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파초인가 야자수인가, 포말경(S22:95)의 까달리(kadali)나무

담마다사 이병욱 2013. 4. 6. 14:24

 

파초인가 야자수인가, 포말경(S22:95)의 까달리(kadali)나무

 

 

 

금강경사구게의 원조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금강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게송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이라면 또 불교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문구이다.

 

일체유위법, 즉 형성된 모든 것들은 모두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포말과 같고, 그림자 같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왜 그런지 구체적인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상윳따니까야에도 비슷한 게송이 있다. 시기적으로 상윳따니까야가 훨씬 먼저 성립되었으므로 후대에 성립된 금강경 보다 원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도 색, , , , 식 이렇게 오온으로 구분하여 설명되어 있다. 페나삔두빠마경(Pheapiṇḍūpamasutta, S22:95)이 그것이다. 우리말로  포말경이라 불리운다.

 

야무나강과 아요디야(Ayodhya)

 

칸다상윳따(Khandha Sayutta, S22)에 실려 있는 포말경은 부처님과 제자들이 아욧자 시의 갠지스강둑에 계신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각주에 따르면 갠지스강이 아니라 야무나강이라 한다.

 

아욧자시는 범어로 아요디야(Ayodhya)라 하는데, 오늘날 웃따르쁘라데시주의 우두(Oudh) 지방에 해당된다고 한다. 포말경이 설해진 갠지스강(야무나강)과 아요디야는 어디일까? 지도를 찾아 보았다.

 

 

 

  

아요디야(Ayodhya)위치(A부분)

 

 

 

포말경을 설한 우두지방의 아요디야시(A부분)의 위치를 찾아 보니 바라나시(B부분) 서북방에 있다. 거리는 330km정도이고 차로 2시간 42분 걸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갠지스강의 다섯지류 중의 하나인 야무나 강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시조 수로왕이 서기 48년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깃발을 나고 온 여인을 황후로 맞았다고 전하는데, 그 여인으 아유타국의 허황옥이라 한다. 그래서 아유타국이 인도 갠지스강 상류에 있는 아요다야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요디야 시는 부처님 당시 남꼬살라국의 수도 이었다고 한다. Srp.II. 320에 따르면, 부처님은 어는 날 향실에서 나와 갠지스강 언덕에 앉아 흘러내려오는 거대한 거품덩이를 보고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에 대하여 법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주위에 있던 수행승들에게 가르침을 설했다고 전한다. 그런 설법은 모든 사실의 공성과 무실체성에 대한 근본법문이라 한다.

 

 

 

 

Ayodhya강변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신 부처님

 

부처님이 갠지스강을 바라보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 하시고자 한 것일까? 물질을 예로 보면 다음과 같은 정형구를 볼 수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이 갠지즈강이 커다란 포말을 일으키는데, 눈 있는 자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실로 포말의 실체일 수 있는가?

 

(페나삔두빠마경-Pheapiṇḍūpama sutta-포말 비유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5,전재성님역)

 

 

물질에 대하여 포말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포말은 영원하지 않고, 안정되지 않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 역시 포말과 같은 것이어서 팽창하고, 균열되고 결국 죽음이 닥치면 부서질 것이라 한다.

 

포말, 물거품, 아지랑이, 파초, 환술

 

이와 같이 실체(sāro)가 없음을  강조 하였다. 이런 실체없음은 물질, 지각, 형식,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공통사항

물질

(rūpa)

갠지즈강의 커다란 포말(Pheapiṇḍūpama)

비어있음,

공허한 것,

실체가 없는 것

느낌

(vedanā)

가을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의 물거품 (Maricikupamā)

지각

(saññā)

늦여름 대낮의 아지랑이 (kadalūpamā)

형성

(sakhārā)

속대도 없는 높고 커다란 파초 (Kadalūpamā)

의식

(viññāa)

환술사가 커다란 길에서의 보여주는 환술(āyūpamañca)

 

 

 

물질에 대하여 갠지스상의 커다란 포말, 느낌에 대하여 가을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의 물거품으로, 지각에 대하여 늦여름 대낮의 아지랑이, 형성에 대하여 속대도 없는 높고 커다란 파초, 의식에 대하여 환술사가 커다란 길에서의 보여주는 환술로 비유하였다.

