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과거불(過去佛)과 정법시대, 라따나경(보배경)10

담마다사 이병욱 2013. 4. 2. 11:27

 

 

과거불(過去佛)과 정법시대, 라따나경(보배경)10

 

 

 

라따나경(보배경, Sn2.1)에서 부처님에 대한 예경과 찬탄에 대한 게송은 세 개이다. 부처님에 대한 직접적인 예경에 대한 것인데 3, 12, 13번 게송이다.

 

3번 게송에서는 부처님과 견줄 수 있는 보배는 이 세상은 물론 내세에도 없다는 것이고, 12번 게송은 열반에 이르는 위없는 묘법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고, 13번 째 게송은 아래와 같다.

 

 

 

 

라따나경 게송13

빠알리

Varo varaññū varado varāharo
Anuttaro dhammavara
adesayī
Idampi buddhe ratana
paīta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와로 와란뉴- 와라도 와라-하로

아눗따로 담마와랑 아데사이

이담-삐 붓데 라따낭 빠니땅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전재성님역

위없는 것을 알고, 위없는 것을 주고,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 위없는 님께서,

최상의 위없는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안에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법정스님역

뛰어난 것을 알고, 뛰어난 것을 주고, 뛰어난 것을 가져오는 위없는 이가 으뜸가는 법을 설했다. 이 뛰어 난 보배는 눈 뜬 사람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 행복하라.

中村元

(すぐ)れたものをり、れたものをえ、れたものをもたらすれた無上が、なるえをきたもうた。このすぐれたが〈ざめた〉(ブッダ)のうちにする。このによってせであれ。

영역

oble, knowing the noble, giving the noble, and to bring about nobility,

The incomparable Teaching was preached.

This too is precious in the Enlightened jewel, by this truth may there be mental happiness.

 

 

 

 

 

위없는 것을 알고, 위없는 것을 주고,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 위없는 님께서

 

열세 번째 게송은 부처님의 예경과 찬탄에 대한 압축표현이다. 네 가지 특징을 표현 하였는데 빠알리어로 ‘와로 와란뉴 와라도 와라하로(Varo varaññū varado varāharo)’로 표기 된다. 이에 대한 해석은 “위없는 것을 알고, 위없는 것을 주고,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 위없는 님께서”라고 하였다. 모두 ‘위없는’ 으로 표현 되는 수식어가 들어 간 것을 알 수 있다. 각주를 참고하여 문구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말 번역

각 주

Varo(와로)

위없는 님

위없는, 훌륭한 님

(uttamo, seṭṭho)

Varaññū(와란뉴)

위없는 것을 알고

열반을 체득한 자

(nibbānaññū)

Varado(와라도)

위없는 것을 주고

위없는 가르침을 주는 자

(varadhammadāyi)

Varāharo(와라하로)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

여덟 가지의 성스런 길(八聖道)를 가져 오는 자

 

 

 번역을 보면 빠알리어 구문의 순서와 맞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와로(Varo) 가 가장 나중에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빠알리 구문 순서대로 번역한다면 “위없는 님이 위없는 것을 알고, 위없는 것을 주고,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영문번역의 경우 주어를 앞에 둔 것이 특징이다. 삐야닷시 테라의 번역을 보면 The Peerless Excellent one (the Buddha) the Knower (of Nibbana), the Giver (of Nibbana), the Bringer (of the Noble Path)~”로 되어 있어 주어를 앞에 두었다. 따닛사로 빅쿠의 경우 “Foremost, foremost-knowing, foremost-giving, foremost-bringing,~”로 되어 있어서 역시 빠알리 어순대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주어에 해당되는 와로가 가장 나중에 위치해 있어도 뜻을 전달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까무라 하지메 역시 주어를 뒤에 두었다.

 

와라(Vara)와 와란뉴(Varaññū)

 

문구에서 공통적으로 와라(Vara)가 들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와라에 대한 빠알리 사전(전재성박사)을 보면 형용사(adj)로서 ‘뛰어난, 훌륭한, 고귀한, 최상의’ 라는 뜻이 있고, 명사(n)로서 ‘소망, 희망, 은혜, 복리’라는 뜻이 있다. 따라서 와로(Varo)는 최상의 님, 위없는 님을 뜻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없는 님이 ‘위없는 것을 안 것(Varaññū)’은 위없는 깨달음인 열반(nibbāna)이다. 그래서 와란뉴(Varaññū)는 ‘열반을 체득한 자(nibbānaññū)’가 된다.

