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찰나와 흐름에 사무치십시오? 찰나멸론(刹那滅論)에 입각하지 않은 근본불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3. 4. 10. 12:25

 

찰나와 흐름에 사무치십시오?  찰나멸론(刹那滅論)에 입각하지 않은 근본불교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이 강조 하는 말 중의 하나가 찰나론이다. 그래서 글이나 강연에서 찰나에 흐름에 사무치십시요라고 말한다. 매 순간 찰나생 찰나멸 하는 연기적 흐름에 사무쳐야 함을 강조 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마디로 답하겠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찰나의 흐름(상속)입니다. 찰나(刹那, khan*a)와 흐름(相續, santati)은 제가 여기 초불 까페와 다른 여러 글에서 강조하고 강조하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거듭한 것입니다. 불교는 고정불변하는 실체(자아, 진심, 진아, 일심 등)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에 존재를 이처럼 찰나생/찰나멸의 흐름으로 파악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생명입니다.

 

(각묵스님, 찰나와 흐름(相續) 사무치십시오, 초기불전연구원 2008-12-27)

 

 

각묵스님은 존재를 찰나의 흐름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글이나 강연에서 거듭 거듭 강조하는 사항은 찰나의 흐름에 사무치라고 한다. 이런 사무치다라는 말은 넌더리치다라는 말과 함께 자주 쓰이는 말이다.

 

이처럼 법의 찰라생멸에 사무치라는 스님은 초기불교부터 아비담마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이나 직계제자들은 법을 실유니 가유니 하는 기준으로는 절대로 살펴보지 않습니다. 법은 찰나생/찰나멸로 보았습니다.”라고 말하여, 찰나론이 부처님의 말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찰나멸론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깟짜나곳따 경(S12:15)을 들고 있다. 영원론과 단멸론을 경계하기 위하여 경을 언급하였지만 연기에 대하여 찰나론적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깟짜나곳따 경은 법의 생과 멸에 대한 것이지 찰나에 대한 것은 아니다.

 

한 찰나에 일어나는 마음은 얼마나 될까?

 

찰나론은 아비담마와 청정도론 그리고 주석서와 같은 논서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아비담마에 근거하고 주석서의 의견을 중시하는 초불연에서 찰나론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찰나는 최소의 단위일까?

 

물질을 쪼개면 원자가 되고, 원자를 쪼개면 아원자라 한다. 시간의 최소단위인 찰나를 쪼개면 아찰나가 될 것이다. 아찰나를 쪼개면 아아찰나가 되고 또 아아아찰나가 되고 무한정 쪼개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찰나생 찰나멸하는 법의 고유성질(自性, sabhaava)은 사라지고 말것이다. 그래서 아비담마에 따르면 찰나에서 멈춘다. 시간의 최소단위를 찰나로 보고 법의 자상공상을 설명한 것이다.

 

한 찰나에 일어나는 마음은 얼마나 될까? 주석서에 따르면 “손가락 한 번 튀기는 순간(eka-cchara-kkhan*a)에 십만 꼬띠(kot*i, 1꼬띠는 천만임. 그러므로 십만 꼬띠는 1조가 됨.) 개의 느낌들이 일어나고 사라진다.(SA.ii.322)”라고 한다. 암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이용하여 하고 소리나게 부딪치면, 그 순간 셀 수 없는 마음이 한 찰나에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Finger sound

 

 

 

동시적 수반연기로 설명되는 찰나연기

 

하지만 찰나연기를 십이연기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래서 형이상학적 찰나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일반적으로 동시적 수반연기로 보고 있다.

 

동시적 수반연기란 무엇인가? 인연상윳따 해제에 따르면 탐욕으로 살생을 저지르는 자의 예를 들고 있다. 12가지 연기지분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동시적 수반연기와 십이연기의 고리를 대비하여 보면 다음 표와 같다.