 

한찰나에 십만억의 느낌

 

이와 같은 구체적 비유는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해 준다. 이 중 느낌을 보면 가을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의 물거품이 생겨나고 사라지는데~”라고 하였다. 이런 표현은 다른 네 가지 존재의 다발에 대한 설명에서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느낌에 대해서만 생멸현상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물방울은 허약해서 잡자마자 부서지기 때문에 잡히지도 않듯, 느낌도 허약해서 영원하고 안정된 것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손가락을 튕기는 찰나에 십만억의 느낌이 생겨났다다 사라진다고 부연설명되어 있다. 조건들에 의해 물방울이 일어난 것처럼 느낌도 감역-대상-번뇌-접촉에 의존하여 일어난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 오온 중에 특별히 느낌에 실재성을 부여 하고 있다. 다른 것은 모두 실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런 실재성은 찰나에 해당된다. 한찰나에 십만억의 느낌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실재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느낌은 접촉에 의하여 일어난다.

 

빗방울과 물거품

 

접촉은 지금 이순간에도 일어 나고 있다. , 코 등 여섯가지 감각기관이 형상, 소리 등 여섯가지 감각대상과 만났을 때 접촉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감각기관이 있는한, 감각능력이 있는 한 접촉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런 느낌 피할 수 없다. 보여지는 것, 들려 지는 것 등 모두 느껴지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것은 찰나에도 십만억 느낌이라 하는데, 이런 느낌을 빗방울 떨어지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비가 내릴 때 땅바닥을 보면 수 없는 빗방울이 바닥을 친다. 그리고 물거품을 내며 곧바로 사라진다. 이 때 빗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접촉이라 볼 수 있고, 물거품을 내며 사라지는 것을 느낌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느낌은 빗방울 같은 것으로 본다.

 

 

수 없는 빗방울이 땅을 치며 사라지듯이 매우 짧은 순간 수 많은 느낌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을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의 물거품 (Maricikupamā)”같은 것이라고 하였고, 느낌은 비어있고, 공허한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금강경 사구게를 연상케 하는 게송

 

포말경에는 금강경 사구게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게송이 있다. 오온에 대하여 비유로서 읊은 것이다. 이를 초불연의 번역과 함께 보면 다음과 같다.

 

 

  

    

비유어

빠알리 원문

Pheapiṇḍūpama rūpa

vedanā bubbuupamā
Maricikupam
ā saññā

sakhārā kadalūpamā,
M
āyūpamañca viññāa

dīpitādiccabandhunā.

 

페나삔두빠낭 루빵

웨다나 붑불루빠마

마리찌꾸빠마 산냐

상카라 까달루빠마

마유빠만짜 윈냐낭

디삐따딧짜반두나

Pheapiṇḍūpama,

bubbuupamā,

Maricikupamā,

Kadalūpamā,

Āyūpamañca,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포말,

물거품,

아지랑이,

파초,

환술

 

초불연(각묵스님)

물질은 포말덩이와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고

인식은 아지랑이와 같고

심리현상들은 야자나무와 같으며

알음알이는 요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는 밝혔도다.

포말덩이,

물거품,

아지랑이,

야자나무,

요술

영문1

. Saying thus the Teacher,
The two-footed relation of the sun said:

1. “Matter is comparable to foam
Feelings to bubbles,
Perceptions are comparable to illusions
Intentions to plantain sheaves
And consciousness to magic,

Foam,

Bubbles,

Illusions,

plantain sheaves,

magic

 

영문2

(Thanissaro Bhikkhu)

 

Form is like a glob of foam;

feeling, a bubble;

perception, a mirage;

fabrications, a banana tree;

consciousness, a magic trick —

this has been taught

by the Kinsman of the Sun.

Foam,

a bubble,

a mirage,

a banana tree,

a magic trick

 

 

 

번역을 보면 오온에 대한 용어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전협회는 색수상행식에 대하여 물질-느낌-지각-형성-의식이라 하였는데, 초불연의 경우 물질-느낌-인식-심리현상들-알음알이라 하였다. 또 비유어를 보면 포말-물거품-아지랑이는 같다. 그러나 파초와 야자나무’, ‘환술과 요술로 다르게 되어 있어 다르다.

 

아지랑이인가 신기루인가

 

먼저 아지랑이(Maricika) 대한 것을 보면, 초불연의 경우 게송에서는 아지랑이라 표현하였으나 본문에서는 무더운 여름의 마지막 달 한낮에 신기루가 생기는데라고 하여라 하여 신기루로 표현 하였다. 게송 다르고 본문 다른 것이다.

