, 재생연결식, 그리고 연기법이다. 법의 눈이 열린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법이라 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현자들만이 부처님의 바른 법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회나 재생연결식, 설화와 웃음거리가 담긴 법문을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가르침을 멋대로 재단하여 자신의 입맛에 바꾸는 자들도 있다. 과연 그들이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십이연기를 재해석한 성철스님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자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는 경전을 제대로 읽어 보지 않아서라고 본다. 설령 읽어 보았더라도 경전의 내용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 보여진다. 그래서 경전의 내용을 재해석하여 나름대로의 이론을 전개 시킨다. 그런 예를 성철스님의 백일 법문에서 보았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제부터는 십이연기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피력하고자 합니다.  먼저 십이연기에 대한 해석의 문제인데, 여기에는 시간적 인과(因果)관계로 보는 해석과 존재의 원리로 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종래에는 십이연기에 대한 이 두 가지 해석이 서로 비등하게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아무래도 연기의 본래 의미는 존재의 원리로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 십이연기에서 연기를 소승의 유부적(有部的)인 생멸(生滅)의 견해로 볼 것이 아니라 법계(法界)의 연기, 중도(中道)의 연기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십이연기의 재해석)

 

 

백일법문은 1960년대 중반에 성철스님이 해인사 방장에 취임하면서 대중스님들에게 법문한 내용이다. 책으로도 나와 있고, 불교TV사이트에서도 들을 수 있다.

 

성철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놀라운 내용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부처님의 심오한 연기법을 재해석 한 것이다. 조건발생적 연기에 대하여 상호의존적 연기로 재해석 한 것이다. 이렇게 한 이유는 중도사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중도사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연기법을 재단한 것이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연기법은 심오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현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철스님은 이를 뜯어 고치듯이 십이연기를 재해석하였다.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법문을 보게 된다.

 

 

사리불은 연기를 두 개의 갈대 묶음의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에 비유하여, 명색(明色)을 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무명의 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으며, 행의 멸함에 의하여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십이연기의 재해석)

 

 

전에 보지 못하던 놀라운 내용이다. 무명과 행이 서로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상호의존 연기임을 강조한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가 서로를 창조한다는 ‘ 사사무애 ’ 적 관점의 법계연기를 정당화 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갈대묶음경과 관련 하여 성철스님은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라는 부분과 관련 하여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다’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이는 스님의 법문에서 “이것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는 뜻을 비유하여 말한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명백히 드러난다. 그래서 대승에서 연기법은 상호의존적 연기로 설명된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 발생적 연기가 모두 함께 사용된다. 대표적인 예가 갈대묶음경이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상호의존적 연기만 채용하고 조건발생적 연기는 배제하였다.

 

일반적인 연기법은 어떤 것일까

 

그렇다면 일반적인 연기법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imasmi sati ida hoti.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Imassuppādā ida uppajjati.             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Imasmi asati ida na hoti.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生此卽生彼)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若無此卽無彼)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若無此卽滅彼)

 

 

위 연기송울 보면 인과와 조건발생을 모두 만족하고 있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야에서 항상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표현된다. 그것도 순관과 역관이 함께 표현 된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그대들이 이처럼 말한다면,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말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며,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마하딴하상카야경-Mahātanhāsan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박사역)

 

 

이것이 부처님이 설한 십이연기 정형구이다. 인과와 조건발생적 연기, 그리고 연기의 순관과 역관이 잘 표현 되어 있다.

 

우정백수(宇井伯壽)책을 인용한 성철스님

 

그런데 성철스님은 오로지 상호의존적 연기만을 채용하였다. 이는 갈대묶음경(S62:67)에서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확대 해석하여 무명과 행식에도 적용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더구나 “시간적으로 무명(無明)이 아버지가 되고 행()이 자식이 되어서 무명(無明)이 행()을 낳는다는 식이 아니라 무명(無明)과 행()은 서로 의지하는 형제지간이라는 것입니다.”라고 설명고 있다. 무명과 행의 순차적이고 생멸적 조건발생적 연기를 부정한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심오한 연기사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은 연기법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1960년대 중반이라면 아직까지 아함경이 한글로 번역되어 나오지 않은 시점이어서 그 방대한 한역 아함경을 모두 다 읽었다고 보여 지지 않는다.

