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생멸법(生滅法)을 알았을 때의 법열(法悅)이란”아눌라스님의 심념처 법문듣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3. 3. 30. 09:09

 

 

생멸법(生滅法)을 알았을 때의 법열(法悅)이란아눌라스님의 심념처 법문듣기

 

 

최근 아눌라 스님의 법문을 다시 듣고 있다. 스님의 카페(http://cafe.daum.net/kalyanamitta )에서 다운 받은 MP3파일을 모바일에 저장하여 편안한 시간에 가장 편안한 자세로 듣고 있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들을만 하다는 것이다. 이는 스님의 수행체험이 녹아 들어가 있는 법문이기도 하지만 철저하게 경전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님의 목소리는 뚜렷하고 호소력이 있어서 듣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많이 되는 것 같다.

 

다양한 개성의 목소리

 

우리나라 선사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심한 의성어와 사투리가 많다. 그러다 보니 집중하기 힘들다. 특히 의성어의 경우 처음에는 들을 만 하지만 자주 반복되면 역겨워진다.

 

의성어 중에 소리비틀기가 있다.  처음 만들어 본 신조어이다. 이는 도올 김용옥을 연상하면 된다. 김용옥교수는 강의 중에 흥분하면 소리가 고성으로 올라가면서 비틀어 진다. 어느 스님 역시 잘 나가다가 기분이 고양되면 목소리가 비틀어진다.

 

다음으로 목소리꺽기와 목소리되집기가 있다. 가수 라훈아를 연상하면 된다. 라훈아노래 특징이 꺽기와 뒤집기이다. 그래서 나훈아를 모창하는 가수들이 이 수법을 잘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소리 꺽기와 뒤집기를 이용하여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심한 의성어를 사용하는 스님의 법문도 있다.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어느 스님은 ~알 쑤 없는 의심으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말을 길게 늘어 뜨리거나 음의 고저를 이용하여 마치 한시를 읊듯이 말한다.

 

목젖을 이용하는 스님도 있다. 법문 중에 ~~~있다라고 하는데, 이때 목젖을 이용하여 ~~”라고 하는데 마치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투리를 예사로 사용하는 스님의 법문도 있다. “억수로 억수로라고 말하는 스님도 있는데 대단히 많다라는 뜻이다. 특히 영남지방의 심한 억양의 경우 알아 듣기 힘들다.

 

이와 같이 소리비틀기, 소리꺽기, 과도한 의성어, 목젖사용하기, 심한 사투리가 있는 법문의 경우 듣기에 부담스럽다. 반면 표준어를 사용한 분명하고 또렷한 목소리의 법문은 듣기에 부담없다. 아눌라 스님의 목소리가 좋은 케이스라 보여진다.

 

 

알아차리기 어려운 어리석음

 

아눌라 스님의 MP3파일 법문은 집중수행 당시 법문을 녹음한 것이다. 언제 어느 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스님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언제 들어도 새롭다. 마치 음악을 듣는 것처럼 편안하게 들은 내용 중에 사념처에 대한 법문이 있다.

 

 

탐심과 진심은 잘 알 수가 있는데, 이 어리석은 마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목욕실에서 플라스틱 슬리퍼를 막 움직이죠? 자기 혼자 있으니까 그 생각을 못하는 거에요. 이 소리가 다른사람에게 시끄럽게 들리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자신이 하는 행동에 결과를 추측하지 못하는,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그 상태는 어리석은 마음이에요.

 

(아눌라스님, 2-오온1.MP3)

 

 

 

 

아눌라스님의 법문듣기, 오온 1

출처: http://cafe.daum.net/kalyanamitta

 

 

 

탐욕과 성냄은 알아차리기 쉬우나 어리석은 마음은 알아차리기 어렵다고 한다. 무의식 중에 나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리퍼 자락을 끌고 다니며 소리를 내는 것도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아 차리지 못해서 라고 한다.