 

아지랑이라고 번역된 마리찌까(Maricika)에 대한 각주를 보면, “지각은 실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마시거나 목욕하거나 주전자를 채울 수 없는 신기루와 같다. 신기루가 대중을 많이 속이는 것처럼 지각은 푸른 색등의 대상들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즐길만하고 영원한 것이라는 관념으로 사람을 유인한다.(Srp.II.322)” 라고 설명되어 있다. 지각()이 마치 신기루처럼 실체가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주석에서 설명된 마리찌까(Maricik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본문의 번역으로 사용하였다. 전형적인 주석적 번역이라 보여진다.

 

마리찌까(Maricika)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보면 아지랑이, 신기루, 광선, 환영의 뜻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경에서 늦여름 대낮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대상 또는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현상에 대하여 설법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마리찌까(Maricika)아지랑이로 번역되어야 맞을 것이다. 신기루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막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초로 번역한 전재성 박사

 

이와 같이 주석적 번역을 특징으로 하는 초불연 번역에서 오역(誤譯)’으로 여겨지는 번역이 보인다. 빠알리어 까달리(Kadali)에 대하여 야자수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까달리에 대하여 성전협회 전재성박사는 파초로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파초가 맞는 것일까? 야자수가 맞는 것일까?

 

경에서 상카라()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견고한 나무심을 바라고, 견고한 나무심을 구하고, 견고한 나무심을 찾아다니며 날카로운 도끼를 가지고 숲으로 들어가 거기서 새로 자라 속대도 없는 높고 커다란 파초를 보고 ~”라 하였다.  목재를 구하기 위하여 숲을 들어 간 사람이 본 것은 속이 텅 비어 있는 나무이었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파초라 하였는데, 이는 켜켜이 껍질이 있고 심재가 없었기 때문으로 본다.

 

이는 상카라가 실체가 없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비유를 든 것이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파초의 줄기는 고유한 특성을 지닌 많은 포피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형성의 다발도 고유한 특성을 지닌 많은 형상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Srp.II.322)”라고 설명되어 있다.

 

파초줄기를 포피의 결합으로 본 것이다. 그런 포피의 결합에 대하여 고유한 특성을 갖는 상카라들의 결합으로 본 것이다. 예를 들어 성냄, 탐욕, 자만, 질투 등 고유 성질을 갖는 상카라에 대하여 파초의 켜켜이 쌓인 껍질로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파초는 껍질만 있을 뿐 나무 꾼이 찾고 심어하는 목재가 되는 심재가 없다. 속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이는 상카라에 대하여 비어있고, 공허한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이다.

 

야자수로 번역한 각묵스님

 

그런데 까달리에 대하여 야자수라 번역한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이것은 야자수 나무의 껍질이 시멘트 같이 생겨서 두껍지만 내부가 비어 있는 것을 말한다. (http://cafe.daum.net/chobul/1AoB/1872 )” 라고 되어 있다.

 

야자수의 나무껍질을 시멘트 처럼 굳은 것으로 본 것이다. 다만 야자수 내부 심지는 텅비어 이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신문 칼럼에도 특히 야자나무의 줄기는 겉모양은 마치 시멘트로 만든 회색의 튼튼한 기둥처럼 보이지만 이 시멘트처럼 생긴 기둥의 속(심재, 心材)은 텅텅 비어있다.(불교신문 2010-03013)”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경의 각주와 모순이다. 초불연의 각주에 따르면 “마치 야자나무 줄기(kadali-kkhandha)가 많은 잎과 껍질 등으로 조합(bahu-patta-vaṭṭi-samodhāna)되어 있듯이 심리현상들의 무더기도 많은 법들로 조합(bahu-dhamma-samodhāna)되어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겉 껍질이 시멘트 처럼 단단하다면 껍질이 켜켜이 쌓인 것이라 볼 수 없다. 시멘트처럼 단단한 것이라면 나무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파초는 껍질이 있다. 그리고 벗겨진다. 그런데 속은 비어 있다. 그렇다면 까달리는 파초일까? 야자수일까?

 

파초는 어떻게 생겼을까?

 

까달리에 대하여 인터넷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니 영문으로 the ‘plantain tree’라 되어 있다. 같은 사이트의 일본어와 중국어 사전에는 모두 芭蕉(파초)’ 라고 되어 있다. 

 

Plantain에 대한 영어사전을 찾아 보니 질경이, 열대의 파초속의 일종, 그 과실’라고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빠알리어 까달리(Kadali)는 파초임에 분명하다. 그런 파초는 어떻게 생겼을까?

