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한 세계를 깨는 아픔, 줄탁(啐啄)인가 조탁(彫琢)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3. 25. 12:55

 

 

한 세계를 깨는 아픔, 줄탁()인가 조탁(彫琢)인가

 

 

 

짜증을 유발하는 법문(法門)

 

하루 일과를 불교방송과 시작하는 불자들이 많다. 그래서 항상 불교방송에 채널을 고정시켜 놓고 있다. 그런데 아침 방송을 들어 보면 짜증이 난다. 그것은 스님들의 법문이 짜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소승나한은…”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나홀로 법문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경전에 근거하기 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주로 들려 준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인 견해로 치우친 법문을 많이 듣게 된다. 그런 것 중의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소승나한은 생사, 생사에 빠지기를 가장 싫어해서 생사가 없는 열반에 들려면 첫째 태중에 들어가지 아니 해야 겠다. 이것이 제일 중대한 조건입니다. 나한은 생사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업을 짓지 아니해야 된다 그러해가지고 그런 마음으로 도를 닦아 나가는 것입니다. 자꾸 조용한데만 찾기만 해요. 사람 상대하기를 싫어 하고, 일을 싫어 하고, 백만사를 멀리 여의고, 끊고 여의고 해 가지고 조용한데로 조용한데만 찾아 들어가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보살은 원래 생사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믿고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사가 본래 없는데 끊을 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도인이 게송을 읊으기를…

 

(S스님, 불교강좌, S스님의 알기쉬운 불교이야기, 불교방송 2013-03-25)

 

 

S선사는 불교방송 불교강좌 아침 법문에서 소승나한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초기불교 또는 테라와다의 아라한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승나한은 오로지 생사가 없는 열반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자꾸만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만 살려고 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걸식에 의존한 번뇌 다한 아라한

 

하지만 이는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 경전을 읽어 보았다면 이런 말을 결코 할 수 없다.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부처님당시 빅쿠들은 오늘날 스님들처럼 심산유곡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은 채 살지 않았다. 마을이나 도시가까운 숲에 살았기 때문이다.

 

일을 하지 않은 빅쿠들은걸식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야에서는 탁발이야기가 매우 많이 등장한다. 이는 아라한도 예외가 아니다.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다음 일화를 알아야 한다. 장로 한 분과 젊은 비구가 어떤 마을에서 탁발을 다녔다. 그들은 첫 번째 집에서 한 숟갈 정도의 뜨거운 죽을 얻었다.

 

장로는 바람기운 때문에 배속에 통증을 느꼈다. 그는 생각했다. ‘이 죽이 나에게 이롭겠다. 식기 전에 먹어야겠다.’ 그는 사람들이 문지방을 만들기 위해 가져온 나무토막 위에 앉아서 먹었다. 젊은 비구는 그것을 역겨워하면서 ‘극심함 배고픔에 휘둘려 이 노장이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행위를 하는구나.’라고 말했다.

 

장로는 마을에서 걸식을 마치고 절로 가서 젊은 비구에게 말했다. ‘수좌여, 그대는 이 교단에서 발판을 얻었는가?’ ‘그렇습니다. 존자시여. 저는 예류자입니다.’ ‘수좌여, 그렇다면 나머지 높은 도를 위해 정진하지 말게나. 그대는 번뇌 다한 자를 비방했다네.’ 그는 그에게 참회했다. 그리하여 그는 본래대로 [청정하게] 되었다.

 

(청정도론, 13장 초월지 84, 대림스님역)

 

 

5세기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가 저술한 청정도론에는 그 때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 되어 있다. 글을 보면 부처님 당시나 5세기 스리랑카에서나 빅쿠들이 탁발에 의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걸식을 하기 위해서는 마을 가까이 살아야 했는데, 번뇌 다한 아라한으로 묘사된 장로가 죽을 탁발하여 먹고 있는 장면이 잘 묘사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S스님이 말한 소승나한은 사람상대하기를 싫어 해서 자꾸만 조용한 곳만 찾는다는 것은 스님의 개인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탁발전통이 실종된 동아시아 불교의 소승적 행태에 대한 이야기로 보여진다.