 

참을 수 없는 헛기침

 

사무실에 헛기침을 하는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였다. 그러나 그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더구나 가래 끓는 듯한 역겨운소리와 함께 큰 소리로 내뱉는 헛기침은 점점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럴 경우 한 마디 말로 충고 해주는 것도 좋으나 그렇게 했을 경우 마음이 상할까 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 대신 맞불작전을 펴서 상대방이 헛기침을 하면 곧바로  헛기침을 하여 주의를 환기시켜 주려 하였다. 처음에는 의식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역시 마찬가지이었다.

 

역겨운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내지르는 헛기침을 듣는 것은 고역이다. 이는 자신도 모르게 내지르는 것이다. 슬리퍼를 끌고 다니면서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과 같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라 볼 수 있다.

 

탐심을 없애려고 하지 마라!

 

탐심과 진심, 어리석은 마음은 사념처에 있어서 심념처에 속한다. 심념처에 대한 아눌라 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경전에 보면 마음수행을 하는 방법을 열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어요. 첫 번째 네 가지는 선업과 불선업이에요. ‘내마음에 탐심이 있으면 탐심이 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려라로 끝나요. 그걸 없애려고 하거나 거부하거나 비난하거나 이러라는 말이 없어요. ‘탐심이 있는 마음은 탐심이 있는 마음으로 알아 차려라!’이것만 하면 되요.

 

(아눌라스님, 2-오온1.MP3)

 

 

사띠빳타나경(염처경, M10)에 실려 있는 심념처에 대한 내용이다. 스님은 탐심을 예로 들어 내마음에 탐심이 있으면 탐심이 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려라!”로 끝내라 한다. 이런 탐심을 없애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단지 알아차리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심념처 정형구

 

이는 철저하게 경전의 문구를 바탕으로 한 법문이다. 그렇다면 경전에서 심념처에 대한 문구는 어떤 것일까.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Kathañca bhikkhave bhikkhu citte cittānupassī viharati?

 Idha bhikkhave bhikkhu

 

1) sarāga vā citta sarāga cittanti pajānāti. Vītarāga vā citta vītarāga cittanti pajānāti.

2) Sadosa vā citta sadosa cittanti pajānāti. Vītadosa vā citta vītadosa cittanti pajānāti

3) samoha vā citta samoha cittanti pajānāti. Vītamoha vā citta vītamoha cittanti pajānāti.

4) Sakhitta vā citta sakhitta cittanti pajānāti. Vikkhitta vā citta vikkhitta cittanti pajānāti. Mahaggata vā citta mahaggata cittanti pajānāti.

5) Amahaggata vā citta amahaggata cittanti pajānāti. Sauttara vā citta sauttara cittanti pajānāti.

6) Anuttara vā citta anuttara cittanti pajānāti. Samāhita vā citta samāhita cittanti pajānāti.

7) Asamāhita vā citta asamāhita cittanti pajānāti. Vimutta vā citta vimutta cittanti pajānāti.

8) Avimutta vā citta avimutta cittanti pajānāti.

 

Iti ajjhatta vā citte cittānupassī viharati. Bahiddhā vā citte cittānupassī viharati. Ajjhattabahiddhā vā citte cittānupassī viharati. Samudayadhammānupassī vā cittasmi viharati. Vayadhammānupassī vā cittasmi viharati samudayavayadhammānupassī vā cittasmi viharati. Atthi cittan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eva ñāamattāya patissatimattāya.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Eva kho bhikkhave bhikkhu citte cittānupassī viharati.

 

 

[세존]

수행승들이여,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이

 

1)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을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을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2) 성냄으로 가득 찬 마음을 성냄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3)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마음을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을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4) 주의 깊은 마음주의 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산만한 마음을 산만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5) 계발된 마음계발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계발되지 않은 마음계발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6) 고귀한 마음계발된 고귀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고귀하지 않은 마음고귀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7) 삼매에 든 마음삼매에 든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을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8) 해탈된 마음을 해탈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해탈되지 않은 마음을 해탈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는 마음에 대해 마음을 안으로 관찰하거나, 마음에 대해 마음을 밖으로 관찰하거나, 마음에 대해 마음을 안팎으로 관찰한다. 또는 마음에 대해 생성의 현상을 관찰하거나, 마음에 대해 소멸의 현상을 관찰하거나, 마음에 대해 생성과 소멸의 현상을 관찰한다.