 

백일법문에 따르면 성철스님은 일본 불교학자 우정백수의 저서를 예를 들어 법문 하고 있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교학자인 우정백수(宇井伯壽)라는 분이 '어떻게 해야만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알 수 있겠느냐'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라는 내용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백일법문에서 연기에 대한 부분은 우정백수의 저술에 의존한 듯한 느낌이 든다. 만일 성철스님이 아함경에 있는 연기에 대한 가르침을 모두 이해 하였다면 무명과 행을 상호의존적 연기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상호의존적 연기를 설한 것일까?

 

갈대묶음경(S12:67)에서 보는 독특한 연결고리

 

부처님의 연기법은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가 복합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특히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라고 설명되는 상호의존적 연기는 어떤 경우에 해당되는 것일까? 이는 상윳따니까 인연상윳따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 상호의존적 연기는 오로지 식과 명색의 관계에서만 성립 되기 때문이다갈대묶음경(S12:67)에서 볼 수 있.

 

갈대묶음경(S12:67)에서 보여지는 십이연기에 대한 연결고리는 매우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볼 수 없는 식과 명색의 순차적 조건발생의 관계가 아니라 명색을 의존하여 의식이 생겨나고 (名色緣識), 의식을 의존하여 명색이 생겨나며(識緣名色)”라고 상호의존적 관계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왜 식과 명색에 대하여 상호의존적으로 설명하였을까? 이는 다름 아닌 식을 재생연결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뭇삶들의 일생윤회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하여 식과 명색의 관계를 상호의존적 연기로 설명한 것이다. 성철스님같이 법계연기와 중도사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윤회와 재생연결식을 부정하는 자들

 

앞서 범부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심오한 법이 연기법을 포함하여 사성제, 업의 법칙, 재생연결식 이렇게 네 가지라 하였다. 이 네 가지 안에 재생연결식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재생연결식을 부정한다. 그리고 윤회도 부정한다. 또 그들은 부처님은 오로지 현세의 가르침만 펼치셨지 내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라는 논지를 펴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 한다.

 

단멸론자들은 윤회에 대하여 지금 여기를 중심으로 하여 바로 이전이 전생이고, 바로 이후가 내생이라는 논리를 편다. 심지어 부처님의 오도송이라 불리우는 법구경의 게송도 현세에 대한 것이고, 아라한 선언 역시 현세에 대한 것이라 한다.

 

현법열반론자(ditthadhammanibbanavada)

 

현세의 행복,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만을 말하는 자들은 현법열반론자(ditthadhammanibbanavada)들이 되기 쉽다.

 

현법열반  또는 현세열반이라 불리우는 딧따담마(ditthadhamma)라는 것은 직접 경험에 의해 보여지는 것을 말한다. 그때 그때 경험되는 자기존재와 동의어이다. 따라서 현법열반이란 이 자기 존재 안의 괴로움의 지멸을 말한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 D1)에 따르면 현법열반에 대하여 다섯가지를 들고 있다. 그 다섯가지는 62가지 삿된 견해에 포함된다. 대표적인 예가 다섯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추구이다. 이는 반드시 자아가 있어서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기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 자아는 지금 여기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현법열반은 사이비 열반이고 가짜 열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62가지 사견중의 하나로 간주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현법열반5가지 중에 선정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첫번째 선정에 대한 것을 보면 벗이여, 이 자아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찬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D1)”라고 부처님이 말씀 하셨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인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지 않고 단지 선정삼매의 즐거움만 누리는 자들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라 볼 수 있다. 그것도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선정 그 상태가 열반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다.

 

유물론적 허무주의자들

 

이렇게 현세의 행복에 대해서만 말하는 자들은 유물론적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그런 자들을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다. 소위 인터넷단멸론자들이다. 인터넷에서 단멸카페를 만들어 놓고 불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자들이다. 그런 단멸론자들의 교과서와 같은 책이 있다. 어느 스님이 지었다는 책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2연기법 중 3번째 4번째에 위치한 식과 명색의 관계에서도 기존의 불교 교리에서는 ‘식’을 재생연결식, 혹은 전생의 업식이라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식’과 명색은 따로 떼래야 뗄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인 것이다. ‘식’이 없으면 명색은 존재할 수 없고 명색이 없으면 ‘식’은 성립시킬 수가 없다. 이렇게 사고하는 것을 상호의존적 발생의 원리, 즉 연기법이라고 한다,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 , 김종수감수, 훤일 지음, 민족사간 )

 

 

이것이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연기사상이다. 단멸론자들이 이해 하는 연기법은 상호의존적 연기이다. 조건발생적 연기가 빠져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철스님이 재해석한 연기와 똑 같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법계연기와 중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상호의존적 연기만 가져갔는데 단멸론자들 역시 상호의존적 연기만을 채용한 것이다.