 

와라도(Varado)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브리흐마야짜나경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에 따르면 사함빠띠의 청원에 따라 진리를 설하기로 결정한다. 이유는 “그러자 세존께서는 하느님의 청원을 알고는 뭇삶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깨달은 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S6:1)”라는 문구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은 뭇삶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진리를 설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 준다.

 

 

[세존]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S6:1)

 

 

부처님이 증득한 위없는 진리를 받아 들이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고 하였다. 만일 버리지 않는다면 진리를 설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될 것이다. 그런 것을 예측하고 진리를 설하지 않으려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설하려 한 것은 누군가는 알아 들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부처님에 대하여 라따나경 게송에서는 와라도(Varado)라 하였다. 위없는 가르침을 주는 자(varadhammadāyi)라는 뜻이다.

 

와라하라(Varāhara)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위없는 깨달음이라 한다. 이는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깨달음을 뜻한다. 그런 깨달음을 가져오는 자에 대하여 위없는 것을 가져 오는 자라 하여 게송에서는 와라하로(Varāharo)’라 하였다.

 

와라하로는 와라(Varā)와 하라(hara)의 복합어이다.  이 때 하라(hara)에 대하여 인터넷  빠알리어 사전을 찾아 보면 ‘the God Isvara’라고 되어 있다. 한자로 ‘대자재천(大自在天)’이라는 뜻이다. 이는 힌두교의 시바신을 뜻한다. 그러나 전재성 박사의 ‘빠알리-한글사전(개정판)’을 보면 형용사로서 ‘나르는, 가져가는’ 뜻과 함께 ‘시바신의 별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었을 때 하라(hara)는 두 가지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게송에서는 '나르다'는 뜻을 취하여 와라하로(Varāharo)에 대하여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 자’, 여덟 가지의 성스런 길(八聖道)를 가져 오는 자로 번역하였다. 라따나경이 실려 있는 숫따니빠따는 부처님 당시까지 거슬로 올라 가는 고층의 경전이기 때문에 기원 후에 성립된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없다.

 

아눗따라(Anuttara)

 

이와 같이 위없는 것을 알고(Varaññū), 위없는 것을 주고(Varado),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Varāharo), 위없는 님(Varo) 께서 설하신 가르침은 무엇일까? 게송에서는 아눗따로 담마와랑 아데사이(Anuttaro dhammavara adesayī)라 하였다. 이는 ‘최상의 위없는 가르침을 설하셨다’라는 말이다.

 

최상의 위없는 이라는 말이 아눗따라(Anuttara)’이다. 위없는, 최상의, 탁월한 뜻을 가진다. 또 최고의 스승이라는 무상사(無上士)’라는 뜻이 있다. 이는 부처님의 열 가지 별호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최상의 위없는 스승이 설한 가르침은 자동적으로 최상의 위없는 가르침(Anuttaro dhamma)이 된다. 그런 가르침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심지어 내세에서도 없을 것이라 한다. 오로지 부처님이 깨달은 가르침으로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부처님은 연기법을 발견하였다. 부처님이 만든 법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Katamo ca bhikkhave, paiccasamuppādo? Jātipaccayā bhikkhave jarāmaraa uppādā vā tathāgatāna anuppādā2 vā tathāgatāna hitāva sā dhātu dhammaṭṭhitatā dhammaniyāmatā idapaccayatā.

 

[세존]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빳짜야경-Paccayasutta-조건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0,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은 세계의 근본 원리라 한다. 부처님이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이미 원리(dhamma)로서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 한다. 이런 연기법의 핵심은 조건(paccaya)’이다.

 

 

과거칠불과 행운의 겁

 

연기법은 고따마부처님만이 깨달은 것이 아니다. 과거에 출현하였던 부처님도 똑 같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는 연기의 보편성을 말한다. 어느 부처님이 출현하더라도 조건에 기반을 둔 연기의 법칙은 똑 같은 내용이라는 뜻이다.

 

상윳따니까야 인연상윳따(S12)에서는 과거 일곱분의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내용이 소개 되어 있다. 이를 과거칠불이라 하는데 위빠시(Vipassī, 91겁전) 붓다, 시키(Sikhī, 31겁전)붓다, 웻사부(Vessabhū, 31겁전) 붓다, 까꾸산다(Kakusandha, 현겁) 붓다, 꼬나가마나(Koāgamana, 현겁) 붓다, 깟사빠(Kassapa, 현겁) 붓다, 고따마(Gautama, 현겁) 붓다 이렇게 일곱분의 과거 부처님을 말한다.