 

파초에 대하여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파초 [Musa basjoo, 芭蕉]

 

외떡잎식물의 파초과(芭蕉科 Musaceae)에 속하는 다년생초

 

키는 5m까지 자라기도 하지만 흔히 2~3m 자란다. 뿌리줄기에서 잎들이 밑둥을 서로 감싸면서 나와 마치 줄기처럼 자라서 헛줄기를 이룬다. 잎은 길이가 2m, 너비가 50㎝로 가장자리는 약간 말리며, 잎맥은 다른 외떡잎식물과는 달리 중앙맥[中肋]에서 2차맥이 나란히 나온다.

 

바나나의 꽃처럼 생긴 연노란색의 꽃은 여름과 가을에 걸쳐 수상(穗狀)꽃차례를 이루며 2줄로 나란히 핀다. 꽃차례 아래쪽에는 암꽃이 피지만 위쪽에는 수꽃이 핀다. 열매는 바나나처럼 익지만 새가 꽃가루받이를 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집안이나 온실에서는 열매를 잘 맺지 않는다. 잎을 보기 위해 널리 심고 있으며, 중국이 원산지이다.

 

한국에는 고려시대에 씌어진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에 파초를 뜻하는 초()가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1200년경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반그늘지고 습기가 있는 곳에서 잘 자라는데, 꽃이 피고 나면 식물체가 죽고, 그대신 옆에 조그만 식물체가 새로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월평균기온이 -2℃ 이상인 지역에서만 집 밖에서도 월동이 가능하다. 잎은 이뇨제, 뿌리는 해열제로 쓴다.

 

(파초, 다음 백과사전)

 

 

파초는 나무가 아니라 다년생초로 되어 있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2m에서 5m까지 자란다고 한다.

 

중국최대 포털인 바이두(baidu.com)의 백과사전에 실려 있는 파초 사진은 다음과 같다.

 

 

 

 

芭蕉

 

 

 

사진으로 파초를 보면 마치 나무처럼 보인다. 마치 야자나무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래서 야자수와 파초를 구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야자나무로 오인할 수 있다. 나무를 찾아 나선자가 속대도 없는 높고 커다란 파초를 나무로 오해 하였을 것이다.

 

절집에서 파초를 재배하는 이유

 

이와 같은 파초를 봉선사에서도 보았다. 조계종 25교구 본사인 봉선사에 가면 좀처럼 보기 힘든 열대성 파초가 있다. 이를 지난 2010년 봉선사 연꽃축제 당시 사진에 담아 두었다.

 

 

 

 

 

 

 

 

봉선사 파초

 

 

 

절집에서 파초를 많이 재배한다고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신심과 관계가 있다. 혜가대사의 단비에 대한 것이다.

 

혜가는 달마대사를 향한 신심과 구도의 열정을 보여 주기 위하여 한쪽 팔을 잘랐다. 그때 팔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눈 속에서 파초 한 잎이 올라와 그를 바쳤다는 이야기가 선어록에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절집에서는 진리에 대한 굳센 믿음과 구도의 상징으로서 파초를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혜가 단비도

 

 

 

 

야자수는 어떻게 생겼을까?

 

이와 같이 파초는 불교와 매우 인연이 있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초불연의 각묵스님은 오온에 대한 음성강좌에서 야자수라 하였다. 그것도 도시의 가로에 조경용으로 심어진 키 높은 야자수라 하였다. 그렇다면 야자수는 어떻게 생겼을까?

 

국어사전에 따르면 야자수(椰子樹)는 “야자나뭇과에 속한 대추야자, 기름야자, 부채야자, 대왕야자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분명히 야자나무과에 속한다고 한다.

 

빠알리 사전에서 까달리에 대한 영어명이 ‘Plantain tree’ 라 하였다. 이는 영어사전에서 열대의 파초속의 일종이라고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파초속과 야자나무과는 다른 것이다.  

 

야자나무에 대한 학명은 Arecaceae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palm으로 알려져 있다. 파초와 같이 다년생 초가 아니라 나무인 것이다. 그리고 202속 2600종의 달하는 다양한 종류의 야자수가 있다. 그런 야자수의 전형은 다음과 같은 사진이다.

 

 

 

야자수(Arecaceae, 영문판 위키백과)

 

 

 

거리의 가로수로 사용되는 것부터 시작 하여 호텔이나 관공서 등에서 관상용을 이용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야자수는 매우 다양한다.  그런 야자수의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까?

 

 

 

야자수(Palm tr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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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수의 속은 비어 있지 않다!