 

단지 그에게 순수한 앎과 순수한 주의 깊음이 있는 정도만큼마음이 있다.’라고 하는 새김이 이루어진다. 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와 같이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한다.

 

(사띠빳타나경-Satipaṭṭhānasutta-새김의 토대에 대한 경-염처경, 맛지마니까야 M10, 전재성님역)

 

 

심념처에 대한 문구는 매우 짤막하다. 모두 8개의 관찰대상이 있는데, 긍정문과 부정문이 있으므로 모두 18가지 마음에 대한 것이다. 공통적으로 분명히 알아야 함을 강조 하고 있다.

 

분명히 아는 것, 빠자나띠(pajānāti)

 

분명히 안다는 것은 빠자나띠(pajānāti)이다. 18가지 항목이 모두 빠자나띠로 끝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가 났을 때 경에서는 성냄으로 가득 찬 마음을 성냄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Sadosa vā citta sadosa cittanti pajānāti)’라 하였다.

 

빠자나띠(pajānāti)에 대한 빠알리어 사전을 보면 ‘[pa +ñā + nā] knows clearly로 되어 있다. 분명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알아챈다라는 말과 다르다는 것이다. 신념처에서 대소변을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삼빠잔나)’과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호흡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띠빳타나경에서 분명히 아는 것(빠자나띠)’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삼빠잔나)’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사념처에서 후렴구와 같은 정형화된 문구가 있다. 그것은 말미에 있는 “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라는 문구이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 Smv.766에 따르면, 갈애에 대한 의존과 견해에 대한 의존에 의존하지 않고, 세상에 어떠한 형상 등을 ‘이것은 나이다.’라든가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각주, 전재성박사)

 

 

의존과 집착에 대한 것이다. , 느낌, 마음, 법을 안팍으로 관찰하였을 때 볼 수 있는 것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로 이루어진 오온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성냄을 관찰 하였을 때 성냄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알면 성냄이 사라진다. 성냄이라고 아는 순간 화난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경에서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한다.

 

이런 무상함은 모든 현상에 적용할 수 있다. 심지어 고귀한 마음, 삼매에 든 마음, 해탈된 마음도 분명히 알아야 된다고 한다. 아눌라 스님의 법문에 따르면 사선정에 들었을 때 지극히 청정한 마음이라 하는데, 이때 내가 청정한 마음에 들었구나!”라고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삼매에 든 청정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 개입 되는 순간 알아차림을 놓치지 쉽다는 것이다.

 

성냄 자체는 영원히 것이 아니다.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리지는 것이다. 또 분명히 알면 이전의 마음이 되어 사라진다. 그래서 성냄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알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성냄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오온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오온도 생멸하는 것이므로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나의 몸, 나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에서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Na ca kiñci loke upādiyati)”라고 하였다.

 

 

 

한 순간에 하나의 마음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분명히 알아야 할까. 이에 대한 아눌라 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왜 그러냐하면 자각하는 순간 스스로 해결이 된다는 거에요. 왜 그런가?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에요. 탐하는 마음이 있죠? 그럼 그걸 , 탐심이 있는 마음이구나!’라고 알아차리죠.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이기 때문에.

 

, 이게 탐심이 있는 마음이구나!’하고 알아차리는 순간 어떻게 될까? 이 마음은 이게 들어서는 순간 사라지죠? 그래서 빠자나띠, 정확히 알아차려라.