 

10년 전 녹음된 테이프를

 

S선사의 법문은 일년 이상 방송되고 있다. 10년 전의 녹음된 테이프를 매일 들려 주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녹음된 내용이라 보여진다. 그래서일까 스님의 법문이 현실과 괴리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소승에 대한 편견이다. 대승보살사상을 강조 하기 위하여 소승을 폄하는 법문을 하고 있는데, 이는 대승경전에서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특히 유마경이 그렇다. 이렇게 소승을 비하하는 법문이 버젓이 매일 아침 방송을 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외도 법문 같은

 

 또 하나 짜증나는 법문이 있다. S선사의 불교강좌 시간 다음에 이어지는 J스님의 ‘J스님의 지혜의 길이다. 10분간 매일 법문이 방송되고 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외도 법문 같은 느낌이 든다.

 

J스님은 먼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허공이 부처님의 몸과 마음입니다. 허공을 두려워하셔야 되요. 진짜 모든 게 다 허공의 뜻이고 부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노력하는 것 있잖아요 부처님이 다~.

 

(J스님, 불교방송,  J스님의 지혜의 길, ~ 06:50 ~ 07:00. 2013-03-25)

 

 

허공이 부처님의 몸이라 한다. 이와 같은 허공론 J스님의 법문에서 자주 사용된다.

 

부처님의 몸이 허공이라는 것은 화엄경 여래수량품에서 마치 허공이 모든 물질과 물질 아닌 곳에 두루 이르지만, 이르는 것도 아니고 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허공은 몸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문구에 근거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래서 허공자체가 부처님의 몸이고 따라서 우리 몸도 부처님의 몸이기 때문에 허공을 두려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것 같다. 부처님이라는 말 대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집어 넣으면 어느 기독교에서 목사들이 하는 말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줄탁동기(啄同機)

 

이렇게 허공론을 말한 다음에 부처님의 권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께서 도장을 찍지 않으시면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들으세요.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거든요…. 안에서 톡톡치는 것에요. 병아리가 부리로 치면 그때 뭔고 하니 어미닭이 위에서 탁탁 쳐가지고 깨가지고 병아리가 나옵니다.

 

근데 너무 기가맥힌게 너무 기가맥힌거에요. 병아리가 톡톡칠 때 어미닮이 안쳐주는 거에요. 그러면 안에서 치다가 죽어 버리는 거에요. 깨고 못나온다는 거에요. …알에서 나오려 하는데 아무리 쳐도 위에서 안깨주면 뭐라? 힘든 병아리가 깨고 나오기 쉽겠습니까?

 

위에서 쳐 주어야 되요. 우리가 아무리 노력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탁 찍어 주어야지.. 그래야 … 성공할 수 있는거에요. 줄탁동시란 유명한 가르침 아닙니까?

 

(J스님, 불교방송,  J스님의 지혜의 길, ~ 06:50 ~ 07:00. 2013-03-25)

 

 

J 스님은 줄탁동시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줄탁동기(啄同機)이다. 줄탁동기란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선종(禪宗)의 공안 가운데 하나라 한다. 이는 선불교식 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선불교식 깨달음이란 일반적으로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라 한다.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부처인 것을 확인 하는 과정이 수행이라 한다. 그래서 화두를 이용하는데, 이때 스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마치 병아리기 알을 깨고 나오려 할 때 스승의 말 한마디가 알 밖에서 알껍질을 깨주는 것과 같다고 한다. 하지만 줄탁동기(啄同機)는 선불교식 깨달음에서나 적합한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의 병아리 부화 비유

 

줄탁동기와 유사한 이야기가 맛지마 니까야에 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온 것에 대한 비유이다. 그런데 선불교 공안으로 활용되고 있는 줄탁동기와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한 마리의 암탉이 있는데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나 계란을 올바로 품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키면, 그 알탉은 ‘오! 나의 병아리들이 발톱이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할텐데.’라고 원하지 않더라도 병아리들이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용맹을 수반하는 열다섯 가지의 조건을 성취하면 그는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으며, 올바로 깨달을 수 있으며, 위없는 안온을 얻을 수 있다.