 

다년생초인 파초와 달리 야자수는 나무’와 같. 그것도 거대한 나무이다. 그런 야자나무의 속은 과연 비어 있을까? 각묵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야자나무의 줄기는 겉모양은 마치 시멘트로 만든 회색의 튼튼한 기둥처럼 보이지만 이 시멘트처럼 생긴 기둥의 속(심재, 心材)은 텅텅 비어있다.”라고 음성강의와 불교신문 연재기사에서 언급 하였다.

 

이를 확인 하기 위하여 인터넷 검색을 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야자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절단된 야자수(바나나 나무)

 

 

 

야자수 가운데가 텅 비어 있지 않다. 섬유질 성분으로 꽉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사의 설명에 따르면 바나나 나무 속을 갈아서 툼(tum)이라 불리우는 녹말성분으로 된 음식물을 만든다고 한다.

 

EBS 자연 다큐 프로를 보면, 야자수 속에 있는 녹말성분을 추출하여 주식으로 사용하는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그런 야자수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해 주는 고마운 나무이다. 또 야자수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어서 겉껍질은 녹말을 만드는 통으로 사용되고, 크고 넓직한 잎은 식량 보관용으로 사용된다. 물론 그 프로에서도 속이 비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커팅된 팜트리의 단면

 

야자수에 팜트리라 부른다. 커팅된 팜트리의 단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커팅된 팜트리의 단면

 

 

 

커팅된 단면을 보면 텅비어 있지 않고 속이 꽉 차 있다. 일반 나무와 다름 없다. 이에 대한 영문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English: Cross section of a trunk of palm tree. Diameter ca 60 cm. Presqu'île du Cap-Ferrat, Alpes-Maritimes, France. We dont see growth rings, because palm trees are not trees.

 

(Cut palm-tree)

 

 

위키미디어 커먼(http://commons.wikimedia.org)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설명에 따르면 직경이 60센티 되는 트렁크 팜트리라 한다. 팜트리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나이테가 없다고 설명 되어 있다.

 

파초의 학명 Musaceae를 보면

 

야자수는 매우 다양한 종이 있다. 무려 202 2600종이라 한다. 그 중에 겉껍질이 시멘트처럼 단단하고 속이 텅빈 야자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확인한 야자수의 커팅된 모양을 보면 텅 비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각묵스님은 어떤 근거로 까달리에 대하여 야자수라 번역하였고, 또 야자수 내부가 텅 비어있다고 하였을까?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명백히 까달리(kadali)는 Plantain tree라 되어 있고 열대의 파초속의 일종이라고 영어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또 일본어와 중국어 사전에는 芭蕉(파초)라고 설명되어 있다. 파초를 영어로 Musaceae 라 하는데 이에 대한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Musaceae(영문 위키백과)

 

 

 

바나나 나무와 유사하지만 한 눈에 보아도 파초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껍질은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은 형태가 아니라 벗겨지는 형태로 되어 있다. 더구나 Musaceae종에 대한 분포를 보면 인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Musaceae distribution(영문 위키백과)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았을 때 포말경에 속이 빈 나무로 등장하는 까달리(kadali)는 파초(芭蕉, Musaceae)가 틀림 없다. 파초의 학명(Musaceae)과 야자수의 학명(Arecaceae)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종인 것이다이는 경전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초불연의 두 가지 실수

 

경에서 한 사람이 나무심을 원하고 나무심을 찾아 다니며~”라고 묘사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목재로 쓸만한 나무를 찾아 나선 것이다. 마침내 목재로 쓸만한 나무를 발견하고 도끼로 잘랐는데 자르고 보니 심지가 없는 파초 이었던 것이다.

 

경에서 아마도 어떤 사람은 파초를 목재로 활용할 수 있는 나무로 착각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그는 거기서 나무껍질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나무심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표현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상카라가 실체가 없다는 것을 파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에서도 착각한 것이 있다. 파초에 대하여 야자수로 착각한 것처럼 보인다. 파초로 번역해야 할 것을 야자수라 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경에서와 같이 목재를 바라고 도끼를 댄 어떤 사람 처럼 보인다.

 

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파초를 야자수로 착각 하였지만, 초불연 번역은 거꾸로 파초를 야자수로 착각하여 번역한 것이다.  더구나 야자수 겉 껍질이 시멘트처럼 딱딱 하다든가 속이 비어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심지가 없을 지언정 텅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야자수는 속이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초불연에서 두 가지 실수를 하였다고 보여진다. 하나는 파초를 야자수로 잘못 번역한 것이고, 또 하나는 야자수의 속이 비어 있다고 잘못 말한 것이다.