 

상호의존적 연기의 악용사례

 

단멸론자들은 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若生此卽生彼)”로 설명되는 상호의존적 연기만을 연기법이라고 강조하는 것일까? 이는 명백하다. 단멸론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단멸론자들이 죽으면 모든 것이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의 근거로 활용한 것이 상호의존적 연기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이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쪽만 채용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단멸론자의 주장을 보면 알 수 있다.

 

 

身壞命終 壽已畢訖
即於現世一切所覺 便盡 止息
當知至竟16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고 수()가 다해 마치면
곧 현재 세계에서 일체의 감각이 다 그쳐 쉬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싸늘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중아함 12) 화파경(破經)]

 

 

若彼終後

即於爾時一切永滅

無餘 永滅

만약 저 육체[]가 파괴되고 정신[수상행식]이 종말을 고하면
곧 이때 일체의 느낌[(
)]은 영구히 멸하고, 남음이 없으므로 영구히 멸한다.

 

[잡아함 969. 장조경(長爪經)]

 

 

이것이 단멸론자들의 주장이다. 주로 한역경전을 인용하고 있다. 그것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일부 문구에 대한 것이다.

 

인용된 것을 보면 모두 육체와 정신에 대한 것이다. 육체와 정신은 상호의존적 관계이기 때문에 육체가 멸하면 정신도 따라서 멸한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전형적인 단멸론이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과 같은 주장이다.

 

그런데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도 상호의존적 연기가 있다는 것이다. 중도사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는 뜻을 비유하여 말한 것입니다.(백일법문)”라고 설명하였지만 이는 단멸론자들에게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 이것에 육체를 대입하고 저것에 정신을 대입하면 “육체가 없으면 정신이 없고,  정신이 없으면 육체가 없다라고 단멸론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재생연결식을 설명하는 나가라경(S12:65)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이 설한 상호의존적 연기는 오로지 명색의 관계에만 적용된다. 식과 명색에만 적용된다는 의미는 일생윤회에 있어서 재생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갈대묶음경(S12:67)에서  명색을 의존하여 의식이 생겨나고 명색연식(名色緣識), 의식을 의존하여 명색이 생겨나며(識緣名色)”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재생연결식에 대한 것이다.

 

단멸론자들이 개거품을 물고 부정하는 것이 윤회와 재생연결식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원음이 담겨 있는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일생윤회와 재생연결식이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갈대묶음경과 함께 재생연결식을 설명하고 있는 경이 있다. 나가라경(S12:65)이다.

 

상윳따니까야 인연상윳따(S12)에 실려 있는 나라가경 첫 머리에 다음과 같은 부차님의 말씀이 있다.

 

 

[세존]

그 때 수행승들이여, 내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무엇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가?’ 그 때 수행승들이여, 나는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 지혜로 꿰뚫었다. ‘명색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

 

 (나가라경-Nagarasutta-도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5,전재성님역)

 

 

나가라경은 부처님이 과거 전생을 회상하며 설한 경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내가 예전에 아직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라는 문구와 함께 경이 시작된다. 따라서 부처님이 전생과 윤회와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한 경이라 볼 수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함으로서 연기의 역관부터 말씀 하신다. 그리고 아홉번째에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여기까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연기의 역관에 대한 정형구이이다.

 

그런데 나가라경에서는 연기의 고리가 의식(vinnana)까지만 연결된다. 각주에 따르면 의식이 명색에 조건지어지도록 만듦으로써 십지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된다. 그래서 열번째에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홉번째 고리에서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와 열번째고리에서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라고 되어 있어서 식과 명색과의 상호의존적인 연기가 성립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십지연기에 대하여 붓다고사에 따르면, 연기고리에서 두 고리가 떨어져 나가 십지연기가 된 것은 이 가르침이 현세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적 연기

 

나가라경에서는 식과 명색의 관계에 대하여 상호의존적으로 설명하였다. 갈대묶음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상호의존적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세존]

그때 수행승들이여, 내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의식은 여기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와 같이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나가라경-Nagarasutta-도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5,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이 의식은 여기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 (paccudāvattati kho ida viññāa, nāmaråpamhā na para gacchati).”라고 하였다. 이말은 무슨 뜻일까?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paccudāvattati kho ida viññāa, nāmaråpamhā na para gacchati: Srp. II.115에 따르면, 여기서 되돌아 오는 의식이란 재생의식(patisandhivinnana)과 통찰지(vipassananana)를 말한다. 재생의식은 조건으로부터 되돌아오고 통찰지는 대상으로부터 되돌아온다. 그것은 명색을 넘어서지 못하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

 

(각주, 전재성박사)

 

 

의식이 되돌아 온다는 것은 조건이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조건이 남아 있는 한 마음은 그 조건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색을 넘지 못한다고 하였다.