 

 

No 동시적 수반연기 십이연기
1 어리석음(moha) 무명(
Avijjā)
2 의도(cetana) 형성(
sakhārā)
3 대상의 분별식 의식(
viññāa)
4 분별식과 공존하는 네 가지 요소(---) 명색(
nāmarūpa)
5 명색과 관련된 감각장 감역(
saāyatana)
6 감역의 활동 접촉(
phassa)
7 접촉의 체험 느낌(
vedanā)
8 탐욕(lobha) 갈애(
ta)
9 갈애와 연관된 계박 집착(
upādāna)
10 집착과 더불어 생기한 신체언어적 행위 존재(
bhava)
11 이러한 모든 담마의 출현 태어남(
jāti)
12 그들의 성숙과 그들의 파멸 늙음(
jarā)과 죽음(maraa)

 

 

 

표를 보면 동시적 수반연기로 표현된 찰나연기는 십이연기와 다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인과와 조건에 따른 순차연기가 아니라 동시발생적 연기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아비담마이론에서 볼 수 있는 찰나론적인 형이상학적 연기도 아니다. 어리석은 자가 순간적 감정을 참지 못하여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을 때 파멸에 이르듯이 동시적 수반연기에 대한 것이다.

 

찰나생 찰나멸으로 특징지어지는 찰나연기에 대하여 순차적인 연기의 고리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깟짜나곳따 경(S12:15)에 언급된 생멸연기에 대하여 찰나생 찰나멸로 설명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찰나멸론에 입각하고 있지 않은 근본불교

 

형이상학적 찰나론은 부파불교의 산물이라 한다. 따라서 빠알리니까야에서 찰나론에 입각한 마음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의 말씀은 찰나멸론에 근거하여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경의 문구를 예로 들 수 있다.

 

 

[세존]

왜냐하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몸이 일년을 살고 이년을 살고 삼년을 살고 사년을 살고 오년을 살고 십년을 살고 이십년을 살고 삼십년을 살고 사십년을 살고 오십년을 살고 백 년을 살고 또 그 이상 사는지를 그는 보고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은 소멸한다.

 

(Pathamaassutavantusutta-배움이 없는 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1, 전재성님역)

 

 

경에서 몸과 마음의 변화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각주에 따르면 "신체적인 몸이 마음보다 좀 더 안정적이라고 한다면 순간주의 이념을 반박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신체적인 몸은 비록 변화되고 파괴되지만 매 순간마다의 생성이 인지되는 것은 아니므로 어느 정도 지속적인 것이다라고 칼루파하나(D.J. Kalupahana)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몸과 마음에 찰나멸론을 도입하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다.

 

더구나 마음에 대하여 마음이 순간적인 변화에 종속된다는 암시도 없다.”라고 하였다. 찰나에도 몸과 마음이 수 없이 생멸한다는 아비담마 논사들의 이야기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오직 몸과 마음의 변화에 대하여 상대적인 속도를 강조하고 있을 뿐이라 한다.

 

경에서의 부처님의 말씀은 근본불교가 찰나멸론에 입각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고 한다.

 

원숭이 비유

 

각주에서 상대적 속도라는 말에 주목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찰나멸론으로 설명되는 절대적 속도가 아니라, 조건에 따른 상대적 속도라는 것이다. 상대적 속도에 대한 이야기는 원숭이 비유를 통하여 확인 할 수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원숭이가 삼림의 숲속으로 다니면서 한 가지를 붙잡았다가 그것을 놓아버리고 다른 가지를 붙잡는 것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은 소멸한다.

 

(Pathamaassutavantusutta-배움이 없는 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마음을 원숭이로 비유하였다. 원숭이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이동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의 생멸로 보았다. 그 어디에도 찰나생 찰나멸한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상대적 속도

 

가지에서 가지로 이동할 때 찰나생멸이 아니듯이 마음 역시 찰나생멸로 볼 수 없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Srp.II. 100에 따르면, 숲은 대상의 숲으로 대상의 숲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원숭이다. 대상을 붙잡는 마음이 나뭇가지를 붙잡는 원숭이다.