 

포말경 게송

 

포말경에서 게송에 모두에 대하여 비교표를 만들어 보았다.

  

 

게송1

  

   

빠알리 원문

Pheapiṇḍūpama rūpa vedanā bubbuupamā
Maricikupam
ā saññā sakhārā kadalūpamā,
M
āyūpamañca viññāa dīpitā 3diccabandhunā.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초불연(각묵스님)

물질은 포말덩이와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고

인식은 아지랑이와 같고 심리현상들은 야자나무와 같으며

알음알이는 요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는 밝혔도다.

영문1

Saying thus the Teacher,
The two-footed relation of the sun said:

1. “Matter is comparable to foam
Feelings to bubbles,
Perceptions are comparable to illusions
Intentions to plantain sheaves
And consciousness to magic,

 

 

게송2

  

   

빠알리 원문

Yathā yathā na- nijjhāyati- yoniso upaparikkhati,
Rittaka
tucchaka hoti yo na passati yoniso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그 근본을 살펴

있는 그대로 자세히 관찰하고

이치에 맞게 탐구해 보면,

비어있고 공허한 것이네.

초불연(각묵스님)

면밀히 살펴보고 근원적으로 조사해보고

지혜롭게 관찰해보면 그것은 텅 비고 공허한 것이로다.

영문1

. In whatever way he wisely examines it,
He sees it as useless and without essence.

 

 

게송3

  

   

빠알리 원문

Yo  ima kāya gārayha- bhuripaññena desita,
Pahāna
tiṇṇa dhammāna rūpa passetha- chaḍḍhita.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이 몸을 비롯해 모두 그렇다고

광대한 지혜를 지닌 님은 가르치네.

세가지 현상을 떠나며

물질은 버려진 것으로 관찰하라.

초불연(각묵스님)

광대한 통찰지를 가진 분은 이 몸에 대해서

세가지를 제거하여 물질이 버려진 것을 보도다.

영문1

About this body, the wise one declared,
When devoid of three, matter has to be discarded.

 

 

게송4

  

   

빠알리 원문

Āyu usmā ca viññāa yadā kāya jahantima
Apaviddho tadā seti parabhatta
acetana.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마침내 온기와 의식

그리고 마음을 버리면,

버려진 채 놓이니

무정하게 다른 것의 먹이가 되네.

초불연(각묵스님)

생명과 온기와 알음알이가

이 몸을 떠나면

그것은 던져져서 의도 없이 누워 있고

남들의 음식이 될 뿐이로다.

영문1

When life span, name, and consciousness,
Get discarded from this body,
It lies unconscious being thrown here and there
And it becomes the food of others.

 

 

게송5

  

   

빠알리 원문

Etādisāya santāno māyāya bālalāpinī,
Vadhako eso akkhāto sāro ettha na vijjat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이것의 상속은 환상이고

무지한 자의 지껄임이고

살해자라고도 하니,

거기에 실체는 없다네.

초불연(각묵스님)

이러한 이것은 흐름이며 요술이어서

어리석은 자를 현혹시키며

이것은 살인자라 불리나니

여기에 실체한 없도다.

영문1

This is how we continue,
It's magic the foolish, prattle.
The Blessed one declared,
It's the slayer, no essence is evident there.

 

 

게송6

  

   

빠알리 원문

Eva khandhe avekkheyya bhikkhu āraddhavīriyo,
Divā vā yadi vā ratti sampajāno patissato.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수행승이여, 열심히 정진한다면

이처럼 존재의 다발을 관찰하라.

낮은 물론이고 밤낮으로

올바로 알아채고 새김을 확립하라.

초불연(각묵스님)

비구는 열심히 정진하여

이와같이 []온을 굽어봐야 하나니

날마다 낮과 밤 할 것 없이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라.

영문1

The monk with aroused effort,
And with mindful awareness should reflect,
The masses through out the day
And through the day and night.

 

 

게송7

  

   

빠알리 원문

Pajahe- sabbasayoga kareyya saraattano,
Careyyādittasīsova patthaya
accuta padant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모든 결박을 끊어 버려라.

자기자신을 피난처로 하라

불멸의 길을 구하여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수행하라.

초불연(각묵스님)

모든 속박을 제거해야 하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야 하리니

머리에 불붙는 것처럼 행해야 하고

떨어지지 않는 경지를 간절히 원해야 하리.

영문1

Monks discard all bonds
And procure your own refuge
Until you realize extinction,
Behave as though your head has caught fire.

 

 

 

 

2013-04-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