 

위빠시 붓다가 91겁 전에 출현 하였고, 31겁 전에 시키붓다와 웻사부 붓다가 출현하였다. 그리고 현겁에는 꼬나가마나 붓다, 까꾸산다 붓다, 깟사빠 붓다와 고따마 붓다가 출현하여 모두 다섯 분의 붓다가 출현하였다. 그래서 현겁에 대하여 ‘행운의 겁’이라 한다.

 

지금까지 출현한 붓다를 보면

 

이외 과거 부처님은 더 있다. 자료에 따르면 총 29분의 부처님이 출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29분의 부처님 이름(The 29 named Buddhas)

이름

출현시기

인간수명

 

1

Tahakara

딴한까라

과거28불

2

Medhakara

메단까라

3

Saraakara

사라난까라

4

Dīpankara

디빤까라

(연등불)

5

Koṇḍañña

꼰단냐

6

Magala

망갈라

7

Sumana

수마나

8

Revata

레와따

9

Sobhita

소비따

10

Anomadassi

아노마닷시

11

Paduma

빠두마

12

Nārada

나라다

13

Padumuttara

빠두뭇따라

14

Sumedha

수메다

15

Sujāta

수자따

16

Piyadassi

삐야닷시

17

Atthadassi

앗타닷시

18

Dhammadassī

담마닷시

19

Siddhattha

시닷타

20

Tissa

띳사

21

Phussa

풋사

22

Vipassī

위빠시

91겁전

8만세

과거7불

23

Sikhī

시키

31겁전

7만세

24

Vessabhū

웻사부

31겁전

6만세

25

Kakusandha

까꾸산다

현겁

4만세

26

Koāgamana

꼬나가마나

현겁

3만세

27

Kassapa

깟사빠

현겁

2만세

28

Gautama

고따마

(석가모니)

현겁

100세

29

Maitreya

마이뜨레야(미륵)

현겁

미래불

출처 ;

1)29불이름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the_twenty-eight_Buddhas

 

 

 

앞으로 미래에 출현하게 될 마이뜨레야(미륵) 붓다까지 합하면 모두 29분이 됨을 알 수 있다.

 

왜 붓다가 출현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붓다가 출현 하는 것일까? 보편적인 진리인 연기법이 붓다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언제나 세상에 있는 것이라 하였는데, 붓다가 출현하여 다시 법을 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연기법이 변질되어 사라졌다는 것을 말한다.

 

세계의 보편적 원리인 연기법이 제대로 전승 되었다면 또 다시 붓다가 출현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붓다가 출현한다는 것은 과거 붓다가 깨달았던 진리가 더 이상 전승되지 않고 도중에 끊어진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의 실종이다. 연기법이 변질 되어 사라진 것이다.

 

연기법이 사라졌을 때 남는 수행방법은 선정삼매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출현하기 전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가 있었고 가장 수승한 경지로서 가장 오래 산다는 비상비비상처가 있었다. 그 수명은 무려 84천대겁에 달한다. 우주가 수도 없이 성주괴공하는 오랜 기간이다.

 

붓다가 출현하여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극히 짧다고 한다. 공백기간은 한량없이 길고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짧기 때문에 영겁의 시간속에서 본다면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하나의 깜박임에 지나지 않는다.

 

정법이 없는 상태로 한량 없는 세월이 흐른다. 그런 예를 보면 위빠시 붓다(91겁전)와 시키붓다(31겁전)에서 본다. 무려 60겁이나 되는 공백이 있다.  우주가 수십 번 성주괴공하는 기간이다.

 

정법이 사라진 후 암흑과 같은 한량 없은 오랜 시간 후에 마침내 붓다가 출현한다. 과거 붓다가 발견하였던 똑 같은 방법으로 연기법을 발견한다. 그리고 법을 펴고 그 법은 전승된다. 그러다가 연기법이 변질된다. 변질된 법은 마침내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다음 붓다가 출현 할 때 까지 암흑의 시대가 계속된다. 이러기를 수 없이 반복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붓다가 출현한다. 마치 맹구우목의 비유처럼 붓다가 출현하는 것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라 한다.  

 

정법이 살아 있는 시대

 

붓다가 출현하여 정법이 살아 있는 시대를 정법시대라 한다. 일반적으로 정법시대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첫째,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빠알리 삼장)이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둘째,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수행을 할 수 있는 팔정도가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셋째, 깨달음을 통하여 열반을 성취한 성자가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빠알리 니까야를 통하여 부처님의 원음을 접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런 시대에 산다는 것은 마치 영겁의 우주 공간에서 점멸하는 하나의 작은 불빛에 지나지 않는 시대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행운의 겁, 행운의 시대라 한다. 

 

정법이 살아 있는 시대에 정법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은 행운임에  틀림없다.

 

 

 

2013-04-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