 

원숭이가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옮겨 가듯이 마음은 대상의 숲에서 옮겨 다니며 시각적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고 때로는 청각적인 대상 등이나 과거, 현재, 미래의, 때로는 외적, 내적의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일으킨다.

 

원숭이가 새로운 나뭇가지를 붙잡지 못하면, 땅바닥으로 내려와서 앉는 것이 아니라 한 나뭇가지를 붙잡고 그 위에 앉는다. 이와 같이 마음이 대상의 숲을 옮겨 다니다가 대상을 새로이 발견하지 못하면, 한 종류의 대상에 정착한다.

 

이 비유는 닦여지지 않은 마음을 원숭이에 비유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항상 대상과 함께 한다는 속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각주, 전재성박사)

 

 

원숭이가 한 가지에 가만 앉아 있지 않고 이 가지 저 가지로 옮겨 다니듯이 마음 역시 대상에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원숭이는 가지에서 오래 머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 역시 한 대상에 오래 머물 수도 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마음이 찰나멸생한다는 아비담마론적 형이상학은 이 경의 가르침에서만큼은 맞지 않는다. 마음은 대상에 따라 머무는 기간이 다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은 순간적으로 생멸하는 절대적인 속도라기 보다 대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 속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법구경에서 보는 마음의 특성

 

마음의 속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하고,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마음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현상으로 본다. 더구나 마음은 변화무쌍하다. 마치 원숭이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다니듯이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이와 같은 마음의 특성에 대하여 법구경에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1.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을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잡는다.

마치 활제조공이 화살을 바로 잡듯.(Dhp 33)

 

2.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이

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Dhp 34)

 

3.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온다.(Dhp 35)

 

4.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지만,

지극히 보기 어렵고 미묘한 마음을

현명한 님은 수호해야하리.

마음이 수호되면, 안락을 가져온다.(Dhp 36)

 

5.

멀리 미치고 홀로 움직이고

신체가 없는 동굴에 숨어 있는

마음을 제어하는 님들은

악마의 밧줄에서 벗어나리라.(Dhp 37)

 

(법구경, 마음의 품, 전재성님역)

 

 

법구경 안락의 품에 마음의 속성이 잘 표현 되어 있다. 경에서 원숭이로 비유한 마음에 대한 게송이 35번 게송이라 볼 수 있다. 경에서 원숭이가 삼림의 숲속으로 다니면서 한 가지를 붙잡았다가 그것을 놓아버리고 다른 가지를 붙잡는 것과 같다.( S12:61)”라 하였는데, 이는 법구경 35번 게송에서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을~”이라고 표현한 것과 일치한다.

 

마음의 속성 네 가지

 

법구경에 표현된 마음의 속성에 대한 설명이 있다.  ‘우 쿤달라 비왐사’의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

 

 

1.  마음은 길들이기 어렵다.

 

마음을 길들이고 다스리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마음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여서 원하는 곳은 어디라도 가며, 자유롭게 떠돌아 다닌다. 마음으로 갈 수 없는 나라가 있는가? 상상만으로도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막을 수 있는가? 아무도 자신의 나라로 들어 오는 마음을 막을 수 없다. 마음에는 장벽이 없다.

 

2.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진다.

 

마음은 빠르게 일어났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한 순간 행복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슬퍼진다.  이 순간에 행복 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화를 낸다.  이순간에는 공손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그렇지 않다.

 

3. 마음은 제멋대로이다.

 

마음은 자기가 선택한 마음의 대상에 스스로의 의지로 다가간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불 법 승 삼보와 정신, 물질이라는 특정한 마음의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은 쉽지 않다.  위빠사나를 처음 시작한 수행자는 정신적대상과 물질적 대상에 집중을 하려고해도 마음이 여기 저기로 돌아 다닌다. 그 마음은 시장으로, 사무실로, 학교로 어디든 돌아다닌다.