 

만약 재생할 조건()이 소멸된다면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명색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도모하고 무엇을 잠재시킨다면 이것이 의식을 일으키는 바탕이 된다. 바탕이 있으므로 의식이 지속되게 된다. 그 의식이 지속되고 성장하면 명색이 생겨난다.(S12:39)”라 하였다. 의도 즉 업이 남아 있는 한 윤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때 식은 재생연결식으로서 명색과 상호의존적연기로 작용하게 되므로 경에서는 명색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와 같이 의식은 되돌아오고 더 이상 명색을 넘지 못할 때, 경에서는 이와 같이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Ettāvatā jāyetha vā jīyetha vā mīyetha vā cavetha vā upapajjetha vā)”라고 하였다. 이는 무슨말일까? 각주에 따르면,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는 한, 이와 같이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는 뜻으로 설명되어 있다. 신구의 삼업에 따른 업이 남아 있는 한 그 업을 대상으로 하여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명색이 생겨나서 끝없이 윤회한다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이 빠알리니까야에서 상호의존적 연기는 재생연결식을 설명하는데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부처님은 연기의 법칙은 매우 심오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현자들이 아니면 이해 하기 어려운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청정도론에 따르면 사성제, 업의 법칙, 재생연결식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은 범부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 오로지 법의 눈이 열린 지혜로운자, 슬기로운 자, 현자 들만이 알 수 있는 법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대로 재단하여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는 자들이 있다. 과연 빠알리니까야에 대하여 또는 아함경에 대하여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연기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였을 때 접한 것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若生此卽生彼)”라는 문구이었다. 대승불교 전통에서 말하여지고 있는 연기법이다. 상호의존하여 발생하는 법계연기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호의존적 연기가 모두 다 인줄 알았다. 그래서 연기법에 대하여 실망하였다.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연기법이라 한다는데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는 식의 연기가 매우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부처님의 연기법도 별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건발생적 연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상황은 달라졌다. 반야심경에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로만 알고 있었던 무명과 노사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열두 가지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열두가지 고리는 무명--식으로 시작 되어 노사로 끝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 역시 너무나 단순하였다. 아무런 감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빠알리니까야를 접하면서 문장으로 된 연기법을 접하면서 달라졌다. 그것은 전에 보지 못하던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태어남이라는 것이 결국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귀결 된다는 것이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대한 빠알리어는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라는 복합어이다. 여기서 소까(Soka)는 슬픔으로, 빠리데와(parideva)는 비탄, 둑카(dukkha)는 고통, 도마낫사(domanassa)는 근심, 우빠야사(upāyāsā)는 절망으로 표현 되어 있다.  이 복합어는 십이연기 정형구에 반드시 나올 뿐만 아니라 초전법륜경의 고성제에서도 볼 수 있다.

 

지금 아무리 행복하다고 할지라도

 

지금 아무리 행복하다고 할지라도 결국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으로 귀결된다는 말에 공감하였다. 그래서 현세에 행복만을 추구한다든지 현세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말에 의문을 품었다. 누구나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귀결 될 수밖에 없다면 이를 극복할 방법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사성제이다.

 

부처님은 고통의 대해서도 이야기 하셨지만 그 해결방식까지 모두 제시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단시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외도의 가르침과 하등의 다를 바 없다. 외도의 가르침에도 뭇삶의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외도의 가르침을 뛰어 넘는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라고 말씀하셨다. 열반이 궁극적인 불교의 목적임을 말한다.

 

또 사성제의 멸성제에서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해탈(mutti)에 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해탈과 열반은 동의어로 본다. 따라서 부처님이 강조한 것은 현생의 행복에 대해서도 말씀 하셨지만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해야 함을 강조 하였다. 이는 반드시 출가자에 한 정 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자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2013-04-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