 

(쩨또킬라경-Cetokhīlasutta-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6, 전재성님역)

 

 

a chick hatching

 

 

 

경을 보면 어미닭이 알을 깨 주지 않는다. 단지 병아리가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잘 품어 주기만 하면 된다.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할텐데라고 기원하지도 않는다. 조건이 성숙되면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듯이, 마찬가지로 깨달음이라는 것도 조건이 성숙되면 성취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병아리의 부화에 대한 비유는 맛지마니까야 세카경(학인의 경, M53)에서 한 번 더 나온다. “그는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으며, 올바로 깨달을 수 있으며, 위 없는 안온을 얻을 수 있습니다.(M53)”라고 언급된 것과 같이 스스로 깨닫는 것이지 스승이 깨닫도록 도와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빠알리니까야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는 ‘줄()’이 아니라, 새끼가 혼자 힘으로 안에서 껍질을 쪼아 세상 밖으로 나오는 조탁(彫琢)’과 같은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맛지마니까야 해제글에 따르면 부처님의 병아리 부화비유 이야기는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1877-1962)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헤르만 헤세가 20대 시절 당시 맛지마니까야가 독일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를 읽고 병아리 부화 비유에 대한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소설 데미안(Demian)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데미안에 묘사된 병아리 부화 이야기에서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스스로 알 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스스로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파괴 해야 새로운 세계가 전개됨을 말한다. 그 어디에서도 다른 사람이 깨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당시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다른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는 부처님의 사상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때가 되면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병아리의 숙명이듯이,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있는 세계를  스스로 힘으로 부수고 나오는 일은 쉽지 않음을 말한다. 자라면서 고통이 따르듯이 제2의 탄생이란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깨뜨리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 가는 데 있어서 그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운명론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J스님은 선불교의 스승과 제자 사이의 알껍질 깨뜨리기에 해당되는 줄탁동기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옛말에 운칠기삼이라는 말있죠? 운칠기삼. 운이 70프로이고 노력이 30프로인데, 아닙니다. 뭐 그말도 틀린말 아니겠지만 우리의 삶 모든 것들은요, 전부가 다~~~~~ 백천만 퍼센트가 운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진배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다 아셔요. 노력하는 자만이 행운을 쟁취하지 노력하지 않은 자가 행운이 옵니까? 행운도 아무에게나 오는 게 아니에요. 몸과 마음을 다 던져서 하는 사람들이 행운이 오는 것이지 매일 판판이 노는 사람에게 행운이 옵니까?

 

아이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운이라는 건요, 부처님께서 결재하신 겁니다. 우리사람들은 자기노력으로 뭐가 되는 줄 알아요. 물론 노력 열심히 해야죠. 그런데 안되는 사람 많잖아요. 왜그럴까요? 뭔가 부처님께서 안쳐주는 거에요….

 

일이 왜 이렇게 안되지? 뭐라, 부처님이 거룩한 가호지묘력으로 잘 받지 못해서 그래요. … 얼마나 부처님께서 시키신대로 살아 갑니까? 증말로 그래요.

 

우리가 삶을 살아 가면서 정말로 여러분 말씀이죠 부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얼마나 노력하는지, 얼마나 노력하지 않은지. 줄탁동시 잊지 마세요. 부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모든 성취는 부처님의 결재가 나야 하고 운이 백천만 프로라는 것을 명심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J스님, 불교방송,  J스님의 지혜의 길, 월~일 06:50 ~ 07:00. 2013-03-25)

 

 

마치 운명론을 듣는 것 같다. 부처님이 그렇게 경계하였던 육사외도 사상이다. “~~~~~”라고 목젖까지 이용한  심한 의성어와 함께 백천만 퍼센트가 운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진배가 없습니다.”라고 말을 하여 운명론 또는 우연론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운이라는 것이 부처님이 결재한 것이라 한다. 부처님이 개입되지 않으면 행운이 올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무소불위, 전지전능한 초월적인 신이 연상된다.

 

그런 부처님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고 있고 다 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알 껍질을 깨주는 어미닭처럼 부처님에게 의지 하지 않으면 결코 행운이 찾아 오지 않을 것이라 한다.

 

짜증말 법문

 

마치 유일신교의 절대자에 대한 설교를 듣는 듯한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그런 스님 법문의 특징은 말끝마다 진짜 증말로로 이다. 마치 참기름 장수가 진짜 참기름을 연발 하는 것 같다. 그런 스님의 법문을 아침부터 듣자니 짜증말 법문인 것 같다.

 

 

 

2013-03-25

진흙속의연꽃