 

4. 마음은 원래 선하지 않은 것을 좋아한다.

 

마음은 여간해서는 선한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 마음은 선하지 않은 생각과 선하지 않은 대상에 빠져 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수행자 개인의 성품이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 마음의 성품이 선하지 않은 행위를 좋아 한다.  마음은 좋지 않은 것을 즐긴다. 마음을 내버려 두면, 마음은 대부분 선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하고 있다.

 

(우 쿤달라 비왐사,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행복한 숲)

 

 

위 네 가지 마음의 속성에서 세 번째인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진다가 생멸에 대한 것이다. 책에 따르면 부처님의 지혜에 의하면, 번개가 번쩍 하는 동안, 또는 눈이 한 번 깜박거리는 동안에 몇 조에 달하는 의식이 일어나서 변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각묵스님의 찰나론과 같은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찰나생멸론은 주석에서 보이지만 빠알리 니까야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찰나연기론

 

아비담마에 따르면 찰나는 법의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의 시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더구나 주석서에서는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아찰나라는 개념까지 등장하고 있다.

 

비록 찰나에 대하여 조건발생적 연기적 흐름으로 보고 있지만, 찰나에 너무 천착하면 어떤 결과가 발생될까? 개정판 상윳따 해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초판 상윳따 해제에서 전재성박사는 다음과 같이 찰나론에 대하여 설명하여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붓다의 심오한 진리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매우 다양한 해석학적 의미가 부여되었고, 때로는 형이상학적으로 잘못 오해되기가 쉬웠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부파불교적이고 아비달마적인 많은 시도들은 결국 형이상학적인 찰나멸론(刹那滅論)이나 원자론 쪽으로 기울어지고 우주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데 커다란 장애로서 작용하게 되어, 대승불교적인 공사상(空思想)이 체계화되어 스스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공사상은 연기사상을 더욱 심화시킨 공로는 있으나 지나치게 상대론적 의존관계를 강조한 나머지 구체적인 생성과 소멸의 인과관계마저 부정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공사상과 상보적(相補的)으로 나타나 유식사상(唯識思想) 또한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을 통해 법계에 대하여 심오한 해석을 부가했으나, 모든 것을 순수한 마음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실제와 연관된 사실의 세계를 관념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사상은 인과론적이라기보다는 나타나는 대로 모든 것이 진리라는 현상론자의 입장과 유사하다는 오해를 받기가 쉽다.

 

(전재성박사, 상윳따니까야 초판본 해제)

 

 

인연상윳따(S12)의 해제글이다. 부처님 연기법이 우주를 설명하는 법계연기로 변질 된 것에 대하여 부파불교의 찰나멸론의 영향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찰나멸론적으로 천착한 결과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인과와 조건에 따른 연기법이 생멸로 설명 되고 있다. 그런데 부파불교로 넘어 오면서 찰나생멸론적으로 변질되었을 때 원자론적으로 기울어 공사상이 더욱 더 체계화 되는데 기여한 것으로 본다. 더구나 상호의존적 연기를 특징으로 하는 법계연기로 변질 되었을 때 인과마저 부정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파불교시대의 산물인 찰나멸론이 천착되고 천착된 결과 후대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나왔을 것이다.

 

 

無量遠劫卽一念      무량원겁즉일념

一念卽是無量劫      일념즉시무량겁

끝도 없는 무량겁이 한 생각의 찰나이고

찰나의 한 생각이 끝도 없는 겁이어라.

 

(화엄경, 법성게)

 

 

이 모두가 마음에 대하여 지나치게 분석적으로 접근하여 찰나멸론적으로 천착한 결과라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스님은 글이나 강연에서 찰나와 흐름에 사무치십시오.”라고 말한다.

 

 

 

  

2013-04-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