 

여러분은 그 마음을 어떻게 할려고 합니다. 그것 또한 그 마음을 없애려는 탐심이에요. 관찰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안하면서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 주기만 하는 것이에요. 있는 그대로 그 보아 주는 상태의 식의 상태가 달라진다는 거에요. 그 순간 해결이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깨어 있는 마음이 유지가 되면 이 상태가 아니라 다른 의식의 상태가 되버려요. 문젯거리가 스스로 사라져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 깨어 있는 상태가 계속 유지가 되는 거에요.

 

(아눌라스님, 2-오온1.MP3)

 

 

아눌라 스님은 한 순간에 하나의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가장 중요한 말이다. 왜 이말이 중요한가.

 

“생멸법(生滅法)을 알았을 때의 법열이란”

 

도이거사에 따르면 선사들의 가르침만 받다가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자 모든 의문이 풀렸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은 한 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못하기 때문에 나중에 알아차림 하는 마음을 일어나게 하면 앞서 일어났든 괴로움이나 번뇌망상은 사라지게 된다. 마음의 본성품과 생멸법(生滅法)을 알았을 때의 법열이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도이거사의 미얀마 수행기2, 미디어붓다 2009-06-08)”라고 말하였다.

 

도이거사는 ‘마음은 한 순간에 한가지 일 밖에 못한다’라는 사실을 알고 모든 의문이 풀렸다고 한다. 그래서 춤이라고 추고 싶은 법열(法悅)을 느꼈다고 한다.

 

법열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으로 듣고 진리를 깨달아 마음속에 일어나는 기쁨이나 환희를 말한다. 법열감은 참된 이치를 깨달았을 때 느끼는 기쁨이다. 이런 법열과 법열감은 빠알리 니까야를 접하거나 초기불교 강좌를 들은 사람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마음

 

선사들의 법문만 듣다 보면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가르침이 많기 때문이다. ‘나와 부처가 같은 것(本來是佛)’이라든가, ‘생과 사가 같은 것(生死一如)’이라든가, ‘번뇌가 보리(煩惱卽菩提)’라든가 등의 말이 도무지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이다.

 

마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음은 본래 하나라는 일심(一心)사상,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오직 마음 뿐이라는 유식(唯識) 등 마음을 강조 하고 있지만 어렵고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은 일원론적이고 동시적이다. 본래마음이 있다는 것은 일원론을 의미하고, ‘일념즉시 무량겁’이라는 게송이 있듯이 마음의 동시성을 강조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선불교와 대승에서 말하는 마음은 끊어지지 않고 모두 연결된 하나의 마음이라 볼 수 있다.

 

초기불교의 마음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끊어진 마음으로 보고 있다. 이는 마음을 연기적 흐름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조건에 따라 마음이 생겨났다가 소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이 생멸하기 때문에 마음이 마치 점처럼 보이고 이 점을 연결하면 하나의 선처럼 보인다. 그래서 선형적 연기, 조건발생적 연기로 본다.

 

반면 대승과 선종에서는 상호의존적 연기로 본다. 부처님의 연기법이 상호의존연기와 조건발생연기 두 가지를 반드시 설명하고 있지만, 대승에서는 전자만 취하는 것이다. 상호의존연기는 법계연기로 설명되고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가 서로를 창조한다는 ‘ 사사무애 ’ 적 관점을 견지한다. 그러다 보니 마음은 서로 연결된 것으로 분리 되지 않는 한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합일과 열반

 

마음이 서로 연결된 한마음으로 보는 한 본래마음과 ‘합일’은 있어도 열반은 있을 수 없다. 열반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마음이 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라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상호의존연기와 조건발생연기를 모두 수용하기 때문에 조건이 없으면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가 열반이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Viññāassa nirodhena ettheta uparujjhati).(Sn5.2)”라는 문구에서 확인 할 수 있다. 학인 아지따가 명색은 어떠한 경우에 소멸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부처님은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명색이 소멸합니다이라 하였다.

 

빠알리 니까야에 따르면 마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때 그 상태를 마치 불이 꺼진 것과 같은 열반으로 본다. 이는 마음이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한다는 대전제가 있어야 하고, 마음은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연기적 흐름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2013-03-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